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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구룡포 일제시대 적산 가옥이 늘어 선 장안리 골목이 일제시대로 복원되고 있다
庭光散人 추천 0 조회 47 11.12.30 02: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구룡포 일제 적산 건물 골목이 변하고 있었다. 일제 잔재흔적을 통한 근대사 복원 골목으로 들어가다

 

 

 

 

 

해방된지 6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렸다. 일제 강점시기 36년보다 두배정도의 세월이 흘러,그 동안 대한민국은 현대화 물결에 온 도시가 변하였다.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근대화 건물들이 흘리고 그 곳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 이미 자리바꿈이 되었다. 이젠 일제 식민시대의 건축물들은 거의 사라져가고 슬럼화되어 흉물스레 변하였다.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의 수명이 다해서,헐리고 남아 있는 것도 모든 이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적산가옥은 일제 청산에 대한 운동과 일본인들에 대한  거부감 속에서 일부러 파괴를 재촉한 측면이 많았다.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있는 군산,해남, 부산,구룡포 지역에선 이 문제에 대해서 근대화 역사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진지한 검토를 한 사례들이 기사화 된 적이 있다.

이러한 적산 가옥에 관련하여 그 역사적 사실을 교훈 삼아 더 나은 미래의 발전을 지향하는 것이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몫들이 아닌가 하는 고민들이다.

그 중심적인 사례를 보면 2009년 포항시에서는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일본인 관광객 1만면을 모집하는 계획으로  T/F팀까지 꾸려가며 적산가옥 거리를 만드는 등 관광산업화를 위해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神社의 도리이(鳥居) 시멘트로 되어있다가

해방후 공원 땅에 묻힌다(자료:k뉴스)

공원 윗쪽 용왕당자리가 신사의 자리였다.이중

담장은 신사의 담장이었다2008년 헐물다(k뉴스

자료)


"그 계획의 출발에는 포항 구룡포에 일본인들의 적산 가옥이 50여 호가 남아있어 이를 토대로 삼아 일본인거리를 만들겠다는 포항시는 이러한 아이템을 활용하여 예전에 구룡포를 거점으로 살던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이곳으로 불러들여 그들이 과거를 추억하게 만들고, 아울러 인근 죽도시장에는 과거에 그들이 사용하던 생활 물품을 주로 구비하겠다는 것이다.

또, 일제 강점기 전국최대의 적산가옥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알려진 전북 군산시 역시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 시대’가 이곳에서 촬영될 만큼 현재 적산 가옥이 150여 채가 남아있고 해마다 일본인 천여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방문하고 있어 군산시는 이 건축물을 바탕으로 일본인촌을 형성하여 근대문화 테마의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데일리안 손은수 기자의 해남 적산가옥에 대해서 한국은 승자의 입장에서 일본을 생각해야하는 시기다)"

 

구룡포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구룡포 공원 앞 적산건물이 있는 용주리,장안리 골목의 복원 현장 상태를 물었다. 현재 공사가 한참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 봄까지 모든 것을 단장하여 경주 벚꽃(사꾸라)피는 시기까지 일본관광객 유치를 위해 겨울 추위 속에 공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경주에서 구룡포로 달려갔다. 복원현장을 기록해 두는 것도 가치있는 기록일 것이니까. 삼한사온이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중부지방에는 약간의 눈이 내리고 이 곳도 겨울 바닷바람이 심하다. 골목길 적산가옥의 주변의 모든 주민들과 업종들은 휴점 상태였다. 오직 미용실 한 곳은 개업 중이었다. 지난번에 들렸던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古里(후루사토)찻집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문이 잠겨있었다. 복원 사업이 마무리지는 날이 개업하는 날일 것이다.

구룡포 장안리 골목길에 약 50채의 적산가옥이 복원이 진행중이다. 가림막과 받침목을 설치한 곳과 공사중인 곳도 있다. 적산가옥이 들어 선 구룡포의 역사를 알아야 근대역사의 복원의미를 알 것 같다.

 

 <구룡포와 일본 어업인 이주>

구룡포과메기, 대게와 오징어 어획 동해안 항구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인구1만1천명의 소읍이다. 1800년 말부터 일본어업인들이 진출하면서 수산업 항구로 발돋움한다.

