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에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마 7:13-14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가는 천국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는 수고도 있어야 하고,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충성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애매히 고난당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는 이런 일들이 힘들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요.
롬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처럼,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나갔을 때, 그 열매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다시 힘을 내어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운동선수나 학생들도 자신들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내하며 수고해야 합니까? 하물며 여러분이 바라보는 천국에 대한
소망은, 운동선수의 금메달이나 세상의 그 어떤 상급과도 가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영광스럽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믿음의 반석 정도에만 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실, 억지로 참고 인내하며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롬 5:3-4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대로, 그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많은 인내를 쌓아온 만큼, 이제는 마음속에 소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며 평안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한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해서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칭찬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이 식어져서 처음 행위를 잃은
것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처음보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행위가 더 깊어지고
승해졌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은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열심히 주님의 사업에 힘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심이 식어져 버립니다. 봉사하던 사람이 봉사를 그만두기도 하고, 전도하던 사람이 전도를 게을리 하기도 하며 열심히 심방하던
사람이 심방에 소홀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행함이 변질되는 것은 신앙 안에서의 목표가 흐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으며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사람은 마음속에 천국 새 예루살렘이라는 목표가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고 작은 비진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성결을 향해 철저히 자신을 지켜나갑니다. 그러나 기도를 쉰다든지 어떤 이유로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잃거나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만큼 천국 소망이 흐려지게 되지요. 그동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믿음 안에서 열심 내던 여러 가지 행함도
자연히 식어지고 변개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겉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봉사도 많이 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선행을 쌓아서 마치 신실한
성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의 할례는 멈춰 있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이나 천국 소망으로
행한다기보다는 육적인 성실함이나 열심으로 행해 나가는 것이지요.
물론 여러분이 봉사나 성도 간의 교제 등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열심을
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찾아 행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중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날마다 더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과 수고가 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되지요.
이렇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으면서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만 가지고 ‘나는 이렇게
충성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니까’ 하며 스스로 위안 삼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만, 믿음이 없이 행함만 있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정작 마음에서 죄악을 버려나가는 노력이
없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정녕 영적인 믿음이요, 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겉으로는 열심
내는 일꾼인 것 같아도 정작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씀을 들으면 믿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영적인 깊은 말씀도 깨우치지 못하며 세월이 지나도 육적인 믿음에만 머물러 있게 되지요. 이렇게 육적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혹, 외모를 보는
사람으로부터는 칭찬받을 수 있다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오히려
날이 갈수록 주 안에서의 모든 행위가 처음보다 더 많아지므로 항상 칭찬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모든 열심과 행함들이 반드시 마음의
할례와 함께 이루어져서 영적인 믿음 가운데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