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년이 넘은 우리 팔금회(78 연도 개금에서 함께 근무한 사람들의 모임)의 단체 여행을 오래 전부터 계획하며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의 하나가 같이 갈 사람들의 조화였다. 우리 부부 4 팀이야 친형제처럼 지내는 터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새로운 얼굴들과의 융합이 잘 되어야 여행이 원만히 진행될 것이므로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모집하였는데 기대 이상으로 화합이 잘 되어 모두들 기뻐하였다. 같이 데리고 갈 딸아이와 집사람이 하루 전에 차곡차곡 준비한 물건들로 가득 찬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끌고 집 앞에서 콜 택시를 불러 탔는데 기사가 중국을 다녀왔다며 한바탕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날씨는 온화하고 화창하여 여행하기에 안성마춤이었다.
약속시간보다 30 분 일찍 도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홍선생 부부가 먼저 와 있고 시간에 맞추어 큼직한 가방을 메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반도의 김이사가 손을 흔들어 둘이 스낵바에서 주스를 한 잔 씩 마시며 일정을 다시 한 번 살피었다. 뒤늦게 나타난 중국청년여행사 부산지사의 젊은이가 황급히 입출국 서류를 적느라 한동안 부산을 떨다가 짐을 부치고 출국수속을 밟았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출국장의 면세점을 둘러보는데 물건은 탐이 나고 주머니는 달랑거렸다. 친구들이 부탁했다는 화장품을 찾아온 가족들을 불러 버스를 탔다. 트랩을 오르며 밖에서 본 중국서북항공의 비행기는 크기가 작아 국제선을 처음 타 보는 우리 딸아이는 놀이기구 타는 것 같다고 하였다. 150 석 의 에어버스 안은 대부분 우리 나라 여행객이었는데 좌석이 가득 차지 않아서 빈자리가 많았다. 출발시간 보다 5 분 일찍 1 시 25 분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1 년 전이나 같았으나 서투른 우리말 안내가 나오는 것은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비행기는 안동을 거쳐 오산을 지나 곧 황해 바다 위를 날았다.
지도상으로 보면 부산에서 다도해를 거쳐가는 것이 직항로 같은데 비행구역 때문인지 한반도를 비스듬히 날아서 산동 반도의 연대와 북경 아래 쪽 태안과 낙양 상공을 거쳐 서안으로 비행하였다. 거리가 2,400 km 정도이며 비행시간이 3 시간이 넘게 걸렸다. 촌스런 파란 제복의 승무원들이 뜨거운 물수건을 나누어주고 곧 음료수를 서비스하는데 옌징 맥주가 있어 모두들 한 두 캔씩 얻어들고 같이 준 땅콩과 해바라기 씨를 안주로 맛을 보았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서 창가로 옮겨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중국 경치를 보고자 창문 밖을 보았으나 구름이 드리워지고 날씨가 맑지 않아 주름진 산만 보였다. 기내식으로 밥과 빵이 나오는데 입맛에 썩 맞지는 않으나 중국 특유의 향채를 넣지 않아 그런대로 먹을 만 하였다. 빈 그릇을 치우고 기념선물이라며 동전 지갑을 하나씩 주는데 마무리가 매끈하지 못하여 좀 조잡하였다. 좁은 자리에서 몸이 뒤틀릴 즈음에 거대한 황토고원 너머로 진령산맥이 보이며 착륙안내 방송이 나왔다.
中國 西安 旅行記 3
( 1 년만에 다시 보는 西安 )
성급한 우리 나라 사람 몇이 아직 정지하지 않고 활주로 위를 움직이는 기내에서 벌떡 일어나 선반 위의 물건을 꺼내고 외투를 입느라 볼썽 사나운 짓을 하였으나 승무원이 제지하지는 않았다. 공항과 연락이 잘 안되는지 트랩을 접속하고도 한참을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트랩을 내려 입국장으로 향하였다. 서안 공항이 복잡하고 비좁아 이곳 함양에 새 공항을 만들었는데 여행객이 많아서 인지 새로운 건물을 더 짓고 있었다. 입국장은 시골 역 대합실처럼 생겼는데 좁은 심사대 안에 공안 두 명이 낡은 컴퓨터를 두드리며 입국심사를 하였다. 많은 사람이 몰리자 여자 공안이 한 명 나와 우리말로 안내를 하였다. 우리 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모양이었다. 단체 비자를 제시하고 차례로 한 사람씩 여권을 보이는데 별 까탈을 잡지 않고 바로 보내 주었다. 비자원본이 없으면 출국을 할 수 없으므로 속에 잘 간직하고 수하물을 찾아서 공항을 나오니 젊은 여자가 '반도고속관광' 이라는 종이를 들고 마중 나와 있었다. 자기는 동북출신이라고 하며 일본어도 잘 하였다. 버스는 중국에서 새로 만든 25 인승 파란 중형버스인데 차가 깨끗한데다가 기사가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잘 생긴 깔끔한 중국 청년이었다. 지난 번 중국에 왔을 때의 낡은 차와 몇 달은 감지 않았을 듯한 더벅머리에 싯누런 이빨을 보이는 골초 중국인이 아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 버스는 서안 어디로 가나 돋보일 정도로 좋은 차였다. 큰 가방은 짐칸에 넣고 서안시내를 향해 달렸다. 표지판도 많아지고 거리에 새 건물도 많이 들어섰으나 고속도로를 예사로 넘어 다니는 사람이 눈에 뜨이고 먼지와 안개가 자욱한 거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강태공이 고기를 낚던 위수는 강수량이 적어서 도랑물을 겨우 면하고 그나마 물색이 흐려 도무지 '강'으로 보기 힘들었다. 저녁안개가 내린 너른 들판에는 허름한 농가가 줄지어 있는데 누런 옥수수를 묶어 말린 것이 보이고 밭에는 온통 밀을 심어 파릇파릇하였다. 고속도로 옆은 옹벽대신 황토를 파낸 삽 자국이 그대로 남았는데 기후가 건조하고 황토 흙이 단단하여 10 년 세월을 그대로 버티었다.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하여 사람이 살았다는 황토토굴의 흔적에는 최근까지 사람이 기거한 듯 연기에 그을린 검은 자국이 남았다. 길가의 수많은 입간판에는 각종 광고가 홍수를 이루어 발전하는 중국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물류는 원활하지 않은지 4 차선 넓고 긴 고속도로에는 통행하는 차들이 적었다. 자그마한 언덕만큼이나 큰 무덤 두 개가 섰는데 경릉이라 하였다. 능의 입구에는 전에 없던 아방궁의 건물 모양으로 생긴 커다란 문이 서 있다. 중국의 고속도로는 폐쇄식이 아니고 개방식이어서 곳곳의 '수비처'에 요금을 내는데 중국 물가에 비하여 꽤 비싼 편이다. 커다란 교차로를 나오니 바로 서안 시내이다.
中國 西安 旅行記 4
(서안의 야경)
서안의 변두리는 우리가 텔레비젼에서 익히 보아온 중국의 골목 그대로이다. 허접한 길가에 각종 음식점과 가게가 늘어서고 사람들이 인도로 차도로 질서없이 몰려다니고 자전거와 오토바이 버스들이 뒤엉켜서 잘도 빠져 다니는 그런 모습들이다. 거지꼴을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멋진 양복 차림의 신사와 잘 차린 여자들이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 모양도 볼 수 있다. 거리의 현수막이나 간판들은 모두 간체로 쓰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배운 한자(번체) 실력으로는 읽을 수가 없다. 그나마 그 용법이 달라 애를 먹는다. 일전에 안내판을 왜 한자로 적느냐는 물음에 우리 나라에 오는 중국인들을 위한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는데 참으로 답답한 소리다. 한자로 '촬영금지' 라고 적어 놓으면 중국사람들은 전혀 그 뜻을 새길 수 없다. 중국에서는 금지라는 말 대신에 '請勿'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은 '照相' 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려면 '請勿照相' 이라고 적어야 한다. 化粧室 이라고 써 놓으면 중국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도 그곳이 대소변 보는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厠所 혹은 洗手間 이라고 해야 안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小乞(스낵) 刀削面(칼국수)을 알 수 없다. 나도 처음에 중국에 와서 刀削面이라 길래 아는 체하고 얼굴을 칼로 깎으니 '면도' 정도로 이해하였다가 중국에서는 국수 麵자를 얼굴 面으로 대신 쓴다는 것을 듣고 속으로 민망해 한 적이 있다. 중심가로 들어 서니 새로 지은 빌라나 고급 아파트가 늘어서고 멋진 고층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변화하는 중국을 느낄 수 있었다. 커다란 고가도로 옆의 건국반점은 지난번에 왔던 곳이라 낯이 익고 건물 내부도 잘 알 수 있었다. 단체 비자를 보여 방 배정을 하였다. 두 사람씩 짝을 짓고 맨 끝방 하나를 딸아이에게 주었는데 큼직한 더블베드가 놓인 호수 쪽의 반대편 방이었다. 손선생 내외가 든 방에는 담배냄새가 심하여 방을 바꾸고 짐을 정돈한 다음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서 네온이 번쩍이고 각종 차량이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 중국에 처음 온 사람들은 중앙선을 예사로 넘고 자전거와 소형택시들이 갑자기 뛰어들거나 심지어 역주행을 하는 것을 보고 놀라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런 것을 익히 보아온 나도 앞에 앉았다가 심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서안 성벽은 노란 네온으로 성벽의 선을 따라 불을 밝히고 문마다 조명을 켜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원단을 맞아 가로수 밑에도 녹색 조명을 쏘아 올려 온 시가지 도로가 푸른빛에 감싸였다. 높다란 건물 지붕은 기와 모양을 만들어 멋대가리 없는 네모진 빌딩에 익숙한 우리들의 눈을 뜨이게 하였다. 거리의 간판은 肯德基(켄터키) 可口可樂(코카콜라) 등 외국 상품 선전도 자주 보이고 창 밖을 한 오 분 정도 살피면 길에서 대우의 레간자나 아반테도 찾을 수 있었다.
