|
beyond reason
3. 불교의 발전과 역류의 발생(부파불교의 시작)
18) 확대되는 불교에서 발생한 균열
서쪽으로 교화의 영역을 넓히는 불교
붓다 당시 불교는 동쪽의 갠지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함. 붓다 입멸 후 불교는 서쪽으로 확장되고 이후 남인도와 서북인도까지 확대되면서 기원전후에는 전 인도로 영역을 확장함.
서쪽으로의 진출은 가연전과 부루나가 담당했으나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음. 서쪽은 아리안 족 문화가 강하고 보수적이었기 때문임. 붓다 입멸후 아난다가 서쪽에서의 포교에 주력하면서 상황이 일변함. 이렇게 발전한 서쪽 교단은 붓다입적 100년 후 동쪽 교단과 필적하는 세력으로 성장함.
야사에게서 촉발된 10가지 쟁점
문제의 발단은 '야사'라는 서쪽 교단의 승려가 동쪽 교단에 갔다가 그곳에서 행해지는 석연치 않은 관행들을 보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됨. 당시 서쪽 교단은 붓다의 원칙을 바꾸지 않고 준수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동쪽 교단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음. 당시 쟁점화된 문제가 10가지라 '십사'라고 함. 사분율 권 54, 오분율 권 30, 십송율 권 60, 빨리율의 '칠백집법'에 기록되어 있음.
십사의 판결과 2차 결집
십사 중에서 크게 문제되는 항목은 1) 각염정과 10) 금은정이었음. 붓다 입적이후 100년이 지나면서 화폐경제가 발달하자 동쪽 교단에서는 소금을 축적하거나 금, 은을 받는 것을 정법(관행)으로 수용한 것임. 야사가 이를 비판하자 동쪽 교단들은 이를 관행이라고 하고 오히려 야사에게 '참회'를 요구함.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쪽 교단 4명, 서쪽 교단 4명의 장로를 대표로 뽑아 토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십사는 정법이 아닌 비법' 잘못된 관행이라고 결정함. 그리고 이 문제를 기점으로 가르침을 재정리하기 위해 바이샬리에서 8개월간 700인의 승려들이 모여 경전 편찬회의를 개최함. 이 2차 결집을 '바이샬리 결집, 700인 결집'이라고 함.
교단의 분열과 20여개 부파불교의 시작
십사논쟁은 일단 서쪽 교단의 승리로 끝남. 하지만 이미 관행에 익숙해진 승려들은 서쪽 교단의 엄격주의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며 수용을 거부함. 이러한 입장차이로 인해 동쪽 교단과 서쪽 교단은 둘로 나뉘어짐. 서쪽 교단은 본래의 전통을 유지한다고 해서 '상좌부'라고 부르는데 상좌란 첫째 자리에 앉는다는 의미로 우리의 종가집 종손이라는 의미임. 이에 비해 동쪽 교단은 보편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부'라고 부름. 이 사건으로 불교교단이 최초로 나뉘었기 때문에 '근분분열'이라고 함.
근본분열 이후 교단은 더욱더 다양하게 분열하여 20부파 이상으로 분열함. 그렇게 불교는 각 지역적인 특색에 맞춰 특화된 모습으로 발전을 거듭함.
부파불교(部派佛敎, 영어: early Buddhist schools)는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제자들 사이에 견해의 차이가 생겨 불멸 후 100년 경에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고, 이어서 이 두 부파(部派: 종파)로부터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 불교가 여러 부파로 나뉘면서 전개되었던 시대의 불교이다.
부파불교는 시기적으로는 원시불교(原始佛敎, pre-sectarian Buddhism) 이후의 시기를 뜻하는데, 대승불교가 서력 기원 전후에 발생한 후에도 부파불교의 부파들 중에는 대승불교의 종파들과 함께 시대적으로 나란히 활동했던 부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세친(316~396)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서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로 전향하였다. 그가 설일체유부의 논사였을 때 저술하였던 《아비달마구사론》은 설일체유부의 교학의 강요서인데, 그는 부파불교의 경량부의 학설 등을 이용하여 비판적으로 설일체유부의 교학을 집대성하였다. 즉, 이 때까지도 부파불교의 부파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으며, 또한 세친의 시대보다 200여년 후의 인물인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따르면 그가 인도로 유학을 갔을 때도 여전히 정량부(正量部, 산스크리트어: Saṃmitīya) 등의 부파불교의 부파들이 상당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3]
고타마 붓다가 반열반에 든 후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인격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지하라는 자등명(自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과 남겨진 가르침(법)에 의지하라는 법등명(法燈明: 법을 등불로 삼으라)의 유훈에 따라 고타마 붓다가 남긴 교법을 결집하여 경장과 율장을 편찬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그 교법(특히, 사성제)을 깊이 연구 해석하여 여러 경전들에 나오는 불교의 이론과 실천 양면을 망라하여 이들을 체계화한 방대한 논서(Abhidharma-sastra, 아비달마샤스트라)들을 작성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부파불교를 한편으로는 아비달마불교(阿毘達磨佛敎)라고도 한다.[4] 서력 기원 전후에 새로운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일어나게 되자 대승불교도들은 그때까지의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폄하하여 칭하였다.
