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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를 사랑하고 작은 일에 감탄하기(마태복음 5장 19-20)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유명한 판타지 소설 <모모>를 아십니까? 책을 읽어보진 않았어도, 그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입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느 오래된 원형극장에 출신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신비한 소녀가 나타나 살았습니다. 그 소녀는 모모. 모모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능력입니다. 누구라도 모모에게 와서 말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행복해집니다. 모모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소녀였습니다. 어느 날 음산하고 냉랭한 기운을 몰고 다니는 회색신사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꾀입니다. 사람들의 시간을 시간은행에 저축하면 이자가 이자를 낳아 더 많은 시간을 주겠다고. 사실 회색신사들은 시간도둑들이었습니다. 결국 그 꾐에 넘어간 사람들은 돈도 많이 벌고 큰집도 사고 좋은 자동차도 굴리고 유명세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기만 할 뿐입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모모는 도둑맞은 시간을 되찾기 위해 신비로운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와 함께 회색신사들과 결투를 벌입니다.
얼핏 <모모>는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과 그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빗댄 이야기로 보입니다. <모모>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저자인 미하엘 엔데는 “그것과는 다르다. 나로서는 그보다 좀 더 앞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사실 현대의 금융자본 시스템의 해악을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금융시스템은 인간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때 행복해진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큰 집을 사고, 그러기 위해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쓰게 만듭니다. 은행은 돈을 빌려주기 위해 사람들의 집과 재산을 담보로 붙잡습니다. 즉 인생을 저당잡고서 돈을 빌려주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인생을 저당 잡힌 사람들은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각박해지고, 가족과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이 미하엘 엔데가 <모모>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습니다.
미하엘 엔데는 화가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엔데의 어린 시절, 무엇이든지 감탄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쳤습니다. 에드가 엔데는 무엇이든지 사소한 일에 감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과 함께 나가 조각상 위에 쌓인 하얀 눈을 보고 “보렴, 참 신비롭구나!” 하더랍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엔데는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보지 않았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엔데가 주목했던 것이 바로, 모두가 환호하던 금융시스템의 해악이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금융시스템은 사람들 특히 양심적인 사람들은 파멸시키고, 비양심적인 사람들은 보상하는 비윤리적이고 악마적인 시스템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말에 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1년이 지난 1997년 결국 그가 우려하던 일이 터졌잖습니까? ‘IMF’로 불리는 국제금융위기입니다. 말 그대로 금융위기입니다.
금융자본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들, 적은 수확, 보잘 것 없는 수입, 이런 것들을 외면합니다. 갈아치우라고 합니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옷!’하며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성장과 세계화를 강요하는 세태에서 가난한 농부들, 힘없는 소상인들, 평범한 직장인들, 돈 없는 대학생들은 금융자본의 권력에 자신들의 소중한 인생을 저당 잡히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나 미하엘 엔데는 그 해악을 보았습니다.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보지 않는 눈,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을 지나치지 않고, 작은 일에도 감탄할 줄 아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작은 자, 작은 일, 어린 아이, 좁은 길(작은 길). 하지만 작은 것을 강조하시고 또 작은 자들을 소중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비판한 이들은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이었던 그들은 율법을 할 수 있는 한 쪼개고 또 쪼갰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아주 작은 단위, 세세한 조항까지 잘 알고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들이 지킨 율법도 비판하거나 반대하신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이유는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소중하게 여기셨고, 율법을 폐기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는 점을 바로 잡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율법을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민이 생깁니다. 율법을 자세하게 해석하고 아주 작은 단위로 나눠서 또 그것을 지키려 했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비판하신 예수님께서도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지극히 작은 것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같은 말씀을 하는 것 아닌가요?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길 원하시는 걸까요? 