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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했듯이 우리도 새 사람이 되자.고후5:17 창32:27-28
새해를 맞이할 때면 새해에는 복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란다고 새해의 덕담을 전하였는데 코로나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지나면서부터는 이런 인사도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로 시작된 지난해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 혼란했던 한 해였고 전 세계적으로 8300만 명에 가까운 확진자와 183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으며 이 코로나 감염은 현재도 더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K-방역을 자랑했던 우리나라도 3차 대유행의 시기를 맞으면서 매일 확진자수가 1000명을 넘어가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코로나의 위기가 더 큰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말부터는 더 센놈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국토부장관을 하면서 임대차3법을 강행하면서 집값을 폭등시킨 김현미 다음 변창흠이 아니고 검찰개혁을 완수하겠다는 법무부장관 추미애 다음 박범계 이야기가 아니라 다름아닌 영국발 변종 코로나라는 것입니다. 변종코로나는 감염력이 70%나 높다고 하니 이 놈이 아니더라도 방역의 댐이 허물어질 위기인데 이제 변이 팬데믹을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새해들어 코로나 백신도 나왔겠다 곧 잠잠해지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 학생들이 학교도 가고 교회도 비대면 예배하라는 소리 듣지도 않게 된다는 생각이 괜한 생각이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올해 새해인사는 새해 복많이 받으시라는 말은 이제 코로나 시대에는 어울지지 않는 인사로 비쳐지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짜 복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부끄럼 없이 살아간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과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 봅니다.
지난 한해는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하면서 어디 마음대로 다니지도 못하였던 한 해를 보내고 나니 시간은 흘러 어김없이 2021년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새로운 한 해, 역사의 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교회와 가정에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들이 가장 힘들어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호6:1)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그분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리라의 말씀을 위로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재앙도 크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경륜하에서 일어났다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코로나 백신이 개발되었다는 희망의 소식이 들려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새벽의 여명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방금 위에서 말했듯이 더 센 변종코로나바이러스가 다가오면 백신을 맞는다 하더라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 작년과 같은 역병이 말세가 되면 온다는 것이라고 누가복음 21장11절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분은 우리 주 예수님 이외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21년 새해는 특별히 그 어느 때보다도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과 치유함이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련의 사태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하루하루를 여시는 주님의 계획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시며, 치셨으나 싸매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아름다운 회복의 열매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해는 방역이라는 이유로 주일예배가 중지되고 비대면예배로 각자 집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예배를 드렸는데 새해에는 우선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예배는 교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예배 회복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비대면 예배라는 말에 대해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제 새해를 맞이하였으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들은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되풀이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로마서에 있는 말씀처럼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오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생활로 우리들 일상생활이 변하였으면 합니다. 우리말에는 변화를 좋아하지 않을 때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은 누구나 새것을 좋아합니다. 새 옷 입을 좋아하고 새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좋아할지라도 성도들의 소원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해가 되었어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고치지 않고서는 새롭게 변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새사람이 되고자 하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야 그의 인생이 새로워 졌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 표적을 보니 랍비인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믿는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시신을 내려서 무덤에 장사지낼 때 함께 했던 사람이 바로 니고네모였다고 요19:39에 보니 또 처음에 예수님께 밤에 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오니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율법에 철저한 바리새인이라도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새해 첫주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2021년에는 우리 모두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기를 진실로 축원합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왔던 그들을 잠시 뒤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온 40년 세월은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만을 일삼던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기사와 이적을 베푸셔서 그 백성들은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감사할 줄 몰랐고 조그만 일에도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민14:2-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주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지나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내뱉은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은 요단강 건너기전 여기 싯딤 땅에 묻어 버리고 이제 정결한 심령이 되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거의 옛 구습을 그대로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역시 똑같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주 배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강 물속에 있던 돌들을 취하여 길갈 땅에 기념비를 세우게 하였습니다.