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하는지라. ②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③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신지라. ④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⑤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⑥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⑦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⑧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⑨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⑩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⑪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하매, ⑫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⑬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하셨느니라.”
라반과 그의 아들들이 야곱을 향하여 비난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야곱 입장에서는 많이 서러웠을 것이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받는 대우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라니……. 누구도 야곱을 위로해주지 못한다. 네 명의 아내, 11명의 아들들……. 가족들이라도 본인의 마음에 있는 외로움까지 다 아는 것은 아니잖은가?
예수쟁이답게 담대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꿈에 가나안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셨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면, 그렇게 행동했어야 한다. 그런데 야곱은 약하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라 하더라도 야반도주할 생각을 꾸민다. 당당한, 담대한 모습을 보고 싶은데, 야곱에게서는 당장의 상황만 피하려 드는 모습만 보인다.
야곱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라반의 양떼는 허약하고, 야곱의 양떼는 건강하다. 라반의 재산은 점점 줄어드는데, 야곱의 재산은 점점 늘어난다. 라반 입장에서는 마치 야곱이 자신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하는지라.”(1절)
한 젊은이가 화물차 기사로 취직했다. 예수쟁이답게 성실히 일했다. 정해진 시간보다 더 많이 일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사장은 그에게 승진을 제안했다. 삼 개월 만에. 그런데 젊은이는 사표를 냈다. 자신을 신뢰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승진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데, 사장이 도둑놈이다. 거짓말쟁이이다. 이곳에서는 도저히 예수쟁이답게 살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사표를 냈다.
어느 순간, 자신을 대하는 라반의 태도도 확연히 달랐다. 무시한다. 야곱을 이용하기 위한, 부드러웠던 라반의 예전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느냐고, 많은 품삯을 주겠다던, 그 달콤한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상황이 자신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야만 한다고 말을 한다. 마치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났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이 순례의 길을 계속했을까? 만약 바로의 압제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엄두를 내기는 냈을까? 가장 아픈 일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지만 모든 아픔은 항상 메시지를 품고 있다. 떠나라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런데 막지 않으셨다. 내버려두셨다. 베드로 인생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아픔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 아픔을 이겼기에, 예수님의 수제자다운 베드로가 될 수 있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자신을 택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픔의 세월들이다. 젊은 사람이건 나이든 사람이건, 남자든 여자든, 예수쟁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감옥에 가두고, 죽인다. 누구보다 예수쟁이를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젊은 시절은 큰 아픔의 시간들이었다. 그걸 아픔인 줄 알기에,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알았다. 사도로서의 삶, 전하는 자로서의 삶이다.
야곱이 시도 때도 없이 잊어먹는 것이 있다. 그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을 때, 무작정 아버지의 집에서 야반도주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다.
야곱은 하나님을 잊었다. 이름은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잊었다. 자기가 힘들 때,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야곱을 잊으신 적이 없으시다. 야곱이 라반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지금, 이제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지금,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꿈에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하신지라.”(3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렀다. 혈혈단신이었던 야곱은 어느새 네 명의 아내와 11명의 아들, 그리고 딸들을 낳았다. 모든 것이 변했다. 그런데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으시다. 여전히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야곱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여전히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근래 ‘기억’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많이 나왔다. 스티븐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학대하던 분이다. 많이 맞았고, 내버려졌고, 그래서 자살까지 시도했다. 결국은 아버지로부터 도망하였고, 아버지와 서로 절연까지 했다. 죽은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와 권투하던 중,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넌 너 편한 대로만 기억하는 놈이야.” 스티븐의 기억은 사실과 많이 달랐다. 자기 입장에서만 기억하였다. 아버지는 학대한 적이 없었다. 자살하려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학대로 기억한 것이다. 스스로 조작한 것이다(“The Adderall Diaries”).
20년 만에 만난 두 친구가 있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이렇게 소개한다. 신학생 시절, 그 친구의 손에 이끌려 기도원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들에게 둘러싸여 예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기억을 정정해준다.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어머니와 함께 오신 권사님들에게 친구를 소개해준 것이다. 이 친구가 예언의 은사가 있으니, 기도를 받아보라고. 정반대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야곱은 하나님에 관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는 게 힘들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변질되었다. 그러면 어떻겠는가. 지금 야곱이 의지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는 것을!
원하지 않는 이사를 하려니,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머리가 아프고, 잠도 못자고, 가슴은 답답하다. 허리디스크 진단 받았던 곳이 다시 아프고, 걸음을 걷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금니가 너무 아파 음식 먹기가 너무 힘들다. 이사를 하고 나서도, 마음이 허전하다. 뭔가 안정이 되지 않는다.
야곱의 마음을 헤아려봤다.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었을까? 밥을 먹으면, 소화는 됐으려나? 마음은 편했을까? ……. 야곱 성격에, 아내들과 문제를 상의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들들에게 이야기하기에는, 아이들이 너무 어리다. 혼자 끙끙 앓았을 것 같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벧엘에서 이미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야곱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다. 너무 희미하다. 도무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의 곁에 계시는데 말이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5절) 야곱은 아내들을 불렀다. 그리고 자기 계획을 늘어놓는다. 이 모든 계획의 시작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기가 가나안을 떠날 수 있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야곱이 부르는 “하나님”은 ‘엘로힘’이다. 능력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 장인이, 처남들이 자기를 비난하지만, 자기를 위협하지만, 자기도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 그분의 이름은 ‘엘로힘’이다.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7절) 14년 동안,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동안, 라반은 품삯을 10번이나 속였다. 품삯을 주지 않기 위하여 양떼들과 염소 떼들을 멀리 떼어놓은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참 묘하다. 참 신기하다. 라반이 속임수를 사용할 때마다 알지 못하는 힘이 자신을 지켜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렇게 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라반의 속임수를 막으셨다.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9절) 하나님께서 라반의 것을 빼앗아, 야곱에게 주셨다. 왜?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하셨느니라.”(13절) 벧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야곱이 만난, 그래서 영원히 야곱 곁에서 떠나지 않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바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어느 순간, 이들이 반역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한 가지 묘책을 찾아냈다.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는 것이다. 더욱 학대를 가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 예수쟁이들은 어떻게 할까?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출 1:12)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이다. “⑧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⑨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쟁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