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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랑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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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타 스크랩 전라북도 부안의 여행정보
산사랑 추천 0 조회 120 10.12.29 2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라북도 부안의 여행정보
=== 변산 8경
* 제1경 웅연조대(熊淵釣臺)
줄포에서 곰소 앞바다를 지나는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바다에 펼쳐지는 어선들의 행진과 야경이 물에 어울리는 모습과, 강촌의 어부들이 낚시대를 둘러메고 창랑가를 부르는 경치를 말한다.
 
* 제2경 직소폭포(直沼爆布)
내변산의 중심에 있는 직소폭포의 선경을 말하며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을 보지 않고 변산을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 제3경 소사모종(蘇寺暮鍾)
가인봉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고색 창연한 내소사의 경치와 곰소만의 푸른 바다의 정경을 깔고 어둠을 헤치고 은은하게 울려 펴지는 저녁 종소리를 말한다.
 
* 제4경 월명무애(月明霧靄)
월명암의 법당 앞 마당가에 서서 둥실 떠오르는 밝은 달을 쳐다보는 경치와 일출과 함께 새벽잠을 깬 산새들의 노래. 자욱한 안개와 구름이 춤을 추는 황홀한 비경, 구름위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의 자태는 한 폭의 산수화이다.
* 제5경 서해낙조(西海落照)
낙조대에서 고군산열도의 섬들과 위도를 앞에 두고 온 바다를 진홍빛으로 불타게 하는 석양의 장관을 말한다.
 
* 제6경 채석범주(彩石帆舟)
억만년 파도에 씻겨온 바위와 동굴 대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석강의 조화와 신비를 말한다.
 
* 제7경 지포신경(止浦神景)
변산면 지서리의 옛 지명이 지지포(知止浦)인데 이곳에서 쌍선봉 등정중 산중턱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수많은 봉우리 사이로 서해의 조망이 그림 같고 산속에 신선이 되어 별유천지에 떠있는 듯한 산수의 진경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 제8경 개암고적(開岩古蹟)
개암사는 변산의 사대명찰중의 하나로 백제유민들이 진을 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한 본거지이다. 울금바위의 위용과 주류성의 자취는 그윽한 역사의 향기를 소담하게 풍기고 있다.

  ※변산 36경※

내변(內邊)
①소뿔바위 ②백천내(百川) ③석문동 ④군신봉(君臣峰) ⑤봉래구곡 ⑥직소폭포 ⑦월명암
⑧낙조대 ⑨쌍선봉 ⑩와룡소(臥龍沼) ⑪감소 ⑫의상봉의 마천대
 
외변(外邊)
①영은폭포(靈隱瀑布) ②금선대 ③개암사④ 울금바위 ⑤월정약수 ⑥주류성지 ⑦보령원
(保寧院) ⑧도요지 ⑨우반이굴 ⑩성계암 ⑪청련암 ⑫내소사
 
해변(海邊)
①월포 ②비득치(飛得峙) ③변산해수욕장 ④채석강 ⑤수락동(水落洞) ⑥언포 ⑦적벽강
⑧비안도 ⑨계화도 ⑩곰소 ⑪죽도(竹島) ⑫작도(鵲島)

채석강
채석강은 해안의 파도침식에 의해 형성된 해식절벽으로 오색 영롱한 갖가지 색깔과 수만권의 책을 쌓은 듯한 층을 이루고 있다.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을 기저층으로 중생대 백악기(약7천만년전)에 퇴적된 층이 기기묘묘한 모습을 하고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의 신비와 섭리에 탄복하게 한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중국 채석강과 생김새가 흡사하다 하여 채석강이라 부르게 되었고 한다. 채석강 위의 닭이봉 정상에는 전망대인 팔각정이 세워져있고 이곳에 올라서면 위도와 주변 섬들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적벽강
 
채석강에서 북쪽으로 1㎞ 가면 돌출한 해식절벽의 석벽(石壁)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이 보이는데 붉은 색의 암반과 절벽으로 해안이 지방기념물 제29호인 적벽강이다. 백사장 뒤편의 죽막마을을 경계로 채석강과 나뉘어 지는데 죽막마을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23호 후박나무가 군락을 이뤄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용두산을 돌아 절벽과 암반으로 펼쳐지는 해안선 약 2㎞를 적벽강이라고 한다.

중국의 소동파가 놀았던 적벽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 특히 석양에 절벽이 반사될 때가 더욱 아름답다. 북쪽으로 돌아가면 약30m높이의 두 개의 절벽으로된 바위 안에 하늘이 보이는 50여m길이의 동굴인 용굴(龍窟)이 있고 그 위에 수성당(지방유형문화재 제58호)이 있다.
 
직소폭포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산과 바다로 나눌 때, 산의 경치 중 가장 대표적인 절경을 직소폭포로 꼽는다. 중계계곡에 자리잡은 이 폭포는 높이가 약 30m가 되고 큰 낙차에서 떨어지는 일직선상의 물줄기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주변의 절벽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폭포 아래 소는 실상용추(實相龍湫)라고 직경이 약 50m정도이며 깊이를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에 모인 물이 제2폭포, 제3폭포를 이루며 옥녀담으로 모여들어 절경을 이루고, 옥수의 맑은 물은 봉래구곡(蓬萊九曲)으로 이어져 실상사터 앞을 지나 사자동을 거쳐 백천으로 이어진다. 봉래구곡은 제1곡 대소(大沼)에서 제9곡 암지(暗池)까지를 말하나 현재는 제5곡인 봉래곡을 9곡의 가장 중심인 관계로 언제부터인가 대표하는 이름으로 봉래구곡이라 부르고 있다. 
 
