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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의 여행정보
=== 변산 8경
* 제1경 웅연조대(熊淵釣臺)
줄포에서 곰소 앞바다를 지나는 서해바다의 아름다운 정경으로 바다에 펼쳐지는 어선들의 행진과 야경이 물에 어울리는 모습과, 강촌의 어부들이 낚시대를 둘러메고 창랑가를 부르는 경치를 말한다.
* 제2경 직소폭포(直沼爆布)
내변산의 중심에 있는 직소폭포의 선경을 말하며 “직소폭포와 중계계곡을 보지 않고 변산을 말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 제3경 소사모종(蘇寺暮鍾)
가인봉을 배경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고색 창연한 내소사의 경치와 곰소만의 푸른 바다의 정경을 깔고 어둠을 헤치고 은은하게 울려 펴지는 저녁 종소리를 말한다.
* 제4경 월명무애(月明霧靄)
월명암의 법당 앞 마당가에 서서 둥실 떠오르는 밝은 달을 쳐다보는 경치와 일출과 함께 새벽잠을 깬 산새들의 노래. 자욱한 안개와 구름이 춤을 추는 황홀한 비경, 구름위로 보이는 산봉우리들의 자태는 한 폭의 산수화이다.
* 제5경 서해낙조(西海落照)
낙조대에서 고군산열도의 섬들과 위도를 앞에 두고 온 바다를 진홍빛으로 불타게 하는 석양의 장관을 말한다.
* 제6경 채석범주(彩石帆舟)
억만년 파도에 씻겨온 바위와 동굴 대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석강의 조화와 신비를 말한다.
* 제7경 지포신경(止浦神景)
변산면 지서리의 옛 지명이 지지포(知止浦)인데 이곳에서 쌍선봉 등정중 산중턱에 오르면 시원한 바람과 수많은 봉우리 사이로 서해의 조망이 그림 같고 산속에 신선이 되어 별유천지에 떠있는 듯한 산수의 진경을 볼 수 있음을 말한다.
* 제8경 개암고적(開岩古蹟)
개암사는 변산의 사대명찰중의 하나로 백제유민들이 진을 치고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한 본거지이다. 울금바위의 위용과 주류성의 자취는 그윽한 역사의 향기를 소담하게 풍기고 있다.
※변산 36경※
내변(內邊)
①소뿔바위 ②백천내(百川) ③석문동 ④군신봉(君臣峰) ⑤봉래구곡 ⑥직소폭포 ⑦월명암
⑧낙조대 ⑨쌍선봉 ⑩와룡소(臥龍沼) ⑪감소 ⑫의상봉의 마천대
외변(外邊)
①영은폭포(靈隱瀑布) ②금선대 ③개암사④ 울금바위 ⑤월정약수 ⑥주류성지 ⑦보령원
(保寧院) ⑧도요지 ⑨우반이굴 ⑩성계암 ⑪청련암 ⑫내소사
해변(海邊)
①월포 ②비득치(飛得峙) ③변산해수욕장 ④채석강 ⑤수락동(水落洞) ⑥언포 ⑦적벽강
⑧비안도 ⑨계화도 ⑩곰소 ⑪죽도(竹島) ⑫작도(鵲島)
채석강
적벽강
직소폭포
변산해수욕장
1932년 변산 일주도로가 개통된 후 부안과 전주일대의 여객운수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1933년 개장된 변산 해수욕장은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해수욕장으로 대천 만리포 해수욕장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의 하나로 매년 피서객이 10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개장초기 변산교(변산면 대항리 해창소재)가 개설되기 전에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해창천을 나룻배로 건너 자동차로 갈아타고 비탈길을 달려 도착했던 곳이다. 완만한 경사와 알맞은 수온, 그리고 파도가 약해 안전성이 높은 해수욕장이다. 주변에 명승지가 많고 썰물때는 200m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져 약30만평이 넘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며 부드러운 모래와 깨끗한 바닷물로 매년 관광객이 증가하고 있다.