中國 西安 旅行記 5
(신세기 반점)
중국에 와서 처음 식사를 하러 내린 곳은 네온 불이 휘황하고 으리으리한 '신세기 반점' 이었다. 일행이 많아 한 탁자에 다 앉지 못하고 둘로 나누어 앉았다. 앞에 조그만 찻잔과 접시, 국을 뜨는 작은 국자와 기다란 젓가락이 있고 나프킨이 꽂혀 있는 컵이 있는데 찻잔에는 아가씨들이 와서 자스민 차를 계속 따라 주었다. 유리컵에는 기본적으로 주스나 술을 부어 주는 데 한 잔은 무료이고 그 다음에는 돈을 낸다고 하였다. 가이드에게 미리 우리 입맛에 맞도록 중국의 향채를 넣지 말라고 한 것이 주효하여 나오는 요리가 모두 먹을 만하고 어떤 것은 간이 맞아서 금방 떨어지기도 하였다. 주로 닭과 돼지고기 요리가 나오고 채소도 나오는데 기름에 볶은 것이라 맛이 좀 느끼하였다. 맥주 한 잔으로는 어림이 없어서 e 맥주라고 쓰인 것을 한 병 더 시켜 마셨는데 쌀 성분이 섞이고 도수가 11 도이라 맛이 좋았다. 밥은 푸스푸슬한 중국 쌀(이 곳은 찰기가 있는 쌀을 하급으로 친다)로 만들어 한 접시 가득 놓았는데 모자라면 더 가져다 주었다. 끝에 나온 달걀 국 같은 것을 떠서 말아먹고 화명 교장 선생님 내외가 가져온 보온 도시락에서 나온 여러 가지 우리 반찬으로 나누어 먹었다. 야간 일정이 없어서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다가 보니 간판에 '특일급' 이라는 등급이 매겨진 식당이었다. 식당 입구에는 요리사 두 명이 각종 재료 앞에 섰다가 손님이 주문한 것을 직접 가져다 만들어 주었다. 유리 상자에는 살아 있는 생물들이 즐비하여 모두들 구경을 하는데 앞쪽에는 새우가 있고 발이 묶인 커다란 게와 잉어, 블루길을 닮은 물고기가 유리상자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왼쪽의 여러 유리 속에는 살아 움직이는 각종 뱀들이 종류별로 갇혀 있는데 어린애 팔뚝만한 검은 구렁이와 독사도 있고 누렇고 기다란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돌아다녀 여자들이 기겁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이 식당은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네발 달린 것은 책상 외에 모든 것을 요리 할 수 있다는 광동요리 전문점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다가 저녁에 먹을 과일을 사려고 길가의 과일 노점상 앞에 갔다. 젊은 기사는 유유히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인도 위에 버스를 세웠다. 과일을 파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중늙은이 들이었는데 손님이 없었던지 우리 일행을 반기었다. 사과와 배도 있고 길다랗고 줄이 없는 수박에 메론, 곶감이 보이고 이름 모를 과일도 많았다. 커다란 포도 옆에 포도와 똑같이 생겼으나 갈색에 껍질이 단단한 과일이 있어 물으니 계원이라고 하였다 한 개 주길래 까보니 젤리 같은 과육에 커다란 씨가 하나 들어 있었다. 맛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달리 표현할 수 없지만 시고 달고 부드러운데 키위도 아니고 포도도 아닌 그런 맛이었다. 하나하나 봉지에 싼 귤 같은 것은 밀감과 오렌지의 중간 맛이 나는 과일이었다. 이 두 가지와 감귤보다 작은 귤을 샀는데 값이 매우 싸서 3 kg에 10 위안(우리 돈 1700 원 정도)을 주었다.
中國 西安 旅行記 6
(호텔로 돌아와서)
키다리 변선생이 옆의 가게 것도 팔아 주자고 하여 그 가게에서도 물건을 샀다.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였으면 좋겠으나 기사와 가이드도 집에 가서 쉬어야 하고 우리도 내일 화산에 오르자면 좀 자 두어야겠기에 호텔로 돌아왔다. 2 층에 있는 방으로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계단은 떨어져 있고 으슥하여 오르내릴 때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인력이 풍부하여 승강기 앞은 물론 복도에도 안내원이 섰고 화장실 앞과 식당 앞 로비에도 여러 명이 서서 안내를 하였다. 각자 방에 돌아가기 전에 단장님 방에 모여서 과일을 분배받았다. 방에 와서 짐을 대강 정리하고 샤워를 하였다. 더운물이 잘 나왔으나 샴푸와 목욕액의 질이 좋지 못하여 가져간 비누로 커튼을 치고 씻었다.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잔돈이 없어 팁을 주지 못한 벨보이를 찾으러 로비에 갔다. 우선 100 원을 작은 돈으로 바꾸고 카운터에서 필담과 수화로 겨우 뜻을 통하여 다른 곳에 간 보이를 전화로 불러내었다. 무슨 잘못이 있나 의심하는 얼굴로 찾아온 보이에게 1 달러를 주니 쎄쎄를 연발하였다. 모두들 이상이 없는지 살피러 올라가다가 옆방 홍선생을 만나 저녁에 할 일도 없고 하니 한판 벌리자고 작당을 하였다. 그러나 도구가 있을 리 없어 둘이 매점에 가서 물으니 트럼프 외에는 없다고 하였다. 이 때 변선생이 어슬렁거리고 나타나더니 자기에게 화투가 있다고 하며 장소를 물색하였다. 집사람을 딸 아이 방으로 보내고 손선생을 부르고 단장님도 우리 방으로 모시었다. 이교장 선생님은 고단하다고 하여 다섯 명이 침대를 밀어내고 바닥에 경기장을 마련하였다. 중국까지 와서 털리면 조달할 데가 없으므로 조심조심 치는데 슬금슬금 돈이 나가기 시작하였다. 내일을 위하여 12 시 안에 끝내기로 하고 11 시 반에 마쳤는데 다행히 뒷끝발이 붙어서 겨우 본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비슷하여 화기애애하게 경기를 마치고 돌아갔다. 집사람은 딸아이가 걱정이 되는 지 같이 자겠다고 하므로 혼자 텔레비젼을 켜 보았다. 선명하게 나오지는 않으나 채널은 많아서 CCTV 가 9 번까지 나오고 서안 TV 1, 2 에 섬서 TV, 안휘성 TV, 상해, 북경 것도 보였다. 내용도 다양하여 밤늦은 시간인데도 드라마와 뉴스, 만화, 활극 등을 보여주었으나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그저
짐작이나 할뿐이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히터가 너무 세게 나와 더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침대는 너무 폭신하여 딱딱한 침대에서 습관이 된 몸이 잘 자려 하지 않았다. 히터를 끄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하였다. 3 시가 넘어서야 겨우 한숨을 잤다. 6 시에 모닝콜이 정확히 울리었다. 방을 대강 정리하고 어깨에 메는 가방에다 생수 한 병과 카메라, 필기구(한 번 밖에 안 썼다)를 넣고 행장을 차리었다. 늦잠을 자는 딸아이도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였다. 단장님은 고가다리 아래 중국인들 춤추는 것을 보러갔다가 어두워 그냥 오셨다고 하였다.
中國 西安 旅行記 7
(화산을 향하여)
로비에 내려오니 손선생 내외는 이미 식당에서 접시를 들고 돌아다니었다. 카운터에게 방 카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가니 호텔 뷔페였는데 주로 빵과 과일 종류이고 우유에 타먹는 콘 등속이 차려져 있어 서양인들의 기호에 맞추어 준비된 듯하였다. 큼직한 접시를 들고 뚜껑이 달린 뜨거운 그릇을 열어보니 쌀죽과 보리죽이 있고 볶음밥도 있었는데 그래도 주식으로 먹을 만하였다. 오이 썬 것과 하얀 소시지를 담아서 자리에 돌아오니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가져와 먹고 있었다. 서빙하는 아이가 와서 커피를 묻길래 달라고 하였더니 한 잔 가득 따라 주었다. 주방장이 섰는 곳에 가서 오믈렛 하나를 시켜다 먹으니 배에서 그만 먹으라는 신호가 왔다. 파인 주스를 한 잔 마시고 나와서 고가다리 밑 춤추는 곳에 구경을 갔다. 하루만에 중국사람이 되어 차가 달리는 거리를 태연자약하게 여러 개 무단으로 건너서 음악 소리가 요란한 곳으로 가보니 남녀가 안고 부르스 비슷한 것을 추고 있었다. 옆에는 초보인 듯 수 십 명이 모여 체조하듯이 스텝 연습을 하고 있고 건너편에서는 태극권을 하는 사람에 칼을 들고 검무를 추는 사람도 있었다. 음악이 쉽고 동작도 어려워 보이지 않아서 한 켠에 서서 같이 따라해 보았다. 바닥은 무도장처럼 반들반들하고 디스크자키(?)는 행색이 남루한 백발 노인이었다. 중국에는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공터에 모여 춤도 추고 체조도 한다고 하여 오래 전에 하던 재건체조와 조기청소 생각이 났다. 밝은 곳에서 춤을 추니 거리낄 것도 없고 감출 것 없어서 시장 바구니 숨기고 캬바레에서 제비들과 춤을 추는 우리와 비교가 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가이드를 만났다. 오늘은 중국의 오악 중의 하나인 화산에 간다. 무협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검술의 고장 화산, 이 화산은 중화(中華)란 나라 이름의 근본이 된 곳이고 산세가 험하여 '천하제일기험' 이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칼등 같은 능선에 오직 외길이 있을 뿐 나는 새도 쉬어 가는 곳이다. 화산은 서안 시내를 벗어나 임동현(진시황과 양귀비의 유적이 있는 여산이 있는 곳)을 지나 화음현에 속해 있다. 거리가 100 km를 넘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하였다. 고속도로에 올리기 전에 시내와 변두리에서 제멋대로 운행하는 차들과 사람을 보았는데 탄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하나는 경적을 거의 울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저렇게 무질서한데도 접촉사고가 잘 나지 않고 잘도 피해 다니는 것이었다. 잠시 후 버스는 서관고속도로를 달렸다. 길옆으로 거대한 굴뚝의 화력 발전소도 보이고 밭 사이로 공동묘지도 볼 수 있었다. 아직 떼도 입히지 않은 벌건 봉분에는 장례식에 쓴 듯한 커다란 화환이 덮여 있었다. 낡은 벽돌담 사이로 마스크도 없이 허연 횟가루를 둘러쓰고 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속도로인데도 아무런 표지가 없는 가운데 사람들이 손을 들어 버스를 세우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中國 西安 旅行記 8
(화산 입구에서)
고속도로 곳곳에는 담당구역인 듯 몇 km 간격으로 사람들이 늘어서서 길을 쓸고 있었다. 평지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는 고속도로는 거칠 것이 없어서인지 똑 바로 한없이 뻗어 있었다. 이런 곳에 도로를 만들면 참 빠르고 쉽게 완성될 것이다. 모두 국가 소유 땅이라 보상이 있나, 산이 많아 터널을 뚫을까, 강이 있어 다리를 놓을까
일사천리로 진행될 듯하였다. 우리 같으면 경찰도 무인 카메라도 없고 달리는 차마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길을 7-80 km로 느리게 달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150-60 km는 기본으로 날아다닐 터이다. 그러나 젊은 기사는 다른 차들이 가끔 추월하는 데도 불구하고 제 속도를 유지하며 천천히 달렸다. 이윽고 버스는 화음현에 닿았다. 화자는 간체를 알겠는데 음자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볕양과 반대로 달월을 쓰면 음자가 된다고 하여 무릎을 쳤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버스는 시골길을 달리는데 길가에서 도로공사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도로가에 하얀 횟가루를 그어 놓은 것이 그 곳을 파낼 모양인데 일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고 (그나마 곡괭이질 한 번하고 열 나절은 더 쉬었다)다른 이들은 이리 저리 흩어져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쉬는 시간은 아닌 듯하였다.(돌아오는 차 속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공공근로처럼 적당히 시간만 때우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화산 입구의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난데없는 아줌마와 아이들의 부대가 들이닥치더니 온갖 물건을 사라고 조른다. 처음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할 정도로 끈질기게 달라붙고 조금만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가는 그들의 밥이 되어 사라고 조르는 통에 곤욕을 치루었다. 한 장 짜리 달력 같은 화산 안내도(우리 같으면 안내소에서 그저 나누어주는 단 매 짜리)를 20 원에 사라고 성화이고 산에 오르면 얼어죽는다고 흰 실장갑을 주며 끼라고 하였다. 가죽장갑을 보여주어도 막무가내여서 모두들 멀찍이 피하는데 키 큰 변선생이 사람이 좋아 보였든지 붙들려 애를 먹었다. 나중에는 버스 안까지 따라와서 사라고 졸랐다. 딸아이가 발이 시리다고 하여 근처의 가게에서 양말 한 켤레를 겨우 반값에 흥정하여 샀다. 미리 화장실에 가느라고 공중측소에 들어갔는데 어디서 늙은 여자가 나타나더니 한 사람 앞에 5 각씩 내라고 하였다. 그것도 깎을 수 있어서 2 원을 주고 다섯 사람이 볼일을 보았다.