변산해수욕장

1932년 변산 일주도로가 개통된 후 부안과 전주일대의 여객운수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1933년 개장된 변산 해수욕장은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으로 대천 만리포 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매년 피서객이 10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개장초기 변산교(변산면 대항리 해창소재)가 개설되기 전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해창천을 나룻배로 건너 자동차로 갈아타고 비탈길을 달려 도착했던 곳이다. 완만한 경사와 알맞은 수온, 그리고 파도가 약해 안전성이 높은 해수욕장이다. 주변에 명승지가 많고 썰물때는 200m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져 약30만평이 넘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며 부드러운 모래와 깨끗한 바닷물로 매년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고사포해수욕장

변산 해수욕장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고사포 해수욕장은 곱고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경사 맑은 물이 해수욕장의 조건을 갖추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의 소나무가 자랑이었으나 그동안 군부대의 훈련장으로 이용하면서 개발에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1988년 군부대의 철수로 관리가 민간으로 이전되면서 변산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조용한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한 곳이다. 이곳은 변산 해수욕장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백사장의 길이도 변산 보다 조금 길어 앞으로 더욱 사랑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해수욕장 건너편에는 새우모양을 하고 있는 약3만평 넓이의 하섬이 있어 음력1일과 15일을 전후해 각각 3일정도의 썰물때면 하섬입구의 바다가 갈라지면서 바닷길이 생겨 「진도」의 바닷길에 버금가는 ‘모세의 기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섬은 원불교 3대 성지중 하나로서 수양을 위한 신도들만 출입을 하고있는 곳이다.

격포해수욕장

명승지인 채석강과 적벽강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격포 해수욕장은 맑은 물과 위치상의 이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전체적인 규모는 약간 좁으나 주변의 경치가 좋아 여름뿐만 아니가 4계절 찾아오는 해수욕장이다.

위 도

위도(蝟島)는 부안으로부터는 약 50Km, 격포항에서는 서쪽 14㎞거리에 위치한 총면적 면적 1,414㎢ 부안군위도면에서 가장 큰 섬으로 36㎞에 걸쳐 뻗어있는 복잡한 해안선 모습이 웅크린 고슴도치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고슴도치 위()자를 따 이름이 위도(蝟島)라 지어졌다.원래 부안군소속이었는데, 조선 고종33년(1896)에 전남 영광군에 소속되었다가 1963년 부안군에 다시 편입된 섬이다.

역사적으로는 군사적인 목적의 해안의 경비전초기지역할을 하였는데, 숙종 8년(1682) 위도 진()을 두어 당시 해군 무관이었던 첨사(僉使)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였고 지금 위도 진() 관아는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한편 조선시대 유배처(流配處)로 되어 귀양살이하던 고관(高官)들이 남기고 간 시부(詩賦)가 많이 남아있다.
 
진리, 대리, 상왕등도, 하왕등도, 치도, 거륜도등 8개의 리()로 섬이 30개(무인24, 유인6)에 인구가 1,575명(2001년기준)이고 320여 척의 배가 있으며(대부분 1∼5톤) 최근 어족이 많이 줄었으나 위도해역은 영광굴비의 본산지로 조기는 물론 보구치를 비롯해 감성돔, 우럭, 농어 등 서해중부권의 회유어족이 총집결하는 황금어장이다. 어족고갈로 한동안 침체됐던 위도는 90년대 들어 전라북도가 변산반도와 고군산열도를 연결하는 해상관광공원을 조성키로 결정해 관광개발에 대한 기대감과 해상교통의 개선으로 많은 관광객이 들어오고 있다.

칠산어장의 중심에 놓여 있는 위도 과거에 조기를 비롯하여 홍어, 병어, 회문어, 전어, 가오리, 갯장어, 삼치, 박대, 서대, 장대, 새우, 등뼈가 있는 오징어, 갈치 등 각종 생선이 잡히고 대구와 청어도 잡혀 동해안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고깃배가 와서 조업을 했다고 한다. 특히 조기가 많이 잡히는 3월에서 유월까지 파시가 들어서면 파장금에서 맞은편 식도까지 칠팔백척의 고깃배가 빽빽이 들어서 닻을 내려 밤이 되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들이 잡는 조기의 양은 배 한척당 평균 50∼60동이었다고 하는데 1동은 1000마리이니 대략 이곳에서만 4천만 마리의 조기가 잡히는 셈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영광굴비’란 말 외에 ‘위도굴비’ 혹은 ‘부안굴비’ 라는 말을 사용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파장금 항에 시장이 섰는데 위도의 파시는 흑산도, 연평도와 함께 서해의 3대 파시 중의 하나다. 파시가 들어서면 석유, 장작, 발동기, 각종 어구, 식량, 부식물, 각종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들어오고 요리집, 다방, 여관, 선술집, 이발관, 미용실, 도박장, 떡집 등이 빈터만 있으면 들어서 이십여호 남짓하던 파장금 마을은 수백 호가 들어서 수만 명이 북적거리는 중도시로 변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잡힌 조기는 대부분 영광군 법성포나 줄포를 통해 굴비로 가공되어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에 대량으로 조기를 잡아대자 어족자원이 차츰 줄어들게 되고 선박기술과 어로기술이 차츰 발달되어 어로작업은 차츰 먼바다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칠산바다로 산란을 위해 회유해 들어오는 조기 떼는 거의 사라졌다. 위도의 파시는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들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위도는 섬전체가 명승지로 위도팔경과 해수욕장 등 많은 관광자원이 있다
 