마치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2021년의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모든 불신앙적인 요소를 깨긋이 청산하고 다시는 지난날의 죄악과 잘못된 것들을 되풀이하여서는 안 되겠다고 각오하고 마음속으로 요단강돌을 갖다 마음안에 탑을 세워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해가 되었으니 오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생활로, 변화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새해만 맞이한다고 저절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 그들은 그렇게도 꿈에도 그리던 하나님이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도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강대한 일곱 족속들이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멸절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그리 쉽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했을때만 가나안 땅을 취할 수 있는 것인데 그러기 전에 주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신 그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잊지 않도록 하며 또 그 역사적인 사실을 후대의 자손들에게 전하고자 요단강 물속에 있던 돌들을 꺼내서 돌 기념탑을 세운 것처럼, 우리들도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늘 감사하는 기념비를 마음속에 세우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쉬운 말로 예배라고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 예배를 우리의 생활에 가장 귀중한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예배 시간은 목숨 걸고 지켜야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런 말씀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슥4:6) 만군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예배를 드리기 위해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을 모시고 마귀들의 권세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며 언제나 불만을 터뜨리는 속성이 마귀의 속성이라면 그 반대로만 마귀에게 대적하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거짓에 반대는 진실이므로 우리들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손해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앞에서 내가 진실을 말하면 마귀는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믿는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 할 때 마귀는 힘 한번 못쓰고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우리 앞에는 감사할 일보다 불평할 일들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마귀는 우리들 앞에서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올해에는 어떤 환난과 고통이 오더라도 진실함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큰 축복을 받는 지름길과 같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잠시 지나온 한해를 생각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삶의 무거운 중압감으로 힘들었을 때도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소망을 주셨으며 교회와 가족들을 눈동자처럼 지켜 주셔서 큰 사고 없게 지난 한 해를 잘 마칠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드립시다.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 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나를 공격해 준 사람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면서 나를 더 이해심 많은 사람으로 만드셨던 것에 감사합니다.
때때로 가시때문에 한숨과 눈물도 흘렸지만 그것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도 배웠습니다. 실패를 통해 겸손을 배운 것에도 감사합니다. 금년 한 해에도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소서.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모든 것이 풍족한 이 시대에 태어난 것과, 무엇보다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징조가 우리 시대에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깜짝 깜짝 놀랐던 순간을 기억하면서도 감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지 말게 하시고 돈이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항상 있는 것으로 족하게 하는 마음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고 이웃 사랑과 영혼구원하는 일에 행복한 삶이 이어지게 하시며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소서. 이제 감사기도를 마쳤으면 새해의 다짐을 한 번 해봅니다.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올해는 좀 더 나아지겠지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하는데 특히 올해는 신축년 소띠해로 소처럼 부지런히 일하여 주인에게 충성하는 소의 성실함을 생각하여 우리 모두가 주인되신 예수님에게 충성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한해가 될 것을 기도합니다.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감사하여야 합니다. 파수군이 성을 지키는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라고 하였듯이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셔야만 우리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애국가에 있는대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라고 하였으니 올해는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장차 한국교회가 열방을 향해 빛을 발하는 나라가 될 수도 있도록 신앙을 가져야 하는데 새해첫날 새벽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태양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런 모습이 거의 없었는데 이제는 먹고 살만하니까 어느새 새해아침에는 이전보다 더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산으로 가서 붉게 떠 올라오는 해를 보면서 태양에게 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니 하나님께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다행히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새해아침 해돋이를 보러 가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해돋이 구경도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코로나가 고맙기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해는 수소기체가 불타고 있는 무생물로서 전혀 인간에게 복을 줄 수도 없는 것임에도 새해 첫날에는 떠오르는 해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 신으로 착각하고 해돋이를 보기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동해안이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 어느 새 새해의 풍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일출구경하는 것 갖고 뭐라고 말할 필요야 없지만 새해 일출을 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소원을 빈다는 것이야 말로 현대판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연중 어느 날이든지 일출구경은 훌륭한 장관을 이루지만 특별히 새해 아침에 일출모습을 보면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간절한 마음으로 한해의 소원을 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태양신을 향한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전도서에는 떠오르는 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다시 떠오르고 지난해 떴던 해가 새해 아침에 다시 떠오르는데 무엇을 가지고 새것이라고 하느냐? 해아래서는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그러게 야단법석 떨지만 전혀 새것이 아니라 어제 있었던 그대로라고 하면서 이러한 것이 다 헛된 일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었다고 새옷을 입었다고 새로와 진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새롭게 변해야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해야 새롭게 변해질 수 있냐고요?
