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목사
동물 나라 한 연못가에 입 큰 개구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자신의 입이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갖고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가를 헤엄치고 있던 입 큰 개구리는 새로운 목욕탕이 연못가에 생긴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목욕탕에 걸려진 안내판에는 “입 작은 동물은 입 큰 동물의 등을 밀어주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입 큰 개구리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는 위풍당당하게 목욕탕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누가 등을 밀어 주려나” 하고 탕 안을 둘러보던 입 큰 개구리를 저 편의 다른 개구리가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개구리는 입 큰 개구리보다 입이 훨씬 컸던 것입니다.
열심히 그 개구리의 등을 밀고 나온 입 큰 개구리는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결국 입을 더 크게 해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성형수술을 받았습니다. 다음날 이 개구리는 의기양양하게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목욕탕 안에는 하마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 큰 개구리는 다시 하마의 등을 밀어야만 했습니다. 이 개구리는 또 한 번의 결심을 하고는 입을 더 크게 수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만연의 미소를 띄우며 그 목욕탕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탕 안에 들어서자마자 땅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곳에는 악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개구리는 다시 성형외과를 찾아갔고 의사는 개구리에게 입을 더 이상 크게 한다면 단 하루밖에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 입 큰 개구리는 하루를 살더라도 꼭 다른 동물에게 등을 밀도록 해야겠다는 허세로 수술을 하고 말았습니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입이 크다는 허세를 가지고 다시 목욕탕을 신바람 나게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도착한 개구리는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목욕탕 문에는 “금일 휴업”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입의 크기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더 크게 하고자 하는 욕심이 죽음으로까지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사람들이 목마르게 찾고 그것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족한 인생, 만족한 삶, 만족한 생활을 위해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시간과 물질과 정력을 낭비하며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 앞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나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1~2).
이사야 선지자는 많은 사람을 향하여 “너희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았고, “하지 말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라”고 했고 “사라”고 했고 “하라”고 했습니다. 돈 없는 자도 목이 마른 자도 굶주린 자도 병든 자도 또 세상 일로 인하여 수고하지 말고 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급한 상태에서 얻고자 원하던 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까? 많은 수입이 있고 좋은 저택에서 물질이 풍요하다고 해서 그 삶이 행복합니까? 만족하십니까?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과연 만족합니까? 밤낮 유흥가를 헤매며 육신의 향락을 찾는 젊은 청춘 남녀는 부족함이 없을까요?
심령의 갈급한 상태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사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람이나 오늘날 사람이나 한 가지로 소원을 가지고 삽니다. 포부와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원을 이루는데 실패를 거듭하고 만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물질은 사람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한다.
짐승들은 물질로 만족합니다. 배고파하는 짐승에게 먹을 것을 넉넉히 주면 그것으로 그 짐승은 만족해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짐승은 본능대로만 살고 그 본능을 충족시켜 주면 그것으로 다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무신론자이며 철학자였던 독일의 니체는 ‘기독교 윤리는 곧 노예의 윤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사랑과 긍휼의 도덕은 낙오된 인생들이 스스로 위로를 받으며 살기 위한 노예의 도덕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은 오직 투쟁과 쟁취와 초인적 의지로서만 만족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이런 초인적인 삶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서 “오!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여! 그대는 이기었노라”고 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은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흠모하고, 동경하고,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 것이 있는데 곧 만족한 생활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족한 생활은 우리 인간이 최대로 바라는 소원이요 꿈이며 이상이고 바램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한정이 없어서 집 위에 집을 더하고, 밭 위에 밭을 더하고 쌓은 재산 위에 더 쌓고자 전전긍긍하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부족함을 느껴서 언제까지나 만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보다 많은 재산과 지식과 명성과 권력을 한 몸에 지닌 지혜의 왕 솔로몬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의 영광의 극치를 말씀하실 때 “솔로몬의 영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사람의 젊음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잠깐이면 지나갑니다. 육신의 쾌락도(전 12:1~5) 사람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돈도 옳지 못한 목적을 위해 낭비하면 애써 수고한 보람도 없고 참 만족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 만족은 값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너희는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참 만족, 그 크신 구원은 값이 없습니다. 무료입니다. 정가가 없고 거저입니다. 돈을 내고 살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최대 선물이요 참 만족인 영혼의 구원은 나의 의로 값을 내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회적인 명성이 그것을 얻는데 도움이 되지도 못합니다. 이사야의 말대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값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공기로 호흡하지 못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기, 신선한 물, 태양, 빛 이러한 것들의 값이 있습니까? 거저입니다. 값이 없습니다. 사랑도 거저입니다. 믿음과 소망도 값이 없습니다. 왜냐구요? 너무 귀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사라고 하였을까요?
산다는 것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것으로 만들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면 믿음도 내 믿음이 되고 소망도 내 소망이 되며 사랑도 내 사랑, 주님도 내 주님, 하나님도 내 하나님이 됩니다.
그러면 값없이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본문에는 “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바로 돈 없이 값없이 주님께 빈손 들고 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지 말고 주님께로 오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주님께 오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나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주시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종차별이 없습니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유한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오기만 하면 이 귀중한 선물, 돈으로 명예로 권세로 살 수 없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참 만족을 얻는 비결은 하나님께 있다.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 우물가 여인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육신적으로 누리는 쾌락 그것은 얻으면 얻을수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 수록 더 누리고 싶지만 만족은 없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치우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참 만족한 영혼의 갈급함은 하나님만이 채워 주십니다. 이사야는 물과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했습니다. 여기 물은 생명수요 포도주는 성령의 기쁨이요 젖은 영적 영양식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을 돈 없이 값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참 만족을 얻으셨습니까?
부족함이 없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의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고통의 멍에 아래서 고민하십니까?
실패와 절망 속에 허덕이고 계십니까?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혀 불만 속에 허덕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러면 자유를 주시고 희망을 주시고 기쁨과 마음의 평화를 주시며 만족한 선물을 주십니다.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예수님만이 참 만족한 축복을 누구에게나 다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