※위도팔경※

①왕등낙조(旺嶝落照) ②칠산어화(七山漁火) ③연안기경(沿岸奇景) ④선소귀범(船所歸帆) ⑤정금취연(井金炊煙) ⑥봉수출운(峰水出雲) ⑦망봉제월(望峰濟月) ⑧내원모종(內院暮鍾)
 
위도에는 어장(漁場)과 관련된 민속놀이가 많은데 그중 1978년 제19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탄 「띠벳놀이」가 대표적이다.최근 위도는 핵폐기장 건설 문제로 위도주민과 부안군민 그리고 정부사이에 상당한 논란과 마찰이 있다. 섬의 치도리에 세운다는 핵폐기장은 그 안전성이나 보상 등의 문제를 떠나서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를 이 지역에 살고있지 않은 사람이라고 무관심하지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소사

진서면 석포리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처음 창건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그 뒤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남아 오늘의 내소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그리고 고종 때 다시 관해선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현재는 내소사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절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고려동종(보물 제 277호), 대웅보전(보물 제 291호), 화엄경사본(보물 제278호), 영산회괘불탱화(보물 제1268호)등이 있으며, 그 중 대웅보전은 쇠못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으며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건물로써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에 각 3칸씩으로 그 의장과 건축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또한 이 건물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전의 정면 8칸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 창살인데, 전면 3칸으로 모두 8짝의 문짝은 온통 국화와 연꽃으로 수놓아져 있으며 이 꽃창살무늬는 그 소박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경건한 신앙을 자아내게 한다.

오색단청이 아니라 나무빛깔과 나무결을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 소지(素地)단청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으며, 꽃창살의 사방연속 무늬는 우리나라 장식문양중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창살 하나에까지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높은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3층 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 설선당과 요사(전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이르기까지 수령 150년에서 200년의 전나무가 600m길이로 터널을 이루고 있는데 이 길은 내소사만이 간직한 아름다움의 하나이다. 봄철의 왕 벚꽃과 가을단풍도 빼놓을 수 없는 내소사의 매력이다.

내소사 뒤쪽 골짜기를 타고 가파른 산길를 2㎞쯤 오르면 해발 300m높이에 청련암(靑蓮庵)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곰소만의 푸른 바다절경이 일품이며, 이곳에서 듣는 저녁 종소리는 소사모종(蘇寺暮鍾)의 변산팔경과 어울려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려준다.
 
 
개암사

부안 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명찰(名刹)로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통일신라 문무완 16년(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창했으며, 고려 충숙왕 원년(1313)에는 원감국사가 이 절을 중창하면서 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 사찰을 이루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 선탄선사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때 모두불타 인조 17년(1636) 계효선사가 중창했고 효종 9년(1658) 밀영선사와 혜증선사가 대법당을 지으면서 재건되었다. 개암사하면 그 뒤에 자리잡은 울금바위가 생각나듯이 개암사 뒤의 우금암(울금바위)와 앞자락의 개암사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저수지를 끼고 호반의 전망을 감상하면서

계곡에 들어서면 오래된 괴목이 울창한 숲을 지나 개암사에 이르는데 이 길은 백제의 옛모습을 되새겨 보는 길이기도 하다. 대웅전(보물 제296호)은 조선 후기의 장식성을 볼 수 있는 건물로써 건물규모에 비해 기둥이 굵어 장중한 외관을 가진다. 내부 또한 조각이 화려하며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용머리와 봉황 조각들이 사방팔방에서 뽑혀진 부재들 끝을 용머리와 봉황으로 장식하여 내부공간은 한마디로 용궁이다. 용과 봉황은 내부에 용 9마리와 봉황 13마리, 외부에 용 2마리와 봉황 9마리 그리고 도깨비 2마리가 조각되어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가람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이 절에서는 대웅전 자체가 불국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월명암

변산의 제 2봉인 쌍선봉(498m)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월명암은 692년(통일신라, 신문왕 12)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 14)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인 1908년에 다시 불타버리자 중고선사(中故禪師)가 어렵게 다시 절을 세웠다. 그러다가 8.15 광복 후 여순 반란군이 이곳에 들어와서 6.25직전,

그들 반란군에 의해 또다시 불에 타는 수난을 겪게되었다. 1954년 원경(圓鏡)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지금과 같은 작은 규모의 암자나마 다시 보게 되었다. 월명암은 변산팔경 중 월명무애(月明霧靄) 서해낙조(西海落照)를 자랑하는 곳이다. 월명암 뒤편 산봉우리의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등성이에서 서해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올라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낙조대이다. 낙조대의 절경은 우리나라에서 동해안 낙산의 일출과 서해안의 부안의 낙조대의 일몰로 양대 절경을 치고 있으며,