고사포해수욕장
변산 해수욕장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고사포 해수욕장은 곱고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경사 맑은 물이 해수욕장의 조건을 갖추고 끝없이 이어지는 해변의 소나무가 자랑이었으나 그동안 군부대의 훈련장으로 이용하면서 개발에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1988년 군부대의 철수로 관리가 민간으로 이전되면서 변산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조용한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한 곳이다. 이곳은 변산 해수욕장의 장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백사장의 길이도 변산 보다 조금 길어 앞으로 더욱 사랑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해수욕장 건너편에는 새우모양을 하고 있는 약3만평 넓이의 하섬이 있어 음력1일과 15일을 전후해 각각 3일정도의 썰물때면 하섬입구의 바다가 갈라지면서 바닷길이 생겨 「진도」의 바닷길에 버금가는 ‘모세의 기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섬은 원불교 3대 성지중 하나로서 수양을 위한 신도들만 출입을 하고있는 곳이다.
격포해수욕장
명승지인 채석강과 적벽강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격포 해수욕장은 맑은 물과 위치상의 이점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전체적인 규모는 약간 좁으나 주변의 경치가 좋아 여름뿐만 아니가 4계절 찾아오는 해수욕장이다.
위 도
내소사
진서면 석포리에서 북쪽으로 1.2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소래사(蘇來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처음 창건시에는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는데 그 뒤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남아 오늘의 내소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인조 11년(1633)에 청민선사가 그리고 고종 때 다시 관해선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예전에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함께 변산의 4대 명찰로 꼽혔으나 현재는 내소사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절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고려동종(보물 제 277호), 대웅보전(보물 제 291호), 화엄경사본(보물 제278호), 영산회괘불탱화(보물 제1268호)등이 있으며, 그 중 대웅보전은 쇠못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으며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건물로써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에 각 3칸씩으로 그 의장과 건축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또한 이 건물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전의 정면 8칸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 창살인데, 전면 3칸으로 모두 8짝의 문짝은 온통 국화와 연꽃으로 수놓아져 있으며 이 꽃창살무늬는 그 소박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경건한 신앙을 자아내게 한다.
오색단청이 아니라 나무빛깔과 나무결을 그대로 드러나게 만든 소지(素地)단청은 아름다움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으며, 꽃창살의 사방연속 무늬는 우리나라 장식문양중 최고수준을 보여주는 것으로 창살 하나에까지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아내고자 했던 옛사람들의 높은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찾아볼 수 있다. 대웅보전 안에는 후불벽화로 ‘백의관음보살좌상’이 그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후불벽화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3층 석탑(전북유형문화재 제124호) 설선당과 요사(전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개암사
부안 지역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명찰(名刹)로 백제 무왕 35년(634)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통일신라 문무완 16년(676)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중창했으며, 고려 충숙왕 원년(1313)에는 원감국사가 이 절을 중창하면서 30여 동의 건물을 지어 대규모 사찰을 이루었다. 조선 태종 14년(1414) 선탄선사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때 모두불타 인조 17년(1636) 계효선사가 중창했고 효종 9년(1658) 밀영선사와 혜증선사가 대법당을 지으면서 재건되었다. 개암사하면 그 뒤에 자리잡은 울금바위가 생각나듯이 개암사 뒤의 우금암(울금바위)와 앞자락의 개암사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저수지를 끼고 호반의 전망을 감상하면서