심지어 예수님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훌륭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사용된 헬라어는 ‘엘라키스토스’라는 말입니다. 헬라어에 ‘작다’는 것을 뜻하는 ‘미크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의 ‘마이크로’(micro)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미크로스’보다 더 작은 단위가 바로 ‘엘라키스토스’입니다. ‘가장 작은’ 단위를 말합니다. ‘엘라키스토스’는 성경에서 크기나 양의 의미보다는, 중요도, 능력, 가치에 있어서 작은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단어는 그래서 ‘가장 천한, 가장 사소한’이란 뜻도 됩니다. 가장 천대받고 곤고하며 도움이 필요하고 하찮고 외면당하는 사람을, 가장 사소하고 평범하며 중요도가 덜한 일을, 중심이나 선두가 아닌 변두리와 뒤쪽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작은 것’을 자주 강조하셨습니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눅 19:17)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므나, 즉 돈을 관리하여 이문을 남기는 일을 말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여기 지극히 작은 것은 불의한 재물, 즉 돈 관리를 잘하여 자신의 퇴직 이후를 준비한 종의 행동을 말합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0, 45)
이 말씀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이란 의미에 대해 감이 오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들’은 바리새인들이 중요시하는 종교적인 세부사항에 비하면 아주 작고 사소하고 하찮은 일들이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들, 죄악된 것들을 가까지 하지 않는 고상하고 거룩한 자신들과는 달리 하찮고 평범하며 귀찮은 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에는 선수였습니다. 그들은 부정한 모든 것, 더러운 모든 것, 법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에서 ‘구별된 자들’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성결하고 거룩한 자들로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 즉 세리와 창녀, 문둥병자들과 사회의 주변인들과는 가까이 하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성경이 부정하다 하는 병자들과도 가까이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성결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율법의 작은 것들, 즉 세부 조항의 조목조목을 지키기 위해서 ‘작은 자들과 작은 것들’을 멀리했습니다, 율법의 본질에서 말하는 바, 더 중요한 것인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작고 사소한 일, 평범하고 하찮은 일 속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율법의 작은 것에도 목숨 걸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면 자기 의, 자기 영광, 사람의 보기에는 성결하고 대단한 자로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은 자들을 사랑하고 작은 일 사소한 일 하찮은 일 평범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사람에게 별로 주목 받지 못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는 내면의 내밀한 ‘작은 것’보다는, 외형에 치중한 자들이었습니다. 즉 마음을 잘 가꾸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일들, 드러나 보이는 인기, 사람들의 갈채,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멀리하는 ‘작은 자들’ 사소한 일들, 평범한 것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작은 자들의 사소한 사연에 귀 기울이며, 하찮은 일에 놀랄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정한 자들, 세리와 죄인들, 창녀들과 먹기를 탐하는 자들 술꾼들과 가까이 지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보다 못한 자’(작은 자들)와는 다른 존재, 즉 분리되고 구별된 존재들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세력과 아성을 구축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주의적 전체주의를 구성했습니다. 세력과 아성을 구축한 이들은 그 사회의 기준이 되었고, 그 기준에 의해 맞는 자와 맞지 않는 자가 나뉩니다. 그리고 맞지 않는 자를 배제하고, 제거하는 것이지요. 문둥이, 이방인, 세리와 죄인. 신앙이 도그마가 되고 일상과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버리고 전체주의를 구성하면 동일한 위험에 빠집니다. 전체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입니다. 나치 독일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여기에 방해되는 주변인들, 특히 집시들과 유태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의 만행을 철학적으로 숙고한 두 명의 철학자가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있습니다.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400여만 명을 학살할 때에 히틀러 휘하에서 최고위 관료로 실무를 담당했던 자가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그를 붙잡아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열었을 때, 대부분의 유태인들은 아이히만이 극도로 악한 자였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재판을 관찰한 아렌트는 그가 매우 평범한 더욱이 지극히 정상적인 이웃집 아저씨 같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국가 독일의 법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매우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이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히틀러 같은 악당이 아니라 선한 지도자 밑에서 일을 했다면 아이히만은 누구보다 뛰어난 관료가 되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에서 아이히만의 잘못, 더 나아가서 나치 독일의 잘못은 바로 “무사유”에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히틀러가 자신에게 내린 명령이 수백만의 유태인들에게 어떤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수용소에 전달되는 공문에 도장을 찍기 전에 아이히만은 그가 결재하는 서류가 당시 독일인들이 벌레처럼 생각하고 제거해서 없애버려야 한다 생각하는 수많은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를 생각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도르노는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의 위험성이 ‘이성과 합리성’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위대한 철학에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고 자신 이외의 것을 온갖 이성적 간계로 박해하는 편집광적 열성이 뒤따랐다.’ 