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입멸 자세, 장소, 그리고 최후의 가르침
안양규
▒ 목 차 ▒
Ⅰ. 서언 ▲ 위로
붓다의 입멸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가 부파불교 논사들에겐 주요한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일견 이러한 문제는 논의의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후대의 불교인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다라고 상정하고 그 의미를 나름대로 추구한 것이다. 붓다의 一擧手 一投足(일거수 일투족)은 단순히 지나칠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라고 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지니고 있었던 불타관(佛陀觀)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셈이다.
본고는 붓다의 최후의 순간 중 쿠시나라(Kusinara) 의 살라(sala) 쌍수 아래에 누운 시점에서 최후의 가르침을 남기는 순간까지 일어난 일들 중 논사들에게 주요하게 논의되었던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살라 쌍수 밑에 누운 후 입멸 순간까지의 붓다의 행적을 전하는 [열반경] 제본이 한결같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시자 아난다(ananda)의 공덕에 대한 칭송, 붓다의 입멸 장소에 관한 문답, 붓다의 장례식에 관한 문답, 말라조(Mallas) 사람들의 붓다 친견, 최후의 제자의 귀의, 승단과 관련된 가르침, 입멸 직전의 최후 가르침등이 그것이다. 순서에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것들은 모든 [열반경] 제본에 나타나고 있다.
이상의 붓다의 최후 행적 중에서 본고에선 붓다의 입멸 자세및 장소, 그리고 최후의 말씀을 중심으로 논사들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제를 살핌으로써 그 당시 불교인들이 붓다에 관하여 어떠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논구할 수 있다.
Ⅱ. 붓다의 입멸자세 ▲ 위로
1. [열반경] 제본의 묘사
[열반경] 제본에 의하면 붓다는 파바(pava)에서 마지막 공양을 마친 후 히란야바티(Hirannavati) 강을 건너 말라족의 살라 숲에 도착한다. 그는 아난다에게 자신을 위해 두 그루의 살라 나무 사이에 머리가 북쪽으로 가도록 침상을 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오른쪽 옆구를 바닥에 대고 누웠으며, 한 다리를 다른 다리위에 올려 놓는다. 이 자세가 열반상으로 불교의 예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붓다가 왜 이런 자세를 취했는가 하는 문제는 붓다 사후 제자들에게 주요하게 논의되었다. 이런 논의가 부파불교 시대의 논서에 정리되어 전해지고 있다.
먼저 논사들의 견해를 분석하기 전에 [열반경] 제본의 기술을 살펴보자. 팔리어본 [대반열반경]을 먼저 살펴보자. 쿠시나라의 살라(sala)숲에 도착한 붓다는 아난다(Ananda)에게 말했다. '아난다여, 너는 한 쌍의 살라나무 사이에 침상(mancakam)의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준비 하여라. 아난다여! 나는 지쳐있어 누워야겠다.' 아난다는 붓다의 뜻대로 침상을 준비했다. 경전은 이어 붓다의 마지막 자세를 묘사하고 있다. '그때 세존은 우협(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어 눕는 것)으로 獅子臥(사자와. siha seyyam사자가 누운모습)를 하고 한 발을 다른 한 발에 포갠 채 정념(正念.sato)하고 정지(正智. sampajano)하고 있었다.' sato 와 sampajano 는 붓다의 누운 자세를 묘하사는데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sato 와 sampajano는 팔리어 [열반경] 자체 내에서 여러번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예를 들면 붓다가 노령이라는 이유로, 여행의 피로라는 이유로, 질병이라는 이유로 평상시와 달리 정신이 흐려있지 않았고 오히려 깨어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안거 직후 붓다의 질병 극복을 묘사할 때, 수명의 행을 포기할 때, 마지막 공양 직후 질병이 일어날 때, 이 두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자칫 이런 상황에선 깨어있기가 쉽지 아니한 것인데 경전은 붓다가 정념을 유지하고 있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사자라는 이이미를 이용하여 강건함과 위엄을 붓다의 모습에 부가하고 있다. 80세라는 고령에 장기간의 도보 여행은 상당히 피로한 일임에 틀림없다. 병까지 걸려 있다면 발자국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고통일 것이다. 극도로 지치고 약한 이미지가 여행중인 붓다의 모습에 연결되는 것을 막기위해 용맹스러운 사자의 이미지가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한역 [대반열반경]은 팔리어 [대반열반경]보다 조금더 자세한 묘사가 주어지고 있다. '아난다여, 너는 살라림(娑羅林)에 가서 한 곳에 홀로 있는 쌍수(雙樹)를 보거든 그 밑을 청소하여 청정하게 하라. 침상을 안치하라. 머리를 북쪽으로 하라. 나는 지금 육신이 극도로 피로하고 고통스럽다. 그때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붓다의 말씀을 듣고 그 슬픔과 비통이 배로 증가하였다. 아난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받들어 떠났다. 그 나무 밑에 이르러 청소를 하고 규정대로 자리를 폈다. 돌아와 청소와 자리 마련이 완료되었다고 아뢰었다. 그때 세존과 모든 비구들과 함께 살라림에 들어가 쌍수 아래 우협으로 자리에 누웠다. 마치 사자가 자는 것처럼 발을 포개어 누었다. 마음을 단정히하고 정념하였다.' 팔리어 [대반열반경]과 마찬가지로 사자의 이미지와 정념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도 앞서 살펴본 두 개의 경전보다 더 자세하다. '너는 나를 위하여 쌍수 사이에 침상을 안치하라. 나는 그곳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여 누울 것이다. 금일 중야(中夜)에 반드시 입멸할 것이다. 이때 아난다는 말씀대로 행하고 나서 세존께 가서 발에 예배하고 한곳에 서서 합장하여 붓다의 말씀대로 안치하였음을 아뢰었다. 그때 여래는 곧 침상에 가서 우협으로 누웠다. 양발을 서로 겹치고 광명(光明)을 생각했다. 반의(槃意)하고 정념하였다. 관조하여 머물며 열반을 생각했다.' 사자의 이미지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의식적으로 광명과 열반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유행경]은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누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너는 여래를 위해 쌍수 사이에 침상을 마련하라. 머리 부분을 북쪽으로 하고 얼굴은 서방으로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법이 전파되어 오랫동안 북방에 머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고 자리를 펴서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때 세존은 스스로 승복을 네 번 접어서 사자왕처럼 우협으로 발을 포개어서 누웠다.' 앞서 살펴본 팔리어 [대반열반경]이나 [열반경][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비해 정념에 해당하는 부분이 빠져 있다.