낙조대는 전망도 좋아 변산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앞에는 위도일대의 섬과 고군산열도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이다. 월명암에는 현재 법당을 비롯해서 사성선원 ,전각, 요사 등이 있다. 전각을 비롯한 대부분 건축물들이 근래에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 사성선원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서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구◆
 
[ 곰소 ]
칠산바다가 변산과 선운산 사이를 뚫고 들어와 내륙에 움푹 들어간 만을 이룬 것이 곰소만으로 천혜의 입지조건이 만든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잡이 어장이었다. 원래 곰소는 3개의 무인도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곰 두 마리가 살았다는 설이 있어 웅도라 칭하였다는 설과 또한

섬앞 남쪽바다 가운데 깊고 커다란 못이 있었다는 설이 있어 웅년도라 칭하였다는 양설이 있으나 이와 같은 설은 문헌에는 없고 구전에 의하여 내려오는 설화에 불과하여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고증에 의하면 고려 31대 공민왕 23년 서기 1374년경에 검모포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며, 그 후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검모포 재부안현 남웅영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은 해군의 요충지로 역할을 계속하여 오다가 일본의 1942년 대동아 전쟁당시, 일본인들이 우리 한민족에게서 수탈한 농산물과 군수물자 등 각종 착취한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군항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진서면 연동마을에서 곰소를 그리고 작도 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축조 도로를 개설하고 육지와 연결하여, 곰소가 육지가 되었으며 북으로 염전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서해안의 다른 갯벌과는 달리 갯골이 발달해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었으며 이곳으로 몰려드는 조기를 잡기 위해 어구를 설치하는데 드는 대나무가 인근에 많았으며 잡은 고기를 절이기 위해 필요한 소금을 굽기 위해 필요한 소나무 장작은 인근 변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이런 여러 조건이 이 지역을 조기의 최대집산지로서 기능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전북에서 군산다음으로 큰 항구로 각종어선이 5 6월의 파시 때는 수백 척이 드나들었으나 주변바다의 어족자원 고갈과 토사가 퇴적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어갔다. 그러나 주민들은 젓갈단지를 구성하고 칠산앞바다의 싱싱한 생선과 곰소염전의 최고품질의 소금으로 만든 곰소젓갈을 생산하여 다시 한번 과거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줄포 ]

칠산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곰소만 끝에 줄포가 있다. 과거 줄포읍 주변의 영전리, 남포리 일대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저습지에 줄풀이 1∼2미터 정도로 무성히 자라 ‘줄래’ 또는 ‘줄래포(茁萊浦)’라 불리다가 포구를 강조하는 뜻에서 ‘줄포’로 굳어졌다. 줄포는 배후에 고창, 무장, 흥덕, 고부, 김제, 부안 등의 고을을 끼고 있었으며, 옆으로 곰소만을 통해 칠산어장에 닿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도로망이 집중되고 연안항로의 중심지가 되어 이들 지역에서 나는 물산(物産)의 집산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오고간 산물은 쌀, 조기, 각종 젓갈류와 옹기 등이었다. 이처럼 수륙 교통의 요지였던 줄포는 객주 5∼6명이 머물러 상권을 지배했으며, 일제에 의해 군산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목포, 제물포, 남포와 함께 서해 4대 항구로 인정받았다.

일제는 일찍이 이곳에 눈길을 돌려 수탈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부터 이곳에 헌병대를 주둔시켜 의병의 습격으로부터 일인들을 보호하고, 미곡 무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객주들은 차츰 사라지고 1910년 합병 후부터는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바다를 매립하고 택지를 조성하여 경찰서, 식산은행, 줄포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남선전기주식회사, 소방서 등의 기관을 들여앉혔으며 항만을 축조하였다. 이는 모두 일본의 공산품을 들여오고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 내가기 위한 조처였다. 성어기가 되면 어족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칠산어장의 생선들이 수백 척의 배에 실려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 특히 위도에서 잡은 조기는 이곳에서 염장 가공되어 굴비로 만들어져 내륙으로 들어갔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줄포항엔 수백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집집마다 조기를 절여 말리느라 지붕까지 허옇게 뒤덮이곤 하였다. 또한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는 선도 높은 생선으로 담근 각종 젓갈은 줄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성을 구가하던 줄포항은 토사가 밀려들며 선박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그 위치를 곰소항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위도로 가던 연락선도 곰소에서 출발하게 되고 1958년도에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하면서 활기를 잃고 말았다. 1980년 이후로는 간간이 오가던 소형 선박마저 닿지 않는 완전한 폐항이 되고 말았다.