1.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된 그리스도인들
인류의 조상인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이 죄가 인간들 사이에 왕 노릇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사이에는 죄가 가로막고 있어서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죄를 제거하고 화목하게 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화목제물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 인간들에게는 아무리 제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앞에 제사를 드린다 하여도 그들에게는 종의 신분밖에 다른 호칭이 없습니다. 여러분 종과 자녀와의 신분차이를 아십니까? 자녀는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진 후사이지만 종은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수백억의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서 주님의 보좌가까이에 그분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탄생한 피조물인 것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아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 간다면 이는 분명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십자가위에서 돌아가시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며 새롭게 된 자들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나 그럼에도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이 이제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제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로 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신 방향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결단을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그 어떤 다른 무엇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자들이 바로 주 안에서 거듭난 자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자들입니다.
(1) 육체대로 살지 아니하려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데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당연히 세속적인 삶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더구나 육체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상풍조를 따라가지 않고 세속의 행동 양식으로 생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는 세상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썩어질 재물이나 명예나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기준에 따라 살아갔으나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기에 오직 하나님 나라의 양식대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탐욕을 부리지 않고 이기적인 욕심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깊은 밑바닥에는 개인적인 탐심이 깔려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치에는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육체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대로 살아갈 때 그곳에는 항상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역사가 펼쳐집니다.
(2) 주님을 따라 생활하는 자입니다.
새 사람이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는 자인 것입니다. 인생은 육으로 났으니 어디까지나 육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악으로 죽어버린 영혼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듯이 악을 행하는데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렘13:23). 육신은 제 아무리 애써도 육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따라가려면 갈라디아서에 나온 말씀대로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에 대해 성경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으로 사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43:18) 너희는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엡4:22-24) 22 이전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릴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23 너희의 생각의 영속에서 새롭게 되라 24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가르침을 받았으니고 하였습니다.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은 육욕에 속한 사람이나 썩어질 수밖에 없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을 벗어 버리면 새 사람이 됩니다.
