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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게송을 포함한 가르침(Sagatha-vagga),
제4주제 마라(악마) 상윳따 Mara Samyutta, 제3장 세 번째 품 Tatiya-vagga
많음 경(S4:21)
Sambahulā-sutta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삭까에서 실라와띠에 머무셨다. 그때 많은 비구들이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고 있었다. 그러자 마라 빠삐만은 바라문의 모습을 나투어, 상투를 크게 틀고 영양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늙어서 서까래처럼 등이 구부러졌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무화과나무 지팡이를 짚고 그 비구들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그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존자들은 젊고 청춘이고 활기차며 머리칼이 검고 축복 받은 젊음을 구족한 초년의 나이에 감각적 쾌락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습니다. 존자들이여, 인간에게 풍족한 감각적 쾌락을 누리시오. 눈 앞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시오.”
“바라문이여, 우리는 절대로 눈 앞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우리야말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눈앞에 분명한 것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서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마라 빠삐만은 머리를 흔들고 혀를 축 늘어뜨리고 이마를 찌푸려 세 줄의 주름살을 짓고는 지팡이를 짚고 가버렸다.
그러자 그 비구들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들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고 있늙어서 서까래처럼 등이 구부러졌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무화과나무 지팡이를 짚고 저희들에게 다가왔습니다. 와서는 저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들은 젊고 청춘이고 활기차며 머리칼이 검고 축복 받은 젊음을 구족한 초년의 나이에 감각적 쾌락을 누려보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습니다. 존자들이여, 인간에게 풍족한 감각적 쾌락을 누리시오. 눈 앞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마시오.”
“바라문이여, 우리는 절대로 눈 앞에 분명한 것을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우리야말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눈앞에 분명한 것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서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서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그 바라문은 머리를 흔들고 혀를 축 늘어뜨리고 이마를 찌푸려 세 줄의 주름살을 짓고는 지팡이를 짚고 가버렸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는 바라문이 아니다. 그는 마라 빠삐만인데 그대들의 눈을 멀게 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그 사실에 대해서 이 게송을 읊으셨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본 사람
그가 어찌 욕망으로 기운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재생의 근거가 곧 집착임을 알아
그것을 없애기 위해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한다.”
saṃyutta nikāya 4
3. tatiyavagga
21. Sambahulasutta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sakkesu viharati silāvatiyaṃ. Tena kho pana samayena sambahulā bhikkhū bhagavato avidūre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anti. Atha kho māro pāpimā brāhmaṇavaṇṇaṃ abhinimminitvā mahantena jaṭaṇḍuvena ajinakkhipanivattho jiṇṇo gopānasivaṅko ghurughurupassāsī udumbaradaṇḍaṃ gahetvā yena te bhikkhū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e bhikkhū etadavoca: “daharā bhavanto pabbajitā susū kāḷakes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ṭhamena vayasā anikkīḷitāvino kāmesu. Bhuñjantu bhavanto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itthā”ti. “Na kho mayaṃ, brāhmaṇa,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a. Kālikañca kho mayaṃ, brāhmaṇa, hitvā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a. Kālikā hi, brāhmaṇa,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Evaṃ vutte, māro pāpimā sīsaṃ okampetvā jivhaṃ nillāletvā tivisākhaṃ nalāṭe nalāṭikaṃ vuṭṭhāpetvā daṇḍamolubbha pakkāmi.
Atha kho te bhikkhū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ṃsu. Ekamantaṃ nisinnā kho te bhikkhū bhagavantaṃ etadavocuṃ: “idha mayaṃ, bhante, bhagavato avidūre appamattā ātāpino pahitattā viharāma. Atha kho, bhante, aññataro brāhmaṇo mahantena jaṭaṇḍuvena ajinakkhipanivattho jiṇṇo gopānasivaṅko ghurughurupassāsī udumbaradaṇḍaṃ gahetvā yena mayaṃ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amhe etadavoca: ‘daharā bhavanto pabbajitā susū kāḷakesā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ā paṭhamena vayasā anikkīḷitāvino kāmesu. Bhuñjantu bhavanto mānusake kāme.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itthā’ti. Evaṃ vutte, mayaṃ, bhante, taṃ brāhmaṇaṃ etadavocumha: ‘na kho mayaṃ, brāhmaṇa,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a. Kālikañca kho mayaṃ, brāhmaṇa, hitvā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a. Kālikā hi, brāhmaṇa,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Evaṃ vutte, bhante, so brāhmaṇo sīsaṃ okampetvā jivhaṃ nillāletvā tivisākhaṃ nalāṭe nalāṭikaṃ vuṭṭhāpetvā daṇḍamolubbha pakkanto”ti.
