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
2013-04
고 난 이 내 게 유 익 이 라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꽃피는 봄이 오는 4월에는 나의 마음도 바람을 피워본다. 내가 피우는 바람이 누구에게 향기가 되어서 다가가고 싶다. 올해 교회의 부활주일은 때 이른 3월 말째 날에 있었다. 그리고 이 달 중순의 말째에는 장애인의 날이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다. 퐁퐁 피워댄다는 것은, 생기발랄한 젊음의 꽃이 아직은 시들시들하지 않다는 노익장의 옷걸이를 탱글탱글한 겉 포대로 치장을 한껏 하고 오늘도 허우대를 휘둘러다 대본다. 본래 장애인에게는 시야가 비좁아서 앞에 펼쳐진 순탄대로도 낯 서른 길처럼 허둥대기 일쑤라서 실수가 잦고, 틀리기 십상이다. 여기에 나의 앞에 장애물까지 놓여 있다면 삼중고의 삶으로 가세되기 마련일 것이다. 여러 날 전에는 솔잎을 설탕단지에다 푹 잠재웠다가 그 울어난 단물을 빼먹으려고 조선솔잎을 따려고, 삼촌 홍채 집사님과 마을 뒤에 자리한 중무제 기슭으로 큰 소나무의 너풀거리는 너울잔가지에 붙은 솔잎을 따다가 옆의 가지로 옮기려 발을 떼어놓는 순간 “아뿔싸”, 나의 몸이 뒤로 나뒹굴러 떨어지면서 발은 위로 쳐들린 채, 방공호 마냥 만들어놓은 콘크리트의 네모진 석관 속으로 내가 빨려들어 간 형국으로 내 몰려지며, 옴짝달싹을 못하게 만드는 바람에 다행이 팔은 앞쪽으로 향하고 있어서 코가 깨졌나하고 코를 매만져보니 코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으나, 몸이 꼭 끼어져서 용트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겨우 비비적거리면서 허둥대가 보니 겨우 몸은 빠져나올 수는 있었으나, 삭신의 여러 곳이 얼얼하였다. 지금껏 내방쳐진 왼편의 방치 쪽의 그 남은 잔재는 역력하다. 우리 말 중에 십년감수(十年減壽)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아니다. 나는 그 당한 일로 인하여 십년지계(十年之計)의 살이로 나아갈 것이다. 외국에서 온 말 중에 “버킷리스트(Bucket list)”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를 말한다. 중세시대 교수형은 올가미를 목에 두른 뒤 뒤집어 둔 양동이에 올라가 양동이를 걷어차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죽음을 뜻하는 어떤 말이 만들어졌는데, 이 말에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목록을 정하는 2007년 롬 나이너 감독의 동명의 영화가 상영된 후부터 널리 사용된 말이 버킷리스트이다. 버킷리스트가 아닌 그 반대의 라이프리스트(Life list)로 올 한해에 스스로를 위하여 해보고 싶은 일 하나를 여기에 가져다 올려놓고 싶다.작년에는 나보다 더 걸음 거리의 장애가 심하셔서 장시간 동안 일어서서 말씀 하실 수 없으실 것 같은 손태영 교수님을 모시고 공동체의 어르신들과 함께 이곳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예전에 자전거를 배워서 타는 것이 하나의 목표셨는데, 그 목표를 금메달을 따듯 어렵게 이루셨다는 얘기가 나의 머릿속에 두 바퀴가 굴려가듯 스쳐서 지나쳐 간다. 또 하나는 앞을 못 보시며 방송을 진행하시는 시각장애인 심준구 목사님께서 여러 달 전에 자전거를 타시다가 사고로 몸을 많이 다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작은 모험삼아 마을의 초등학교 마당에 가서 자전거 바퀴자국으로 길을 내가고 싶다.
요즘 들어 더더욱 사는 모양들이 그만그만해 가지를 못하고, 고만고만해져들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각박한 말들을 푸념조로 공 던지듯 툭툭거려댈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는거냐?” 아니면 “먹기 위해서 사는거냐?” 나는 이 말에 따지듯 토를 달자면, 극단적으로는 앞의 사람들은 고르지 못한 영양실조(營養失調)를 넘어선 영양실추(營養失墜)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가깝게는 북한의 주민들과 아프리카의 눈 큰아이들이 찍혀진 사진처럼 다가든다. 뒤의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은 심하게 말하면 몸 안에 농림수산부장관들이 여러분 계셔서 여기서도 몸상태가 조화쏙을 이루지를 못하고 영양실조(營養失調)를 넘어선, 몸속에 영양과잉의 잉여생산물의 저장 창고가 너무 적어, 창고를 임대하여 쟁여놓을 구석이 있어야 할 지경의 사람일 것이다(누가복음 12:13-21). 이런 분들을 요사이는 생활습관병 환자들이라고 따로 군집생활을 하게들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이 상호 다른 말들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기 위하여 죽는가?” 그렇지 않으면 “죽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가?” 성서에서는 한 선생님께서 두 가지의 질문의 답을 각각 다른 곳에서 이야기 하신다. 자신의 마음판에서 선과 악이 싸움을 벌리는 광경을 보고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 고린도전서 15:31-32). 어떻게 보면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은, 거꾸로 말을 하자면 매일의 살아감이 그날그날을 뒤로 주고 가는 죽어감이라고도 말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죽기 위하여 살아간다는 말을 바울선생님은 감옥 속에서 썼다는 편지 글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나는 불연 듯 다음의 생각이 억측처럼 스쳐간다. 혹시나 장애인들이 그 말의 구색을 갖춘 사람들은 아닐는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그 분의 자전적인 옥중에서의 얘기처럼,장애인들은 달팽이 마냥 자기의 갑갑한 커다란 덩치를 등짐처럼 지고 살아가야 하는 처지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몇 주 전에는 안 쪽 마을 조정리교회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고 말씀 하신다”(시편 119:71). 미국의 하버드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한 세기에 가깝게 소위 그 나름의 삶에서 성공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사회고통에 반응하는 성숙도”에 있었다고 한다. 고통에 함몰되면 어쩌면 과하게 표현하여 물에 잠기게 되는 몰살의 상황으로 내저어갈지도 모른다(마태복음 8:28-34 이곳에서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고통의 전가).
큰 아이의 휴대폰에서 표상처럼 대두되어 보여 지는 다음과 같은 영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LOVE yourself MORE” 바로 “너 자신을 더 사랑하라” 지금도 공부를 밥 먹듯 하고 있는 친구 목사로부터 뼈저린 얘기를 듣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절절한 얘기이다. 이 말이 나의 신앙을 고취시키는 듯하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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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안순분 이인순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지명수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이삭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충전교회.금성교회.김기홍.정이삭.최영애.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1인).라홍채.박종만.이은주.수영교회.양오석.진명구.채윤기(박현실.2회).살림교회(박상용외32인).그리스도의집(옹인숙.파리바게트.3회).조정리교회(이정애.2회).(주)대성식품.대덕교회.신건태.주식회사EG(이광형).신평교회(김종원).동산교회(윤호철).동춘교회4남선교회.남상현.금산지역자활센터(조정근).동춘교회6여전도회.임영호(장재영.고은성).동건사(이해석).김용환(최정숙).시민교회(엄재용).금산군사회복지경찰장애인연합회(김민수.김소희.윤춘섭).김종성가족.쎄븐미용실(손연화).최영수외2인.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2인).금산군모란회(5인)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