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1905년(광무 9)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체결한 조약.
일시 1905년
목적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
해당국가 조선, 일본
관련된 의병
이유승,안병찬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윤태흥, 이석종, 이건석
민종식 신돌석
김좌진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총장)·박영희:부관)·이범석: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천수평·마록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
조만식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됨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임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됨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됨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
서상돈
민족운동가. 서울 출생. 가톨릭교도로 신유박해·기해박해 등의 고난으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여러 곳을 옮겨다닌 집안의 내력으로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함
1871년 대구에서 독학을 하며 지물 행상과 포목상을 함 86년에는 상당한 재산가가 되었으며, 뒤에 경상도시찰관에 임명되었다. 대구교구의 발전을 위해 일을 하면서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
박정희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음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1974년 8월에는 영부인 육영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문세광에게 저격당함
신채호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함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안창호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함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다
1907년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이승만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열강 특히 미국정부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외교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펴며 교포사회에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김구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봉창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193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 일본으로 건너감.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
박은식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단장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
윤봉길
1929년 월진회를 조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같은 활동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자, 1930년 2월 만주로 망명, 다시 상하이로 갔다.
1931년 상하이에서 세탁소 회계원·모직공장 직공 등으로 전전하며, 김구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전두환
1970년 백마부대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함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을 지냈다.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초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19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어 중앙정보부장 서리
1981년 1월 창당된 민주정의당의 총재가 되어 2월 개정된 새헌법에 따라 제12대 대통령에 당
주시경
1896년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 교정원으로 일하면서 협성회를 창립하여 《협성회보》를 발간하였고 또 조선문동식회)를 결성,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는 한편, 여러 학교와 강습소의 교사·강사직을 맡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1898년 《국어문법》을 완성, 1910년 이를 수정·발간하였다. 1905년 국어연구와 사전편찬사업에 관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였고, 1907년 어윤적·이능화 등과 함께 학부(學部:교육부)의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유관순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 총독에 의하여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즉각 고향으로 내려갔다.
-ㅇ-이상이었습니다-ㅇ-
p.s.학교에서 날려먹어서 힘들었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