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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보물은 오직 청백이 있을 뿐
보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극인克仁(참봉), 극의克義(진사),, 극례克禮(생원), 극지克智, 극신克信(무과, 군수)이다. 극례는 봉화로 분가했는데, 손자 정준廷準(문과, 학유), 현손 중청中淸(문과, 승지)과 그 아들 주우柱宇(문과, 지평), 그리고 주우의 현손 한운翰運(문과, 지평) 등이 모두 문과 급제하여 봉화의 명문이 되었다. 중청은 호가 구전苟全으로 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지금 구전종택이 남아있다.
딸 둘을 두었는데, 박눌朴訥(찰방), 유자온柳子溫(진사)과 혼인했다. 박눌은 다섯 아들, 거린ㆍ형린ㆍ붕린ㆍ홍린ㆍ종린이 모두 문과급제 했다. 세칭 ‘오린五麟’이라 하며, 그 가운데 종린從鱗(문과, 이조정랑)의 후손들은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 세거하며 명문이 되었다.
박눌의 아버지, 그러니까 보백당의 사돈은 박소종朴紹宗인데, 그 사위가 박치朴緇로 퇴계의 외조부이다. 류자온은 손자가 입암 류중영이고, 그 아들이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형제이다. 하회 풍산류씨는 설명이 필요 없는 명문이다. 서애의 ‘영모록’ 에는 보백당의 결혼 비화가 적혀있다. 재미있는 기록이라 소개한다.
“서씨부인은 동복현감 서운徐運의 딸이었다. 혼례가 임박하여 황희黃喜 정승이 문경에 와 있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녹사錄事가 서 현감을 미워하여 ‘처녀가 두 눈이 실명했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황 정승이 노하여 혼사를 깨 버렸다. 그 후 대사간(보백당)과 혼인이 되어, 서 현감이 황 정승에게 ‘노비 한명을 보내 제 소경 딸 구경이나 하십시요’ 했다. 황 정승이 유모를 보내 살펴보니, 용모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흘렸다. 전후사정을 알게 된 황 정승이 그 둘째딸에게 청혼하여 혼사를 맺었다.”
‘사직과 낙향’은 ‘청백이 보물’이라는 유훈과 함께 이후 보백당 가문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한 가문의 아이덴티티 형성은 이런 결단에서만 가능했다. 관직포기와 처사處士 지향은 이후 안동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농암이 그러했고, 퇴계가 그러했다. 농암聾巖, 퇴계退溪의 자호 자체가 그러한 인생관의 지남指南이었다. 악의 세계에 바위처럼 굳게 귀를 막고, 악의 세계에서 물러나 개울 가로 가겠다고 했다. 이는 더욱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비타협의 도덕적 완강함으로 형상화되었다. 이 후 많은 안동의 선비들이 그 길로 갔다. 처사지향은 곧 학자지향이고, 학자지향은 곧 선비안동과 양반안동의 시금석이 되었다.
시대적 상황이 정계를 떠나게 했지만, 역으로 고향에 멋진 유산을 남긴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안동김씨 수많은 현달자가 남기지 못한 보백당 가문만이 가지는 보물이다. 보백당종택, 묵계서원, 만휴정이 그것이다. 세 유적은 안동 동남부 길안면 묵계리에 소재하는데, 나지막한 산들이 앞뒤로 둘러있고, 앞으로는 꺽지, 다슬기가 사는 묵계천 맑디맑은 개울이 흘러 더 없는 목가적 풍광을 자아내고 있다. 만휴정은 국가문화재인 명승名勝(82호)으로 지정되어 더욱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만휴정은 참 아름다움 정자이다. ‘늘그막에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뜻 그대로의 집이다. 천년사찰 용담사龍潭寺를 포근히 감싸 안은 황학산黃鶴山과 금학산金鶴山, 그리고 계명산鷄鳴山과 천지갑산天地甲山이 앞뒤로 겹겹이 둘러있고, 그 가운데 너럭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기막힌 풍광을 연출 한다. 정자로 들어가는 계곡 위 외나무다리는 이 그림 같은 풍광의 화룡점정이다. 그리고 정자 마루에는 이 마루에 꼭 어울리는 시판詩板,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 걸려있다. 그야말로 가관지지可觀之地며 가유지지可遊之地라 할 만하다.