말합니다. 즉 위대한 철학이 자신의 완전무결함, 완벽함, 엄밀함을 지키기 위해서 그보다 못한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철저하게 억압하고 박해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위대한 철학과 지성이 살아있던 독일은 나치의 전체주의적 발상에 사로잡히자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과 완전무결함을 위해 집시와 유대인들을 배제하고 제거했던 것입니다.(<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강신주, 동녘)
교회의 십자군 전쟁, 중세의 마녀 사냥,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틀리면 이단 정죄하는 역사들이 그를 말해줍니다.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와 제3세계를 제패할 때에도 앞선 것이 바로 카톨릭과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말살, 잉카 문명을 정복하고 초토화한 것이 기독교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논리였습니다.
예수의 “작은 자” 정신을 버리면 기독교와 교회도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비뚤어져 되어 사람을 죽이고, 교리의 순수성을 위해 작고 사소하고 하찮은 사람이나 일들을 외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같은 시간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이 어떤 기도를 드렸나요? 누가복음 18:11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세리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부정을 타니까. 그리고 ‘죄인들과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금식을 두 번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금식을 두 번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겠습니까? 또 그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칩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일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신앙에, 자신의 종교에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신앙에서,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고,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달았다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작은 자, 사소한 자, 하찮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너무 하찮아서 중요하지 않아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자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 심지어는 그들이 죄인이어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죄인이어서 사회에서도 제외된 죄인들까지 돌아보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분처럼 인정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세속적인 사람을 볼 때, 불신앙적인 사람을 볼 때, 그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며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비웃음을 듣더라도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돌보고 섬기셨던 예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분이었기에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에게도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 분이었기에 저 같은 사람이 목사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다.
철학자 강신주 박사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주변인들을 사소하다고 여기면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익숙해지면 무시하고 지나칩니다. 젖어들지 마십시오. 익숙해지지 마십시오. 늘 낯선 것으로, 새로운 것으로 신선한 것으로 놀랄 줄 알아야 합니다. 경탄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내가 누리는 부와 행복을 당연하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기업가들은 내가 돈이 있고, 내가 꾸리는 회사이니 그로인해 얻는 이익을 혼자 독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누군가, 눈에 띄지 않는 작은이의 희생과 고생으로 얻은 것이라 여긴다면 자신의 밑에 있는 직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임원우 집사의 회사의 대표는 저희와 다른 종교를 가진 분이지만, 전에 한번 만나 식사하며 들은 이야기에 크게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부모님 회사를 경영하면서 깨달은 것은 회사의 돈은 직원들이 벌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직원들을 존중하기로 했다고.
작은이를 통해 예수를 보십시오. 작고 하찮고 평범한 이들 속에서 작은 예수를 발견하십시오. 그러면 누구라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사소한 것을 통해 위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평범함 속에서 비범한 하나님의 진리와 임재를 보십시오. 그러면 작고 사소한 일에도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이웃인 ‘작은 자’와 함께, 그리고 그들 뒤에 숨어계십니다. 그 이웃과 우리가 하는 ‘작고 하찮고 사소한 일들’ 가운데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작은 자 정신을 잃지 마십시오. 지극히 작은 자를 귀중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 우리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작은 자를 사랑하시고, 작은 일에도 감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