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66〉무심과 분별심
차별않는 자가 진실로 깨달은 사람
분별심 내니 스스로 장애 일으켜
남녀 등 어떤 것에도 ‘무심’해야
<금강경> 서두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한다.
“보리심을 낸 보살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應云何住)? 그리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云何降伏其心)?”
부처님의 답변은 간단하다.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했다는 상(相, 집착심·분별심·관념)을 갖지 말라. 보살이 상을 갖고 있으면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보시를 하되 관념을 갖지 말고 무주상보시를 할지니라.”
<금강경>과 같은 반야부 경전인 <유마경>에도 분별심에 관한 내용이 있다. 회중에 한 천녀가 보살들과 성문 제자들에게 하늘 꽃을 뿌렸다. 그런데 꽃잎이 보살들에게는 붙지 않는데, 성문 제자들에게만 꽃잎이 붙었다. 스님들이 아무리 꽃잎을 떼려고 해도 떼어지지 않았다. 이때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존자님, 왜 굳이 꽃잎을 떼려고 하십니까?”
“비구 옷에 꽃잎이 붙어 있는 것은 법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꽃잎은 분별이 없건만, 존자님께서 왜 그렇게 분별심을 내십니까? 출가자가 분별심을 내는 것은 여법(如法)한 행위가 아닙니다. 꽃잎이 붙지 않은 저 보살들은 분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꽃잎이 붙지 않은 겁니다. 마치 사람들이 두려운 생각을 품으면 귀신들이 그 틈에 장난치는 것처럼, 스님네들이 생사(生死)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육경인 색·성·향·미·촉 경계들이 틈을 내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사람에게는 오욕이 스며들지 않는 법입니다. 번뇌나 두려움이 없는 이에게는 꽃잎이 붙지 않습니다.”
집착하고, 분별심을 내니 자유롭지 못한 마음에 스스로 장애를 일으킴이요, 그 틀(Frame)에서 묶여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요지는 분별심이나 집착심이 문제라는 것이다.
당대 선사 대주혜해는 <돈오요문>에서 “선악개능분별(善惡皆能分別) 어중무착(於中無着)”이라고 하였다. 즉 선(善)한 것은 선한대로 악(惡)한 것은 악한 그대로 분별은 하되, ‘선하다는 것’, ‘악하다는 것’에 대한 분별심을 내거나 의식하지 말라는 뜻이다.
옳고 그름, 남자·여자, 청정·더러움 등 이분법을 스스로 만들어내어 분별하고, 스스로의 상자 안에 갇혀있다. 이 분별심은 <금강경>으로 말하면 소주심(所住心)에 해당하며, 반대인 무소주(無所住)는 선(禪)에서 무심(無心)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황벽희운은 <전심법요>에서 무심을 갠지스강의 모래에 비유해 이렇게 말했다.
“모래는 부처님이나 보살 등 성인이 지나갈지라도 기뻐하지 않는다. 반대로 소·양·벌레가 밟고 지나가도 싫다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또한 진귀한 보배와 향료가 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모래는 탐내지 않으며 똥오줌의 악취에도 모래는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무심이다. 분별심을 여의어 중생이든 부처님이든 여자이든 남자이든 어떤 것에도 차별하지 않는 무심한 자가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다.”
소납은 조계종 승적을 가진 지 30년이 넘었다. 직분은 승려 신분이 아닌 비구니이다. 경전이나 어록을 볼 때는 차별받지 않는, 분별심의 대상이 아닌 자유인이라는 점을 만끽한다. ‘부처님의 진리를 만난 것’에 행복감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오면 종단에서는 아웃사이더라는 점이다. 모친은 딸이라도 귀한 자식 낳았다고 미역국을 먹었을 터인데….
조계종 총무원이 ‘종헌 및 선거법 개정’을 내며 비구니 참종권 문제가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다. 비구니도 종단의 아웃사이더가 아닌 인사이더가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경허 선사가 만년에 읊으신 ‘옳고 그름을 논하지 말라(莫論是非)’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 모두가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 누가 너고, 누가 나이더냐.”.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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