나는 지난겨울 홀로 만휴정을 찾았다. ‘소리 없는 여울’-묵계를 건너니 산천은 고요했고, 눈을 밟으며 좁은 산길로 들어가니 사방은 더욱 고요하여 ‘만휴’의 정취가 온 몸을 감싸 안아 왔다. 빠삭 빠삭 빠삭,..발바닥에 무방비로 밟혀오는 눈들의 저항소리. 고요는 사색을 동반하고, 사색은 과거로 들어가게 했다. 과거 그날, 한사寒士 보백당이 걸어갔던 깨끗한 고독의 길을 후인이 다시 반추하는 것도 그리 나뿐 일일 수는 없다.
1701년(숙종 27년) 3월 어느 날, 오랜 유배에서 풀려난 75세 남인의 거두,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 아들 밀암 이재李栽와 함께 묵계서원 터를 둘러보다 문득 감회에 젖어 율시 4수와 절구 1수를 지었다. 밀암은 후일 행장, 제문, 상량문을 지었다. 그때 갈암이 “나는 늙고 병든 몸이라 시나 한 수 읊으니, 너는 후일 글을 지어 보아라” 했을 것 같다. 그때 이미 아들의 글 솜씨를 알아봤을 태니까.
갈암은 산림山林으로 추앙받아 과거 없이 이조판서에 오른 최후의 남인으로, 노론이 영원히 복권시키지 않으려 했던 3인- 내암 정인홍, 백호 윤휴- 가운데 한 분이었다. 갈암은 1908년 복권되었다. 어머니가 최초 한글음식요리서인『음식디미방』의 저자이며, 경당 장흥효張興孝의 따님인 정부인 안동장씨(본명 張桂香)였다. 밀암은 퇴계종택 ‘계상유지건옥표방기溪上遺址建屋表坊記’와 서애종택 ‘충효당기忠孝堂記’등의 글을 지은 당대의 처사處士였다.
나는 만휴정을 내려오며 갈암의 시를 읊조렸는데, 절구 한 수는 담백하여 감칠맛이 절로 난다. 권귀에 맞선 선배 보백당과 노론에 맞선 자신을 다같이 “조물주도 시기할 만한 멋진 영남의 인물(東南美)”이라 자부하고 있다. 자부심처럼, 몰후에는 ‘퇴계 적전嫡傳’으로 평가받아 진정한 영남의 인물이 되었다. 시는 이러하다.
賓主東南美 손님과 주인은 영남의 인물들
江山絶勝區 강산 빼어난 이곳
登臨風日好 봄바람도 좋을시구
造物不猜吾 조물주 우리를 시기하지 않으리
보백당은 훌륭한 자손과 멋진 유적만을 남기지 않았다. 보다 멋진 보물을 남겼다. 그것은 깊은 해석을 요하지 않는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열자의 유훈이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오직 청백일 뿐”-이 글귀 한 구절이 이 집의 최고의 보물이다. 그 글귀는‘淸白’두 글자로 요약되고, 이 두 글자는 ‘名勝’의 유적을 더욱 무궁토록 견인하는 주추가 된다 하겠다.
충효, 청렴은 나라의 버팀목이다. 충신, 효자, 청백리 현창이 그 증거이다. 두고두고 추모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그 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그 동안 보백당 현창사업은 6번 정도 있었다. 묵계서원 창건과 복원, 『보백당실기』 편찬과 중간, 증직 청원과 시호 청원이 그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때마다 당대 안동 일원의 명현들이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적극 참여’는 글의 의한 참여이다. ‘글 부조’는 최고의 부조이고 최대의 적선이다.]