[반니원경般泥洹經]에선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때 붓다는 현자 아난에게 말했다. '너는 살라숲의 쌍수 사잉 침구를 북쪽으로 두라. 나는 한밤중에 멸도하리라. 아난이 가르침을 받고 행하고 나서 돌아와 이미 준비되었다고 아뢰었다. 붓다는 쌍수에 이르러 침상에 나아가 우협(右脅)으로 누웠다.' 이 경전에선 앞서 살펴본 사자의 비유나 깨어 있음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다.
[열반경] 제본은 한결같이 붓다가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하고 우협으로 누었다는 점에 대해선 일치한다. 대체로 두 가지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첫째, 붓다가 의도적으로 머리를 북쪽으로 두었다는 것이다. 왜 붓다가 이런 자세를 취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유행경]을 제외한 다른 제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둘째, 붓다의 누운 자세를 사자의 누운 모습과 비교하는 부분이다. 빨리어 [열반경][대반열반경][유행경]은 사자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세 경전들은 붓다의 강건함과 깨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논사들도 이상의 두 가지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2. 논사들의 해석
1) 머리를 북쪽으로 둔 이유
[아비달마대비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에선 7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구시국(拘尸國. 구시나라)의 논사들은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눕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즉 그 나라의 논사들이 그런 식으로 눕기 때문에 붓다도 그 법을 따랐다고 보는 것이다.
(2) 붓다는 모든 논사를 조복시킨 무상의 제일의 논사이므로 그렇게 누운 것이다. 이 부분의 설명은 명확하지 못한 면이 있다. (1)과 관련하여 이해하여 보면 아마도 스승들이 자신의 죽음에 임박해 머리를 북쪽으로 두는 것이 전통적인 관습이었던 것 같다. 붓다는 최상의 스승이기 때문에 당연히 북쪽으로 머리를 두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3) 세상 사람들의 허망한 믿음에서 붓다는 벗어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붓다는 아직 입멸하기 전인데도 일부러 북쪽으로 누웠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나라 사람들의 믿음에 의하면 북쪽은 죽은 자를 위한 방향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붓다는 살아 있으면서 북쪽으로 머리를 둠으로서 민간의 속설과 미신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라는 설명이다.
(4) 구시국 사람들의 부정심(不淨心)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나라의 풍속에는 북방에 신을 위한 사당을 건립했는데 만일 붓다가 발을 북쪽으로 두고 누우면 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업신여긴다고 부정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런 자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5) 붓다는 정법을 공경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붓다의 입멸후 법의 횃불이 북방에서 훨훨 타오를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했다는 것이다. 정법에 대한 존경심으로 정법이 펼쳐질 곳의 방향으로 머리를 두었다는 것이다.
(6) 이전에 붓다가 해놓은 모든 일들이 점점 융성해지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붓다는 3무수겁(無數劫) 동안 많은 선근을 쌓았는데 그 선근이 점점 융성하여 시들어지는 일이 없다. 융성한 선근이 최고로 뛰어난 방향인 북방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붓다는 머리를 그 쪽으로 두고 누웠다.
(7) 입멸 후 북쪽의 사람들이 점차로 더욱더 광대해지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경제적인 이유 이면에는 불교의 포교라는 것이 전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7)은 (5)와(6)과 함께 읽어야지 따로 읽어서는 제대로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1)(2)(3)(4)는 구시나라의 관습과 결부되어 있는데 비해 (5)(6)(7)은 붓다 사후 불교의 융성지를 예상하고 있다. 구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북방이 전통적으로 좋은 방향이라고 믿어지고 있었는데, 불교도들은 그러한 믿음을 수용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1)(2)(4)는 북방이라는 전통적인 방위에 대한 구시국 사람들의 신앙을 붓다가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3)은 그러한 전통적인 민간의 믿음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인들은 시신을 지극히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 죽음의 신이 살고 있는 남방으로 시신을 두는 것이 힌두교의 관습이다. 그러나 붓다가 북쪽으로 향하여 누었다는 것은 이러한 힌두교의 신앙과 관습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3)의 설명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전통적인 관습의 타파라는 해석은 다른 점에서도 보인다. 전통적으로 힌두교들은 집에서 임종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중에 임종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하면 집에서 임종하도록 조치한다. 임종이 임박하면 임종을 맞이한 사람을 집 입구나 그 사람이 평소 사용하던 방에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눕힌다. 사후 시신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런데 붓다가 숲에서 입멸하려는 것이나 서쪽으로 얼굴을 향하도록 하고 머리를 북쪽으로 두는 것 모두가 전통적인 힌두교의 관습과 반대된다. 붓다가 임종을 맞이하여 관습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입멸 자세로 마지막 가르침을 펴고 있는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2) 우협으로 누운 이유
설일체유부의 논서에는 두 가지 설명이 제시되고 있다.
