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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사야 44:6~8
오늘 본문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의 증인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세상 가운데 증거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누구시라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고 계신지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맨 처음에 하나님은 자기를 소개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할 당시에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을 했던 분이기에 인간 왕이 예루살렘 왕궁에서 선민 유다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왕이 아니라 자기 택한 백성들을 다스리는 참된 왕은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본래 왕은 여러 사명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보호해야 합니다. 또한 공의와 공법을 따라 백성들이 의롭게 살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악한 자들이 일어나 연약한 백성들을 압제하지 못하도록 의롭게 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을 공정히 하여 억울한 일이 없도록 최종 재판도 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왕이 선하고 의롭고 권세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왕들은 이와 같은 조건을 다 충족할 자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자기 백성들을 지킬 수 있지도 못합니다. 불의하고 포악하기도 합니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도리어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압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 왕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신음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 왕으로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분입니다. 능력과 권세가 한이 없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시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지혜와 사랑이 풍성하며 공의와 공평으로 백성을 다스리므로 그 백성들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줍니다. 그의 통치 아래 누구도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십니다. 악한 마귀와 죄와 사망의 권세가 그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강한 팔로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들은 행복합니다.
무릇 좋은 목자를 만난 양은 행복하고, 좋은 선생을 만난 학생은 복이 있고, 좋은 부모를 만난 자녀도 행복합니다. 이처럼 지극히 선하고 능력이 있고 지혜롭고 사랑이 한이 없으신 왕의 백성들은 복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그의 백성 된 우리 그리스인들은 진실로 복이 있습니다. 할렐룽야.
둘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여기서 ‘구원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알로’이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그를 구속한 자’라는 말입니다. 이 ‘구속하다’는 히브리어 단어 ‘가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준 율법 내용 중에 가난해진 친척과 골욕을 위하여 가까운 형제, 자매, 친척이 나서서 그 곤경에서 건져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빚을 져서 논과 밭과 집을 팔고 아들 딸들까지 노예로 팔려나가는 곤경에 빠진 친척을 위하여 유력한 친척이 재산을 내어서 그 빚을 갚고 논과 밭과 집과 종으로 팔린 자들을 다시 건져내어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를 레위기 25장에서 ‘기업 무르기’, ‘토지 무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업을 물러주는 사람을 히브리어로 ‘고엘’ 곧 ‘구속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구원자’는 원문 뜻을 살리면 개역판 성경에서 사용했듯이, ‘구속자’라고 번역함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속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오는 구속자 곧 기업 무르는 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합니다.
먼저, 구속자는 가난하여 논이나 밭이나 집이나 자녀를 빼앗긴 사람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나 기업을 무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룻의 가족의 기업을 물러준 보아스 역시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가까운 친척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민 중에 자기 백성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들의 구속자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셨습니다. 사람이 죄로 인하여 저주와 사망과 영벌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를 구출해내려면 가까운 친척만이 그를 구속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자 이 세상에 동정녀의 몸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서도 안 되고 천사도 안되고 사람만이 사람의 친척이 되어 사람을 그 죄악과 그 죄의 값에서 구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자의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자는 재물이나 능력을 충분히 갖춘 유력자라야 합니다.
빚지고 가난하여 다 빼앗길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출해내는 것은 마음만 갖고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를 건져낼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한 부유한 자였기 때문에 룻의 시댁 나오미 가정의 모든 곤경을 도와 그들에게 기업을 되물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포로가 되었을 때에 그들을 구출하여 건져낼 수 있었으며,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사람임과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으로서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셨기에 신약 시대에 죄와 허물로 다 저주 아래 처하고 지옥으로 끌려갈 자들에게 다 값을 지불하시고 건져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구속자는 친척을 곤경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친척이라고 해서 다 구속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 유력하고 부자라고 해서 구속자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곤경에 빠진 형제와 친척을 향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 그 구속의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자기 친족 나오미 가정의 불행에 가슴아파했습니다. 모압 땅에 기근을 피하여 갔다가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 나이든 친척 나오미를 생각할 때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녀의 모압 며느리 룻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청상 과부가 된 어린 소녀가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여 자기의 고향 친정 집을 떠나 낯선 이국의 시댁 고향에 따라와서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이삭 줍는다고 바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조언을 받은 룻이 보아스에게 청혼하였을 때에 책임도 중하였지만 기꺼이 그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보다 기업 무를 권리에 있어서 우선권이 있는 친척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묻고자 베들레헴 성문에서 여러 증인들 앞에서 그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처음에는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했다가 나중에는 룻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의 가문을 세워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자기가 가진 기업에는 손해가 나고 나오미 가정만 좋은 일이 될 것을 생각하니까 그만 이해타산의 마음이 생겨서 자기는 무르지 않겠다고 말하며 뒤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기업 무를 권리의 우선 순위가 후순위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미 가족의 기업을 물러주고 룻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룻과 결혼한 후에 이상하게 그 아들은 나오미 가족의 상속자가 아니라 상속자가 없던 보아스 집안의 상속자로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으니 보아스는 아무런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업 물러준 그 일로 인하여 가문의 대가 이어지는 큰 축복을 받았고 그 족보를 통하여 다윗 왕이 태어나고 예수 그리스도도 그 가문에 태어나시는 복을 보아스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친척 나오미를 불쌍히 여기고 그 집안의 어린 며느리 룻의 희생도 알아주고 감동을 받아 기꺼이 기업을 물러줌으로써 메시야 가문이 되는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려면 자기의 생명을 바치고 우리의 모든 악하고 더럽고 큰 죄악을 다 짊어져야 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하는데 그것을 반드시 져야 할 필요도 없었지만, 기꺼이 그 십자가의 대가를 치른 까닭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크고 깊은 사랑과 긍휼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사랑, 그의 긍휼이 죄에 빠져 헤메이다가 마귀의 종노릇하다가 결국 슬픔과 고통 중에 영원한 유황불에 떨어질 운명에서 우리를 건져내주신 것입니다. 