화장실은 구멍만 있고 칸막이가 없어서 여자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냄새가 심한 것은 물론 불결하기 짝이 없다. 화산은 산이 험해서인지 들어가는 절차가 꽤 까다로와서 한참을 기다렸다. 우리 버스는 대기시키고 엔진 속이 훤히 내다보이는 낡아빠진 고물버스에 오르게 하였다. 입구에서 본 화산은 영암의 월출산처럼 화강암 바위가 늘어선 장대한 모습이었다. 구비를 도니 초소가 보이고 바리케이트를 쳐 놓은 옆에서 군부대 들어가는 것처럼 서류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中國 西安 旅行記 9
(케이블카를 타고)
운전기사와 공안이 뭐라고 한동안 주고받더니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였다. 왼쪽으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짜기 옆으로 2 차선 콘크리트 도로가 나 있는데 그늘이라 길 가운데는 얼음이 녹지 않고 있었다. 몇 구비 돌지 않아 화산의 웅장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주왕산처럼 생긴 험한 바위들이 연이어 보이고 그 크기도 엄청 나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맨 앞에 앉은 덕분에 이 쪽 저쪽의 풍경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버스는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험한 길을 천천히 달려 서서히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경치는 갈수록 기묘하고 험하여 사람들이 잡담하기를 그치고 창 밖을 보느라 정신이 팔리었다. 이윽고 주차장에 이르렀는데 검은 제복의 공안이 좌악 깔리고 검은색의 고급 세단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보아 높은 양반이 온 것 같았다. 케이블카를 타러 가는 길 양옆으로 가게들이 보이는데 옥으로 만든 칼과 무협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여러 가지 칼들을 팔고 있었다. '화산논검' 이라고 이곳 화산에서 각파의 무술인들이 시합을 한 이야기를 상술에 써먹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군고구마를 파는 행상도 보였는데 우리를 보고 '고구마, 고구마' 하며 호객을 하여 한국사람이 더러 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케이블카는 6 인 승 곤도라가 여러 대 이어진 형태인데 무주 리조트에서 본 것과 비슷하였으나 겨울철 비수기라 절반 이상을 떼어놓고 운행하여 한참을 기다렸다. 계단옆 벽에는 이 붕 총리를 비롯한 중국의 고위 관리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찍은 사진들을 붙여 놓았다. 우리 차례에는 젊은 처녀가 하나 탔는데 말을 붙여 보니 자기는 서안 교통대학의 학생이라고 하였다. 일행은 먼저 갔다고 한다. 곤도라는 수직으로 800 m 높이를 1500 m 넘게 오르는데 설악산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 간판에 아시아 제일이라고 써 놓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에 천길 절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그런 절벽이 어디 있담. 허풍도 심하지' 하고 여겼는데 실제로 이곳 화산의 절벽은 천 길도 더 되는 것 같았다. 가물가물한 급경사 바위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고 그것도 한 덩어리 바위가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고 상상해 보면 대강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오른 쪽의 절벽에는 사람 손가락 모양이 나타나 있고 그 위의 소나무는 무얼 먹고 자랐는지 늘씬한 것이 폭의 그림이었다. 경치를 보다가 문득 발 아래를 보니 오금이 저렸다. 칼날 같은 바위 등으로 외가닥 돌계단 길이 나있었다. 돌을 쌓아 만들지 않고 정으로 바위를 쪼개어 길을 내었는데 어떤 곳은 사다리를 세운 것 같이 경사가 급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약 5 분 정도 시간이 지나 우리는 무사히 케이블카에서 내려 돌계단 길을 올랐다. 산 위는 바람이 없고 포근한데다 하늘까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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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화산)
쇠사슬 난간이 달린 돌계단을 5 분 정도 오르니 전망대가 있고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 행상이 보였다. 여기에도 공안 여러 명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화산은 5 개의 봉우리로 되었는데 그 중 남봉 낙안이 제일 높고 동봉 조양과 서봉 연화 셋을 합쳐 구름 위에 솟았다고 하여 천외삼봉이라고 한다. 화산 전체가 하나의 완전한 화강암체로 구성되었고 27 억 년 전에 생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영험한 산으로 이름이 높아 진시황, 한무제, 측천무후 등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또 도교의 성지로 72 개의 동굴이 보존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봉우리 양쪽으로 한 가닥 실같은 길이 보이고 절벽 중간 중간에 제비집 같은 기와집들이 띄엄띄엄 있었다. 전망대의 오른 쪽으로 난 바위 길을 오르니 화산 안내소가 있는 데 양복장이 몇이 수 십 명의 공안이 둘러 선 가운데 설명을 듣고 있고 앞에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접대하는 여자들의 표정과 동작에서 상당한 긴장감이 도는 것을 보아 고위직인 것 같다. 10 여 분을 걸어 북봉의 정상에 올랐다. 1615 m 라는 표지석이 섰고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고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사진을 잘 찍는 변선생에게 부탁하여 식구들과 몇 장 촬영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 기념품 행상이 "야스이 ,야스이(싸다)" 하며 붙잡는다. "와타시와 칸코쿠진데스. 니혼진가 나이!"(나는 한국인이다. 일본인이 아니다) 그렇게 말해도 알아듣지도 못한다. 몇 마디 토막말만 배운 모양이다. 화산이 새겨진 등산 기념 메달을 5 원 주고 하나 사서 뒤에 이름을 새겼다. 데모할 때 쓰는 붉은 머리 띠 같은 것도 팔았는데 중국인들이 그걸 사서 목에 넥타이처럼 걸고 다녔다. 바닥이 미끄러운 길을 조심하며 왼편 길로 접어드니 길이 산 위로 나있는데 군데군데 작은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도교 사원도 있고 숙소와 창고 같은 건물도 있었다. 한 군데 바위를 돌아 내려가는데 길이 좁고 대단히 가팔라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어서 현기증이 났다. 다행히 한 모퉁이 돌아서자 위험요소가 없어졌다. 조그만 산장이 보여 단장님과 먼저 간 몇 분이 피로한 몸을 잠시 쉬려고 의자에 앉았더니 총각 하나가 와서 돈을 내라고 한다. 그 옆의 돌 의자는 국가에서 만들어 무료지만 대나무 의자는 자기들이 설치하여 요금을 받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종이에 조잡한 글씨로 한 시간에 5 원 이라고 적어 두었다. 그러나 기특한 것은 우리로 치면 국립공원 급이어서 그런지 가격이 정찰제로 붙었는데 비교적 쌌다. 아까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 매실을 설탕에 절인 간식을 한 봉지 샀는데 가게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일부는 아득히 보이는 꼭대기 산장까지 가 본다고 나서서 가이드가 따라갔다. 나는 남은 일행과 같이 의자에 앉아서 쉬었다. 물값이나 술값이나 비슷하여 목이나 축이고자 가게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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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을 내려오며)
가격표를 보니 한스 맥주가 한 병에 7 원이었다. "우콰이" 하며 5 원 주겠다고 하니 안된다며 6 원을 내라고 하였다. "삥피조우"(찬 맥주)한 마디에 군소리 없이 냉장고의 찬 걸로 바꿔 주었다. 이 높은 곳에서 사 먹는 맥주치고는 값이 싼 편이다. 식당에서 추가로 주문하면 10 원을 받는다. 산상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은 그 맛이 일품이었다. 어제 사온 과일과 간식으로 군것질을 하다가 화장실로 내려갔다. 그럴듯한 외관과는 달리 화장실 안은 칸막이 없이 구멍만 뚫려 있는데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골짜기로 바로 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자연분해 법을 적용하는 모양이나 밑에서 걸어 오르는 사람들의 머리에 맞으면? 한동안 기다려 내려온 일행에게 들으니 정상에 오르려니 또 막아놓고 돈을 달래서 그냥 내려온다고 하였다. 하산하는 길에 늙은이 둘이 멜대에 무 배추 등속을 한 짐 가득 지고 비틀비틀 올라왔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저 산 아래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처음 버스 탄 곳) 이 산 꼭대기 가게까지 계약을 맺고 물건을 조달해 주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물론 비싼 케이블카는 타지 못하고 새벽에 일어나 눈길 계단을 걸어서 지고 온다고 하였다. 그나마 한 번 지고 오르는데 고작 20 원 (우리 돈 3400 원) ! 그것도 일이 많으면 좋아라하고 2 번 오르기도 한단다. 겨우 그 돈을 벌자고 이런 위험하고 힘든 길을 오르내리다니. 나 같으면 20 만원 준다고 해도 사양할 것인데... 그러나 이 일은 계속 있고 다른 일은 있다가 없다가 하기 때문에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하였다. 같이 간 딸아이가 나중에 중국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어냐고 물으니 이 일을 첫째로 꼽았다. 내려오는 케이블카는 손님이 적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는데 경치가 더 좋았다. 모두들 감탄을 하며 화산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한 사흘 잡아 이곳 봉우리들을 모두 밟아 보았으면 좋겠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섰다. 케이블카 내리는 곳 옆에서 사내 하나가 혼자 벽돌을 쌓고 있었는데 전문가인지 솜씨가 제법 날렵하였다. 먼저 내려간 가이드가 군고구마를 한 봉지 사들고 와서 나누어주었다. 우리 착한 가이드는 어제도 자기 돈으로 따로 과일을 사주고 늦게 까지 남아 치닥거리를 하고 오늘은 고객들의 안전을 위하여 꼭대기까지 왕복 1 시간이 넘는 산길을 다녀왔다. 남편도 가이드를 하고 있고 시댁이 서안 시내라 아이를 맡겨놓고 왔다며 자기 임무에 충실하였다. 모두들 친절하고 좋은 가이드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일본어 실력도 상당하여 일본관광객의 안내도 맡고 있다고 하며 식당도 최고급으로 안내하고 공산당이 시켜서 돌아보아야 하는 곳의 쇼핑도 강요하지 않고 물건값을 미리 깎아주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고구마를 한 입씩 베어 물고는 희희낙락하며 버스에 올라 입구로 내려왔다. 주차장으로 가서 우리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에도 상인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물건을 사달라고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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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으로 돌아오며)