“Neso, bhikkhave, brāhmaṇo. Māro eso pāpimā tumhākaṃ vicakkhukammāya āgato”ti. Atha kho bhagavā etamatthaṃ viditvā tāyaṃ velāyaṃ imaṃ gāthaṃ abhāsi:
“Yo dukkhamaddakkhi yatonidānaṃ,
Kāmesu so jantu kathaṃ nameyya;
Upadhiṃ viditvā saṅgoti loke,
Tasseva jantu vinayāya sikkhe”ti.
saṃyutta nikāya 4
connected discourses with mara
21. A Number
Thus have I heard. On one occasion the Blessed One was dwelling among the Sakyans at Silavati. Now on that occasion a number of bhikkhus were dwelling not far from the Blessed One—diligent, ardent, and resolute. Then Mara the Evil One manifested himself in the form of a brahmin, with a large matted topknot, clad in an antelope hide, old, crooked like a roof bracket, wheezing, holding a staff of udumbara wood. He approached those bhikkhus and said to them: “You, sirs, have gone forth while young, lads with black hair, endowed with the blessing of youth, in the prime of life, without having dallied with sensual pleasures. Enjoy human sensual pleasures, sirs; do not abandon what is directly visible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
“We have not abandoned what is directly visible, brahmin, in order to pursue what takes time. We have abandoned what takes time in order to pursue what is directly visible. For the Blessed One, brahmin, has stated that sensual pleasures are time-consuming, full of suffering, full of despair, and the danger in them is still greater, while this Dhamma is directly visible, immediate, inviting one to come and see, applicable, to be personally experienced by the wise.”
When this was said, Mara the Evil One shook his head, lolled his tongue, knit his brow into three furrows, and departed leaning on his staff.
Then those bhikkhus approached the Blessed One, paid homage to him, sat down to one side, and reported everything in full. The Blessed One said: “That was not a brahmin, bhikkhus. That was Mara the Evil One, who had come in order to confound you.”
Then the Blessed One, having understood the meaning of this, on that occasion recited this verse:
“How could a person incline to sensual pleasures
Who has seen the source whence suffering springs?
Having known acquisition as a tie in the world,
A person should train for its removal.”
잡아함경 제39권
1099. 중다경(衆多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석씨의 석주라는 석씨 마을에 계셨다.
그 때 많은 비구들이 가사를 짓기 위해 공양당(供養堂)에 모여 있었다.
그 때 악마 파순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지금 사문 구담은 석씨의 석주라는 석씨 마을에 머물고 있는데, 마침 많은 비구들은 가사를 짓기 위해 공양당에 모여 있다. 나는 지금 그곳에 가서 저들을 어려움에 빠지게 하리라.'
그리고는 곧 젊은 바라문의 모습으로 변화해 상투를 틀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손에는 구부러진 지팡이를 짚고 공양당으로 가서, 많은 비구 대중들 앞에서 잠깐 동안 잠자코 서 있다가 잠시 뒤에 모든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젊은 나이에 출가하였다. 지금 너희들의 살결은 희고 털은 검으며 한창 왕성한 시기이다. 다섯 가지 욕망을 누리면서 장엄한 모습으로 즐겨야 할 때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친척들을 저버리고 슬피 울면서 이별한 다음, 믿음 때문에 집 아닌 데로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있는가? 왜 현세(現世)의 즐거움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때아닌 즐거움을 구하는가?
비구들이 바라문에게 말했다.