줄포에는 김상만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50호)가 있으며 1895년에 건축한 초가로 안채, 곡간채, 안 사랑채, 헛간채와 대장간까지 갖춘 10여동의 건물이 있다. 총 건평은 172평이며 안채, 안 사랑채는 우신각 지붕이고 헛간채와 곡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지붕은 샛대로 이었다. 이 집은 인촌 김성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인촌의 양부 김기중이 1907년에 지은 집이다. 그는 줄포를 통한 미곡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 격포항 ]
격포항은 인근의 줄포항과 곰소항이 토사의 퇴적으로 점차 수심이 낮아지자 인근에 위치한 격포항을 개발하여 접안시설과 냉동시설의 확충으로 점차 이 지역의 중심항구로 발달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수군의 근거지로 수군별장, 첨사 등을 두어 왔고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 관할의 격포진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는 위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이 왕래하고 주변의 채석강과 격포 해수욕장의 명승지가 인접하여 앞으로 고군산군도등 서해안 도서와 연결되는 교통망이 연결된다면 더욱 중심지로 발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라.발자취
간척사업
부안군 개간의 역사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던 우리나라는 보다 많은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농토를 넓히는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왔는데, 해안 간석지를 간척하는 일은 근대적인 토목기술로 대규모 인공제방이나 방조제의 축조가 가능하게 된 일제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부안군의 농토확장의 역사를 보면 1단계로 선사시대 이후 변산반도 주변의 산록을 중심으로 하서면, 상서면, 주산면 일대의 개간활동과 거주지화가 이루어 졌으며, 2단계로 낮은 평지 쪽으로 개간이 진행되어 하서면, 보안면, 주산면, 행안면일대의 낮은 평야지대와 구릉지대로 개간이 시작되었다.
 
3단계로 동진강 하류의 하구연안 일대의 백산면과 동진면의 간석지가 개간되었는데 1924∼1940년까지의 하천개수공사계획에 의해 하천 양안에 대규모의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간석지를 매립한 곳에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최근의 4단계는 계화도와 행안면을 연결하는 연육제방공사가 완료되어 광활한 계화도 간석지가 육지화 하면서 농경지로 개간된다.
 
부안군 간척사업
 
간척을 한 후 간척된 토지를 농경지 등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의 확보이다. 이런 점에서 부안군은 동진강이 흘러 하구를 형성하므로 국내 다른 지역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동진강은 길이 44km, 유역 면적 1,021㎢로 1975년 유역변경식 섬진강댐에 의해 역류되는 섬진강의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안군의 해안 계화 간척지와 동진강 하구연안 간척지의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동진강 하구는 변산반도와 옥구 사이에 큰 만입(灣入)으로 되어있고 동진강과 만경강에서 유출된 퇴적물과

금강하구에서 흘러온 퇴적물이 쌓이고 밖으로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이 방파제 구실을 해줘 간석지의 발달이 매우 유리하다. 부안군의 간척지는 대부분 동진강 하구연안의 간석지에 조성되었다. 다음단계의 간척사업은 1962년 이후 육지인 행안면과 계화도 사이의 2700㏊에 이르는 대단위 간척사업이다. 행안면 문포와 계화도 사이의 제1방조제와 계화도와 돈지 사이의 제2방조제를 건설하여 광활한 농경지를 조성하였다.
 
계화도 간척지

1944년 일본인들에 의해 간척공사가 착공되었으나 해방으로 중단된 후 1965년 섬진강 옥정리 댐의 완공으로 발생한 수몰민 1,768세대의 이주 정착을 위한 후보지로 1962년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간척공사가 재개되었다. 1963년 시작되어 1966년 제1호방조제(9,254m)가 완공되고 1965∼1968년 제2호방조제(3,556m)가 완공되었다. 그 후 1968년∼1978년의 10년 동안 청호저수지, 동진 도수로, 택지조성, 취락건설공사 등이 마무리되었다. 이전의 다른 간척지와 달리 농경지와 주거지를 완전 분리시켜 지대가 높고 식수공급이 원활한 기존의 어촌마을을 이용하여 택지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최근 건설되는 새로운 개척지 촌락의 일반적인 형태로 개척의 효율성보다는 주민 편의시설의 배치나 기계화 영농에 의한 농경지와의 거리단축을 미리 예상한 개발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3,068ha의 농경지가 조성되어있는데 이곳 논의 면적은 무주군의 전체 논 면적(3,952ha)보다 넓으며, 1980년부터 본격적으로 쌀을 생산하기 시작하여 연간 70만 톤의 쌀과 4,000여톤의 보리가 생산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은 병충해가 많지 않아 농약을 덜 쓰기 때문에 저공해 쌀로 인기가 높다. 1983년 부안 군 행안면에서 분리되어 부안군 계화면이 되었다.

새만금 간척사업

 
새만금 사업은 정부가 사라지는 농지를 대체하기 위한 농지확보와 부족한 수자원 확보 식량의 무기화에 대비한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부안의 변산반도에서 고군산도와 군산을 연결하는 대규모의 간척사업이다. 방조제 33km를 축조하여 40,100ha 해수면을 28,300ha의 토지와 11,300ha의 담수호로 개발하는 사업으로 바다를 막아 여의도 면적의 140배 정도의 땅을 만드는 사업이다. 정부는 이 사업이 완공되면 연간 14만 톤의 미곡 증산과 연간 10억㎥의 수자원 확보 및 방조제 축조로 상류 만경강, 동진강유역 12,000ha의 상습침수지역 완전 해소되고 방조제 도로설치로 교통개선(66km) 및 군산, 고군산군도, 변산반도, 백제문화권의 종합관광권이 조성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공사기간중 연13,390천명의 고용창출효과가 있다고 발표하였다.