점심을 먹기 위하여 화산 인근의 화음현의 커다란 식당으로 들어갔다. 대문이 열리자 식당 안까지 버스가 들어가는데 제법 너른 정원이 있고 문 한 짝마다 두 사람씩 4 명의 처녀들이 인사를 깎듯이 하였다. 안내를 따라 홀을 지나 안쪽 자리에 두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어제 저녁 중국식을 한 번 먹어보았다고 이력이 나서 차도 마시고 부어주는 맥주와 음료수도 받아들었다. 풋마늘 같은 것과 미역 비슷한 것, 콩나물 같은 것이 볶음으로 나오는데 재료도 모르겠고 이름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생선도 한 마리 눕혀서 들어오고 닭고기에 쇠고기 같은 것도 들어와 모두 푸짐하게 잘 먹었다. 현관의 진열장에는 뱀 대신에 자라와 커다란 식용개구리가 꿈틀거리고 각종 새우들이 물 속에서 팔딱거렸다. 식사를 마친 다음 가이드가 물을 산다고 기사에게 말하니 마침 가게는 길 건너편에 있었다. 좀 더 가서 유턴을 하여야 옳건만 중국식은 간단하였다. 바로 그 자리에서 차가 달리는 중앙선을 넘어 반대쪽을 보고 차를 세웠다. 모두들 기가 막혀 얼굴만 쳐다보았다. 생수를 몇 병 사서 서안으로 향하였다. 중국에는 차를 마시기 때문에 물을 주는 곳이 없다. 식당은 물론이고 호텔에서도 찬물을 마시려면 돈을 주고 사먹든지 특별히 부탁하면 어디 가서 한 잔만 가져다준다. 온 길을 되돌아 나오는데 마을의 길가에 노점들이 서 있고 노천 옷가게도 보여 모두들 구경을 하였다. 양고기를 그대로 매달아 팔고 냉장고 하나 없이 파리가 득실거리는 좌판에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내 놓았다. 시장 골목에는 사람들로 들어차서 새까만 머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리자 올 때 본 경치들이라 모두 말 탄 양반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며 졸았다. 우리 가이드도 고단한지 앞자리에 머리를 몇 번 박아가며 잠을 잤다. 밀밭에 선 표어 중에는 서부개발에 대한 내용이 많았는데 인구에 비하여 면적이 넓고 교통과 사회기반시설이 취약한 이 곳을 국가단위에서 중점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다고 한다. 오늘 고생한 발을 호강시키려고 발맛사지를 받으러 가기로 하였다. 발맛사지는 본래 전족의 풍습이 남아 있는 중국 여자들의 불쌍한 발을 위하여 생겨났다는 말도 있고 옛날부터 궁궐에서 전해지던 처방이라 하기도 한다. 여하튼 중국의 발맛사지는 천하에 으뜸가는 경치라 일컫는 계림이 가장 유명하다는데 지난번 여행을 하였을 때 계림의 서비스는 받지 않고 북경에서 맛사지를 받았는데 처음이어서 인지 시원하게 잘 하였다. 어디서 받으나 별 차이를 못 느끼니 먼 계림까지 발맛사지 받으러 갈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서안 시내 뒷골목 같은 곳을 한참 가더니 인도를 가로질러 상인들이 우글거리는 좁은 골목으로 차를 넣었다. 버스 옆으로 사람이 다니지 못할 정도의 길을 나오니 컴컴한 건물이 섰고 커다랗게 족욕(足浴)이라 써 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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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맛사지)
들어가는 입구는 컴컴하고 어두운 계단이라 딸아이가 깡패소굴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2 층에 올라가서 문을 여니 환한 불빛 아래 말끔하게 차려 입은 젊은이가 인사를 하며 반긴다. 지난 번 북경의 그곳처럼 널찍한 홀 가운데 칸막이가 쳐진 소파가 스무 개정도 놓이고 빙 둘러 벽 쪽으로 작은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방안에는 소파가 6 개 혹은 3 개씩 놓였다. 우리가 들어가니 액정비젼으로 우리 나라 가요를 들려주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전신 마사지를 받는다고 하므로 방으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삼삼오오 홀의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에 처녀 둘이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신발을 벗어라 한다. 양말까지 벗고 비누를 푼 대야에 발을 담그게 하였다. 하루 종일 지친 발을 따뜻한 물에 담그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시는 것 같았다. 어깨부터 양팔을 주물러 내려오는데 시원하기 그지없다. 보기보다 힘이 세어서 옆자리의 단장님이 감탄을 하셨다. 5 분 정도 지나서 발을 씻기고 로션 같은 걸 종아리까지 바르더니 발맛사지를 시작하였다. 우리로 치면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학업을 그만 두고 이런 짓을 하는가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이드에게 들으니 보기보다 나이들이 많아서 모두 스물 서넛은 되었고 전문 학원에서 배운 아이들이라고 하였다. 발바닥을 문지르기도 하고 발가락을 뽑기도 하였다. 한 삼십 분 이상을주무르더니 일으켜 세우고 발을 수건으로 싼 다음 나갔다. 모두 끝났나 하고 앉아 있으려니 다시 들어와 돌아 앉힌다. 그리고 등과 어깨를 주물러 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고 팁을 주어야겠는데 들어올 때 단체로 20 원 씩 계산했다는 걸 알려 줄 방법이 없어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즈음 마침 가이드가 와서 중국어로 통역을 하여 주었다. 한결 가뿐한 몸을 일으켜 의관을 정제하고 홀에 나오니 아직 전신 마사지가 끝나지 않아 어떻게 하나 보려고 방안을 기웃거렸다. 모두들 병원에 온 환자처럼 까운을 갈아입고 침대에 하나씩 엎드려 있었다. 구멍에 머리를 박고 있던 집사람이 어서 나가라고 하였다. 밖의 테이블에 앉아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있으려니 모두들 마치고 나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온몸을 주무르는데 위에서 밟기도 하고 구석구석을 만져주어 시원하나 발은 조금밖에 주무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계산을 끝내고 밖에 나오니 어두워서 캄캄하였다. 저녁을 먹으러 네온 불이 휘황한 승리반점으로 갔다. 이 집도 특 일급이라고 급수가 매겨져 있었다. 홀을 지나 방으로 가는 양쪽에는 각종 그림과 글씨가 걸렸는데 문외한이 되어서 전문가인 변선생만 이리 저리 살피었다. 서빙하는 아가씨가 여러 명인데 요리를 한 가지씩 가져다 주고 설명을 해 주나 알아들을 수 가 없었다. 그래도 요리가 간이 맞고 맛이 있어 맥주 한 잔씩 건배를 하고 맛있게 먹는데 복장이 다른 처녀아이가 하나 들어와 우리 말로 여러 가지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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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할인점 구경)
그런데 서비스라며 작은 술을 한 병씩 주었다. 온갖 약초가 들어간 몸에 좋은 술이라며 한 병에 120 원을 내라고 한다. 조그만 술 한 병에 우리 돈 2 만 원이라니. '장양춘' 이라는 이름과 달리 향이 독특하여 술이라기보다 약을 먹는 기분이나 변선생은 향이 마음에 든다고 하였다. 섭섭하게도 아무도 사려고 하지 않아 그 아가씨는 공연히 비싼 술 두 병만 손해보았다. 아가씨가 가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잽싸게 챙겨 넣어 두었다. 손을 씻으려고 화장실에 가니 타일도 깔고 수세식으로 개조를 했으나 냄새가 나고 바닥이 추적거려 더러웠다. 식당 문을 나서는데 거지가 하나 누워 구걸을 한다. 집사람이 호텔에서 먹으려고 챙겨온 남은 음식을 봉지 채로 주었다. 차를 타려는데 잡상인들이 둘러서서 테이블 보를 사라고 하고 붓 장수 하나는 여러 개의 붓과 조그만 도장에 인주까지 달린 상자를 만 원 달라고 하였다. 작년 서안에서 사라고 조르던 붓과는 크기도 크고 모양도 좀 좋아 보였으나 별 소용이 없어 ' 부요! '(싫다) 했더니 당장 두 개를 얹어 만 원이라고 하였다. 차에 오르니 3 개에 만 원, 자리에 앉으니 네 개에 만 원, 차가 움직이자 창문을 두드리며 다섯 개 만 원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저녁 시간에 할 일이 없으므로 가이드에게 야시장이나 적당한 쇼핑거리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중국이 올림픽을 유치한 뒤로 세계화다, 문명화다 하면서 제일 먼저 없앤 것이 야시장이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숙소 건국 호텔 앞의 야시장도 없어지고 곳곳의 야시장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음식 자체도 비위생적이지만 설거지 한 물과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려서 환경오염이 심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야시장을 모두 실내에 모았는데 점포세가 비싸고 습관을 버리지 못하여 차츰 줄어들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신 큰 할인점에 가보기로 하였다. 차를 내린 곳은 시장 통 이었는데 여러 가지 고기 종류를 꼬치로 구워 팔고 있었다. 어두워서 무엇인지 모르나 냄새는 구수하고 가격도 한 꼬치에 1 원, 2 원으로 싸다. 복잡한 길을 지나 지하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할인점으로 내려갔다. 드나드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비교적 깨끗한 것이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이 출입하는 것 같다. 온갖 물건과 사람이 범벅이 되어 떠들고 돌아다녀 정신이 없었다. 이것저것 보느라 식구들도 놓치고 가이드도 잃어버렸다. 설마 입구에서 기다리겠지 생각하고 물건값을 비교해 보는데 품질은 알 수 없으나 우리 가격의 반정도 되었다. 시간만 있다면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골라서 사겠지만 대강 훑어보고 냄새를 없앤다는 신발 깔창을 10 원 주고 사고 말린 살구가 있어서 3 봉지에 9 원을 주고 샀다. 술 코너에는 정말 셀 수 없을 정도의 여러 가지 술이 진열되어 있는데 맛을 알 수 없어 선뜻 사기 어려웠으나 단 한 가지 작년에 샀다가 자스민 향 때문에 못먹고 버린 '서봉주' 는 알아 볼 수 있었다.