1706년 묵계서원 창건(숙종32년) 전후, 이보李簠의 유사遺事, 이재李栽의 행장行狀과 제문祭文, 이광정李光庭의 묘갈명墓碣銘은 장문이며 역작이다. 특히 80노구에 쓴 이재의 행장은 명문이다. 그 글에는 “위대하시다, 서애 문충공께서 ‘강직하다’ 하셨지만, 연산조의 사퇴야말로 만세에 남을 돈사惇史”라 했다.
이를 이어 묵계서원창건기 류극화柳克和, 봉안문 김세흠金世欽, 상향축문 김세호金世鎬, 재루중건상량문 이상정李象靖, 청덕사상량문 옥세보玉世寶, 청덕사중수상량문은 김성탁金聖鐸이 썼다. 1790년 만휴정상량문 정박鄭璞, 1733년 『보백당실기』 간행에는 서문 조덕린趙德鄰, 발문은 권구權榘가 썼다. 1901년 『보백당실기』중간에 발문은 류지호柳止鎬, 류도헌柳道獻이 썼다, 영양은 몰라도 주실(注谷)은 알게 했다는 뛰어난 문신 조덕린의 서문에는, “백년 뒤에 그 심사를 추적해도 광명준결光明峻潔하여 조금도 결점이 없으셨다”했다.
1858년 내린 이조참판 증직청원서는 이주정李周禎, 분황고유문은 류치명柳致明, 개제고사 김대진金岱鎭이 썼고, 1859년 내린 이조판서 증직 분황고유문은 이휘영李彙寧이 썼다. 1863년 내린 시호諡號 때는 묘갈개수고유문은 류도성柳道性, 묘갈개수시추록 김흥락金興洛, 신도비명은 이돈우李敦禹가 썼다. 1895년 사당중건기 김도화金道和가 썼다. 1998년 묵계서원복원 봉안문 이용구李龍九, 복원기문 이헌주李憲柱, 중건기는 이가원李家源이 썼다.
모든 글은 왕조실록과 서애의 영모록, 그리고 김중청金中淸의 연보年譜를 그 저본으로 했고, 이광정, 조덕린, 권구, 류도성, 김흥락, 이돈우 등은 ‘외예손外裔孫’이라 했다.
권구權榘(1672-1749)는 호가 병곡屛谷으로, 화산 권주權柱의 7대 종손이다. 화산의 부인은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녀이고, 둘째 손서孫壻가 퇴계 이황이며, 셋째 손서는 농암 이현보의 맏손자 이원승李元承이다. 병곡 외조부는 서애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柳元之고, 류원지는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증손녀와 혼인했다. 김세흠, 김세호는 김창석金昌錫과 더불어 청계 김진金璡의 후손으로‘의성김씨 3학사’라 했다.
병곡과 김성탁은 갈암 이현일의 문인인데, 병곡은 갈암 손녀와 결혼했다. 갈암은 화산의 묘갈명을 지었다. 대산 이상정은 밀암 외손자며, 이돈우의 고조부이다. 정재 류치명은 대산 외증손자며 류지호의 아버지다. 이주정은 임청각 이명李洺의 후손이고, 이휘영은 퇴계 10대 종손이다.
김흥락은 학봉 11대 종손이고, 류도성은 서애후손이다. 김도화는 정재 제자이며, 이용구는 국학진흥원 ‘퇴계학맥도’에 마지막으로 이름이 오른 농암 16대 종손이고, 이가원은 퇴계후손이다. 혼인과 사제로 얽혀 있고, 모두가 퇴계학맥을 이어간 거성들이었다.
화산은 뛰어난 문신으로, 영남사림의 선구였지만 갑자사화 때 참변을 당했다. 중종반정 원년 1506년, 바로 복권되고 우참찬에 증직되어 다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병곡은 처사處士였지만 화산을 넘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진 영광을 얻었고, 당호도 ‘병곡종택’으로 명명되었다. 능문能文이 능리能吏를 넘어서는 사례이고, 안동문화가 곧 글 문화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병곡종택은 소산 옆 가일佳日에 있고, 권씨 집성촌이다. 병곡은 『보백당실기』‘발문(書實記後)’에 짧은 소회를 적었지만 오열하면서 쓴 것 같다.