(1) 붓다는 사자왕처럼 누운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2) 이전에 제자들에게 우협으로 누울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 붓다도 우협으로 누운 것이다.
(2)부터 먼저 살펴보면 중생의 눕는 자세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사자왕처럼 눕는 것, 신처럼 눕는 것, 귀신처럼 눕는 것, 탐욕스러운 사람이 눕는 것, 사자왕은 우협으로 눕고 신은 얼굴을 위로 향해 눕고, 귀신은 엎드려 눕고, 탐욕있는 사람은 왼쪽 겨드랑이를 대고 눕는다. 우협으로 눕는 것은 좌협으로 눕는 것과 상반되고 있다. 좌협으로 눕는 사람은 탐욕심을 위시한 번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반대로 우협으로 눕는 사람은 모든 번뇌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붓다가 제자들로 하여금 우협으로 누우라고 가르친 것은 번뇌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인다.
붓다는 종종 사자의 왕으로 비유된다. 모든 동물 중에서 사자가 가장 용맹하여 동물의 왕이 되듯이 붓다도 사람들 중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붓다의 설법을 사자후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상좌부의 대표적인 논사인 붓다고사는 자세하게 사자의 누운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동물의 왕인 사자는 자긍심이 대단하므로 자신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설령 자고 있는 동안이 라도 흐르러짐 없이 위엄을 지키고 있다. 앞발 두개를 포개어 한 곳에 두고 뒷발 두개를 포개어 다른 곳에 둔다. 꼬리를 뒷발 두개 사이에 놓고 머리는 앞발 앞에 둔 채 잠을 잔다. 잠에서 깨어 날 때 두려움 없이 일어나 자신의 자세를 관찰한다. 만약 사자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져 있으면 불만족해하며 계속 누워 사냥하러 가지 않는다. 이런 방만한 자세는 맹수의 왕인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따라서 사자는 항상(자고 있을때 조차도)방심하거나 방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도 마찬가지로 항상 방심하지 않고 자신의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 경전의 편집자나 논사의 주장이다. 붓다는 마지막 순간에 즈음하여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져 있었지만 방심하지 않고 위엄있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붓다고사는 외견상 붓다의 누운 모습이 사자의 누운 모습과 유사하지만 내적으로 말하면 붓다는 그 당시 제4선에 입정한 것으로 이것이 여래의 누운 자세라는 것이다. 이 제4선을 전통적으로 사자의 누운 자세로 불리는 것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여튼 이 제4선에서 가장 큰 에너지가 생긴다고 한다. 팔리어 [대반열반경]에는 붓다의 입멸자세가 아주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비해 붓다고사는 아주 장황하게 붓다의 마지막 자세에 대해서 주석하고 있다. 이런 그의 자세한 주석은 붓다가 취한 자세가 힘없는 노인이 누운 모습으로 비치는 것을 염려한 결과로 보인다.
[열반경] 제본은 붓다의 누운 자세에 대하여 매우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지만 붓다고사나 유부의 논사들은 이 누운 자세가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한 자세가 아니라 사자처럼 위엄있는 자세라고 강조하면서 장황하게 주석하고 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자신을 지탱할 힘이 없어 드러누워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맹수의 왕처럼 힘이 있으면서 깨어 있어 주위에서 일어 나는 일을 잘 분간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앉지 않고 누워서 입멸한 이유
한 한역본을 제외한 [열반경] 제본은 붓다가 누운채 입멸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논서에는 다섯 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1) 대중들로 하여금 붓다의 전신을 쉽게 볼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2) 붓다가 누워서 입멸하면 신체의 도량(度量)이 나타나므로 분명히 알 수 있어 따로 억측을 물러일으키지 않는다.
(3) 붓다는 속임수를 여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만약 붓다가 앉아서 입멸하면 외도들은 어떻게 앉아서 입멸할 수 있는가하고 의심하며 이것은 속임수라고 말할 것이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누워 입멸했다는 것이다.
(4) 미래의 성자를 위해서이다. 미래의 아라한 중 몸이 허약하여 누워서 입멸하는 경우가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붓다는 앉아서 입멸했는데 이 사람은 누워서 입멸하니 성자가 아니다라고 비방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비방을 막기 위해 붓다는 누워서 입멸했다.