中國 西安 旅行記 15
(그대로 남아있는 팁)
버드와이저 캔 맥주가 우리 돈으로 500 원 가량 하니까 술값은 엄청 싼 편이다. 딸아이가 나를 찾아오더니 가방을 보라고 하였다. 이리저리 물어서 가방 코너에 가니 값이 싸기는 하나 만약 AS 에 문제가 생기면 귀찮을 것 같아 포기하였다. CD 코너에 가서 아들놈 줄 클래식을 골랐으나 점원이 알아듣지를 못한다. 나오다가 보니 이교장 선생님이 무얼 사셨는지 손에 든 봉지가 불룩하였다. 자세히 보니 캔 맥주와 여러 가지 안주를 듬뿍 사들고 계셨다. 저녁에 자실 약으로 쓸 모양이다. 불빛이 찬란한 시내를 지나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시내 관광이라 모닝콜을 6 시 반으로 느긋하게 잡고 식사도 8 시쯤 하기로 하였다. 각자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우리가 놓아 둔 팁이 그대로 있었다. 내 방에 둔 중국 돈 10 원 짜리만 없어지고 딸아이 방의 1 달러 지폐는 그대로였다. 조금 있으니 옆방의 홍선생이 와서 팁이 그대로 있다고 말하고 변선생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거 참 이상하다. 호텔에서 나갈 때 룸메이드 몫으로 1 달러 정도의 팁을 베개 위에 얹어 놓고 나오는 것은 상식인데 여기서 근무하는 아이들이 모르고 놓아 둘 리 없고 자존심이 강하여 받지 않는 경우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또 호텔 측에서 종업원 교육을 시킨다고 하여도 부당한 팁을 요구하지 말라고 시키지 관행적으로 놓아두는 돈까지 간섭할 리 없지 않은가?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은 팁을 받지 않으려면 모두 그대로 둘 것이지 어째서 우리 방의 것만 가져갔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도 답이 없어 어제 고스톱 치느라 침대를 이리저리 옮기고 쓰레기를 많이 내 놓아 그런가 의심해도 알 길이 없다. 한 동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욕실에 들어가니 두터운 수건이 크기대로 여러 장 놓이고 청소를 깨끗이 해 두어 쾌적하였다. 일회 용품도 모자라는 것만큼 채워두었는데 샴푸를 '세발액' 보디샴푸를 '목욕액'으로 쓴 것까지는 좋았으나 칫솔을 '아구(牙具)' 라고 쓴 것은 어색하였다. 어쨌든 더운물을 받아서 머리를 감고 면도까지 마쳤다. 샤워를 끝내고 텔레비젼을 보는데 손오공이 저팔계와 철선공주를 쫓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한동안 재미있게 보다가 산행으로 피로해서 어제와 달리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아직 깜깜하고 시계를 보니 5 시도 안되었다. 심야시간이라 방송도 몇 군데 밖에 나오지 않는데 SX TV(시안 TV)에서 화산을 등산하는 장면이 나왔다. 여자 리포터가 반소매 옷을 입고 푸른 소나무와 시원한 물줄기로 보아서 여름에 촬영한 것으로 여겨지는 데 우리가 지나온 북봉을 비롯하여 화산의 여러 곳을 보여주어 흥미진진하였다. 어느 봉우리인지 모르지만 천길 절벽 끝에서 벽에 박아 놓은 쇠사슬에 의지하여 신발 폭 만한 널빤지 위를 걷는 위험한 장면도 나왔다. 그러나 여자 리포터는 간이 큰지 태연자약하였다.
中國 西安 旅行記 16
(여산을 향하여)
아침 시간이 되어 로비에 내려가니 몇이서 고가다리 밑 춤 구경을 갔다가 죄다 늙은이밖에 없어 그냥 왔다고 하며 들어왔다. 어제처럼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오늘은 서안 교외 임동현에 있는 병마용갱을 보러 간다. 서안 최대의 볼거리이자 중국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이다. 진시황릉은 여산 기슭에 자리잡고 병마용은 릉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우리는 길게 '진시황 병마용' 이라고 부르지만 중국현지에서는 간단하게 '진용' 이라고 한다. 서관 고속도로를 30 분쯤 타고 나오면 병마용 가는 길의 안내판이 잘 나타나있다. 군데군데 서 있는 간판에도 세계 조각사의 걸작, 2 천년 고도의 유물 운운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붐비지 않아 좋았다. 작년에는 차에서 내리자 잡상인이 달려들었는데 어째 조용하다. 가게 옆을 지나도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기념품 가게 안에는 병마용을 처음 발견하여 화살촉과 각종 유물 한 수레를 끌고 가서 신고하고 중국 돈 30 원을 받은 '양주발' 노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책자에 사인을 해 주고 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고자 하였으나 사진을 찍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온갖 물건을 파는 가운데 칼국수 집이 있어 가이드가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얼마의 돈을 주고 숙수에게 요리 시범을 하라고 하였다. 원래는 밀가루 반죽을 머리 위에 얹고 칼로 썰어 날리는 것인데 위생적이지 못하고 위험하다고 하여 요즈음은 함석으로 만든 네모진 그릇 위에 반죽을 놓고 칼로 잽싸게 썰어 한 발 가량 떨어진 국솥에 날려보내는 시범을 보였다. 그리고 면발을 가늘게 뽑아 라면(우리의 라면이 아니고 면발이 가는 중국 국수의 일종)을 만들어 보였다. 전자식 카드를 한 장씩 받아들고 입구를 통과하니 국방색 외투를 차려입고 이름표를 붙인 처녀들이 여러 명 모여 떠들고 있는데 안내원인 듯하였으나 안내는 하지 않고 저희들끼리 희희덕 거리며 놀았다. 원형극장에 들어가니 마침 진시황제와 병마용에 관한 영화를 막 시작하고 있다. 처음 온 사람들을 위하여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여 주고 20 분 정도 관람이 끝난 다음 1 호갱부터 찬찬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손님이 적어 밀리지 않고
돌아 볼 수 있었다. 2200 년이 지난 세월을 땅속 깊이 묻혀 있다가 나온 병마용들은 금방 만든 것처럼 생생하였다. 손톱은 물론 손금까지 새겨져 있고 눈썹과 머리카락까지 하나하나 세밀히 묘사되어 있다. 도저히 그 때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신발의 밑창을 미끄러지지 않도록 지금의 등산화 모양으로 홈을 파 놓았고 옷고름을 묶은 모양이나 목에 두른 수건도 모두 달랐다. 6,000 개가 넘는 병마용은 지금도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1 호갱을 둘러보고 3 호갱으로 갔다. 공안의 눈을 피하여 사진 몇 장을 찍고 장군용과 병사용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다. 배가 나온 쪽이 장군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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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1 호갱이 보병부대인데 반해 3 호갱은 그 규모가 가장 작지만 대 부대를 통솔하는 지휘부라고 하였다. 장군용들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고 넘어져 아직 일으켜 세우지 못한 용의 조각들도 많았다. 2 호갱에는 기마 부대인 듯 말의 용이 많이 나왔다. 그 때의 중국 말들은 키가 작아서 나귀를 겨우 면한 작은 것들이지만 재갈을 물고 안장 위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태우고 잘 달렸다고 한다. 지금의 덩치가 큰 말은 한 나라 때 장건이 서역에 가서 얻어온 바람같이 달리고 피땀을 흘린다는 천마가 들어오고 나서 퍼진 종자인데 그 시대 유물 중의 하나가 유명한 '비연답마' 라고 발로 나르는 제비를 밟고 힘차게 뛰는 역동적인 동제마상이 있다. 병마용 갱을 모두 둘러보고 지하의 박물관으로 갔다. 박물관의 중심 볼거리는 진시황의 마차인데 4 마리 말이 끄는 두 대의 마차가 정교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첫 번째 것은 호위용으로 차양막을 자동으로 내리는 장치가 되어 있고 두 번째가 진시황이 타던 마차인데 수레바퀴의 살이 30 개로 한 달의 날수를 나타내고 차양막의 대는 지금의 우산처럼 자동으로 접히고 각도까지 조절하게 설계되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각종의 무기가 200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녹슬지 않고 보관되고 있는 것은 그 위에다가 정밀한 크롬도금을 하였기 때문인데 크롬 도금법은 독일에서 1930 연대에 와서야 실용화된 기술이다. 땅 속에서 나온 칼로 신문지를 뚫었더니 11 겹의 종이를 힘들이지 않고 관통하였다고 한다. 구경을 마치고 화장실을 가는 데 젊은이 하나가 문을 열어 놓은 채로 태연하게 볼일을 보고 있어서 들어간 우리가 도로 민망하였다. 병마용 앞 가게에서 경극에 쓰는 탈 모양을 여러 개 걸어 놓고 파는 데 딸아이가 하나 사 달라고 하여서 65 원 부르는 걸 10 원에 사 주었더니 신기해하였다. 잠깐의 쇼핑 시간을 주어 가게의 물건을 구경하고 실제크기의 병마용 가운데에 들어가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길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피하느라 가게 안에 들어갔다. 유리상자 속에 넣은 황금색을 입힌 마차 두 대 100 원 달라는 걸 역시 10 원에 사고 차에 올랐다. 이 곳의 감과 대추가 맛있다는 데 맛보지 못하고 간다고 집사람이 아쉬워하였다. 병마용을 나와서 진시황릉은 차를 타고 지나치며 보았다. 일세를 주름잡은 영웅은 땅속깊이 잠들고 후손들이 먹고살겠다고 무덤 위까지 석류나무 과수원을 만들고 길도 내었다. 인근의 지하궁을 만들어 둔 곳이 있다고 하여 따로 단체경비를 지불하고 들어가 보았다. 엑스레이로 진시황릉을 투사해 본 결과와 사마천의 사기를 종합하여 1/350 로 축소하여 만든 전시관이었다. 효과를 높이고자 주위를 어둡게 하여 무덤 속의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들어가기 전에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한 시황제의 업적을 먼저 설명하여 주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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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지하궁)