19) 아소카왕의 인도통일과 불교중흥
붓다당시 붓다를 후원해서 불교가 성립하고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준 왕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와 그의 아들인 아사세'였음 그러나 불교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종교로 거듭날 수 있게 한 왕은 '아소카'왕이었음. 붓다 입적 200년 후 아소카왕은 전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불교를 국교화하며 자비와 복지를 실천한 군주임.
참고) 아소카(프라크리트어: 𑀅��𑁄𑀓, 산스크리트어: अशोकः 아쇼카)는 마우리아 제국의 제3대 삼랏이다.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서 마우리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이며, 인도에서 가장 위대한 삼랏의 하나로서 전륜성왕(samrāṭ Chakravartin)으로 인용된다. 아소카는 수많은 군사 정복뒤에 오늘날의 인도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아소카 시대 마우리아 제국은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과 서쪽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 동쪽으로는 인도의 아삼 주 남쪽으로는 미소레 주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전쟁의 비참함을 깊이 느껴 불교를 융성하게 하고 비폭력을 진흥하고 윤리에 의한 통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곳곳에 절을 세우고 불교를 정리하였으며, 실론·타이·버마에까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총애하는 왕비를 잃고 고독과 번민 속에서 죽었으며, 아라한의 자리에 올랐다.
마우리아 제국(산스크리트어: मौर्य साम्राज्यम् 마우리야 삼라지야)은 기원전 320년부터 기원전 185년까지 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고전기 인도의 제국으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시에 제일 넓은 면적을 지녔던 국가이다. 초대 황제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시대에 발전된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국력을 키운 후 북인도 지역을 통일하였고, 기원전 305년부터 기원전 303년까지 셀레우코스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기원전 303년 평화 협정의 결과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을 정벌하며 타밀라캄과 칼링가 왕국을 제외한 인도 아대륙 지역을 통일하였다. 3대 황제인 아소카 시대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며 타밀라캄 지역의 촐라, 체라, 판디아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 전역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전성기 인구가 5천만에서 6천만 사이를 기록할 정도로 당시 고대 국가 중에서는 매우 많은 인구를 자랑했으며,[2][3] 면적 또한 19세기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을 제외한 남아시아 역사상의 국가들 중 제일 넓은 면적을 자랑했지만, 아소카 사후 암군들의 통치, 왕위 계승 분쟁, 사타바하나의 독립 등 제국 내 영토들의 독립, 최고 행정부인 소파가세누스의 부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같은 외세의 침략 등으로 점차 쇠퇴하다가 기원전 185년에 푸샤미트라 숭가의 쿠데타에 의해 왕조가 전복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은 멸망하였다.
잔인한 아소카와 복지의 아소카
아소카는 상반된 두얼굴을 가진 인물임. 통일전 아소카왕은 지옥에 비견되는 고문실을 운영했다는 기록이 나올정도로 잔인한 왕이었음. 통일 후 아소카는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 것을 참회하고 불교로 전향함.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최고의 복지군주로 삶을 살아감.
아소카왕은 현재까지도 인도인이 가장 좋아하는 성군으로 꼽히는 인물. 마우리아 왕조를 상징하는 '공작새'는 인도의 국조로 아소카왕이 붓다를 기념해서 첫 설법장소인 '바라나시'에 세운 아소카 석주의 머리장식은 인도를 상징하는 국장임.
아소카의 불교지원
불교에 귀의한 아소카왕은 붓다의 성지를 차례로 순례하고 '아소카 석주'를 세워 성소를 기림. .. 8만 4천 불탑을 건립하여 인도전역에 불교를 유포함.
이는 동쪽 교단의 권위축소를 의미하는데 2차 결집을 통해 확인되는 서쪽 교단의 약진과 상호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음. .. 아소카왕의 아들과 딸이면서 출가하여 스리랑카 불교의 시원을 이루는 '마힌다와 상가미타'는 모두 서쪽 교단의 인물임.
참고) 마힌다와 상가미타 :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의 왕자로 상좌부의 장로였던 마힌다(Mahinda)는 왕명에 의하여 실론 섬에 파견되어서 섬의 지배자를 귀의시키려고 아누라다 성에 대찰(마하비하라)을 건립하였다. 그의 누이동생 상가미타(Sangamitta)도 비구니가 되어 실론에 건너가 불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이것이 실론에 상좌부 불교가 전하여진 최초의 일이었는데 서력 기원전 1세기경에 바아다가마니아바야 왕이 무외산사(無畏山寺)를 건립함으로써 대사파(大寺派)와 대립하게 되고 뒤에 다시 기타림사파(祇陀林寺派)가 분리되어 실론의 불교는 3파가 정립하게 되었다. 5세기가 되면서 부다고사를 비롯한 고학자가 나타나서 교학의 기초가 튼튼해졌다. 보수적인 상좌부 불교의 대사파에 대하여 다른 부파의 비구들에게도 개방적이었던 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는 한때 우세를 보였으나 11세기 이후에는 이민족이 침입하고 불교가 쇠퇴하자 역대 왕은 불교부흥정책을 취했는데 특히 13세기에 파라크라마바후 왕은 대사파(大寺派) 부흥에 힘써 상좌부 불교가 다시 성행하게 되었다
아소카왕과 3차 결집
아소카왕이 불교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출가환경이 좋아지자 수행의 목적이외에 생계를 위해 출가하는 사람들이 다수 발생함. 이들을 정리하여 붓다의 가르침이 왜곡되는 것을 막고 붓다의 가르침을 재정리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 3차 결집임. 3차 결집에 대한 전승은 남방불교에만 기록됨. 아소카의 후원 하에 목갈리풋다 팃사가 중심이 되어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화씨성)에서 9개월간 1천명의 승려대표가 모여 회의를 진행함. 이를 '파탈리푸트라 결집, 1천 결집, 3차 결집'이라고 부름.