1942년 10월 인천과 같이 읍으로 승격되는 부촌으로서 당당히 자리 매김하였다. 그 이면에는 일본인 '도가와야스브로(十河彌三郞)' 이주 어업인의 힘이 컸다.

구룡포를 개척한 일본 오카야마현(岡山縣) 출신이며 수산업자였다. 1908년(대한제국융희2년) 구룡포읍으로 거주하며 1917년 방파제축조,1923년 매축공사를 비롯하여 대보와 구룡포,포항과 구룡포 도로 개통과 항구조성,구룡포를 수산업의 전진기지로 끌어 올리는데 주역이었다. 경북평의원(1924년)으로 활동하면서 영향력이 넓어져 그 명성은 구룡포는 물론 신문기사에 자주 실린 인물이다.

해방 1년 전(1944년) 68세 일기로 사망한다. 사후에 경북 도내 실력자이며 구룡포 개척의 공로자인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 고향 오카야마 지인들과 하시모토(橋本)이 주축이 된 지역 유지들은 현재 구룡포공원에 공덕비를 세운다.

 

<시멘트로 덮혀 송덕비의 정체>

 

 '도가와야사브로 송덕비' 이다. 높이7미터,폭1.5미터 규화석 송덕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1960년 경에 충혼탑을 재활용하면서 일제 잔재 모양새 가림 때문에 송덕비 글자를 시멘트로 봉합하였다. 구룡포 읍 승격과 항구 축조와 개척에 공로한 도가와야 덕을 기리기 위해 공원의 계단 조성과 송덕비가 함께 이뤄졌다.

2008년 전쯤엔 계단은 시멘트 계단과 양편으로 입방체 석주(돌기둥) 117개가 계단 펜스처럼 서 있었다. 돌기둥에는 일본인들의 이름과 한국인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송덕비 조성과 계단 조성을 위해 조력한 이들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대마도 하치만 신사 계단에도 동일한 돌기둥이 있었다.

2008년 3월 포항시는 계단을 시멘트 대신 돌판넬로 교체하면서 돌기둥에 새겨진 이름을 시멘트로 덮혀 씌우며 뒷면으로 돌리고 앞면에 한국인 기부자 새로운 이름을 새겨 놓았다. 즉 충혼각을 세우는데 일조한 지역 유지 이름과 단체명을 새겨 117개의 돌기둥을 재활용한 셈이다.

 

<일본군 혼령과 한국 혼령이 혼재된 이상한 충혼탑>

 

구룡포 공원 계단을 오르면 오른편에 규화석으로 된 송덕비(도가와야사브로 송덕비)와 왼편에 충혼탑이 보인다.

이 충혼탑은 바로 옆, 일본식 시멘트 기단이 남아 있는 기념비(까만색 대리석은 교체된 것)가 있다. 당시 제국(일본帝國) 재향군인회 고문을 맡고 있던 도가와야 사브로가 1929년(소화3년)11월 신사가 있던 우측에 일본 순국 군인들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웠던 것이다. 현재 기단부가 남아있고 이후에 기념비 대리석은 교체되었다.

이로써 구룡포 공원은 후일 영령들의 추모와 관련된 곳으로 된다. 신사를 비롯하여 제국재향군인회 영혼들을 모시는 자리가 된다.

이 추모비는 해방후 충혼탑으로 재 활용하면서 논란이 된다. 1960년 이 추모비를 충혼탑으로 재활용하는 셈이 되었다. 한국혼령과 일본혼령을 함께 기리는 곳이 된 셈이다. 문제가 되자 바로 옆에 새로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

 

<구룡포 신사의 담장을 헐다(2008년)>

 

구룡포 공원 충혼탑50여 미터 윗쪽 현재 용왕당이 옛 신사이다. 한반도에서도 가장 빠른 시기인 1913년 대정2년 5월에 일본 천조대신을 모신 신사를 세웠다.