유리 진열장안에는 부역에 끌려와 힘든 노동에 지친 사람이 뼈만 남은 몰골로 죽어 넘어져 있다. 통로 양쪽으로는 병마용들이 창을 들고 늘어 서있는 가운데 계단을 여러 층 올라갔다. 교실 서너 배 만한 공간에 아방궁의 축소모형과 가운데 진시황의 관을 안치해 둔 것이 보이고 하늘에는 시간에 따라 달이 뜨고 해가 솟았다. 생전의 영화를 그대로 누리고자 왕위에 오르자 바로 시작했다는 왕릉공사는 38 년이 걸려 완성되었고 당시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토목에 관여한 사람은 모조리 죽였다고 하였다. 진시황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된 후 찾았으나 이미 남의 사람이 된 다음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평생 황후를 두지 않고 대신 수천 명의 후궁을 두었다고 한다. 같이 순장된 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한 처첩과 왕자와 공주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묻히고 수은을 부어 강을 만들고 동해바다의 고래기름으로 불을 밝혔다고 한다.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아방궁과 같은 궁궐을 그대로 꾸며 놓고 성곽과 성문도 만들었다. 죽어서도 심심하지 않도록 전국의 부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능묘 근처에서 살게 하였다 한다. 아직 도굴 당한 흔적이 없으므로 사마천의 기록대로 모든 것이 지하에 그대로 있다면 피라밋이나 스톤헨지를 돌아보는 것이 가소로울 듯하다. 하늘에는 온갖 방위의 별자리를 장식하고 9 개의 해를 쏘아 맞히는 궁사도 그려 두었다. 지하궁을 구경하고 화청지를 보러갔다. 시간이 늦어 점심부터 먹기로 하였는데 차가 화청지 앞 주차장에 도착하자 머리가 1/3 정도 날아가 버린 걸인이 나타나 동냥을 하였다. 잔돈을 털어주고 자세히 보니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아니라 지난겨울에 본 그 거지였다. 휠체어에 의지하여 가슴에는 무공훈장을 달고 끼니를 구걸하는 것을 보니 아직 보훈이라는 개념은 사치스런가 보았다. 화청지의 옛 식당은 일층 가게가 없어지고(뱀술을 팔았는데....)그림과 글씨를 진열해 두고 우리를 불렀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두보나 이백, 왕유의 시들이 온갖 서체로 걸려있었다. 이층에 올라가서 음식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시설은 특일급이 아니나 오랜만에 짭잘하고 매운 기가 있어 지금까지 먹은 음식 중에 제일 낫다고들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건물 아래편에 있는 옥 전시장에 구경을 갔다.(강제로) 지난번에 본 곳이고 옥을 사지도 않으려니와 흥미도 없어서 먼저 한 바퀴 둘러보고 혼자 나와 근처를 구경하였다. 유명한 관광지라 버스가 줄을 이었는데 조그만 소형버스는 절대로 타지 말라고 하였다. 중간 중간에 많이 쉬고 손님이 차도록 기다리기 때문에 번호가 붙은 큰 버스를 타야 제대로 구경을 할 수 있단다. 노점에는 조잡한 병마용과 오전에 산 황금마차도 있어 값을 물어 보니 80 원을 달라고 하였다. 나중에 얼마나 깎아줄 지 모르지만 터무니없이 부르는게 황당하여 아예 대답도 않고 돌아서니 뭐라고 하며 손짓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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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
날씨는 봄날처럼 포근하고 바람도 없어 여행하기에는 정말 좋았다. 우리 일행에 덕이 많은 분이 있는지 하늘이 크게 일조를 하였다. 사실 매서운 바람이 불고 손이 시릴 정도이면 구경이고 나발이고 모두 싫어지기 마련이다. 만리장성에 올랐을 때 매운 칼바람이 얼마나 불었든지 얼굴이 얼얼하여 얼른 내려온 기억이 난다. 15 명 일행이 조그만 비취 하나만 그것도 팍팍 깎아서 사서 나왔다. 나중에 가이드가 시간을 측정하니까 쇼핑을 가면 30 분 이상은 사지 않더라도 꼭 있어달라고 당부를 하였다. 살만한 것을 적당한 값을 매겨 손님을 끌어야지 어거지로 앉혀놓으면 서로 불편하기만 할 것인데 정책 입안하는 사람들의 머리하고는.... 걸어서 길을 건너 화청지로 들어갔다. 양귀비가 현종에게 술을 권하는 커다란 그림이 있는 곳에서 혼자 떨어진 한 사람을 기다렸다. 양귀비가 몸을 씻었던 해당탕과 연화탕을 둘러보고 28 청춘과 60 이 넘은 노인의 로맨스를 상상해 보니 그림이 그려지지를 않는다. 연화탕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연결하여 그려 두었는데 지금은 모두 떼어버리고 그림과 글씨를 걸어놓고 팔고 있었다. 우리 아이는 중국에 사진을 찍으러 왔는지 어딜 가나 카메라를 부른다. 화청지 연못가에서 몇 장을 찍어 주고 양귀비가 머리를 말렸다는 누각에도 올라보고 서안사변의 현장 오간청에도 들러 보았다. 장학량이 장개석을 잡으려고 쏜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고 깨진 유리창도 보존되어 있어 그날의 현장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데 우리 손으로 일제의 치욕이라며 중앙청 건물을 허물고 영도다리 앞의 미나까이 건물도 뜯어버렸다. 우리가 상해에 가면 초라한 임시정부 건물도 가보고 싶고 안중근 의사가 옥살이하던 여순 감옥도 일부러 찾지 않는가? 일본인 관광객만 해도 수백만이 올 것인데 무식한 자는 용감하다고 철거해 버렸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화청지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연못가에는 겨울인데도 양귀비가 반라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뜨거운 김이 솔솔 나는 온천수 구멍에 손을 대고 씻어 보는 데도 따로 돈을 받는다. 과연 중국인들의 발상답다. 하기야 기차 역장이 관광회사 사장을 겸하여 차표를 빼돌려 웃돈을 받고 팔고 대학이 기숙사에 외국인 관광객을 재우고 돈을 벌며 심지어는 군용기를 일반 관광객에게 비싼 값으로 전세 내어주기도 하는 나라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몇 년 전 만해도 외국인과 내국인의 입장료가 달랐다. 외국인이 몇 배로 비싼 요금을 물었다. 온 나라가 돈에 환장을 한 것 같다. 매끈한 물에 손을 씻으며 시간이 허락하면 온천욕도 즐기며 천 년 전의 역사 속에 빠져보고 싶으나 목욕은 커녕 정원 안에 조성해 놓은 소비림에도 못 가보고 돌아 나왔다. 가이드가 가는 길에 화상약 공장에 들른다고 하였다. 옥공장과 약공장, 차 파는 곳 이 세 코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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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약 공장)
북경의 그것보다 훨씬 규모도 작고 약간 엉성한 듯한 건물의 교실(?)에서 모여 앉아 강의를 받았다. 키가 큰 젊은이가 들어오더니 북한 사투리를 심하게 써서 반 밖에 알아들을 수 없도록 말을 하는데 이 공장이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장이라고 하였다. 가는 곳마다 자기 공장이 제일 유명하다고 하면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한쪽 구석에는 가스 버너에 굵은 쇠사슬이 붉게 달구어 지고 있었다. 잠시 후에 자기가 시범을 보이겠다고 하였다. 이교장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범을 보이기 전에 웅담이라는 것을 조금 씩 나누어주는 데 아주 써서 모두들 얼굴을 찡그렸다. 뉴질랜드에서 가져온 천연 혈청이라는 붉은 액체를 넣은 비이커에 피우고 난 담배 필터를 넣어 저으니 새까맣게 변하였다. 거기에 웅담 가루를 넣고 흔드니 원래의 핏빛이 돌아왔다. 눈속임인지 정말인지 반신반의 하는데 달군 쇠사슬을 손으로 훑는다. 지난번처럼 살 타는 노린내도 안 나고 화상 입은 손바닥도 보여주지 않고 처녀들이 달려들어 바로 상처에다가 흰 약을 발랐다. 내가 보기에는 순간적으로 속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5 분만에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새 살이 돋는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약을 1 년 전에 북경의 어느 가게에서 샀는데 몇 번 바르지 않고 이사할 때 어디에 버려져서 없앴다. 모두들 사라는 약을 사지 않고 앉았는데 이교장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고 사모님과 둘이서 웅담과 여러 가지 약을 사서 체면을 세웠다.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로 웃고 떠들면서 서안 시내로 향하였다. 오늘은 비림과 대안탑까지 보려고 했는데 시간의 차질이 생겨서 자은사 대안탑은 내일 구경하기로 하고 오늘은 비림만 둘러보기로 하였다. 비림은 서안 성내에 있는 데 남쪽성벽 괴성루 아래에 있다. 내일 돌아 볼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옆을 끼고 비림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기대를 한 사람은 집사람이었다. 서예를 시작한지도 20 년 가까이 되었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 강좌에 나가며 각종 전시회에 출품하여 입선 경험도 여러 번 있는지라 평소에 배운 안진경, 구양순, 저수량, 왕희지 등 명필들의 진품을 직접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탁본을 떠서 살 수 있다는 말에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는 모양이었다. 날아갈 듯이 처마 끝을 하늘로 향한 전통 중국식 기와집의 현판에 '비림' 두 글자가 뚜렷한데 碑林이라 쓰지 않고 비석 비자의 꼭지점이 없다. 중국 근대사 중 아편전쟁의 장본인 임칙서의 글씨이다. 임칙서는 벼슬이 떨어져 이곳을 지나며 관직을 그만 둔다는 뜻으로 꼭지를 떼어버리고 썼는데 그렇게 써도 글자는 틀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중에 다시 금의환향하여 꼭지를 붙일 예정이었는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하여 아직도 꼭지가 없는 채로 남아있다. 일단의 중국인 관광객이 우리보다 앞서 구경을 하고 있고 있을 뿐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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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