너희는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은 마귀의 전매특권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하면 우선은 거짓말부터 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에 호소하여 판결받을 때를 보면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양심적인 판사는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를 판결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2020년 12월24일 문재인 대통령이 마음에 빚을 졌다고 한 전 법무부장관 조국의 부인 정경심 교수에 대한 판결문이 낭독되었다. 정경심은 총 15개 죄목으로 기소되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동양대 표창장 위조 건만큼은 아마도 전 국민이 다 아는 이슈일 것이다. 2019년 9월 4일 중앙일보 1면엔 〈조국 딸 받은 ‘동양대 총장상’…총장은 “준 적 없다”〉는 제목의 단독 기사가 실렸다. 당시 최성해 동양대 총장의 발언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딸이 받았다는 표창장이 ‘부모 찬스’를 쓴 것을 떠나 위조 의혹으로 번지는 계기가 됐다. 동양대 총장 최성해의 이러한 진술은 일관적이고 구체적임 증언을 하였지만 이 주장이 1심에서 인정받기까지 무려 1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동양대 총장 명의의 표창장 위조했다고 한 것에 대한 판결문을 낭독하는데 1년이 걸렸다는 것은 상장을 위조한 PC가 정경심 집에 있었느냐? 아니면 동양대학교에 있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피고인은 2013. 3.경 조민이 차의대 의전원의 우선선발에 지원할 당시 자기소개서에 동양대 영어영재교육센터에서 튜터로 활동한 것처럼 기재하고, 동양대 어학교육원장/영어영재교육센터장 명의의 허위 봉사활동 확인서 등을 첨부자료로 제출하였음에도 조민이 합격하지 못하자, 피고인 정경심은 아들 조민과 공모하여, 딸 조민의 서울대 의전원의 지원서류 제출 전인 2013. 6. 16. 서울 서초구 효령로34길 79, 00동 000호에 있는 자택에서 동양대총장의 수장경력을 제출하였는데 이 상장은 아들 조원에 대한 동양대 총장 명의의 상장(이하 ‘조원 상장’이라 한다)을 스캔한 후, 이미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조원 상장의 스캔 이미지를 전체 캡처한 다음 이를 워드문서에 삽입하고, 그 중 “동양대학교 총장 최성해 (직인)” 부분을 캡처 프로그램으로 오려내는 방법으로 ‘총장님 직인.jpg' 이미지 파일을 만들었다. 쉽게 얘기하면, 조민의 동생인 조원이 예전에 동양대로부터 받은 표창장을 가지고 조민의 표창장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표창장 위조 여부는 소위 ‘원본’을 검증하면 알 수 있지만 정경심은 표창장 원본을 분실했다며 끝내 이를 제시하지 않았다. 위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동양대 총장 직인 파일은 예상과 달리 동양대 강사 휴게실에 놓여 있던 데스크톱 PC에서 발견됐다. 일단 검사와 변호인 측의 주장에 따르면 데스크톱 PC의 설치 장소는 동양대 아니면 정 교수 집이다검찰이 지목한 표창장 위조일은 조 전 장관 딸이 서울대 의학전문대학원 지원을 앞둔 2013년 6월 16일이다. PC에서 표창장 관련 파일을 열고 저장한 시간대는 당일 오후 2~5시로 나왔다. 판결문을 보면 재판부는 이 PC가 2012년 2월~2014년 4월 동양대에서 쓰인 적이 없고 정 교수 자택에서 사용한 것으로 판단했다.이에 정 교수 측은 동양대 강사휴게실 천장과 1층 복도 천장에 설치된 공유기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2008년 제작된 해당 데스크톱 PC엔 무선 인터넷을 잡을 수 있는 랜카드가 없다. USB 방식의 무선랜카드를 PC에 꽂은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휴게실이나 복도 천장 공유기에서 선을 빼서 데스크톱 PC에 연결하는 것이다. 2년 이상 그렇게 쓰는 게 가능할까. 더구나 그 공유기가 2012~2014년 당시 천장에 설치됐는지를 증명할 근거도 제시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해당 PC에선 조 전 장관 가족들이 사용한 흔적이 여럿 발견됐다. 조 전 장관이 쓴 것으로 보이는 파일과 아들 이름의 폴더도 있었다. 토요일 새벽 시간 접속 기록, 마비노기 게임 설치 등을 보면 대학교 공용 PC로 썼다고 보기 어려운 근거가 너무 많다. 판결문을 보면 정 교수 측이 데스크톱 PC와 관련해 주장한 핵심 내용 중 사실로 입증된 것이 거의 없다. 정교수가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법정구속되자 조 전 장관을 십자가를 진 예수에 비유하는 글도 올라왔다. 1심 재판부를 탄핵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 숫자만 40만 명을 넘었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이념에 빠진 자들이라고 봐야 될 것 같은데 새해엔 부디 상식과 진실이 통하는 항체가 복원되길 기대한다.
