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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0·26사태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대신하여 행함)하다가,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10대 대통령이 됩니다(1979~1980).
최규하는 10·26사태 이후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국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합니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합니다. 후에 전두환은 10·26사태 당시까지 김재규가 맡고 있었던 중앙정보부장 서리(직무 대리자)까지 합니다.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에 이어,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까지 국가의 ‘보안·수사·정보’를 모두 장악한 것입니다.
보안은 안보와 비슷한 말로서, 안보는 외부의 위협이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을 말합니다. 1979년 10·26사태를 전후하여,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보안·수사·정보’를 장악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박정희 저격범 김재규를 사형시켰고, 상관이었던 계엄사령관 정승화(육군참모총장·계엄사령관 겸직)를 제거(12·12군사쿠데타)하여 군사권을 장악합니다. 이어서 중앙정보부장 서리까지 차지하여, 대통령이 되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라고 하다가, 2018년부터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변경되었습니다.
12·12군사쿠데타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0·26사태라는 국가적 혼란 상황을 틈타 정권을 장악한 군사쿠데타를 말합니다. 한국사는 5·16군사쿠데타의 주역들을 ‘군부’라 하고, 박정희의 아류(모방하는 일이나 그렇게 한 것)인, 전두환·노태우와 같은 12·12군사쿠데타의 주역들을 ‘신군부’라고 일컫습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정보권과 수사권을 바탕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다시 군사권을 바탕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던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독재는 연장되었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그만큼 지연(어떤 일을 더디게 끌거나 끌리어 나감)되었던 것입니다. 10·26사태는 독재를 종식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앞당기는 역사적인 기회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책임에서 최규하는 자유롭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 아쉬운 것은 용기와 용단입니다. ‘하나회’는 영남출신 육사 11기생들의 친목 모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그 중심에는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이 있습니다. 노태우는 전두환에 이어 제13대 대통령을 했고, 정호용은 전두환 정권에서 국방부장관을 했고, 김복동은 노태우의 처남으로 국회의원을 두 차례 했습니다.
한편 최규하는 1979년 12월에서 1980년 8월까지 10대 대통령직에 있었습니다. 그는 허울뿐인 존재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실권(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나 권세)은 전두환 등의 신군부 세력에게 있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에 넌더리(몹시 싫은 생각)가 났던 시민(국정에 참여할 지위에 있는 국민)과 학생들은 민주적인 대한민국을 소망했습니다. 대한제국과 같은 황제의 나라가 아니라, 대한(大韓)은 민국(民國)이길 소망했던 것입니다. 주인으로서의 권리인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 특정한 인물이 주인 행세(권세를 부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길 바랐던 것입니다.
국민 스스로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을 민주(民主)라고 합니다. 그런 소망을 역사는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을 ‘프라하의 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빗대어 대한민국의 1979년 10월26일에서 1980년 5월 17일까지의 민주화운동을 ‘서울의 봄’이라고 부릅니다. 시민과 학생들은 신군부 세력의 퇴진, 비상 계엄령 해제, 언론 자유 보장, 유신 헌법 폐지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을 합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침공으로 좌절했듯이, ‘서울의 봄’ 역시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을 앞세운 군사적(계엄군) 진압으로 좌절(어떤 계획이나 일 따위가 실패로 돌아감)되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1980년 민주화의 봄은, 겨울이었습니다.