1,2차 결집과 달리 3차 결집에서는 논서가 추가됨. 논서는 경과 율에 대한 주석서로 시대가 바뀌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기 시작한 것임. 이러한 3차 결집의 결과 '경, 율, 론'이라는 3장구조가 완성됨.
참고) 경, 율, 론 3장
삼장(三藏, Tripitaka)은 불교의 경전을 경, 율, 논의 3가지로 분류하고 이를 합쳐서 부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경은 깨달은 자로서의 고타마 붓다의 말씀 또는 가르침, 논은 고타마 붓다 이후의 제자들이 경과 율에 대한 주석 등을, 율은 특히 계율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흔히 이 세가지를 모두 합쳐 경이라고 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의 pitaka(한문 번역: 藏)는 '둥우리, 모음집'을 뜻하며,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이 고타마 붓다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가르침을 모아서 그 성격에 따라 세가지 모음집으로 편성하여 'Tripitaka'(삼장(三藏))라 불렀다. 세친의 《섭대승론석》에 따르면 장(藏)은 '능히 포섭한다[能攝]'는 뜻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의미[義]를 포섭한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있다.[1][2]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아함(阿含, Āgama)이라 일컬으며, 이를 직접 받아 적은 글들을 경(經, Sūtra)이라 부르고 있다. 이 경전을 고타마 붓다의 제자들이 후에 해설한 글들을 논(論, Sāstra)이라는 이름 하에 모아 편성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여러 가지 규칙과 의식 등에 관해 설명한 글 들은 율(律, Vinaya)이라고 부르고 있다. 흔히 대장경, 일체경이라는 낱말은 위의 세가지 불교의 경전을 총칭하는데 쓰이고 있다.
4차 결집
4차 결집은 3차 결집과 달리 북방불교 문헌에만 기록되어 있음. 4차 결집은 기원 후 2세기에 서북인도를 지배하던 쿠산 왕조의 카니슈카왕의 후원으로 협존자와 세우의 지도하에 500명의 대표승려들이 '카슈미르'에 모여 진행함. 그 결과물로 200권의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 정리됨.
20) 20개의 부파로 재분열하는 불교
불교교단의 재분열의 배경
붓다가 제창한 불교는 집단보다는 개인의 깨달음에 주안점을 둠. 이는 붓다의 중도주의나 대자제들이 인도하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수행방법의 차이에 대한 용인, 그리고 지역과 문화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붓다의 태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음.
상좌부와 대중부의 재분열, 20부파의 성립
상좌부와 대중부 중 먼저 세부분열 즉 '지말분열'에 들어가는 것은 대중부임. 대중부는 구성원이 많고 또 관습을 엄격히 지키기 보다는 변화를 수용하는 진보적인 인물들이 속한 부파임. 세우가 찬술한 '이부종륜본'에 따르면 대중부는 붓다 입멸 200년 경부터 재분열을 시작하여 먼저 '일설부, 설출세부, 계윤부'가 성립, 독립했다고 함. 이후로 다문부, 설가부, 제다산부, 서산주부, 북산주부로 분파되어 총 9부파로 나뉨.
상좌부는 대중부보다 100년 후에 분열을 시작하는데 상좌부가 본상좌부와 설체유부로 분열하고 설일체유뷰 안에서 독자부, 화지부, 옴광부, 경량부가 독립하고 이중 독자부가 법상부, 현위부, 정량부, 밀림산부로 다시금 나뉘어짐. 총 11부파가 만들어짐.
부파분열의 원인
여러부파의 특징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점 가운데 하나는 경량부는 아난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법장부는 목건련을 계승했다는 점임. 즉 대제자를 리더로 하여 수행집단을 구성해썬 붓다 당시의 유풍이 후대까지도 전해지고 있었고 이것이 부파분열의 한 요인으로 작용함.
제다산부, 서산주부, 북산주부 등 부파의 명칭을 보면 특정지역에서 발생한 부파임을 알 수 있음. 즉 지역에 따른 문화차이도 부파분열의 한 원인임.
부파분열이 계속되면서 승려들은 점점 더 민중의 생활과 거리가 멀어짐. 이때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전법에 나선 까닭은 민중을 위한 교화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기에 이름. 이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대승불교 운동'임. 이들은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등장했기 때문에 부파불교를 폄하하여 '소승불교'라고 부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