내가 조국부인 정경심 이야기를 한 것은 이나라의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온 국민이 다 아는 것을 궤변과 거짓말로 자신과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조국은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단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기부인 정경심이 70억원 정도를 가족펀드에 투자했다는 것도 부인이 하는 것이니 자신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거짓말하는 그들 부부의 모습이나 자식들이나 단지 밥한끼 굶는 것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경우와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짓말은 마귀의 전유물인데 마귀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속에는 거짓말을 하는 DNA가 사람에 따라 많고 적을 뿐이지 거짓말 안하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하지만 조국부부같은 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려면 남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거짓말을 해선 안된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살전 5장 22절에는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내 속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을 때만 가능하고 주님과 연합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을 때만이 거짓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새 사람으로 다시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사람이란 이 거짓 시기 탐심 등을 청산하지 않고는 새것을 영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새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나 미지근한 부분이 있다면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것부터 완전히 제거하고서 새 사람답게 살아가길 바랍니다.
(3) 예수님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가능하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든지 새롭게 되고자 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단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에“라는 말은 ”연합, 교제, 연결“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며 그리스도와 날마다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매순간 교제를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말합니다(엡4:24). 새롭게 다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은 비록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 아래 살지만 결코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하지는 않습니다(롬6:2).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데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써 그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갈5:24-25). 우리는 마귀에게 속아서 우리가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서 종노릇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즉 성령으로써 거듭난 사람은 마귀의 미혹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4) 아들의 신분으로 새롭게 된다.
바울은 예수 믿기 이전 우리의 상태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으로써 신분에 정말로 놀라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갈4:6-7)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이런 말씀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인간은 아무리 충성을 하여도 아들이 될 수 없었습니다.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종이었지 하나님의 아들 신분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신분이 어떻한지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정도가 아니라 영생을 누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자녀로서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생명력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으시고 그들을 향하여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르셨습니다(17).
따라서 그들은 이제 죽음을 향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거룩한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새롭게 부여하셨습니다(18).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로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고 했듯이 이후부터는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롬6:13)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삶의 변화이므로 이전에는 나를 위해 살던 그 옛 사람의 삶은 죽었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새로운 삶이 부여된 것입니다(롬14:8)
여러분 물은 물의 수준 이상 더 못 올라갑니다. 영이 죽은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영이 죽은 아기를 낳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자는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 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마치 모래도 조개 안에 있으면 진주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모래가 진주가 되기 위해서는 조갯살이 얼마나 고통을 참았느냐 처럼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으로 오는 모든 풍속을 참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새 사람된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새 사람된 두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2.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였던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적인 정욕에 빠지고 재물에 빠지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새롭게 변할 수 없지만 다음의 두 사람을 보면 정말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했던 사람들을 만나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다섯 번째나 바꾸면서 사는 창녀였으나 어느 날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자 사마리아 성에 예수님을 최초로 전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자가 저렇게 새롭게 변할 수 있을까? 사마리아성내 사람들이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예수님앞에 나오게 되었는데 정말 그녀가 변했던 모습은 그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말씀을 믿었던 믿음만이 그녀를 새롭게 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녀로 인하여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시면서 하늘나라를 그들에게 전하여 주는 놀라운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만났던 여리고 성에 살던 키가 작은 세리장이 삭개오는 어느 날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보려고 뽕나무 위에 올라갔을 때 예수는 삭개오를 보시고 내려오라 하시며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평안과 위로, 삶의 변화와 즐거움을 체험했던 즉시 그는 토색(억지로 강탈)한 물건들을 돌려주며 가난한 자를 돌보고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종족들에게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오직 재물에만 눈이 어두웠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렇게 탐리하던 모리배였던 세리 삭개오는 자기의 토색한 죄를 회개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선한 이웃으로 변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 요1:12-13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후사를 상속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으니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큰 축복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생명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전의 우리가 아님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피조물로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장은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한 자들이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하였으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이상 복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3.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다
유대인을 가리켜 이스라엘인 이라는 것은 그들 조상 야곱으로부터 나온 이름이다.
(창32:27-28) 27 그가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하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하니라.
