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주암종대실기(舟巖宗垈實記){전주최씨세적록}
- 전주최씨종대기적비 -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주암종대실기>가 적혀 있다)
南原之北面舟巖村卽文廟朝名賢先祖烟村先生嘗爲南原府使時愛其山水相宅遺後之所也而種樹成林營局養山修其作合鑿地爲井子子孫孫繼繼承承以簪纓之族淸白傳家而世居此洞者年將至四百世已遠十三是以南原北面舟岩村惟以崔氏舟巖洞稱之有口者皆言有耳者皆聞古今帳籍昭昭載之門運不幸去戊辰年分族中有爲奸娟煽惑者以還退之意放賣宗基爲他人所有諸族漠然不知也數年後買者突然入宅故宗族始知其放賣一齊聚會以還退之意喆之則暗買之人不肯還給故呈于營邑則題敎無非嚴截然渠自恃富行賂作奸終不還推自此以後路上行人猶有指點過墟之歎况此以崔爲姓者雖三尺童子知其人事者則無不舍寏灑淚矣其後百餘年又爲訴訟數三次而未得解寏矣至誠所到金石可透理之常然也故去甲戌年族弟圭東誠力周旋者不啻數年之間而快爲復舊自戊辰至甲戌將爲百二十七年也三四世蹟寏之事一旦解之老少男女勿論遠近諸族咏之歌之舞之蹈之欣動天地抃躍之情豈盡形喩乎舊有烟村先祖影幀兼奉於舟巖祠而祠撥於高宗庚午之邦禁乃別建影堂與士林俎豆者數年矣今於宗垈之復舊也乃爲新建一閣而乙亥春告成奉安影幀耳復舊之內外講堂及庫舍門廊一切修補面目一新噫玆豈非我祖先之靈黙佑於冥冥中所致乎凡我後承勿醉歡喜痛念前戒且思垂後以爲永世鞏固之計焉
檀君紀元四千二百八十年丁亥春瀚
后孫崔正謹識
남원 북쪽 변두리 주암촌(舟巖村)은 바로 문종 때 명현 선조 연촌(烟村) 선생께서 남원 부사로 계시면서 이곳의 경치를 사랑하셔서(1) 살림집을 지어 후손에게 물려주신 곳이다.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고, 산(山)을 보살피고 가꾸었으며, 터를 잘 다듬고 개척하였고,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어,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벼슬하는 양반 가문으로서, 청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전통을 만들어서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지 벌써 400년이 되었으며 세대 또한 13대에까지 이르렀다.
남원 북쪽 변두리에 있는 주암촌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최씨들이 대대로 살아오고 있는 바로 그 주암동(舟巖洞)”이라고, 입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말을 하고,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알아듣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문서와 장부에도 그와 같이 적혀 있다.
가문에 불행한 일이 있어서 지난 1808년(순조 8)에 일가 중 한 사람이 간사한 사람(이문로)의 꼬임에 빠져서, 훗날 쉽게 도로 물릴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종중의 터전을 팔아 치움으로 인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내려오던 땅이 다른 성씨를 가진 사람 소유가 되어버렸으나, 우리 가문 모든 종인들은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 땅을 산 사람이 갑자기 그 자리에 들어와서 살겠다고 이사를 함으로 인하여 우리 종족은 그 때서야 비로소 그 땅이 남에게 팔려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종인들이 일제히 함께 모여 회합을 가지고 땅을 되찾아 받기로 결의를 하였으나, 몰래 땅을 산 사람이 거래를 물려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청에 고발하여 재판을 벌였지만 판결은 그다지 엄하게 맺고 끊은 듯이 나지 않았고,
또 몰래 땅을 산 사람이 자신이 돈이 많다는 것을 믿고 사방으로 뇌물을 뿌리는 등, 간사한 짓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돌려받지 못하였다.
그 사건이 있고 난 이후부터 길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키면서 최씨 가문을 두고 한심하다고 한탄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하물며 최씨라는 성씨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삼척동자라고 할지라도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성씨인데, 조상이 물려주신 집터를 둘러싼 문제하나를 해결하지 못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한탄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소송을 벌인 것만 해도 몇 차례에 이르렀지만 영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떤 일이던지 막론하고 정성을 다하여 지성으로 노력하면 쇠나 돌도 뚫을 수 있는 이치가 있기 마련인 것이니,
지난 1934년(갑술)에 족제 규동(1)이 힘과 정성을 다하여 다방면으로 주선한 결과 몇 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옛날에 잃어버린 터전을 되찾게 되었으니, 1808년에서 1934년까지 무려 127년이란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의 일이다.
3~4세대 앞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가 하루아침에 모두 해결되었으며, 남녀노소는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최씨 일가들이 기뻐 날뛰며 춤추고 노래 부르고 천지가 기뻐서 손뼉을 치며 덩실덩실 춤을 추니 이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옛 부터 연촌(烟村) 선조의 초상화를 주암서원에 함께 모시고 있었으나, 사당은 1870년(3)에 철폐되었고, 나라에서 서원에 제사를 모시는 것을 금지하니 따로 영당을 지어서 사림들과 함께 제사를 모셔 온지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이번에 종대 터를 되돌려 받았으니 그 터에 건물 하나를 새로 지어서 1935년(을해) 봄에 낙성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새로 복구된 건물은 내외의 강당은 물론, 창고와 문랑 등 일체로 모두 수리하고 보완하여 새롭게 면목을 일신하게 되었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 선조님의 영혼이 아득한 곳에 계시면서 묵묵히 도와주신 소치가 아니리요.
무릇 우리 후손들은 기쁨에만 너무 취하지 말고, 옛날에 있었던 잘못을 아프게 기억하여 경계로 삼고 또 그러한 생각을 후세에 물려주어 영원토록 이어갈 수 있도록 크고 튼실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단군기원 4280년 정해년(1947) 봄.
후손 최정(崔正) 삼가 지음.
* 각주 ---------------------------
(1) 사실은 오수천 건너편에 북창(北倉)이라는 군량미 창고를 만들면서, 주암촌을 함께 개척하신 것이다.
호군공 휘 주(淍)는 주암촌에 살면서 북창에서 근무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2) 圭東. 봉사공(경립)파 23세 죽암공(竹菴公). 자 재숙(在淑) 초휘 장춘(長春). 참봉공(응운)파 휘 한팔(翰八) 자 질보(耊甫)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휘 한풍(翰豊) 자 정명(正明), 초휘 한덕(翰德)의 계자가 되었다.
죽암공은 소송 중에 있으므로 상대방이 땅을 우리 가문에 팔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알고, 친구에게 부탁하여 대리 매매를 통하여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죽암공의 손자 성현(誠賢)씨가 현재 주암서원 옆에서 살고 있다.
(3) 고종 7년. 경오년. 이 해는 주암서원이 철폐된 해가 아니라. 연촌공 초상화를 봉안할 영당을 다시 건립한 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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