(5) 자신의 힘을 믿는 이의 교만을 끊게 하기 위함이다. 나라연(那羅延)의 힘을 갖춘 붓다도 무상의 법칙에 의해 핍박받아 누워 입멸하는데 하물며 우리 범부들이 조그마한 힘을 믿고 교만을 내겠는가? 하고 반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라연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그 힘은 보통 소의 힘보다 10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붓다고사도 다섯번째의 설명과 같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붓다고사의 계산법에 따르면 붓다의 힘은 다음과 같이 산출된다. 보통 코끼리가 소유한 힘의 10,000,000,000배에 해당하는 힘이 붓다의 힘이다. 보통 코끼리의 힘은 보통 사람의 힘의 10배이다. 따라서 붓다는 보통 장정이 가진 힘의 10 x 10,000,000,000를 소유하고 있다. 이렇게 막대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던 붓다가 마지막 순간에는 기력이 쇠진하게 되어 눕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튼 북방의 유부나 남방의 상좌부는 평소 붓다의 힘은 보통 인간의 힘을 초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힘을 가진 붓다의 육신도 이렇게 마지막 순간 무상법의 희생이 되므로 자신의 힘만을 자만하는 자는 교만심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1)과 (2)는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제자들이 직접 붓다의 시신을 목겸함으로써 불필요한 억측이나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한다. (1)과 (2)가 제자들의 미혹을 방지한 것이라면 (3)은 외도들의 미혹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설명이다. 이런 종류의 의혹이 일어나는 것은 성인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보통 사람들은 성인의 외형만 파악할 수있기 때문에 성인의 몸 동작이나 행위가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본다. 죽을 때도 성인은 보통사람과 다른 자세를 취하여 죽는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믿음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좌하지 않고 누워서 입멸했다는 것이다. (4)와 (5)는 사실상 붓다가 정좌하지 않고 누워서 입멸한 이유가 기력이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Ⅲ. 붓다의 입멸장소 ▲ 위로
1. [열반경] 제본의 설명
[열반경] 제본에 의하면 붓다는 구시나라에서 입멸하였다. 쿠시나라는 붓다 당시에도 매우 조그마한 마을이었던 것 같다. 붓다가 이곳에서 입멸하려고 하자 아난다 존자가 큰 도시서 입멸할 것을 붓다에게 간청하는 장면이 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 작은 마을(kudda nagarake), 숲속의 마을(ujjangala nagarake) 장작더미의 마을(sakha nagarake)에서 반열반하지 마십시오. 존자여! 왜냐하면 다른 거대한 도시(maha nagarani)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참파(campa), 라자가하(rajagaha), 사밧티(savatthi), 사케타(saketa), 코삼비(kosambi), 바라나시(baranasi)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반열반하소서. 그곳은 부유한 왕족(khattiya mahasala), 부유한 사제(brahmana mahasala), 부유한 장자(gahapati mahsala)들이 여래에 대한 신심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래의 시신을 공양할 것입니다." 한역 제본도 거의 동일하게 말하고 있다.
[대반열반경]에는 쿠시나라가 변방이고 협소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반니원경]은 좁고 누추한 조그마한 성으로 묘사하고 있고, [불반니원경]은 쿠시나라는 소읍이며 더구나 지금 붓다가 누워 있는 곳은 성읍 바깥으로 취락도 적고 누추한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행경]은 좁고 누추한 조그마한 성이며 잡초가 무성하고 이지러진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는 황야와 자갈의 땅, 변방의 비루한 땅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난다의 간청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의 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위대하신 스승이 외지고 조그마한 장소에서 죽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죽은 후에도 이런 누추한 곳에선 추도나 장례도 초라하게 치러지거나 제대로 행하여지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염려이다. 위대한 성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추도를 받고 성대하게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 일반인의 상식이다. 세속적인 관습에 순응하려는 아난다의 간청을 붓다가 거절하고 있다. 그러나 그 거절 이유를 살펴보면 일반인의 상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따르고 있다. 즉 과거 전생에 이 땅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거대한 수도였다는 것이다. 지난 과거세에 여러번 이곳에서 전륜성왕으로 죽었지만 이번 생애에는 마지막으로 붓다로써 입멸하여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난다의 간청 및 그 이유에 대해 붓다의 답변은 신화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어 일반인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들린다. 어쨌든 이러한 아난다의 간청이나 붓다의 답변은 [열반경]이 형성될 때 벌써 입멸장소를 둘러싼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수의 학자들은 붓다가 자신의 고국 카필라바수트를 가는 도중 쿠시나라에서 입멸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붓다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곳에서 객사한 것이다. 한편 이런 객사설에 대항하여 붓다는 의도적으로 쿠시나라를 선택했다는 견해도 있다. 라자가하나 바이살리 같은 대도시 보다는 조그마한 마을을 선택한 것은 붓다의 품성이 겸손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즉 평소 검소함과 고요를 붓다는 즐겼기 때문에 번잡한 대도시에서 입멸하는 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견해는 정치 사회적인 추론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의 출생 왕국인 석가국이 코살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붓다가 그곳에 열반에 드는 것은 적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말라족은 자기의 직계 친척은 아닐지라도 붓다와 같은 몽골계 인종이었으며 자신의 친척과 같았다는 이유에서 차선책으로 붓다는 말라족의 쿠시나라를 자신의 입멸장소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객사설에 비해 이상의 두 설명은 붓다가 객사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보는 관점에 있어 부파불교 시대의 논사와 같은 불타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붓다고사의 견해