계곡에 들어서면 오래된 괴목이 울창한 숲을 지나 개암사에 이르는데 이 길은 백제의 옛모습을 되새겨 보는 길이기도 하다. 대웅전(보물 제296호)은 조선 후기의 장식성을 볼 수 있는 건물로써 건물규모에 비해 기둥이 굵어 장중한 외관을 가진다. 내부 또한 조각이 화려하며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용머리와 봉황 조각들이 사방팔방에서 뽑혀진 부재들 끝을 용머리와 봉황으로 장식하여 내부공간은 한마디로 용궁이다. 용과 봉황은 내부에 용 9마리와 봉황 13마리, 외부에 용 2마리와 봉황 9마리 그리고 도깨비 2마리가 조각되어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가람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이 절에서는 대웅전 자체가 불국토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월명암
변산의 제 2봉인 쌍선봉(498m)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월명암은 692년(통일신라, 신문왕 12) 부설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내려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중건하였다. 1848년(헌종 14)에는 성암화상(性庵和尙)이 크게 고쳐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한말에 의병들이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 싸울 때인 1908년에 다시 불타버리자 중고선사(中故禪師)가 어렵게 다시 절을 세웠다. 그러다가 8.15 광복 후 여순 반란군이 이곳에 들어와서 6.25직전,
그들 반란군에 의해 또다시 불에 타는 수난을 겪게되었다. 1954년 원경(圓鏡)스님이 군내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지금과 같은 작은 규모의 암자나마 다시 보게 되었다. 월명암은 변산팔경 중 월명무애(月明霧靄) 서해낙조(西海落照)를 자랑하는 곳이다. 월명암 뒤편 산봉우리의 오솔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등성이에서 서해바다가 한눈에 보이고 좌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우뚝 솟아올라 있는데 이곳이 바로 낙조대이다. 낙조대의 절경은 우리나라에서 동해안 낙산의 일출과 서해안의 부안의 낙조대의 일몰로 양대 절경을 치고 있으며,
낙조대는 전망도 좋아 변산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고 특히 앞에는 위도일대의 섬과 고군산열도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이다. 월명암에는 현재 법당을 비롯해서 사성선원 ,전각, 요사 등이 있다. 전각을 비롯한 대부분 건축물들이 근래에 조성되었는데 대표적인 건축 사성선원은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서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포구◆
그러나 역사적인 고증에 의하면 고려 31대 공민왕 23년 서기 1374년경에 검모포란 이름으로 불렸다 하며, 그 후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 검모포 재부안현 남웅영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곳은 해군의 요충지로 역할을 계속하여 오다가 일본의 1942년 대동아 전쟁당시, 일본인들이 우리 한민족에게서 수탈한 농산물과 군수물자 등 각종 착취한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군항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진서면 연동마을에서 곰소를 그리고 작도 마을을 연결하는 제방을 축조 도로를 개설하고 육지와 연결하여, 곰소가 육지가 되었으며 북으로 염전이 형성되었다. 이곳은 서해안의 다른 갯벌과는 달리 갯골이 발달해있어
썰물 때에도 배가 다닐 수 있었으며 이곳으로 몰려드는 조기를 잡기 위해 어구를 설치하는데 드는 대나무가 인근에 많았으며 잡은 고기를 절이기 위해 필요한 소금을 굽기 위해 필요한 소나무 장작은 인근 변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이런 여러 조건이 이 지역을 조기의 최대집산지로서 기능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전북에서 군산다음으로 큰 항구로 각종어선이 5 6월의 파시 때는 수백 척이 드나들었으나 주변바다의 어족자원 고갈과 토사가 퇴적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을 잃어갔다. 그러나 주민들은 젓갈단지를 구성하고 칠산앞바다의 싱싱한 생선과 곰소염전의 최고품질의 소금으로 만든 곰소젓갈을 생산하여 다시 한번 과거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줄포 ]
칠산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곰소만 끝에 줄포가 있다. 과거 줄포읍 주변의 영전리, 남포리 일대에까지 조수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저습지에 줄풀이 1∼2미터 정도로 무성히 자라 ‘줄래’ 또는 ‘줄래포(茁萊浦)’라 불리다가 포구를 강조하는 뜻에서 ‘줄포’로 굳어졌다. 줄포는 배후에 고창, 무장, 흥덕, 고부, 김제, 부안 등의 고을을 끼고 있었으며, 옆으로 곰소만을 통해 칠산어장에 닿을 수 있어 자연스럽게 도로망이 집중되고 연안항로의 중심지가 되어 이들 지역에서 나는 물산(物産)의 집산지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오고간 산물은 쌀, 조기, 각종 젓갈류와 옹기 등이었다. 이처럼 수륙 교통의 요지였던 줄포는 객주 5∼6명이 머물러 상권을 지배했으며, 일제에 의해 군산항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목포, 제물포, 남포와 함께 서해 4대 항구로 인정받았다.