완전 조성후 이 지역에 목축 수산 원예 관광 단지를 건설하고 고군산군도에 국제항을 건설하며 인구 30만 명 이상의 도시를 건설하여 서해안 핵심지역으로 개발한다고 하였다. 정부는 2004년까지 방조제를 완성하고 2011년까지 모든 사업을 완공하려고 하고 있는데 현재는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공사 중단의 이유는 1996년 시화호 오염을 계기로 환경단체등이 새만금호의 수질문제를 제기하자 정부는 1999년 5월∼2000년 6월까지 민관공동조사단을 구성하여 경제성, 수질, 해양환경 등을 조사했는데 이 과정에 정부 및 전라북도와 시민단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정부 부처간에도 이견이 있어 이 사업에 대한 최종 결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현재 2001.5.25 정부는 친환경적 순차개발 계획 확정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 사업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다. 식량증산은 현재 식량이 남는 형편이며, 무한한 가치를 지닌 갯벌을 없앰으로써 오히려 식량자원을 없앤다는 의견과, 갯벌의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 확보되는 수자원의 수질문제 그리고 사업의 지연에 따른 사업비의 증가에 따른 경제성의 문제 등 현재 많은 논란과 대립이 있는 지역이다. 이 사업이 계획되고 시행된 지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데도 이제야 이런 사안에 대해 사회문제화 되고 재검토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을 벌려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업의 계획 및 사업 결정단계에서 이런 논의와 검토가 있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현재의 관점에서 생각한 해결책보다는 좀더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미래적인 관점에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마.먹거리

[ 계화도 간척지 쌀 ]
 
간척지의 대표인 계화도의 간척지 쌀은 염기성토양으로 벼의 재배환경이 청정바다와 인접하여 생육기간중 해풍을 맞고 자라므로, 타지역 보다 병충해의 발생이 적고 미량원소가 풍부하고 찰기가 있으며 감칠맛이 나는 저공해 쌀이다. 일조량이 많고, 병충해 발생이 적은 신생토양지인 계화도에서 생산되는 계화도 간척지 쌀은 맛과 질이 우수하고 미량원소가 풍부한 저공해 쌀이다

[ 곰소젓갈 ]
 
곰소항 어귀에 들어서면 젓갈냄새가 진동하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젓갈은 멸치액젖을 비롯하여 새우젓, 바지락젓, 황석어젓, 갈치속젓, 조기젓, 멸치젓, 고노리젓, 밴댕이젓, 잡젓 등 20여종으로 젓갈만 전문으로 판매하는 집도 20여 집이 넘는다. 10여 년 전 만해도 젓갈 가공업은 부업의 형태였지만 이제는 연간 70억 이상 판매되는 주소득원이 되었다. 곰소만은 육지가 300여m의 산지로 되어있고 큰 강이 유입되지 않으며, 인근에 공장이 없어 갯벌이 아주 깨끗하다. 이곳에 각종 조개류가 묻혀있고 인근에서 잡히는 각종 잡어들이 곰소항에 들어와 바로 소금에 절여 가공되기 때문에 맛이 좋고 신선도가 뛰어나다.

[ 부안김 ]
 
부안김은 대륙붕이 잘 발달되어 유기질 및 서해안 갯벌이 풍부한 변산반도의 공해 없는 맑은 바다에서 생산되고, 주변연안의 지리적 입지가 양호하여 김이 성장하는데 최적의 기온을 유지하면서 매년 전국에 부안김의 맛과 향의 명성이 얻어지고 있다. 과거 김 생산으로 명성을 얻었던 남해지역에서 각종 해난사고 등으로 해양오염이 가중되어 김이 품질이 크게 떨어지는것과는 대조적으로 부안의 김은 이러한 오염이 없다는 것이 장점으로 우수한 김을 생산하면서 전국에 지역특산품으로 위치를 다져오고 있다. 부안군 지역에서는 김양식을 약800㏊에서 300여 가구가 김양식 사업에 참여해 40억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백합죽과 바지락 죽 ]

백합은 껍데기는 길이 약 90mm, 높이 약 72mm, 나비 약 43mm의 둥근 삼각형으로 두껍고 견고하며 껍데기 표면은 암갈색에서 회백갈색까지 다양하고, 각피는 매끈하고 광택이 난다. 또 흑갈색의 넓은 띠가 팔자(八字) 모양을 하고 있다. 뒤쪽 끝이 뾰족한 편이며 양 껍데기를 닫으면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민물의 영향을 받는 조간대 아래 수심 20m까지의 모래나 펄에 서식하는데, 산란기는 5∼11월이고 어린 조개는 한천질의 끈을 내서 조류를 타고 이동한다. 맛이 좋아 식용하며 껍데기는 약품 용기 또는 바둑의 흰 돌로 이용했었다. 양식조개로서 중요한 종으로, 한국·일본·타이완·중국·필리핀·동남아시아 등지에 분포한다.백합은 다른 조개에 비해 조갯살이 푸짐하고 쫄깃한 맛이 특징이다. 특히 '맛보다 영양으로 먹는 조개'란 말이 있을 정도로 영양도 뛰어난 고급 요리감이다. 초고추장에 찍어 회로 먹어도 좋지만 부안 지역에선 주로 죽, 탕,

