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회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2014년 12월 14일)
문의 톨게이트를 나온 후 우회전 하면 첯 번째 답산지 송세량(宋世良) 墓所가 있는 남일면 화당리에 도착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고조부인 송세량(宋世良, 1473-153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정부(貞夫), 예조정랑 순년(順年)의 손자, 안동 대도호부사 여해(汝諧)의 아들이다.
(墓所로 오르는 入口)
1498년(연산군 4)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음보(蔭補)로 선릉 참봉(宣陵參奉)과
건원릉의 참봉을 지냈으나 뒤에 물러가 구원(丘園)에 은거하였다.
*6세 宋愉 ㅡ 7세 繼祀 ㅡ8세 順年 ㅡ9세 汝諧 ㅡ10세 世良 ㅡ11세 龜壽 ㅡ12세 應期 ㅡ13세(흠조.승조.천조.
방조) 甲祚 ㅡ14세 時烈> ㅡ 時榮(乙辰坐)
(三賢閭 碑)-송구수 아우 송인수와 여동생의 남편인 동주 성제원과 동고동락하면서 학문을 강론 하며 그
들이 살던 곳을 삼현려(화당리)라고 불렀다.
(10세 宋世良 墓)
西向을 바라보고 조성된 健元陵參奉 宋公之墓와 부인 文化柳氏墓는 靑龍과 白虎가 꽉 싸주고 案山도 수려
하며 外靑龍 外白虎까지 局勢가 좋다.
白虎 案山으로 멀리 朝山은 아름다운 貴峰으로 羅城을 이루고 있다.
坐向은 卯坐酉向이며 右水到左 未破口로 去水하는 듯하다.
서북쪽 亥方砂가 아름답고, 白虎方 丙午 正方 문의면 뒷산 작두산(鵲頭山 430M)은 木星으로 수려하면 人物
이 나온다고 하니 아마도 宋時烈이 이곳 先代의 음덕(陰德)을 받은 것일까?.
(案山과 朝山)
( 방조의 子 宋時榮 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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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송시열 증조부 송귀수(宋龜壽) 묘는 서원구 남이면 문동리에 있다.
송귀수 1497년(연산군3)-1538년(중종3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수. 호는 서부(西阜).
안동 대도호부사 여해(汝諧)의 손자이며, 참봉 세량(世良)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나고 선악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였으며, 특별히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여막에 거처하면서 예를 다하니, 마침 흰 제비가 날아들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가
효성이 지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음서로 벼슬은 영경전참봉(永慶殿參奉).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등을 지냈다.
<송귀수 ㅡ 응기 ㅡ 承祚(응기의 둘째 아들) ㅡ 시혁(승조의 아들>
(11세 宋龜壽 묘 전경)
(송귀수 묘비)
(父母山인 玉女峰과 북. 연못이 있어 玉女織錦形局이라 한다.)ㅡ穴場이 白虎쪽에서 좌측 청룡쪽으로 경사를
이르고 전순이 우축 백호쪽으로 기울어 져 있으니 생각해볼 일이다.
(13세 宋承祚 묘 案山과 朝山)
(墓域全景 위로부터 11세송귀수-12세응기-13세承祚(응기의 둘째 아들)-14세시혁(승조의 아들)의 묘소 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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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貞節公 필재(필齋) 박광우 묘소(朴光佑 墓所)는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에 있다.
朴光佑 墓所는 숭인사(崇仁祠)옆 길을 따라 100여m 오르면 눈앞에 안내판이 나타난다.
(숭인사(崇仁祠)와 경모단(敬慕壇)
(貞節公 朴光佑 墓所의 안내 表石)
조선 명종 대의 필재(필齋) 박광우(朴光佑,1495∼1545)는 조선 중기의 학자·관료 출신.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화를
입어, 사후 서원에 배향되었다.
본관은 상주(尙州)로 자는 국이(國耳)이며, 호는 필재(蓽齋), 잠소당(潛昭堂)이다. 청주 출신으로 생원 박린(朴璘)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장유성(張有誠)의 딸이다. 그의 어머니 장씨(張氏)가 書室 3칸을 세우고 네 아들을 교육함에 예제(禮制)를
가지고 교훈이 엄격하여 4형제는 이에 감격, 학행이 크게 성취되니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크게 감탄하여 맹모
지교를 다시 보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貞節公 朴光佑 墓)
1519년(중종 14) 형 광좌와 생원시에 급제하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상처를 입고 옷을 찢어서
머리를 싸매고 정부외랑(政府外廊)에 앉아서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참지 김로(金魯)
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의
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여 염우한설(炎雨寒雪)에도 복상(服喪)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525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1536년 재령군수로서 문장에 능하여 원접사(遠接使)를 수행하였고, 1545년 강릉부사(江陵府使)를 거쳐 사간
(司諫)이 되었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유배되던 중 장독(杖毒)으로 인하여 돈화문 밖에서 51세
로 죽었다.
일찍이 조광조와 교분이 있었으며, 뒤에는 이언적(李彦迪)과 같이 화를 당하였으니 그의 사상과 절의를 충분
히 짐작할 수 있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봉분 앞 位牌碑)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 산73-1에 있다.
묘소 중앙의 봉분을 중심으로 봉분 바로 앞에 위패비와 상석이 있고, 왼쪽에는 숙종 13년(1687)송시열이 찬한
묘표가 있고, 근래에 조성한 사적비, 장명등과 본래의 것인 문관석, 동자석, 망주석 등이 있다.
畢齋 朴光佑의 墓는 齋室 옆으로 오르면 안내판이 반긴다.
鳳舞山 九龍峰 하에 乳穴로 入首 주변의 흙과 초목의 生氣를 느끼며, 蟬翼에 해당하는 좌우가 잡풀이 없고
밝은 빛을 띠고 있어 좋은 穴 자리로 보인다.
坐向은 子坐午向으로
墓所 중앙의 封墳을 중심으로 봉분 바로 앞에 위패비(位牌碑)와 床石이 있고, 왼쪽에는
숙종 13년(1687) 우암 宋時烈이 撰한 墓表가 있다.
이외에도 근래에 조성한 사적비, 장명등과 본래의 것인 문관석, 동자석, 망주석 등 여러 石物이 많다.
이 墓는 1977년에 경기도 파주에서 移葬한 것으로 조선 시대의 일반적인 묘제를 따르고 있다.
(왼편에 숙종 13년(1687) 宋時烈이 찬한 墓表.)
ㅡ청원 박광우 묘 출토유물ㅡ
조선 명종 대의 문신인 박광우 선생의 묘에서 나온 유물로, 시신을 담는 관(棺)·청동방울 7개·백자항아리 1점
이다.
원래의 묘소였던 경기도 파주군 조리면 오산리에서 현재 자리로 묘를 옮길 때 발견된 유물들로, 파손이 적다.
향나무로 만든 관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직사각형 형태로, 안팍의 2중으로 되어 있다.
내관은 길이 250.5㎝, 폭 69.6㎝이고, 외관은 길이 280㎝, 폭 99.5㎝이다. 내관의 바닥에는 7개의 구멍을 불로
뚫은 널빤지가 깔려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시신 밑에 두는 칠성판(七星板)이다.
청동방울은 시신의 발 밑에서 발견되었는데, 표면에 장식이 없고 지름 2.6㎝의 크기이다.
백자항아리는 조선 전기에 유행하던 부장품 중 하나로, 목이 짧고 입구가 좁은 특징을 보이며 뚜껑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1977년 청원군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하여 묘는'충청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하였으며, 묘에서 출토된
유물은 따로 '민속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案山과 朝山)
甲午. 淸虛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