일제는 일찍이 이곳에 눈길을 돌려 수탈의 중심지로 삼았다. 구한말부터 이곳에 헌병대를 주둔시켜 의병의 습격으로부터 일인들을 보호하고, 미곡 무역을 통해 호남평야의 쌀을 빼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객주들은 차츰 사라지고 1910년 합병 후부터는 일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바다를 매립하고 택지를 조성하여 경찰서, 식산은행, 줄포출장소, 우편국, 곡물검사소, 남선전기주식회사, 소방서 등의 기관을 들여앉혔으며 항만을 축조하였다. 이는 모두 일본의 공산품을 들여오고 호남평야의 쌀을 실어 내가기 위한 조처였다. 성어기가 되면 어족이 다양하기로 유명한 칠산어장의 생선들이 수백 척의 배에 실려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 특히 위도에서 잡은 조기는 이곳에서 염장 가공되어 굴비로 만들어져 내륙으로 들어갔다. 조기잡이 철이 되면 줄포항엔 수백 척의 배들이 정박해 있었고, 집집마다 조기를 절여 말리느라 지붕까지 허옇게 뒤덮이곤 하였다. 또한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에서 잡히는 선도 높은 생선으로 담근 각종 젓갈은 줄포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전성을 구가하던 줄포항은 토사가 밀려들며 선박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면서 차츰 그 위치를 곰소항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위도로 가던 연락선도 곰소에서 출발하게 되고 1958년도에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곰소항으로 이전하면서 활기를 잃고 말았다. 1980년 이후로는 간간이 오가던 소형 선박마저 닿지 않는 완전한 폐항이 되고 말았다.
줄포에는 김상만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50호)가 있으며 1895년에 건축한 초가로 안채, 곡간채, 안 사랑채, 헛간채와 대장간까지 갖춘 10여동의 건물이 있다. 총 건평은 172평이며 안채, 안 사랑채는 우신각 지붕이고 헛간채와 곡간채는 맞배지붕이다. 지붕은 샛대로 이었다. 이 집은 인촌 김성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인촌의 양부 김기중이 1907년에 지은 집이다. 그는 줄포를 통한 미곡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 격포항 ]
라.발자취
간척사업
마.먹거리
바.축제 [ 위도 띠뱃놀이 ]
굿이 끝나면 제물을 당 앞으로 내다놓고 음복을 하는데 이 때 무당은 선주들에게 산(算)쌀을 집어주어 짝수가 되면 그 해 무사 안녕하고 고기를 많이 잡는다는 '산점'을 친다. 이 때 선주들은 성의껏 금전을 젯상 위에 놓아준다. 원당굿이 끝나면 그 해에 배에 모실 신을 지정하는 깃굿을 하고 농악을 치며 내려온다. 오는 도중에 바다로 돌출한 용바위에 올라 제수로 쓴 음식을 바다에 던져 바다에서 죽은 무주고혼들에게 풀어먹인다. 이어서 마을 앞 당산나무 아래에 모여 주산돌기를 시작한다. 이는 일종의 지신밟기의 성격인데 마을 사람들이 동아줄을 어깨에 메고 농악에 맞추어 에해용 소리를 부르며 마을을 돈다.
주산돌기에 이어 오후 2시쯤 만조가 되면 마을 앞 백사장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용왕제는 무당이 "바다를 향해 재배" 하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절을 하면서 시작된다. 이어 무당의 춤과 사설이 계속되며 여인들은 용왕님에게 먹일 회식밥을 내오고 남자들은 띠배를 메고 나온다. 회식밥은 제수로 쓰인 음식들을 거두어 모아 물을 부어 만든 물밥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띠배를 돌며 가래로 회식밥을 퍼서 띠배에 담는다. 이 때 어낭창 가래질 소리를 한다. 가래질 소리란 만선을 이룬 배가 육지에 있는 그릇에 고기를 퍼담을 때 가래를 이용해 퍼서 담게 되는데 이 때 부르는 노동요이다.