붓다고사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붓다가 이곳에 반드시 입멸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붓다고사에 의하면 파바에서 마지막 공양을 한 이후 극도로 지쳐있었으므로 파바에서 쿠시나라까지 거리 8내지 12마일 오는 동안 25번 다른 곳에서 앉아 쉬었다. 온갖 힘을 다해 해질 녘에 살라 숲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붓다고사는 붓다가 이렇게 힘들게 쿠시나라에 온 경위를 먼저 밝히고 그 이유를 3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대선견왕경(Mahasudassana sutta)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만약 쿠시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입멸한다면 이 경전을 설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에 이곳 쿠시나라에 입멸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 의하면 붓다가 입멸할 즈음 그의 시자 아난다가 붓다에게 이 작고 누추한 쿠시나라 마을이 아닌 다른 마을에서 입멸할 것을 권청한다. 그때 붓다는 이곳은 전생에 위대한 제국의 수도였으며 자신은 이 나라의 전륜성왕으로 통치하다가 이 수도에서 죽었다고 말하며 쿠시나라의 옛 영광을 간략히 말하고 있다. [열반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짤막한 부다와 아난다의 대화는 팔리어 경장에서는 Mahasudassana sutta 라는 별개의 경전으로 독립하여 나오고 있다. 이 경전을 설하기 위해서 쿠시나라에 일부러 왔다는 것이다. 즉 아난다로 하여금 이 마을에 관해 질문을 유도하게 하여 이 경전을 설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두 선을 행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Subhadda 를 교화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이 외도는 붓다에 의해서만 교화될 수 있으므로 그가 머물고 있는 쿠시나라에 왔다. [열반경]에 의하면 그는 붓다의 최후의 제자가 된다. 붓다가 입멸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붓다에게 찾아와 진리에 관해 질문하고 답을 듣고 나서 출가하게 된다. 특별히 왜 그를 마지막으로 교화하게 되었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생에 두 형제가 함께 농사를 지었는데 형은 매우 관대하여 수행자에게 공양을 민첩하게 했지만 동생은 언제나 늦었다. 이런 과보로 현생에 형은 붓다의 첫제자인 아탸나 콘다냐(Annta Kondanna)가 되었고 동생은 수밧다(subhadda)가 되어 붓다의 최후 제자가 된다.
셋째 사리를 둘러싼 분쟁을 막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쿠시나라는 도나(dona)라는 브라흐민이 있어 사리 소유로 인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 즉 다른 곳에서 입멸하면 화장 후 사리를 서로 소유하려다가 싸움이 일어나 많은 살상이 일어날 수 있지만 쿠시나라에는 현명한 도나가 있어 분쟁을 잘 해결하여 사리를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다고 붓다가 예견했다는 것이다. [열반경]에 의하면 쿠시나라국 사람들이 붓다의 사리를 독점하려고 하자 이웃 7개국의 병사가 도착하여 그들도 마찬가지로 사리를 독점하려고 하는 전쟁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때 도나가 나타나 전쟁으로 치닫는 싸움을 평화롭게 해결한다.
붓다고사는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붓다가 기력의 소진에도 불구하고 굳이 쿠시나라에 입멸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붓다는 이상의 세 가지를 미리 예견하여 온 것으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고사의 설명은 다분히 [열반경]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견디어내기 어렵다. 단순히 우연히 발생한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붓다고사는 강력히 반발하겠지만 우연으로 보는 시각을 무시하기 어렵다. 단순히 돌발적인 사건으로 우연으로 볼 것인지 붓다고사의 주장대로 붓다의 미래를 예지하는 지혜의 의한 것인지 하는 문제는 불타관의 문제이다. 붓다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상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ㅗ 해결을 기대한다. 여하튼 붓다고사는 ㅂ수다의 전지한 능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3. 유부논사의 견해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선 8가지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자.
(1) 모든 역사(力士)를 제도하기 위하여
(2) 외도인 Subhadda를 교화하기 위하여
(3) Pukkusa 로 하여금 독각(獨覺)의 선근 종자를 심기 하기 위하여. Pukkusa는 말라족 사람으로 Alara kalama(알라라 칼라마) 의 제자였다. 붓다가 파바로부터 쿠시나라로 오는 도중에 그는 붓다를 만나 자신의 스승의 불가사의 선정을 자랑한다. 이에 붓다는 자신의 선정이 더 훌륭하다고 Pukkusa 를 설득한다. 이에 Pukkusa 는 붓다에게 귀의한다. Pukkusa의 귀의는 붓다의 지위를 재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성도전 붓다는 Alara kalama 를 한 때 스승으로 삼았다. 불행히도 이 스승은 붓다가 성도할 때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으므로 붓다는 그로부터 자신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확인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그는 붓다의 제자가 되었거나 붓다가 자신보다 훌륭하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붓다가 한 때 그의 제자였었다는 기억을 희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의 제자를 대신 끌어들여 붓다에게 귀의시킴으로써 붓다의 위대성을 재천명한 것으로 해석된다.