우리는 현세의 즐거움을 버리고 다른 세상의 때아닌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들은 곧 때아닌 즐거움을 버리고 현세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파순(波旬)이 또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때아닌 즐거움을 버리고 현세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비구가 대답하였다.
세존의 말씀에 의하면, 다른 세상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만 많으며, 이익은 적고 근심만 많다고 하셨다.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현세의 즐거움이란 모든 번뇌를 떠나면 시절(時節)을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통달할 수 있다고 하셨다. 현세에서 이와 같이 관찰한 인연으로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나니 바라문이여, 이것을 현세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그러자 바라문은 세 번 머리를 흔들고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다가 지팡이를 짚고 이내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모든 비구들은 겁이 나서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 사람은 무엇을 하는 바라문이기에 여기 와서 변화를 부리는 것일까?'
그리고는 곧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는 한쪽으로 물러앉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 비구대중들이 가사를 짓기 위해 공양당에 모여 있었는데, 장엄하게 꾸민 장성한 어떤 바라문이 상투를 틀고 저희들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젊어서 출가하여……(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바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세 번 머리를 흔들고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다가 지팡이를 짚고 이내 사라지더니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저희들은 겁이 나서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섰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는 바라문이기에 여기 와서 그런 변화를 부립니까?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바라문이 아니라 악마 파순인데, 너희들이 있는 곳에 와서 너희들을 교란시켜보려고 한 짓이다.
그리고는 세존께서 곧 게송을 설하셨다.
온갖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는
모두 다 애욕으로 말미암나니
세상을 다 칼이나 가시처럼 여긴다면
어느 누가 애욕을 좋아하겠는가.
이 세상에 몸으로 느끼는 것은
모두 다 칼이나 가시 같은 것이니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늘 열심히 스스로 길들여야 한다.
순금 덩어리를 높이 쌓아
마치 저 설산 만한 것을
한 사람이 전부 가져다가 쓴다 해도
마음은 오히려 만족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평등한 관법을 닦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雜阿含經
SA 1099 (一〇九九) 眾多
如是我聞:
一時,佛住釋氏石主釋氏聚落。時,有眾多比丘集供養堂,為作衣事。
時,魔波旬作是念:「今沙門瞿曇住於釋氏石主釋氏聚落,眾多比丘集供養堂,為作衣故,我今當往,為作留難。」化作少壯婆羅門像,作大縈髮,著獸皮衣,手執曲杖,詣供養堂,於眾多比丘前默然而住。須臾,語諸比丘言:「汝等年少出家,膚白髮黑,年在盛時,應受五欲莊嚴自娛,如何違親背族,悲泣別離,信於非家,出家學道?何為捨現世樂,而求他世非時之樂?」
諸比丘語婆羅門:「我不捨現世樂求他世非時之樂,乃是捨非時樂就現世樂。」
波旬復問:「云何捨非時樂就現世樂?」
比丘答言:「如世尊說,他世樂少味多苦,少利多患;世尊說現世樂者,離諸熾然,不待時節,能自通達,於此觀察,緣自覺知。婆羅門!是名現世樂。」
時,婆羅門三反掉頭瘖瘂,以杖築地,即沒不現。
時,諸比丘即生恐怖,身毛皆竪,此是何等婆羅門像,來此作變?即詣佛所,稽首禮足,退坐一面,白佛言:「世尊!我等眾多比丘集供養堂,為作衣故。有一盛壯婆羅門,縈髮大髻,來詣我所,作是言:『汝等年少出家……』」如上廣說,乃至三反掉頭瘖瘂,以杖築地,即沒不現。「我等即生恐怖,身毛皆竪,是何婆羅門像,來作此變?」
佛告諸比丘:「此非婆羅門,是魔波旬來至汝所,欲作嬈亂。」爾時,世尊即說偈言:
「凡生諸苦惱, 皆由於愛欲,
知世皆劍刺, 何人樂於欲?
覺世間有餘, 皆悉為劍刺,
是故黠慧者, 當勤自調伏。
巨積真金聚, 猶如雪山王,
一人受用者, 意猶不知足。
是故黠慧者, 當修平等觀。」
佛說此經已,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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