가래질 소리가 계속되며 회식밥이 띠배에 퍼서 담겨지는 동안 부녀자들은 무당과 함께 몇 번이고 절을 하며 한 해의 재수를 빈다. 회식밥을 다 퍼담으면 농악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리며 마을 사람들은 '술배소리'와 '배치기소리'를 한다. 이는 만선이 되어 돌아올 때 배를 저어가면서 즉흥적으로 느끼는 것을 엮어서 부르는 흥겨운 노래다. 배치기 소리가 장단이 더 빠르며 더 흥겹다. 술배소리와 배치기 소리가 끝나면 농악과 춤이 계속되면서 띠배를 물에 띄워 모선에 연결시킨다. 띠배는 길이 2미터, 폭 1미터 정도의 판자 위에 짚과 띠풀을 둘러 엮어 만든 모형배이다. 배 안에는 긴 백지 위에 동방청제축액대장군(東方靑帝逐厄大將軍),
서방백제축액대장군, 남방적제축액대장군, 북방흑제축액대장군, 중앙황제축액대장군의 오방신장에 맞춰 쓴 액을 쫓는 깃대를 세우고, 동네 우물가나 당산나무 아래 그리고 동네의 터가 센 곳에 액을 몰아가라고 세워 두었던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거두어 싣는다. 농악과 선주기가 모선에 오르면 배치기소리를 더욱 우렁차게 부르면서 용왕님이 먹을 회식밥과 묵은해의 재액인 허수아비를 가득 실은 띠배는 모선에 이끌려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간다. 농악소리도 점점 멀어진다. 재액에게 다시는 오지 말라고 전송하는 환호성도 점점 잦아든다
[ 매창문화제 ]
부안읍 매창공원에서 매년 4월말 경에 열리는 축제로 이매창은 1573년 부안에서 현리인 이탕종의 딸로 태어나 1610년에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선시대 4대 여류시인중 한사람이다. 매창의 신분은 기생으로 시를 잘 짓고 거문고 연주에 뛰어났을 뿐만이 아니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품위와 절개를 지키며 당대의 문장가 및 풍류객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들 중 매창이 평생 그리하며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은 천민 출신으로 예론의 대가이며 유성룡을 따라 의병으로 활동한 유희경과 양반 출신으로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호방한 성격의 허균과 10여년동안 시문과 인생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매창은 38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통해 지은 수백 편의 시문 가운데, 한시 58수가 <매창집>에, 시조 '이화우' 1수가 <가곡원류>에 전하고 있는데,
매창집은 미국 하버드대학과 간송문고에서 소장하고 있다. 매창 사후 주옥같은 시어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크게 공헌한 매창의 삶과 시문학 정신을 기리는 매창 추모제를 부안 지망의 시인묵객들로 구성된 부풍율사에서 수백 년 동안 지내왔으나, 2001년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매창문화제로 확대 다양한 장르의 행사를 개최하여 그 의미를 더욱 새롭게 하고 있다. 주요 행사 내용은 세미나, 추모제례, 시화 미술 작품전시회, 장기 및 노래 자랑, 농악경연, 국악한마당, 백일장 및 사생대회 등이 있다. 추모제례는 오래 전부터 하였으나 문화제 형태는 작년에 1회를 개최하였으나 올해는 부안 예술제(10월 개최 예정)에 통합해서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 해넘이 축제 ]
매년 12월 31일 포항의 해맞이 축제에 상대적으로 부안의 격포에서 해넘이 축제를 개최한다. 내용은 상설이벤트, 식전행사, 공식행사, 부대행사로 나누어지며 작년의 경우 띠배에 희망소지 달기, 모닥불 피우기, 관악대 퍼레이드, 풍물패 공연, 백곰수영축제, 칠선녀 공연, 무용수 퍼포먼스, 일몰 카운트타운, 희망의 불 이어가기, 띠배띄우기, 불꽃놀이 및 레이저쇼, 해넘이 가요제(인기가수공연), 캠프파이어 및 청소년 페스티발(락·댄싱) 등의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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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松 香 ( 솔 향 기 ) 원문보기 글쓴이: 松 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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