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16.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
유교.도교의 외래종교 배척으로 ‘폐불’ 수난
북위 무제의 폐불 이후 문성제(재위 452~465)는 불교흥륭에 더욱 매진했다. 맥적산 석굴도 이 시기 개착됐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중국에 불교가 전래한 후, 삼국과 동진16국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로 불교는 통치사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문화를 이끄는 주요한 사조(思潮)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는 항상 ‘이하론(夷夏論)’에 입각한 전통적 사상들, 특히 유(儒).도(道) 양가의 도전에 시달려야 했는데, 종종 극심한 위기를 맞게 된다.
그 가운데 당시 전제황권의 핵심인 네 황제로부터 비롯된 이른바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법난’이라고 불리는 폐불(廢佛)사태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연대적으로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 북주(北周)의 무제(武帝), 당(唐)의 무종(武宗),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에 의하여 진행된 불교에 대한 정권의 잔혹한 탄압을 말한다.
이런 ‘삼무일종’의 법난은 무엇 때문에 발생했고, 그 결과는 어떠했으며, 이후 전체적인 불교에 대한 영향은 어떠했는가.
우선, 북위의 태무제와 북주의 무제에 의한 법난은 모두 북조(北朝)에서 발생한 상황이다. 이에 있어서는 남조(南朝)와의 간략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동진16국 시대에는 남방의 동진이나 북방의 16국이나 모두 불교를 정치적 지배이념으로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동진과 북방의 정권과 불교의 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동진의 불교를 대표로 하는 여산 혜원스님의 유명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에서와 같이 출가 사문은 유가의 강상명교(綱常名敎)와는 달라서 속세의 국왕과 황제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아도 되지만, 철저하게 “왕(王)의 치도(治道)를 돕는” 기능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여 완벽한 정교(政敎)분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황제들이 철저하게 불교에 귀의하는 남조(南朝)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북조에 이르러서는 그 상황이 달라진다.
〈위서(魏書)〉 ‘석로지(釋老志)’에 따르면, 당시 북방 스님들의 지도자인 법과(法果)스님은 “태조는 밝고 뛰어나 불도(佛道)를 좋아하시니, 곧 지금의 여래(如來)와 같다. 따라서 마땅히 예의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여 황제를 부처님의 화신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북위가 439년 북방을 통일하고 ‘승관(僧官)제도’를 확립시키면서 더욱 굳어진다. 즉 불교가 철저히 황권 아래 복속된 것이다. 남북조시기에 황권에 의한 두 차례의 법난이 모두 북조에서 발생한 것은 이러한 정교관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북위의 도무제(道武帝)를 비롯하여 명원제(明元帝), 효문제(孝文帝)와 선무제(宣武帝)등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정치적 필요와 개인적 신앙으로 불교를 중시하였고, 거대한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그러나 명원제의 아들인 태무제(재위 423~451)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도 즉위 초에는 불교를 신앙했지만, 효문제.선무제.태무제에 이르는 3조(朝)의 신하 최호(崔浩)와 그와 결탁한 도사(道士) 구겸지(寇謙之)의 영향으로 점차 도교를 신앙하게 된다. 그에 따라 태무제의 시광(始光) 원년(424) 북위의 수도인 평성(平城)에 도관을 건립하게 하는 등, 적극적으로 도교를 옹호하는 정책을 펼친다. 태연(太延) 4년(438), 태무제는 최호와 구겸지의 건의를 받아들여 50세 이하의 모든 사문은 환속하라는 조칙을 내린다.
440년에 이르러 태무제는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개원(改元)하는데, 이는 분명히 도교를 국교화하고자 하는 황제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진군 5년(444), 태무제는 왕공(王公) 이하 일반 서민들에게 사문에게 공양을 금지시키는 조칙을 내리고, 당시 승가의 지도자인 현고(玄高), 혜승(慧崇) 등의 스님들을 살해한다.
태평진군 7년(446), 관중지방에서 개오(盖)의 반란이 일어나자 태무제는 친히 정벌에 나선다. 장안(長安)에 이르러 사찰에 병장기를 숨긴 것을 발견하고, 태무제는 모든 불상과 도형 및 경전을 남김없이 불사르고, 사문을 모두 묻어버리라고 명한다. 이러한 결과, 혜교(慧皎)의 〈고승전〉에 따르면, 북위에 단 한명의 스님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태무제에 의한 법난으로 북위의 불교는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게 되지만, 문성제의 노력에 의하여 빠르게 회복되고, 결과적으로 북조의 불교는 오히려 태무제 이전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북위 말년에 정치적으로 문란해지고, 동.서의 양국으로 분열되는 등 북조의 정치상황은 상당히 복잡하게 전개된다. 서위(西魏)를 이은 북주(北周)의 무제(武帝)에 이르러 불교는 다시금 폐불의 상황을 맞게 된다. 무제는 즉위 초 불교를 신앙했지만, 이후 그는 유가(儒家)를 더욱 중시했다.