(4) Pukkusa 의 아내로 하여금 무상정등선근의 종자를 심게 하기 위하여
(5) 구시성 역사들이 경명당하는 것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구시성의 사람들은 다른 도시의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으므로 붓다가 다른 곳에 입멸하면 이 마을 사람들은 붓다의 사리를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입멸했다는 것이다. 구시성은 천민들이 거주했거나 생활 수준이 매우 낮아 큰 도시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의 혜택을 제대로 받을 기회가 적었던 것이다. 그것을 염려하여 붓다가 이곳에 입멸함으로써 구시성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입지를 높일 수 있고 붓다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6) 붓다의 사리를 널리 유포시키기 위해서 구시성 사람들은 심신이 용감하고 건전하며 나누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용감하고 굳세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굴하게 굴복되어 붓다의 사리를 강탈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을 좋아하므로 주체적으로 널리 사리를 분배할 것이라는 것이다. 자신만이 붓다의 사리를 간직하려다가 다른 도시의 사람들과 싸우는 일이 구시성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7) 붓다의 입멸시 붓다가 받는 공양은 전륜성와보다 몇천배 더 받는데 큰 도시에서 입멸할 경우 받는 공양은 전륜성왕보다 능가하더라도 기특(奇特)한 것이 안되는 것에 비해 작은 마을에서 받는 공양은 도시에서 받는 공양보다 같더라도 더 기특하다는 것이다. 부유한 도시에서의 호화로운 장례는 비일비재하여 특이한 것이 되지 않지만 작은 마을에서 행해지는 같은 호화로운 장례는 눈에 띤다는 것이다.
(8) 전생에 붓다가 여기에서 신명을 버렸기 때문에 이번 생애에도 이곳에서 입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열반경] 제본에 나오는 것과 같다.
(1)과(5)는 쿠시나라의 사람들을 위하여 이곳을 입멸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2)(3)(4)는 특정한 개인을 위하여 붓다가 이곳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6)은 붓다의 사리 분배를 위해 (7)은 붓다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8)은 이상의 설명들이 만족스럽지 못하므로 [열반경]의 의견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답안이 제시되었다는 것은 붓다의 입멸 장소에 관한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 8개의 설명 중 선현과 쿠시나라 사람들을 위해 쿠시나라를 입멸장소로 선정했다고 보는 견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질병으로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선현과 쿠시나라 사람들에게 법을 설한 필연성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는 문헌이 있다. 이 문헌은 설일체유부에 의해 전승된 것으로 유부의 논사의 설명도 이 문헌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붓다와 선현, 그리고 쿠시나라 사람들의 인연은 전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생에 한 마리 사슴 왕과 천 마리의 사슴이 숲에 살고 있었다. 사냥꾼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사슴 왕은 자신의 안위보다 다른 사슴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다. 사슴 왕은 미약한 사슴들을 위하여 천(川)에 들어가 자신을 징검다리로 만들어 모두 피신 시켰다. 사슴 왕의 등을 밝고 사슴들이 건너갔기 때문에 사슴왕의 몸은 망가지게 되었다. 그때 한 어린 사슴이 물을 건너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가가 등에 엎고 구해 주었다. 마침내 기역이 다하여 죽기에 이르렀을 때 왕은 다음 생에도 이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발원을 세웠다. 이런 발원으로 선현과 쿠시나라 사람들을 위해 이곳 쿠시나라로 마지막으로 왔다는 것이다. 붓다는 전생에 사슴 왕이며 선현은 전생에 어린 사슴이며 쿠시나라 사람들은 전생의 사슴들이었다.
[열반경] 제본이나 후기의 논사들이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붓다가 쿠시나라에서 객사한 것이 아니라 붓다 자신이 이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위대한 붓다가 작은 시골 마을에서 여행 중 초라하게 죽었다고 폄하하여 말하는 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소한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도 끌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붓다의 위대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불교도들은 이렇게 왜곡될 수 있는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 이 작은 마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붓다가 깊은 뜻을 가지고 이곳을 입멸 장소로 선택했다고 본 것이다.
Ⅳ. 붓다의 최후 가르침 ▲ 위로
1.붓다가 상체를 보인 이유
한역 [열반경]중 일부 경전은 붓다가 상테를 드러내고 제자들에게 자세히 관찰하라는 장면이 있다.
[유행경]을 먼저 살펴보자. "세존은 울다라승(鬱多羅僧. 맨위에 입는 겉옷)을 펼쳐서 금색의 팔을 보여 주었다.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여래가 세상에 때때로 출현하는 것이 우발라화가 때 마춰 한번 출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여래는 대비심으로 상의를 벗어 신상(身相)을 드러내었다. 모든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불신(佛身)을 관하라.
왜냐하면 여래.응공.정등각은 만나기 어렵다. 그때 모든 비구들은 조용히 있었다. 붓다는 법은 모두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다. 이것이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
유부의 논사들은 이상의 경전과 약간 다르게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논의하고 있다. "그때 세존은 상체 부분을 벗고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마땅히 나를 관(觀)해야 한다. 너희들은 마땅히 나를 찰(察)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여래.응공.정등각은 출현하기도 어렵고 친견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우담바라화보다 더 어렵다.
논사들은 먼저 왜 붓다가 상체를 보여주었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두 가지 이유가 먼저 주어지고 있다.
첫째 제자들에게 붓다의 몸을 친견하는 공덕을 짓도록 해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00지를 12년 간 수행하여 얻은 공덕도 잠깐 동안이나마 붓다의 몸을 보아 생긴 공덕보다 못하는 것이다.