1956년 2월23일 민주당 현지 국회의원의 주축으로 신사를 헐물고 용왕당을 세웠다. 그러나 신사의 이중 담장은 재활용하다가 용왕당 증축을 위해 포항시는 2008년 신사의 담장을 허물었다. 신사의 담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신사를 지키던 수호 사자상>

공원 계단을 오르면 충혼각이 보인다. 충혼각 너른 뜰 앞에 두마리의 사자상이 있다. 그 모양새가 일본 조각 냄새가 물씬그린다. 아니나 다른까, 일제 시대 신사 앞에  있던 사자상이란다. 신사를 허물면서 사자상은 충혼각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재활용한 셈이다. 아무튼 한국식 건축물인 충혼각엔 걸맞지 않은 성물이다.

 

<일본 근대사 유적의 복원에 즈음한 유감>

구룡포 과메기와 오징어가 차가운 해풍에 말려지고 있다. 구룡포 공원이 있는  장안리,봉주리 잠자고 있던 적산가옥이 기지개를 깨고 있다. 포항시에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해 어촌 관광이라는 테마로 일본관광객 유치를 서둘고 있다. 구룡포 근대 문화재 등록과 적산가옥 복원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았다.

 구룡포 향토사 정태현 편찬위원의 말이 머리 속에 맴돌았다.

 

 "구룡포에서 가장 일본다운 건물이었다는 천주교 공소와 신사터가 일본관광객들을 유인하는 데는 최고라하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앞으로 드라마세트장 같은 복원만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시멘트 덧칠해 지워졌던 일본인들의 이름도 이제 세상에 나와야한다. 어차피 일본 근대사의 역사를 복원한다면 치욕의 역사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알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구룡포에서 가장 일본다운 건물이었다는 천주교 공소와 신사터가 일본관광객들을 유인하는 데는 최고라하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2008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앞으로 드라마세트장 같은 복원만 아니냐는 아쉬움이 남을 것을 우려하고 있다

 

옛 다이토여관(大藤旅館) 전화16번이라 걸린 액자

일본시대의 시멘트콩크리트 담장,일제시대 건물용도의 사진이 걸려있다.

 

 

 

 

 

전형적인 일본식 널판넬 벽체,국민학교 교실 건물이 이런 형태였다. 60년대까지 전국 일제시대 국민학교 건물은

모두 이런 형태였다. 50~70대 어른들에겐 낯익은 건축형태이다.

 

일본인들이 남겨두고간 적산건물을 물려받은 사람은 일본인들 밑에 종사하던 한국인들이었다.

해방후에도 일본인들에 대한 호의적이고 친일적 경향이 다분하였다.

근대문화재는 고대 문화재보다 쉽게 파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구룡포 적산가옥 주변은  시간의

멈춤 공간으로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구룡포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은 한동안 그 고향인 구룡포를 단체로 찾아왔었다.10년 전까지, 이젠 고령이 되었지만

감포에서도 10년 전까지 매년 일본인 졸업생들이 찾아왔고, 구룡포 일본인 학교 졸업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복원을 마친 가옥들도 있었다.

용주리,장안리 일대 골목을 걷노라면 한국간판만 없다면 일본에 있는 착각에 빠진다.

 

 

 

추운날 한참 공사 중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관광자원화 사업 현장사무실

충혼탑으로 오르는 계단-1944년도에 시멘트 계단과 석주들(새 널돌 계단으로 교체됨)

 

구룡포공원 계단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옛 석주에 일본인 기부자의 이름이 있었지만 뒷면에 시멘트 덮칠로 마감하고 앞은 새롭게 재활용(한국인명단)

적산가옥이 지붕들

구룡포공원에서 본 항구

구룡포항과 공원계단

충혼답과 사자상이 보인다.

 '도가와야사브로 송덕비' 이다. 높이7미터,폭1.5미터 규화석 송덕비가 지금도 남아있다.

1960년 경에 충혼탑을 재활용하면서 일제 잔재 모양새 가림 때문에 송덕비 글자를 시멘트로 봉합하였다.

구룡포 읍 승격과 항구 축조와 개척에 공로한 도가와야 덕을 기리기 위해 공원의 계단 조성과 송덕비가 함께 이뤄졌다.

 

이남이 - 나비의 꿈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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