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세의 나이로 1989년 생을 마감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유명한 음악가 치고는 상당히 오랜삶을 살았다. 구소련의 우크라이나 출생이지만 미국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얻은 그는 낭만주의적 전통 위에 섬세한 기교와 힘있는 연주로 정평을 얻었고 특히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해석에 능통했다는 평을 얻었다. 그는 79세의 나이에도 유럽연주여행을 나설 정도로 열성적인 삶을 살았고 현존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귀감이 되는 근래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손꼽히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는 마치 호로비츠에 대한 헌사가 담긴 전기영화가 아닐까싶다. 제목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호로비츠는 단지 액자속 사진에만 등장한다. 이 영화가 헌사하는 호로비츠는 따로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지저분한 몰골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는 그 아이는 유명한 말썽꾸러기다. 그런데 아이가 맴도는 곳은 피아노 앞이다. 아이는 피아노를 좋아한다. 그래서 녀석은 건반을 두드리고 그녀석이 두드린 건반을 통해 퍼지는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닌 음선이다. 아이는 자신이 듣는 소리를 건반위에 재현하는 능력이 있었다.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써의 연주여행을 꿈꿨지만 그녀의 현실은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 어쨌든 그녀가 학원을 열기위해 이사온 이삿짐을 푸는 날부터 어느 이상한 아이가 메트로놈을 훔쳐간다. 그리고 그녀석은 개원 후에도 갑작스럽게 학원을 찾아와 엉망을 만들고 그녀에게 피곤한 사건을 공급한다. 그런데 이 아이가 더러운 손으로 두들기는 건반은 묘한 음선을 만든다. 이 아이 재능이 있다. 그녀는 아이로부터 삶의 터닝 포인트를 찾으려 한다.
이렇게 아이와 여자는 만난다. 윤경민(신의재 역)과 김지수(엄정화 역)는 원수같은 사이에서 사제지간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사제지간의 사이에 놓여있던 벽의 허물어짐을 천천히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류의 영화가 줄 법한 감동은 전형적인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예측이 가능해도 당하는 경우가 있다. 당연한 것이 항상 실소를 낳는 것만은 아니다. 어설프게 흐르는 전형성은 실소를 금할 수 없지만 탄탄하게 다져진 전형성은 탄성을 자아낸다. 이 작품은 전자보다는 후자쪽에 가깝다. 오차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감동은 견고한 진실성으로 연주된다. 같은 악보를 연주해도 연주자가 누구냐에 따라 곡의 느낌이 달라지는 것처럼 비슷한 소재를 스크린화해도 그 감동의 곡조는 같을 수 없는 법이다.
비범한 이야기가 빚어내는 영민한 감동이 대단해보이긴 하지만 때론 평범한 이야기가 빚어내는 일상적인 감동이 영적인 울림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다. 이 영화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루저들의 삶을 조명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유학을 포기해야 했고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써 연주여행의 꿈을 접은 채 피아노 학원 선생님으로써의 나날을 보내는 지수나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 부모의 애정보다는 괄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경민이나 자신의 삶안에서 밑바닥을 긁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 두사람이 하나의 공통점, 즉 피아노 건반 그 자체에 대한 애정으로 시선이 모였을 때 둘은 서서히 밑바닥까지 침전된 것만 같은 자신의 삶을 끌어올릴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영화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선율을 흘려보낸다. 서로의 삶이 상대방을 필요로 한다는 것. 단순히 이용가치로써의 선택이 아닌 서로의 마음이 지닌 공백을 충만시켜 줌으로써의 상대방의 가치가 와닿는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다. 선생님으로써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의 대리실현으로써의 경민과 자신이 받지 못한 모정을 주는 진실한 구원자로써의 지수는 그렇게 서로의 우연한 만남에 필연적인 이유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희망에 부풀지 않는다. 단순히 모든 것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마치 슬럼프에 빠진 음악가처럼 쉽게 풀려나갈 것만 같던 연주가 한순간 실수로 삐그덕거리고 망가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실패는 때론 많은 것을 뒤돌아보게 한다. 성공보다도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작은 갈등을 선점한 채 묻는다. 그리고 갈등의 뒤안길에서 잠깐의 갈림길에 들어선 인연은 다시 재회한다. 서로의 공백으로 인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고 서로의 존재감을 다시 한번 절실히 느끼게 된다. 단지 함께 있었음이 아닌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절실함. 그렇게 특별한 의미가 되는 두 사람이 그려내는 감동의 음표는 은은하기도 하고 때론 격정적이기도 하지만 음율의 깊이가 주는 감동은 눈물샘을 자극한다.