둘째 무상을 깨닫고 무상하지 아니한 법을 추구하라고 격려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붓다가 3무수겁 동안 쌓았던 복의 더미가 잿더미가 되기 전에 그것을 보고 견고한 법을 추구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다. 붓다의 육신은 32상 80종호의 덕을 갖추고 있지만 이러한 것도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되는 것을 보고 무상을 벗어난 것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이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몸을 가지고 무상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논사들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경전에는 가관(可觀)이나 당관(當觀)이라는 말로 되어 있고 관찰이라는 용어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논사들은 관(觀)과 찰(察)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1) 觀이란 안식(眼識)으로 보는 것을 말하고 察이란 의식(意識)으로 살핀다
(2) 觀이란 무분별심으로 察이란 분별심으로 보는 것이다
(3) 觀이란 현재를 살피는 것이고 察이란 미래를 살피는 것이다
(4) 觀이란 생신(生身)을 살피는 것이고 察이란 법신(法身)을 헤아린다.
(5) 觀이란 소집(所集)을 보는 것이고 察이란 소증(所證)을 헤아리는 것이다
(6) 觀이란 상호(相好)을 보는 것이고 察치란 공덕(功德)을 헤아리는 것이다.
觀이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의미하므로 붓다를 관한다는 것은 눈에 의해 파악되는 붓다의 색신(色身)을 의미한다. 반명에 察이란 미루어 헤아리는 것으로 붓다를 察한다는 것은 눈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붓다의 법신(法身)을 의미한다. 색신의 무상함을 관하면서 동시에 법신의 상주를 察하라는 것이다. 색신에만 집착하면 허무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므로 동시에 법신을 찰하는 것이 권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 비해 논사들이 찰을 더 부가한 의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무상한 붓다의 색신만 이야기하면 단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붓다의 법신을 말하기 위해 찰이라는 용어를 굳이 부가한 것이다.
2. 붓다의 최후의 가르침
팔리어 [열반경]에 의하면 붓다는 제자들로부터 불법에 의심이 없다라는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은 최후의 가르침을 남긴다. "비구들이여,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제행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방일하지 않고(appamadena) 정진하라." 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정진하라는 가르침은 붓다의 유언으로 제자들에게 남겨졌을 법한 내용이다. 불방일의 원어는 appamada 인데 부정접두사 a와 pamada로 이루어진 말이다. pamada는 어떤 자극에 의해 정신이 마비된 것을 가리키는 말로 특히 만취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appamada는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단순히 무엇인가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또렷이 각성한 상태이다. 불방일의 가르침은 결국 붓다(깨어 있는자. 각자(覺者))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붓다는 최후의 유언으로 불방일을 남겼다는 것은 붓다 자신도 최후 순간까지 "깨어있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반니원경]에선 다음과 같이 붓다의 최후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들 비구들은 붓다의 의용(儀容. 붓다의 모습)을 觀하라. 다시 보기 어렵다. 지금부터 1억사천겁년 후에야 부처가 나올 뿐이다. 항상 만나기는 어렵다. 천하의 000는 꽃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 만약 꽃을 피우면 곧 세상에 붓다가 출현할 것이다. 붓다는 세상의 태양으로 항상 중생의 무지를 제거하는 것을 염려한다. 나는 성사(聖師)로서 나이 79세에 이르렀다. 해야 할 바는 이미 모두 펼쳐 보였다. 너희들은 그것을 힘써라. 밤이 이미 반을 지났다." 이 경전에선 붓다의 출현의 어려움과 붓다의 친견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가를 강조하고 있다.
[불반니원경]은 아주 간략하게 붓다의 최후 말씀을 전하고 있다. "불(佛)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이미 밤이 자났으므로 다시 소리내지 마라." 이 짤막한 말 이전에 제자들은 붓다나 붓다의 가르침에 조금의 의혹도 없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나타나 있다. 이 경전은 다른 경전과 달리 붓다의 최후 말씀에 관하여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제자들을 두고 떠나는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특별히 의미심장한 말씀을 최후로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대반열반경]엔 다른 경전과 달리 다소 감동적인 장면이 추가되어 있다. 제자들로부터 불법에 관해 어떠한 의혹도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 최후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만약 내가 신.구.의로 잘못한 것을 보았다면 너희들은 나에게 말해야 한다. 그때 모든 비구들은 붓다의 이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여래가 어찌 신.구.의로 아주 작은 잘못이라도 지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여래는 곧 게송을 읊으셨다.
제행은 무상하다. 생멸하기 마련이다
생멸이 사라진 것, 적멸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때 여래는 이 게송을 설하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만들어진 것은 모두 무상하다. 지금 비록 금강석과 같은 나의 몸도 또한 무상하여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생사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다. 너희들은 응당 수행하고 정진하라. 빨리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 나는 반열반할 것이다. 그때 이미 이르렀다."