비림의 건물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공묘 건물의 기초 위에 새겨졌다. 공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동서양측에 문을 만들고 서문을 예문이라 하고 동문을 의로라고 한다. 남쪽으로 난 문은 공자만 드나드는 문으로 봉하고 새문(塞門)이라는 명칭만 가질 뿐 실제로 문은 아니다. 국가 급의 공묘는 둥근 연못을 가질 수 있지만 지방의 공묘는 반원의 연못만 가질 수 있다. 지방에서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공묘를 드나들며 이 반지(半池)에서 붓을 씻었다고 한다. 반지 북쪽의 석비방은 공묘 특유의 건물로 영성문이라고 하는데 최고관리만이 다닐 수 있고 일반관리는 서문을, 기타 수재들은 동문을 통하여 드나들었다. 영성문 북측 정자에는 중국에서 천하제일종이라고 일컫는 경운종이 있다. 에밀레종과 비슷하게 생긴 종 표면에는 학, 비천, 용, 봉황, 짐승의 머리, 구름 등이 조각되어 있었다. 종의 가운데 어름에는 당나라 예종의 어필로 도교와 종소리에 대한 찬미를 새겨놓았다. 자주 울리지는 않지만 우리의 보신각 종처럼 중국 CCTV에서 중계하는 새해의 종소리가 바로 이 종소리라고 한다. 비림은 말 그대로 온갖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많이 보관되어 있다. 총 1,095 개의 비석이 섰는데 온전한 것보다 금이 가고 깨어져 쇠붙이로 깊스를 하고 있는 중환자 비석이 더 많다. 역대 명필들의 글씨가 망라되어 있는데 당대에 만들어진 개성석경은 114 개의 비석에 61 만 자의 글자가 새겨져 교과서 구실을 한다고 한다. 당 현종이 직접 썼다는 직필 비석(효경비라고 부르는데 제 1 실의 입구에 서 있다. 효경에 대하여 주를 단 것이다)을 일부러 내려가 구경하고 1 실로 들어가 12 부의 경서인 주역, 시경, 논어, 효경, 상서, 주례, 의례, 예기, 춘추좌씨전, 춘추공양전 등이 늘어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난번 문화혁명때 4 인방의 명령으로 다 두들겨 부수고 깨었다니 그들의 무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그나마 남은 것을 정성을 다해 보존하는 것이 상식일진대 안진경, 구양순을 가리지 않고 마구 두들겨 탁본을 뜨고 있었다. 탁본 뜨는 솜씨는 좋으나 하루에도 수십 장씩 돈벌이를 위하여 몇 십 년을 계속해 왔다니! 오래지 않아 더 이상 탁본을 못하게 할 것이고 그리되면 진품도 구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한 장 사려고 값을 물으니 200 원이라고 하였다. 비석이 크고 여러 개라 작품 한 질을 온전히 사려면 우리 돈으로 기 십만 원이 있어야 했다. 그나마 오늘 작업을 마쳤다고 하면서 주문하면 내일 갖다 준다고 하였다. 일세를 풍미하던 명필들의 글씨는 후손들의 손에 시커멓게 더럽혀져 흘러내리는 먹물이 그들의 눈물을 보는 것 같았다. 사진 촬영을 말리지 않아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마음에 드는 작품 몇 장을 찍어 왔으나 마음이 아프다. 다음 전시실은 당나라 대가들의 작품이 줄지어 섰다. 이곳은 서예 공부하는 사람들이 글씨체의 모범으로 삼고자 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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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림에서 나오다가)
수많은 비석 사이에서 구양순의 황보탄비, 그의 아들 구양통의 도인법사비, 안진경의 다보탑비 등 대가들의 작품을 둘러보았으나 배운 바가 모자라고 감상할 능력이 부족하여 설명을 흘려듣고 다음 방으로 가니 이번에는 온갖 서체를 모은 비석들인데 예서체로 한나라의 조전비, 해서체로 당나라의 곽가비, 행서체로 당의 혜견선사비, 초서체로 당 회소의 천자문, 전서체로 송나라 전서목록편방자원등이 눈에 뜨이었다. 다음 방은 송나라와 청나라까지의 유명한 시문을 모은 곳이고 5 실과 6 실은 각종 사회 활동과 관련한 기록과 지방사를 새긴 비석과 청나라의 시가와 원, 명 대 서예대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다고 한다. 비림의 명물중의 하나는 조조에게 잡혀온 관우가 은밀히 유비에게 보내는 그림으로 된 글씨가 있다. 대나무를 그린 것처럼 보이나 그것을 글자로 새겨보면 비록 위나라에 매인 몸이나 지조는 변하지 않음을 나타낸 내용이다. 옛사람의 굳은 절개와 기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저녁시간이고 문닫을 때가 되어 찬찬히 구경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실제로 다 읽을 수도 없고 읽어 본다한들 그 뜻을 어찌 새기리) 끝까지 못 다보고 문을 나섰다. 비림의 입구 양쪽으로는 탁본을 떠서 족자로 책으로 만들어 파는 곳이 많은데 시간이 바빠서 제대로 흥정을 못하고 안진경의 해서와 왕희지의 서첩 두 권을 샀다. 버스에 올랐을 때는 어둑어둑 하였다. 새해를 맞아 네온 불이 찬란한 거리를 지나서 만두를 먹으러 어제 저녁 먹었던 승리반점으로 향했다. 중국에서는 만두를 교자라고 하는데 수교(水餃)라고 써 놓은 것은 글자대로 물만두를 가리킨다. 오늘은 많은 곳을 다녀 다소 어수선하고 피로하였으나 우리 기사는 충분히 쉬었는지 생생하다. 젊은이가 입이 무겁고 묵묵히 제 할 일을 잘하여 믿음직스럽다. 그런데 퇴근 시간인지 차가 많이 막혔다. 그 좁은 와중에도 티코 만한 택시들이 이리저리 큰 버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제 갈 길을 잘도 간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네 거리에서 차들이 뒤엉켰는데 우리 버스가 가운데에서 꼼짝을 못하게 되었다. 왼쪽에서 오던 시내버스가 계속 밀고 나와 우리 차와 거의 붙을 지경이 되어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데 뒷창문과 시내버스의 운전석 백미러가 부딪쳤다. 운전수가 내려와 욕을 해대며 우리를 나무란다. 우리 기사는 잠자코 듣고만 있는데 앞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정리를 하였다. 뒤쪽의 시내버스가 후진을 해주고 접촉한 차가 조금만 뒤로 빼면 아무 일 없이 통과할 수 있는데 이 심술쟁이는 오히려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뛰어가는 것을 모두 말려 큰 싸움은 나지 않았으나 일대가 한 동안 마비되었다. 온갖 실랑이 끝에 겨우 나오기는 하였지만 복잡한 거리 어디에도 공안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자세히 보면 가끔 가벼운 접촉사고를 일으켜 서로 다투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中國 西安 旅行記 23
(승리반점의 교자연)
승리반점에 도착하니 종업원들이 반갑게 맞아 준다. 엊저녁 술 팔던 아가씨가 또 와서 술을 사라고 하였다. 공으로 주는 술도 마다하고 내보내었다. 향채를 빼고 만든 만두들이 줄지어 나오는데 하나 씩만 나오므로 두 개를 집으면 한 사람이 먹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선 보통의 찐만두가 푸짐하게 나왔다. 몇 개씩 집어먹고 기다리니 채반이 여러 개 얹힌 찜통을 들고 와서 하나씩 번갈아 내 놓았다. 모양과 색깔이 가지가지였으나 맛은 비슷하였다. 서태후가 서안에 피난을 와서 머무는데 요리사에게 명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재료를 쓴 요리를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자기가 자는 방에 모기소리가 났다고 모기 쫓는 당번의 목을 날린 사람이라 요리사는 백방으로 궁리하다가 갖가지 모양의 만두를 만들어 바치고 가장 작은 진주 만두 몇 개를 먹었는가 물었다. 하나를 먹었다면 마음먹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고 둘을 먹었다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하는 등 약간의 아부와 궤변을 늘어놓아 태후의 마음을 풀리게 하여 목숨을 건진 이야기가 있고 나서 이 만두를 서태후 만두라고 하는데 오늘은 18 가지의 만두가 나온다고 하였다. 과연 하나 씩만 먹어도 18 개이니 자연히 배가 불러 더 먹지를 못하였다. 콩알만한 만두가 든 진주만두는 종업원이 직접 국자로 떠서 서빙을 하는데 그 작은 만두(분명히 만두 속이 있는 진짜 만두다)를 정확무비하게 골라서 하나 씩 나누어주었다. 맨 나중에 받은 우리 아이는 만두가 여러 개 들어 있다고 하였다. 만두 외에도 굵은 대추와 맛있는 땅콩, 쇠고기 요리 등이 곁들여 나와 이를 안주로 한스 맥주를 몇 병 비웠다. 식당 입구에서 손으로 짠 식탁보를 사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장사꾼들이 오지 않는 바람에 공치고 말았다. 저녁시간에는 야시장을 보려고 가이드에게 말했는데 기사에게 물어보니 큰 야시장은 거의 없어지고 작은 규모의 야시장이 있는데 거기라도 좋다면 가보자고 하였다. 모두들 찬성하여서 구경을 갔다. 가이드가 야시장에는 사기꾼도 많고 소매치기 등 도둑이 득실거리니 소지품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어느 골목에 차를 멈추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지저분할 뿐 아니라 주위가 어둡고 스산하여 사람들이 긴장하였다. 말이 통하는 가이드가 앞장서고 두세 명씩 짝을 지어 시장 통을 둘러보았다. 그 옛날 충무동 왕자극장에서 제일 극장 사이에 있던 야시장과 비슷하나 여기는 온통 먹는 것 천지였다. 간데라를 밝히고 좌판 위에 각종 야채를 놓고 그 위에 다시 여러 가지 재료를 얹어 놓았는데 오징어, 조개, 꽁치 등 해산물도 있고 무슨 고기인지 육류도 놓여있다. 우리가 지나니 자기 점포로 손님을 끌기 위하여 길가의 허름한 식당에서 소리를 치며 사람을 부른다. 활활 붙는 불기름으로 재료를 요리하는 사람도 있고 도마 위에서 반죽을 쳐대는 요리사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입고 있는 흰옷은 때에 절어 숯가마에서 꺼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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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풍경)
비닐을 덮어씌운 종이에 아무렇게나 써 갈긴 메뉴는 무슨 무슨 면 또는 탕이라 써 놓고 한 그릇에 3 원에서 5 원 정도의 값이 매겨져 있고 10 원을 넘는 것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길바닥은 그들이 조리하고 버린 설거지물과 음식찌꺼기로 질퍽거렸고
가게 안에서 술을 마시면서 구경나온 우리를 구경하는 험상궂은 얼굴의 중국인들도 기분이 나빠서 얼른 얼른 지나왔다. 구수한 연기가 나는 곳은 꼬치를 구워 파는 곳인데 팝콘 만한 작은 고기를 줄줄이 꿰고 석쇠 위에 누워있는 꼬치가 있는가 하면 주먹만한 양고기 도막 서너 개와 양파 당근 등을 겹겹이 끼운 커다란 것도 있다. 말이 통하고 좀 더 안전하다면 여기 죽치고 앉아서 접시 가득 썰어 놓은 안주로 시원한 맥주나 고량주 한 모금을 걸쳤으면 딱 좋겠으나 그러기에는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검은 가마 솥 속에서 김을 내 뿜고 있는 찐빵인지 만두인지 모를 커다란 밀가루 빵은 대접만 하였다. 길을 건너려는데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여나믄 살 먹은 사내아이가 조잡한 꽃을 2 원에 사라고 붙었다. 여기에 걸린 홍선생이 몇 번 거절을 하다가 동냥하는 셈치고 2 원을 주었더니 난데없이 5 원이라며 3 원을 더 내라고 하였다. 꽃을 돌려주어도 뭐라고 욕 비슷한 것을 하며 계속 따라와 툭툭 치는 것이었다. 화를 내고 쫓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비를 건다. 가이드가 와서 야단을 쳐도 막무가내로 생떼를 쓰는데 질겁을 한 홍선생이 눈을 부라리고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주위에는 불량해 보이는 녀석들이 몇 따라 붙었다. 위기를 느끼고 한데 모여 밝은 곳을 향하였다. 가이드 말이 돈을 꺼내려 지갑을 손에 쥐는 순간 털쳐서 달아난다고 하였다. 큰길에 가까워지자 슬그머니 사라졌다. 어린아이를 이용하여 나쁜 짓을 사주하는 어른들이 죽일 놈들이지만 남의 나라 치안까지 간섭할 계제가 못되므로 구경을 서둘러 마치고 차에 올랐다. 호텔로 돌아와 로비에 모였는데 한 쪽에서 바이올린 등 현악 4 중주단이 연주 중이었다. 의자에 앉아 한 곡 감상하고 박수를 보냈더니 답례를 한다. 우리 아이가 가서 악보를 보더니 고향의 봄 노래가 있다고 했다 한번 부탁해 보라고 하였더니 잠시 후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국의 호텔에서 현지인이 연주하는 우리 노래를 들으니 가슴이 뭉클하다. 옆에 섰던 다른 한국인들도 같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어서 '아리랑' 을 서비스하였다. 이 곡을 끝으로 철수하기에 총무에게 말하여 서둘러 약간의 팁을 챙겨 주었다. 방에 돌아와 오늘 산 물건을 정리하고 카메라와 필름 등 내일 사용할 것들을 가방에 다시 넣고 샤워를 하였다. 북경의 홀리데이 인 호텔은 투숙객에게 사우나를 무료로 제공하였는데 여기는 50 % 깎아서 중국 돈 50 원이라고 하였다. 우리 돈으로 8,000 원이 넘는다. 얼마나 시설이 좋은지 모르지만 대단히 비싸다. 감질 나고 조심스러운 샤워 대신 깨끗하고 뜨거운 물이 넘치는 욕조에 푹 담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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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은사 대안탑)