야곱이란 이름은 다분히 교활하고 남을 속이는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추구했던 삶을 살았던 이름이었습니다. 사실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은 그 때가지 자기 꾀와 속임수, 권모술수가 능한 사람으로서 자기 힘을 의지하고 육신의 정욕과 욕심에 붙들려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신의 본능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은 굶주린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챙길 생각을 했으며, 또한 어머니의 거짓된 제안에 따라 형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 눈이 희미한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다가 도주한 사건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31:17-21) 17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 그가 모은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 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 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이에 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공격하려 하지만 야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외삼촌 라반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허탈하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속임수가 나타난 이유는 불신과 정욕이 그를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위협은 피했지만 야곱은 다시 라반보다 더 무서운 형 에서를 만나야 하는 상황에 처해집니다. 끊임없는 위기가 연속으로 야곱에게 몰려 오고 있지만 그는 주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꾀를 내어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창32:3-8) 3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 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 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에서가 올 것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지만 마음만은 역시 불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이십년 처가살이를 벗어난 큰 부자가 되어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형 에서와의 앙금이 해결되어야만 고향에서 정착해 살 수 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먼저 종들을 보내었는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형 에서가 400명의 남자들과 함께 자기에게 온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창32:13-20) 13 그렇지만 이튿날 야곱은 자기의 소유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였다. 14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15 젖먹이는 낙타들과 그 딸린 새끼들 30마리, 암소 40마리, 수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수나귀 10마리를 취하였다. 16 그의 종들의 손에 각각 가축 떼를 나눠주었다. 그의 종들에게 말했다. 내 앞서 건너가라 그리고 가축 떼와 가축 떼 사이에 너희는 간격을 두라. 17 야곱은 맨 앞서 가는 종에게 이렇게 명했다. 에서가 묻기를 너는 누구의 사람이며 네가 어디로 가며 네 앞에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너는 말해라 18 이것들은 당신의 종 야곱의 것인데 내 주 에서에게 보내어진 예물입니다. 그도 우리 뒤에 오고 있습니다. 19 야곱은 두 번째와 가축 떼, 세 번째와 가축 떼, 뒤에 가는 모든 자에게 에서를 만나거든 동일하게 말하라고 명했다. 20 또 당신의 종 야곱이 바로 우리 뒤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도록 했다. 야곱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이 예물로 형 에서의 얼굴을 달래고 나서 그의 얼굴을 보면 아마 그가 자신을 받아 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야곱은 물질을 가지고 형 에서의 적대감을 달래기를 원했지만 마음은 불안하다.
(창32:22-24) 22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23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만 홀로 남았더니 야곱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예물을 앞서 보낸 후 야곱은 그 진에서 그 날 밤중에 일어나 그의 두 아내와 그의 두 여종과 그의 11명의 아이들을 취하고 얍복나루를 다 건너게 한 다음 이제 홀로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있는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삶 속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이요 가장 외로운 때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이 완전하게 거품이 될 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특히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장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얍복 나루에 홀로 남은 야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이었다. 야곱은 수호천사들을 보았던 마하나임에서 밤을 새워 기도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께 기도한다. 지난 이십년간 베푸신 은혜에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처자식을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주실 것을 밤새워 기도한다. 마하나임은 얍복에서 약 25마일 떨어져 있다. 그 밤은 야곱에게 잠을 못이루는 밤이었다.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수 밖에 없는 밤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니 환도뼈가 위골되었다. 그래도 야곱은 그 사람을 놓지 않으니 그가 말하기를 이제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끔 놓으라 하였을 때 야곱이 말하기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때 이 사람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가 야곱이라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창32:28) .