특히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보답하는 결말은 아름다움 그 자체로 인한 먹먹한 감동이 밀려오는 것만 같다. 말도 필요없는 사제지간의 사연이 피아노 선율 그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기되고 감정의 울림이 전달된다.
영화는 아름다운 피아노 음계를 따라 감동의 음표를 수놓는다. 그럴듯한 이야기에서 뽑아내는 그저그런 감동이 아니라 그럴만한 이야기가 뿜어내는 진실된 감동이 귓가를 따라 마음을 적신다. 평범하지만 진실되며 비슷하지만 독보적이다. 이 영화의 감동은 그 자체만으로 숭고해질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아름다운 건 은은한 피아노 선율에서도 기인한다. 절대음감의 천재소년을 연기하는 신의재군은 실제로 전국콩쿨대회에서 1등으로 입상한 경력을 지녔다. 어린 소년의 고사리같은 손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은 영화를 감미롭고 유연하게 만들며 관객의 귀를 즐겁게 만드는 요건이다. 또한 영화의 감동을 증폭시켜 주고 영화 자체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더욱 윤택하게 한다. 특히나 결말부의 연주는 영화의 전체적인 느낌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게 만들며 아름다운 감동적 선율 뒤로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에게 영화의 감동을 그대로 머금게 하는 인상적인 엔딩으로 기억될 것만 같다.
엄정화의 연기는 실로 대단하다. 살벌한 살의를 뿜어내다가 철없는 말괄량이로 돌변하기도 하는 그녀의 연기는 이제 깊이있는 진실함까지 소화해낸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마치 절정의 연기를 펼치는 것만 같다. 또한 최근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상종가를 달리는 박용우의 털털한 연기는 영화의 웃음을 가미시키는 향신료와 같다. 그의 진솔한 매력이 이번 영화로 인해 각인될 것만 같다.
요즘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한때 조기교육 열풍으로 나라전체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부모님은 아이의 미래를 위해서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킨다. 하지만 어쩌면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아이의 오늘을 무미건조하게 몰락시키는 건 아닐까. 어쩌면 아이에게 필요한건 슈퍼맨이 되기위한 능력함양이 아닌 사랑과 보살핌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꿈보단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아이가 원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원해야 하는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어린 나이때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힌다. 그렇게 우리 아이들은 부모님이 세워준 표지판을 따라가며 자신이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수많은 호로비츠들을 잃어버린다. 영화는 아이들을 위한 참다운 가르침을 언급한다. 단지 열성적인 닥달로 아이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애정이 담긴 지도로써 아이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 아이들의 풍족한 미래도 중요하지만 사랑받는 현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영화는 진실된 눈망울로 전하려 한다. 우리가 죽이고 있는 수많은 호로비츠들을 위한 헌사를 말이다.
필자도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오랫동안 다니며 어느 정도 건반을 두들겼던 것 같다. 피아노에 재미를 붙여서 혼자서도 책상위를 피아노 치듯 두들기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하지만 식상함을 느끼고 언젠가부터 학원에 나가지 않았고 그 뒤로 피아노는 내 삶의 어린추억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니 그 시절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건반을 두들기고 싶다는 생각이 말이다. 물론 호로비츠가 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지만 그 시절 대가를 바라지 않던 순수했던 즐거움을 다시 찾고자 한다면 나잇값 못하는 철없음이 되련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