자기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크고 영원한 사랑이 우리를 구속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요 우리 신약 성도들의 완전한 구속자이신 것입니다. 이렇듯 무거운 죄 짐과 저주와 영벌의 멍에에 매여 모든 것을 잃어버릴 운명인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 구속자이신 하나님이시거늘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다 바쳤는데, 우리가 어찌 주님을 위하여 무엇인들 아낄 수 있겠습니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셋째로,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군의 여호와로 소개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호칭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만군’이란 별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란 천군 천사들에 의하여 둘러싸인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위엄을 담은 하나님의 호칭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천천 만만의 하늘 군대 천사들을 거느리며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를 대적하여 맞설 자가 아무도 없으신 분이시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처럼 든든하고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신 자이십니다.
6절 하반절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는 처음이라고 말씀하셨으니, 모든 것을 시작하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강조하십니다. 모든 존재의 시작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적 존재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함으로 있게 되었으며, 이 모든 세상 곧 우주 삼라만상도 하나님께서 창조함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시간도 그러하고 모든 세상의 역사도 하나님께서 시작하심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도 하나님께서 친히 운행하심으로써 존재하였고 지금까지 흘러온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 개인들의 존재도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셨고 우리 각 사람의 삶도 하나님께서 다 정하시고 인도해오심으로써 있어왔고 지금도 현존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마지막이십니다. 혹 모든 만물이 다 불에 타 없어지고 시간도 없어질지라도 하나님은 그 후에라도 계속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 뿐 아니라 영원까지 계속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없었던 적도 있었고 현재 존재하지만 나중에는 이 지상에서 없어질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없어본 적이 없고 아니 계신 적이 없고 또 영원히 계실 분이신 것입니다. 모든 영적인 존재들도 다 피조물이기 때문에 시작도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영원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는 역사 이전에도 계셨고 역사 속에서 계속 계신 분이시며 역사 끝에도 계속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 가운데 계실 뿐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여 항상 계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신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우상도 있고 신이라 일컫는 영적 존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없는 것이거나 거짓 것이며 유한한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과 달리 참되고 변치 아니하며 영원하신 분이며 스스로 계신 자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신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그래서 하나님은 6절 하반절에서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 높여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같은 다른 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한 가지 더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역사를 주관하시는 대 주재이십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될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백성’을 세운 후에 계속하여 역사의 흐름을 선포하고 예언하며 설명해오신 자로 자기를 소개하면서, 그런 자 곧 그런 신이 있다면 한번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자기처럼 말해보라고 도전하십니다. ‘영원한 백성’을 개역 성경에서는 ‘옛날 백성’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뜻은 아마도 에덴 동산의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담 때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장래 일들을 알려주시곤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다 이루어졌고 그 말씀이 성취되곤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장차 바벨론에 유다가 망하게 되지만 그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바사와 메데의 왕 고레스를 통하여 그 백성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미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의 흥망성쇠와 나라와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신이 이와 같이 역사를 기획하고 그의 뜻대로 전개하며 사람이나 나라를 세우기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심을 미리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갈 수 있습니까? 그런 자들은 마치 모세 시대 애굽의 마술사 얀네와 얌브레처럼 잠깐은 흉내를 좀 낼 수 있으나 곧장 다 거짓됨과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의 백성과 가문에 대하여서도 미리 될 일을 다 알고 계시며 그의 뜻을 따라 하나 하나 이루어가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그를 의지하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한 생각은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요 우리에게 장래와 소망을 주신다고 하셨음을 믿고 소망 가지고 고난 중에도 믿고 의지하면서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할렐루야.
이제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고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 8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두 가지의 일을 하라고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명하십니다. 하나는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입니다. 구속자입니다.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영원하신 자존자십니다. 역사의 대주재로서 우리와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재와 미래를 다 다스리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할렐루야.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또 한 가지 일은 하나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많은 진리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리는 오직 참신은 우리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분만이 역사의 대주재이시며, 모든 사람의 운명과 삶의 주인이시며 인도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진리의 증인으로 부름받았으니 이 확실한 사실을 당당히 증거합시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참 신이시요 우리 삶의 인도자시며 말씀하신 바를 다 이루심을 확실하게 믿고 이 사실을 열심히 증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