우리는 창세기 32장에서 위대한 영적 거인으로 바뀌는 야곱을 보게 되는데 그 사건은 야곱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야곱의 씨름은 하나님과 다투는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살아왔던 야곱은 완전한 파산의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겨루고 있습니다. (창32:30)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기다렸으나 결국 야곱은 그 어려움들을 이기고 승리하게 됨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다. 야곱의 철저히 회개하였다는 것은 그가 해가 떠올라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었다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환도뼈의 근육은 인간의 신체 중에서 가장 강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삶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을 깨뜨리십니다. 환도뼈를 쳐서 위골된 것은 야곱을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누구와도 겨루어 이겨 왔습니다.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와 형을 넘어뜨리고 복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받고, 외삼촌 라반도 넘어뜨리고 모든 복을 뺏는 자였습니다. 이제 씨름 대상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먼저 씨름을 걸으면서 밤새도록 씨름하였으나 야곱이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야곱이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25). 환도뼈가 위골되므로 절뚝거렸습니다. 이때 야곱은 에서에게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죽게 생겨서 거기서 회개하고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매달렸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으나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새 이름인 이스라엘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이제 새로운 피조물인 이스라엘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승리하였다는 것으로 하나님이 다스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얍복강 나룻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간 야곱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믿음의 승리자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얍복강변의 야곱과 같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철저히 회개하고, 결사적으로 기도하여 옛사람을 깨뜨리어야만 새로운 피조물인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 역시 어쩌면 얍복 나루 사건 이전의 야곱일지도 모릅니다. 정녕 우리가 욕심을 따라 달려온 인생이 허물어지는 것을 볼 때, 또는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을 겪을 때,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한 야곱이라면 바로 그때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에 사기꾼 야곱을 새 사람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최고의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야곱이 있는데 성경은 이 존재를 옛사람이라고 부르고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불신앙의 존재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쓴뿌리라고도 부릅니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본능적으로 구하는 것이 ‘야곱’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길 원하는 존재가 야곱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자신의 꾀와 힘을 의지하며 살던 그 자리에서 나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야곱의 태생적인 겉사람은 2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특별히 다가오셔서 야곱의 아집을 깨뜨리시려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환도뼈의 탈골을 통하여서 절뚝거리는 모습이 된 야곱을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자로 바뀌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새이름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존재와 행태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명을 새롭게 하사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은혜임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내 속에 남아 있는 야곱같은 쓴뿌리를 믿음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뽑아내야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새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혜의 환경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성도의 삶
(1) 성도는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시146:1-2) 1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 오 내 혼아 주를 찬양하라. 2 내가 사는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내가 생존하는 동안에 노래로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인은 주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내 영혼아 찬양하라하며 자기 스스로에게 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생전에 주를 찬양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시인의 찬양은 하나님을 입으로만 하는 찬양이 아니라 그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다 포함한 전인적인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찬양을 그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계속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일생을 다하도록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생의 목적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에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새 일을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할 것임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자기의 평생에 해야 할 일로 삼는 사람은 이전 일에 얽매어 살지 않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얽매인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2) 성도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시146:3-5) 3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말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4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주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인은 이 시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언급하며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무한하고 전능자이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시인이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아무리 능력이 많은 통치자라 할지라도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유한하고 무능한 존재로서 우리를 구원해 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고(6), 진실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며(6),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고, 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며(7)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을 굽게 하시는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9).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주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행복하다(5) 라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을 나의 평생에 해야 할 일로 삼는 사람은 그 생각과 계획이 결코 소멸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는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나의 평생에 해야 할 일 특별히 금년 한해 동안에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성도라고 불리워지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두가지 일을 매일 매일 하겠다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바울이 권면합니다. (갈5:16-17, 24-2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오늘 주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비밀은 인생의 진정한 문제는 야곱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로 살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순간마다 내가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의식하며 확인하는 것이 믿음의 씨름입니다.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붙드는 기도의 씨름을 통해 자신을 죽이고 주님이 살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씨름입니다. 이 씨름을 하면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씨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기 바랍니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바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사건의 실체입니다. 그곳에서는 한 개인의 죽음의 상황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원한 멸망의 상황이 십자가 앞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로움과 두려움과 답답함 가운데 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인데 야곱으로 살아가면서 죄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망하게 하더라도 구원하여 성도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기 바랍니다. 브니엘의 주 예수님께 진심으로 삶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모든 삶이 순간마다 이 귀한 복음의 비밀을 알아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의 삶이 되시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