서울의 봄꽃들이 신군부 세력의 군홧발에 짓밟힐 때에, 꺼져가는 봉홧불을 이어받아 민주화운동의 불을 다시 지핀 곳이 전라남도 광주였습니다. 1980년 4월 이후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 거세지자, 신군부(계엄사령부)는 이것을 진압하고 정치권력마저 장악하고자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합니다. 이를 5·17비상계엄확대조치라고 합니다. 비상계엄확대조치는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의 합동수사 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 주도한 것으로, 국회를 군사력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불법 행위였습니다. 이 조치로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금지되었고 많은 정치인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강제로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갔는데, 김대중도 그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이에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비상계엄확대 반대, 계엄령 철폐, 전두환 퇴진, 대학교 휴교령 반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위력이나 기세를 드러내어 보임)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시위를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공수부대(특전사군인) 등의 무장군인들(계엄군)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을 시도합니다. 이 과정에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고, 전남대 등의 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의 무지막지한 폭력적 진압에 맞서 시민군을 구성하고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직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그것도 특수훈련을 받은 특전사령부 소속의 공수부대 군인들을 시민군은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많은 인적 피해를 남긴 채 진압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5·18민주화운동이라고 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반군부통치, 반독재의 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대 이후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의미·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민주화란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자유와 평등을 포괄한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확산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모든 면에서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민주적이게 하는 것을 민주화라고 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군부통치·반독재의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합니다. 국보위는 신군부가 12·12군사쿠데타로 장악한 군사권(계엄군. 무력)으로 바탕으로 자신들에 대한 저항을 제압한 후, 정치권력마저 장악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행정기구입니다. 박정희 등의 군부가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설치했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따라 한 것이, 전두환 등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습니다. 명분(표면상의 이유)은 대통령을 보좌하고 자문한다지만,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고, 실제로는 전두환이 국가보위입법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대통령 구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는데 필요한 길을 닦는 역할을 한 조직이 국보위입니다. 국보위위원장은 최규하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는 대한민국 운명의 절체절명 순간에서 번번이 국민과 민주화의 입장보다 신군부의 입장에 섰습니다. 물론 그도 그 나름의 입장은 있었겠지만, 그는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대한민국의 국가원수(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모든 행정을 통할(모두 거느려서 다스림)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5·17비상계엄확대조치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등을 통해, 그들과 정치적인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이유(반정부적 인사)와 방법(삼청교육대 등)으로 제거했습니다. 삼청교육대는 국보위가 사회악(마약·범죄·도박·매음)을 일소(모조리 쓸어버림)한다는 명분으로, 사회를 정화(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함)한다는 명분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국보위의 하부조직입니다. 삼청교육대라고 부른 이유는 국보위의 사회정화분과위원회 본진이 서울의 삼청동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보위(신군부가 주도)는 삼청교육을 통해 사회를 정화한다고 했지만, 정작 정화의 대상은 그들이었고, 그들이 국민 주권의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회악의 근원이었습니다.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적폐(오랫동안 쌓여 뿌리박힌 폐단) 자체였습니다. 삼청교육대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는데 걸림돌(정치적 라이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사회악 일소(사회 정화)’라는 구실로 삼청교육대를 운영했으며, 언론사를 통폐합했고, 뉴스를 사전에 검열했으며, 민주화 시위를 탄압했습니다.
이후 최규하를 대통령에서 사임(사퇴)시키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의원들(거수기)의 간접선거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로써 신군부의 리더였던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11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헌법을 ‘대통령 7년 단임과 대통령선거인단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를 골자로 하는 개정하였습니다. 이로써 5공화국이 시작되었습니다. 1981년 이 헌법에 따라 서울의 장충체육관에 대통령선거인단이 모여서 간접선거를 함으로써, 12대 대통령에 전두환이 다시 당선되었습니다. 전두환의 대통령선거인단은 박정희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따라 한 것입니다. 장충체육관은 국내 설계로 지은 한국의 첫 돔 경기장이라고 합니다. 유신 헌법과 5공화국 헌법에 따라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은 모두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또는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당선되었기에, 이들을 일명 체육관대통령이라고도 부릅니다.
박정희의 군부든 전두환의 신군부든 모두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정통성이 약했습니다. 박정희는 그래도 직접선거로 당선된 적이 있었지만, 전두환은 두 번 모두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박정희에 비해 정통성이 더 약했습니다. 정통성이란,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 권력 지배를 승인하고 허용하게 하는 논리적ㆍ심리적인 근거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박정희에 비해 국민들로부터 인정받는 정도가 약했던 전두환은, 강온(강함과 부드러움) 양면(두 가지 방면)의 통치전략(지배방법)을 사용합니다.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는 언론을 통제하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였으며, 강압적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였습니다.
그 후 정권이 안정되면서, 약한 정통성을 만회(바로잡아 회복함)하기 위하여, 민심을 얻기 위하여 여러 가지 유화정책(너그럽게 용서하고 사이좋게 지냄)을 폈습니다. 교복과 두발 자유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 해외여행 자유화, 각종 국제 스포츠 대회 유치, 프로 야구 등이 유화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은 정의 사회 구현(어떤 사실을 구체적으로 나타냄)과 복지 사회 건설을 표방(어떠한 명목을 붙여 주의·주장을 내세움)하고 있었습니다. 12·12군사쿠데타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불의였습니다. 불의가 정의를 외친다는 것은 왠지 공허한 느낌을 줍니다.
첫댓글 짜임새 있고 알차게 정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