구이로 먹는다. 김과 깻가루 고명을 얹은 백합죽은 노약자나 어린이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보양식으로 즐겨 찾는다. 백합은 서해안의 중심지인 부안의 특산품으로 조선시대부터 임금님의 진상품으로 이곳 부안에서 백합을 올렸다고 전한다. 30여 가지의 영양소가 있으며 철분이 대량 함유되어 있어 여성들의 빈혈과 숙취에 좋으며 핵산(DNA)은 원기회복에 특효가 있다고 한다. 백합죽은 부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로 그 맛이 독특한데, 횟감으로나 구이 요리로도 좋지만 죽으로 요리하면 더욱 맛이 좋아 부안군은 백합죽을 향토전통음식으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대파, 마늘 등 간단한 양념으로 끓인 백합탕은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기억해둬야 할 음식이다. 시원한 국물이 알코올에 찌든 속을 확 풀어준다.

바지락은 껍데기의 길이가 약 40mm, 높이 약 30mm로 큰 것은 껍데기길이가 약 60mm에 달하는 것도 있다. 껍데기는 달걀 모양 타원형으로 부풀어오른 모양이며 딱딱하며, 각피는 거칠고 크기·무늬·형태 등이 서식지에 따라 다르다. 색깔은 변이가 많으며 왼쪽껍데기와 오른쪽껍데기가 서로 다른 것도 있다. 조간대의 모래나 진흙이 섞인 곳에 분포하며, 어린 조개는 부풀어오른 정도가 약하며 족사(
足絲)로 돌에 붙어산다. 산란기는 초여름부터 초가을이며 5월과 10∼11월의 2회 성기(盛期)가 있다. 번식과 성장이 빨라서 양식도 하는데, 1㎡당 0.5∼5kg을 수확할 수 있으며 1년 간 성장하면 길이가 1.5∼1.6배, 무게는 2.9∼3.5배가되며 간조 때 4∼5시간 노출되고 모래가 많은 펄의 자갈이 섞인 곳이 적지이다. 젓갈을 담그거나 날것을 요리하여 먹지만 늦봄부터 초여름까지의 번식기에는 중독의 위험이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양식이 쉬워 연안어민들이 예로부터 많이 양식했고, 식품으로 소비되는 것 외에 최근에는 수출용 통조림의 원료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조개이다. 한국(특히 서해안)·사할린섬·일본·중국·타이완 등지에 분포한다. 변산 해변의 바지락죽도 백합죽에 못지 않은 지명도를 누리고 있다. 오히려 최근에는 백합죽보다 바지락죽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부안 사람들이 전한다. 실제 부안 읍내에는 바지락죽 간판을 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이곳의 바지락죽에선 '뻘'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조개가 품고 있던 모래나 뻘이 없다는 것이다. 바지락 삶은 국물에 녹두와 당근 등을 넣어 끓이는데, 맛은 부드럽고 달달하다. 바지락 살이 통째로 들어있어 씹는 맛도 좋다. 기름진 서해 갯벌에서 금방 캐어낸 싱싱한 바지락을 가지고 요리하기 때문에 쫄깃쫄깃한 맛과 향이 일품이다. 지금은 어디를 가든 성업을 이루고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바지락죽은 없었다. 워낙 흔해빠진 조개라서 이걸 가지고 요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바.축제

[ 위도 띠뱃놀이 ]
위도는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14km 떨어진 서해안에서 큰 섬으로 섬 생활은 고기잡이가 주업이다. 따라서 풍랑을 달래고 풍어를 비는 토속신앙으로 예부터 독특한 띠뱃놀이를 해온 민속이 있었다. 점차 사라져 가는 우리의 전통민속을 보존해 온 위도 띠뱃놀이는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1978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이 띠뱃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곳은 파장금에서 8km쯤 덜어진 대리마을로 위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동제는 원당제, 주산돌기, 용왕제에 이어 띠배에 액 띄워 보내기 순으로 진행되는데 육지에서 정초에 지내는 당산제와 성격이 같으며, 띠배에 액 띄워보내기는 서남 해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섣달이 되면 대리 사람들은 동네 어귀에 왼새끼에 백지 조각을 낀 인줄을 치고 동네에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당집 주위도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쳐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는 산막으로 옮겨가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동네를 깨끗이 한 다음 정월 초사흗날 원당굿을 지내는데 원당은 마을 동쪽 높은 언덕에 있다. 당집 안에는 산신상, 원당마누라상, 본당마누라상, 옥적부인상, 애기씨상, 수문장장, 장군서낭상 등의 마을과 바다를 수호하는 7위의 신상이 모셔져 있다. 초사흗날 이른 아침 기잡이를 선두로 무당, 화주, 화장, 선주 등이 흥겨운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원당에 오른다. 회식밥, 쌀 두 말, 콩 한 말, 돼지머리, 술, 과일, 포 등의 제물을 진설하고 무당이 축수를 한다. 이 때 마을 사람들은 엎디어 절을 하며 저마다의 소원을 빈다. 무당의 축수가 끝나면 산신상 앞에서 당굿이 시작된다.