아침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보니 마지막날인 오늘도 날씨가 참 좋다. 가이드의 말로는 이런 청명한 날은 자주 없다고 하며 지난 번 팀 중에는 안개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여 발이 묶이고 갔다가 돌아온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차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았다. 배터리가 소모될 것을 감안하여 출발하기 전에 일부러 새 것을 구입하였는데 몇 통 찍지 않고 다 될 리가 없어 이리 저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구내 매점에 가서 배터리를 물으니 다행히 있기는 하나 값이 무척 비싸서 중국 돈 120 원을 주고 갈아 끼웠다. 우리 나라에서 사는 것과 거의 두 배 차이이다. 카메라는 이상없이 잘 돌아갔다. 돌아가서 무를 양으로 헌 배터리를 잘 챙겨 넣었다. 대안탑은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좁은 골목길을 돌아 얼마가지 않아 차에서 내렸다. 절 앞은 깨끗하고 널따란 광장이 있는데 현장법사의 상이 서 있었다. 당나라 고종이 먼저 죽은 그의 어머니 문덕황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하여 절을 짓고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자은사라 명명하였다. 괴상하게 배배 꼬인 가지가 특징인 용홰나무 두 그루 사이에 대자은사 금박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검은 향로가 있다. 사람들이 향로 옆에서 초와 향을 사서 꽂고 열심히 절을 한다. 우리도 20 원을 주고 붉은 초 몇 자루와 기다란 향 한 묶음을 사서 꽂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대웅전 문 앞에서 삼배를 올리었다. 대웅보전 뒤로 솟은 큰 탑이 서안시의 상징인 대안탑 인데 인도를 향해 가던 현장법사가 사막 한 가운데서 길을 잃었을 때 커다란 기러기 한 마리가 나타나서 길을 인도해 주었다고 한다. 부처님이 현신하여 자기를 도왔다고 생각하고 훗날 인도에서 돌아와 탑을 짓고 이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대안(大雁)탑이라고 불렀다 전해진다. 초기에는 5 층이었고 구운 기와와 석회 흙으로 만들어졌다. 그 후 7 층으로 재건하였다가 당대종 연간에 10 층으로 또다시 짓고 후일 지진으로 3 층이 무너져 내려 지금은 7 층탑이 64 m 높이로 서 있다. 탑 안에는 284 개의 계단이 있어 끝까지 올라 갈 수 있는데 층마다 창이 사방으로 나 있어 서안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1 층만 올라도 1 년을 더 살 수 있다는 속설도 있어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이곳도 따로 돈을 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입구 양쪽의 조그만 방에는 비석이 두 개 섰는데 하나는 당태종 이세민의 대당삼장성교서이고 다른 것은 당고종 이 치의 대당삼세성교서기 이다. 비문의 내용은 삼장법사의 공덕을 기린 것이고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 저수량의 대표작이다. 여기도 탁본을 떠서 파는데 진짜인가 의심을 하니 종이를 코에 들이대고 먹 냄새를 맡게 하였다. 그리고 탁본을 뒤집어 요철을 보여주었다. 두보가 대안탑에 올라 지은 시의 탁본 한 장을 100 원에 샀다. 그것도 250 원 내라고 하는 것을 깎고 또 깎아서 정찰제를 허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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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과 벼루)
탑 꼭대기까지 오르는 계단은 새로 만들어 반들반들 윤이 났지만 흥취를 반감시키었다. 제법 운동이 될 정도로 계단을 빙빙 돌아 오르는데 곳곳에 글씨를 걸어놓고 팔았다. 주로 전서와 행서체가 많았다. 어느 층에는 부처 열반상의 발바닥을 동판에 새겨 둔 것도 있고 현장이 불경을 지고 걷는 그림도 걸려 있었다. 조잡하게 만든 대안탑 모형도 유리상자에 넣어 두었는데 아니 둠만 못하였다. 이윽고 꼭대기에 올라 사방의 창을 통하여 서안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안개와 황사로 희미하나마 시원하게 뚫린 주작대로와 서대가, 북대가 거리에는 자동차가 꼬리를 물었다. 대웅전 옆에서 찬불가가 낭랑히 들리는데 아침에 듣는 소리가 좋아 우리의 사찰 내 상점처럼 생긴 곳에 들어가 필담과 손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여 지금 들리는 그 테이프를 20 원 주고 샀다. 구경을 마치고 내려와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절 옆의 기념품 가게는 절에서 직접 운영한다는데 여러 가지 물건 가운데에는 신도들이 시주한 물건들이 있었다. 절에서 돈으로 바꾸려고 내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집사람이 찾는 청묵은 작은 것 밖에 없고 다른 것은 눈에 들지 않았으나 사금석과 옥 등으로 도장을 새겨 파는 곳이 있었다. 가격표에는 280 원이 붙었으나 가이드가 흥정하여 120 원까지 내려갔다. 그걸 기어이 100 원으로 내리고 이름을 적어 주었다. 중년의 사내는 투박한 손으로 안경을 쓰더니 작은 붓에 붉은 물감을 찍어 내가 지적하는 체에 따라 금방 이름을 쓰고 손으로 새겨나간다. 도장을 거꾸로 새기는데 솜씨가 놀라웠다. 컴퓨터로 새기면 정교하지만 똑같은 것을 얼마든지 복사할 수 있으므로 손으로 새겨야 위조할 수 없다. 돌사자 조각 사금석에 큼직하게 새겨진 도장은 만족스러웠다. 우리 아이와 또 한 사람이 옥도장을 주문하는 사이 변선생은 큼직하고 고풍스런 벼루 하나를 들고 부부 둘이서 흥정을 하였다. 그 집에 있는 물건 중에서 가장 비싼 값인 6,800 원이 매겨져 있는데 사모님이 단돈 500 원을 던져주며 가지려하니 안된다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그 값에 샀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돌아와서 알아보니 벼루의 으뜸으로 치는 단계석 벼루 보다 한 급 위 일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은 묵은 것이라 그 값어치를 알 수 없고 그보다 작은 것이 인터넷에 올라 있는데 300 만원을 호가하더라는 것이다. 모두들 TV 의 진품명품에 한 번 들고 나가보라고 권하고 같은 물건을 놓고 시간이 조금 늦어 놓친 이교장 선생님은 입맛만 다시었다. 여하튼 변선생 내외는 이번 여행에서 단단히 한 몫을 잡았다. 저런 기회나 물건이 자주 있다면 중국에 한 달쯤 살다가도 좋을 뻔하였다. 버스는 멋진 기와 건물에 너르고 깨끗한 섬서성 역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 박물관은 규모로 보아서 중국에서 2 번째로 크며 중화문명의 발전과정과 휘황한 섬서성의 역사문화를 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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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성 역사 박물관)
내부에는 37 만 건의 유물을 전시했는데 기본진열, 전문진열, 임시진열 등으로 공개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기본 진열실만 둘러보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이 곳은 우리가 둘러 본 중국의 여러 곳 중에서 가장 현대화 된 곳이어서 곳곳에 컴퓨터가 놓이고 터치 스크린과 6 개국 번역기가 설치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말 안내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았다. 현관에는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젊은 공안 한 명이 멋적은 듯이 서 있었다. 우리 아이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니 수줍어하며 옆에 섰다.
제 1 전시실 앞에는 커다란 돌사자 한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1 실은 상고사 관련 유물을 전시해 둔 곳으로 서안 인근의 반파 유적지에서 나온 원인의 두개골 화석과 그들의 주거 및 의식주를 모아두었다. 주나라 전시실에는 청동기가 주로 전시되어 있는데 커다란 향로와 제기들이 눈에 띄었다. 진의 유물관에는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유물이 많았다. 진용을 비롯하여 찬란했던 당시의 문화재를 보고 당나라에 와서 문명이란 것에 눈을 뜬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역사관을 모두 수정하여야 했다. 그 때의 시원찮은 도구로 이렇게 정교하게 조각하고 만들어 붙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나라의 토용들은 일본 NHK 방송국이 제작하여 전세계에 널리 소개된 유명한 다큐멘터리 프로 '실크로드'에서 익히 보아왔던 것이었다. 장건이 얻어온 천마의 상과 낙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예인들의 생생한 모습은 시공을 뛰어넘어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을 전해 주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여러 가지 유물과 당대의 능묘에서 출토된 벽화 속의 신라인은 지금이라도 입을 열 것같이 보였다. 수많은 도자기와 무기류 장신구를 제외하더라도 진열장을 가득 채운 유물들은 어느 하나 국보급으로 손색이 없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가며 가져간 남경 박물관의 유물만도 20 만 점이 넘어 해 마다 바꾸어 전시를 한다는데 도대체 이 나라는 얼마나 광대하고 그 사람들이 이어온 역사 속의 문화재는 얼마 만큼인지 알 수가 없다. 놀라움과 부러움 속에서 박물관을 주마간산으로 돌아보는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구경을 마치고
박물관 로비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비연답마의 힘찬 모양이 마음에 끌려 중간 것 하나를 놓고 흥정을 하였다. 명색이 국가 급 대형 박물관이라면 피곤하지 않게 받을 적정한 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