당시 불교의 사원과 스님의 수가 날로 증가하여 국고의 수입이 점차 감소하여 국가경제가 위협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때, 환속한 위원숭(衛元嵩)은 나라를 다스림에 불교는 적합하지 않으니 사원과 스님의 수를 감하라는 상조를 올리게 된다. 이로부터 무제는 불교의 탄압을 위하여 여론을 조성하고자 천화(天和)에서 건덕(建德)년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문무백관과 스님, 도사를 소집해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선후를 논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매번 불교는 도교와의 논쟁에서 이겨 빌미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무제는 건덕 3년(574) 5월, 불.도 양교를 금지하고, 경전과 불상을 모두 없애며, 스님과 도사를 모두 환속하고, 사원과 도관의 재산을 몰수하여 왕공(王公)에게 하사하라는 조칙을 내리게 된다. 또한 6월에 무제는 ‘통도관(通道觀)’을 설치하여 불교와 도교의 명사 120명을 선발하여 ‘통도관학사(通道士)’라고 칭하여 불교와 도교의 명맥만을 남게 하였다. 건덕 6년(577), 북제(北齊)를 멸하여 다시금 북방을 통일한 무제는 북제의 영토에도 불교를 금하는 조칙을 내리게 되고, 그에 따라 북방의 수많은 사원들이 훼손되고, 많은 수의 스님들이 남방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무제에 의한 법난은 표면적으로는 유가를 중시함으로부터 불.도 양교를 폐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당시 북주 사찰의 수가 3만여 곳을 넘었고, 스님의 수가 200만에 달하여 전인구의 1/16에 해당할 정도로 지나치게 비대해져 국가의 경제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 더욱 커다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조까지 정교분리…북조 이르러 불교 황권에 예속
北魏 태무제 도교 국교화…강제 환속 등 사문 말살
北周 무제-唐 무종-後周 세종도 사찰폐쇄 등 ‘탄압’
피해 덜 본 선종 흥기…중국불교 주도권 남방 이전
북조의 태무제.무제에 의한 법난에는 여러 원인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가 황권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남조(南朝) 역시 끊임없이 유.불.도의 삼교가 치열하게 쟁론을 벌이고 있었고, 사원과 스님의 규모 역시 북조와 비슷하여 국가경제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지만 북조에서와 같은 법난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북조의 불교발전은 수.당대에 이르러 보다 중국화되어 완전한 ‘중국불교’의 색채를 띠게 된다. 당대에 있어서 도교는 황가(皇家)의 성이 이(李)로서 노자(老子, 李老聃)와 같다는 인식으로 황실의 비호를 받게 되고, 또한 육수정(陸修靜), 도홍경(陶弘景), 성현영(成玄英) 등의 걸출한 도사가 출현하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에 따라 당대는 유.불.도의 삼교의 정립(鼎立)을 이루는 시대가 되면서 삼교 모두 사상적으로 심원한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당말에 도교로 말미암아 다시 폐불이 발생하니, 그것은 바로 무종(武宗)에 의하여 회창(會昌)연간에 발생한 법난이다. 이른바 ‘회창법난’이라고도 칭하는 이 법난은 무종이 도교를 신봉하여 개성(成) 5년(840) 조귀진(趙歸眞) 등 81명의 도사를 불러 황궁에 도관(道觀)을 설치하면서부터 비롯된다. 회창 2년(842)에 스님 가운데 계행(戒行)이 바르지 못한 자는 재산을 몰수하고 환속시키는 조칙으로부터 4년 오대산(五臺山)을 위시하여 모든 절의 순례를 금지하고 사액(賜額)이 없는 절은 폐쇄하고 곳곳의 스님은 환속시키는 등 일련의 폐불정책은 당대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된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48에 따르면, 장안과 낙양에는 오직 2개의 사찰만 남기고, 각 사찰에는 30인의 스님만이 거주하게 하며, 절도사와 관찰사가 다스리는 곳과 각 주(州)에는 1개의 사찰만을 남기며, 불상과 불구는 돈이나 농기구로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4600여 사찰이 폐쇄되었으며, 26만 명의 스님이 환속 당하였고, 15만 명의 환속된 스님에게 양세호(兩稅戶)라는 조세를 부담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회창법난은 한창 전성기를 맞이한 중국불교에 커다란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 법난으로 인하여 중국불교의 발전은 그 방향이 크게 전환되게 된다. 그것은 선종(禪宗)의 흥기라고 할 수 있다. 사원의 토대와 경전 등의 불전이 소멸된 상황에서는 여러 종파 가운데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기치를 거는 선종이 가장 피해를 덜 보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대(五代)의 난세에 이르러 불교는 다시 북방의 후주(後周) 세종(世宗)에 의하여 법난을 당하게 된다. 세종은 오대의 교체로 인한 국가 경제의 회복을 위하여 현덕(顯德) 2년(955), 폐불을 단행한다. 이로 인하여 북방에서 폐사된 사찰이 3336개소, 남은 사찰은 2694개소, 합법적인 스님은 6만1200명이 남았을 뿐이다. 이 법난의 영향으로 북방의 불교는 완전히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중국불교의 주도권은 남방으로 이전되게 되었다.
삼무일종의 법난은 정치와 경제, 사상 등 복합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유.도 양가의 외래종교인 불교에 대한 반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법난 당시의 불교계는 지나치게 비대해져 내부적으로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진무/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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