굿이 끝나면 제물을 당 앞으로 내다놓고 음복을 하는데 이 때 무당은 선주들에게 산()쌀을 집어주어 짝수가 되면 그 해 무사 안녕하고 고기를 많이 잡는다는 '산점'을 친다. 이 때 선주들은 성의껏 금전을 젯상 위에 놓아준다. 원당굿이 끝나면 그 해에 배에 모실 신을 지정하는 깃굿을 하고 농악을 치며 내려온다. 오는 도중에 바다로 돌출한 용바위에 올라 제수로 쓴 음식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죽은 무주고혼들에게 풀어먹인다. 이어서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주산돌기를 시작한다. 이는 일종의 지신밟기의 성격인데 마을 사람들이 동아줄을 어깨에 메고 농악에 맞추어 에해용 소리를 부르며 마을을 돈다.

주산돌기에 이어 오후 2시쯤 만조가 되면 마을 앞 백사장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는 무당이 "바다를 향해 재배" 하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무당의 춤과 사설이 계속되며 여인들은 용왕님에게 먹일 회식밥을 내오고 남자들은 띠배를 메고 나온다. 회식밥은 제수로 쓰인 음식들을 거두어 모아 물을 부어 만든 물밥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띠배를 돌며 가래로 회식밥을 퍼서 띠배에 담는다. 이 때 어낭창 가래질 소리를 한다. 가래질 소리란 만선을 이룬 배가 육지에 있는 그릇에 고기를 퍼담을 때 가래를 이용해 퍼서 담게 되는데 이 때 부르는 노동요이다.

가래질 소리가 계속되며 회식밥이 띠배에 퍼서 담겨지는 동안 부녀자들은 무당과 함께 몇 번이고 절을 하며 한 해의 재수를 빈다. 회식밥을 다 퍼담으면 농악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 사람들은 '술배소리'와 '배치기소리'를 한다. 이는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배를 저어가면서 즉흥적으로 느끼는 것을 엮어서 부르는 흥겨운 노래다. 배치기 소리가 장단이 더 빠르며 더 흥겹다. 술배소리와 배치기 소리가 끝나면 농악과 춤이 계속되면서 띠배를 물에 띄워 모선에 연결시킨다. 띠배는 길이 2미터, 폭 1미터 정도의 판자 위에 짚과 띠풀을 둘러 엮어 만든 모형배이다. 배 안에는 긴 백지 위에 동방청제축액대장군(東方靑帝逐厄大將軍),

서방백제축액대장군, 남방적제축액대장군, 북방흑제축액대장군, 중앙황제축액대장군의 오방신장에 맞춰 쓴 액을 쫓는 깃대를 세우고, 동네 우물가나 당산나무 아래 그리고 동네의 터가 센 곳에 액을 몰아가라고 세워 두었던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거두어 싣는다. 농악과 선주기가 모선에 오르면 배치기소리를 더욱 우렁차게 부르면서 용왕님이 먹을 회식밥과 묵은해의 재액인 허수아비를 가득 실은 띠배는 모선에 이끌려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간다. 농악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재액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전송하는 환호성도 점점 잦아든다

[ 매창문화제 ]

부안읍 매창공원에서 매년 4월말 경에 열리는 축제로 이매창은 1573년 부안에서 현리인 이탕종의 딸로 태어나 1610년에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선시대 4대 여류시인중 한사람이다. 매창의 신분은 기생으로 시를 잘 짓고 거문고 연주에 뛰어났을 뿐만이 아니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품위와 절개를 지키며 당대의 문장가 및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들 중 매창이 평생 그리하며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은 천민 출신으로 예론의 대가이며 유성룡을 따라 의병으로 활동한 유희경과 양반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호방한 성격의 허균과 10여년동안 시문과 인생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매창은 38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통해 지은 수백 편의 시문 가운데, 한시 58수가 <매창집>에, 시조 '이화우' 1수가 <가곡원류>에 전하고 있는데,

매창집은 미국 하버드대학과 간송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다. 매창 사후 주옥같은 시어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크게 공헌한 매창의 삶과 시문학 정신을 기리는 매창 추모제를 부안 지망의 시인묵객들로 구성된 부풍율사에서 수백 년 동안 지내왔으나, 2001년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매창문화제로 확대 다양한 장르의 행사를 개최하여 그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하고 있다. 주요 행사 내용은 세미나, 추모제례, 시화 미술 작품전시회, 장기 및 노래 자랑, 농악경연, 국악한마당, 백일장 및 사생대회 등이 있다. 추모제례는 오래 전부터 하였으나 문화제 형태는 작년에 1회를 개최하였으나 올해는 부안 예술제(10월 개최 예정)에 통합해서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 해넘이 축제 ]

매년 12월 31일 포항의 해맞이 축제에 상대적으로 부안의 격포에서 해넘이 축제를 개최한다. 내용은 상설이벤트, 식전행사, 공식행사, 부대행사로 나누어지며 작년의 경우 띠배에 희망소지 달기, 모닥불 피우기, 관악대 퍼레이드, 풍물패 공연, 백곰수영축제, 칠선녀 공연, 무용수 퍼포먼스, 일몰 카운트타운, 희망의 불 이어가기, 띠배띄우기, 불꽃놀이 및 레이저쇼, 해넘이 가요제(인기가수공연), 캠프파이어 및 청소년 페스티발(락·댄싱) 등의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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