다른 어떤 경전보다 이 경전은 붓다의 최후 순간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서두 부분에서 붓다는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잘못한 것이 있는가를 제자들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붓다의 겸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마지막 순간까지 붓다는 깨어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잘못도 무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거시 더 타당할 것이다. 붓다라는 말 자체가 '깨어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붓다는 최후까지 무명에 의해 미혹되는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행경]에선 세존은 금색의 팔을 보여주고 여래의 출현의 어려움을 말한 뒤 불방일을 가르치고 있다.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마라. 나는 불방일으로써 스스로 정각에 이르렀다. 무량의 衆善(중선)도 또한 불방일로 얻어진 것이다. 일체 만물은 무상한 존재이다. 이것이 여래가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바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도 [유행경]과 마찬가지로 상체를 보여주고 여래 출현의 소중함을 말한다. 그러나 단지 무상법만 말하고 불방일은 생략되고 있다. "붓다는 법은 모두 이와 같이 제행무상이다. 이것이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 비록 불방일의 가르침이 언표되고 있지 않지만 무상법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상법만을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허무주의나 체념적인 생활로 이어질 것이다.
[열반경] 제본은 붓다의 마지막 말씀을 동일하게 전하고 있지 않지만 대부분 불방일을 붓다의 최후의 유훈으로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열반경]제본에 담겨있는 붓다의 최후 가르침은 무상에 대한 철저한 자각과 거기서 벗어난 세계에의 추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붓다는 생멸에 종속되어 있는 무상한 법에서 벗어나 생멸을 초월한 세계를 추구도록 권고하고 있다. 무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불방일이 제시되고 있다. 다순히 부지런히 노력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념처 수행법을 의미한다고 보인다. 순간 순간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방심하지 않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논사는 붓다의 최후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너희들 비구들은 재묵(裁默)하고 제행(諸行)이 소멸되는 것이다라고 관찰하라" 붓다가 최후로 이런 가르침을 설한 이유를 제자들의 슬픔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비구들이 붓다가 장차 입멸하므로 그 슬픔이 극심하였다. 그래서 붓다는 그 비애를 멈추게 하여 제행무상을 관하도록 한 것이다. 이어 논서는 붓다의 최후 가르침의 내용을 몇 가지 방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첫째, "재묵(裁默)이란 정념(正念)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제행이 소멸되는 것이다라고 응당 관찰하는 것은 정지(正知)를 일으키라는 것이다."
둘째, 재묵(裁默)이란 사마타(samatha)를 수행하라는 것이고 제행을 관한다는 것은 위파사나를 수행하라는 것이다.
셋째, 재묵(裁默)이란 비애를 멈추게 하는 것이고 제행을 관한다는 것은 관행(觀行)을 일으키라는 것이다.
넷째, 묘음(妙音) 존자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재묵(裁默) 이란 다른 사람의 비애를 멈추게 하기 위함이다. 제행이 소멸되는 것이다라고 응당 관찰하라는 것은 자신이 성취(成就)한 것은 망실(忘失)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존자의 설명은 이어진다. 붓다가 정각한지 얼마되지 않을 때 설했다는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제행은 무상하여 생멸하기 마련이다. 일어난 것은 멸하기 때문이다. 그 적묵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지금 입멸 순간에 이전의 게송의 의거하여 제행은 소멸하기 마련이나 붓다 자신이 성취한 것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님(無忘失法.무망실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존자의 설명에서 무망실법은 제행과 상반되는 것으로 존자가 인용한 게송의 적묵에 해당한다. 무망실법은 열반에 다름 아닌 것이다. 붓다의 육신은 제행이므로 생멸의 법칙에 종속되지만 붓다가 이룩한 열반은 무망실법으로 생멸의 무상을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존자의 이해에 따르면 붓다는 최후의 가르침을 통해 무상법을 집착하지 마고 그것을 초월한 법을 추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Ⅴ. 결어 ▲ 위로
붓다의 마지막 순간을 전해주고 있는 [열반경]에 따르면 어떠한 해석도 없이 붓다는 마지막 공양을 먹고 질병에 걸린 채 쿠시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입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묘사는 자칫하면 붓다의 최후 순간을 쉽게 왜곡시키기 위한 자료로 해석될 수 있다. 붓다가 식중독에 걸려 인사불성 상태로 외진 마을에서 객사했다고 악의적으로 험담할 수 있다. 이런 외도의 악담을 불교인들은 그냥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붓다 최후 행적을 목격한 제자들에게 이상과 같은 악담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붓다의 입멸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 해석하는 자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이런 악담에 대응하기 위해선 붓다의 입멸 상황을 바르게 전달할 필요를 불교인들은 느꼈을 것이고 이런 노력의 산물이 부파불교의 논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외도가 행했을 법한 악담을 반격하여 붓다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입멸장소를 선택하였고 입멸 순간까지 약간의 흐르러짐 없이 온전히 깨어 있었다는 것이다. 붓다의 이런 각성 상태는 붓다의 최후 가르침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무상법을 자각하고 방일하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단순히 제자들을 위해 설한 것이 아니라 한편 붓다의 마지막 순간도 방일하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신이 불방일하지 못하면서 제자들에게 불방일을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다.
붓다의 최후 행적을 불교인들이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미화하고 있는지 지금으로선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불타관의 연구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붓다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열반경]에 보이는 불타관보다 부파불교의 논서에 보이는 불타관이 훨씬 붓다를 초인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열반경]도 단순하게 붓다를 인간적인 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있었던 사실을 왜곡해가면서 붓다를 미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붓다가 무기력하게 벽촌에서 객사하였다는 험담을 불교인들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었다는 것을 본고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위로
[출처: 종교와 문화 제8호(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