무오, 갑자사화에 낙포 이굉李浤(문과, 개성유수), 이명李洺(생원, 형조좌랑) 형제와 조카들인 이윤李胤(문과, 대사간), 망헌 이주李冑(문과, 도승지), 이려李膂(문과, 사간원정언) 등 선조들이 한꺼번에 피화된 이주정(문과, 사헌부지평)도 아마 ‘증직청원서’를 쓰면서 똑같이 오열했으리라 생각된다. 병곡의 소회 부분은 이러하다.
“선생의 후손 영泳이 나를 ‘자손의 반열에 있다(在子孫之列)’하고, 발문을 부탁하니 못난 내가 어찌 이를 감당 할 수 있으랴. 다만 생각해보니, 내 선조 참찬공은 선생과 동시, 동향으로 입조入朝하신 시말始末이 같으시다. 지금 이 실기實記를 보니 저절로 비통한 감정이 일고(自有所慽慽焉),마음이 격동되어 어떻게 할 수 없을 지경이다(動於心而不能已者).”
난포는 난초가 자라는 텃밭이다
대부분의 문중이 그러하듯, 보백당의 현창사업 역시 종손들의 결단으로 이루어졌다. 『보백당실기』편찬에는 7대 종손 김승서金承瑞와 4촌 승옥承鈺 그리고 영泳, 묵계서원 창건 때는 8대 종손 김중망金重望과 함께 모셔진 응계凝溪 옥고玉沽의 후손 옥세보가 있었다. 14대 종손 김병주金炳周는‘은이불현隱而不顯’한 분이었지만, 학행이 있어 엄청난 물력이 들어간 연시延諡 행사를 이끌었다. 『보백당실기』 중간 편찬에는 15대 종손 김학규金學圭, 묵계서원 복원에는 김주현金冑顯 현 종손이 있었다. 1998년 4월의 복원 향례享禮에는 1,000여명의 인사들이 운집한 사문斯文의 대사大事였다.
김학규부터는 모두 문집을 남겼다. 나는 사실 보백당 종택에 이런 학문적 전통이 전수되었음은 몰랐다. 유고遺稿들이 필사 유일본으로 남아 있다면 알 수도 없다. 2004년 김주현 종손은 이런 조상의 유고를 간행했다. 『선장세고仙莊世稿』 4책 25권의 거질巨帙이다.‘선장’은 묵계의 옛 이름이 ‘선항仙巷’이어서 그렇게 표제表題 했다. 종손은 유고 간행에 앞서 각각의 ‘묘갈명墓碣銘’을 근세 최고의 선비들에게 청탁했다. 문집 표현대로 쓰면, 난포 묘갈명은 전주인 류정기(全州人 柳正基), 가헌 묘갈명은 진성인 이원윤(眞城人 李源胤), 동천 묘갈명은 순천인 김철희(順天人 金喆熙), 달우 묘갈명은 나의 선친(永川人 李龍九)이 지으셨다. 이로써 보백당 근세 종손들의 대를 이은 문한文翰과 조행操行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선친은 글 말미에 ‘척말戚末’이라 했다. 박실(朴谷) 신창현감 류긍호柳肯鎬의 집이 ‘신창댁’인데, 선친에게는 외가이고 달우 종손에게는 진외가였기 때문이다. 선산 해평으로 이사 간 ‘수남위종택’이 그 집으로, 조부 김창진의 처가이다. 그러니까 두 분은 6촌이 되니 그런 표현을 했다.
『선장세고』 편집은 이러하다. 현 종손의 고조부인 김학규는 호가 난포蘭圃인데 『난포집』 9권을 남겼다. 증조부는 김창진金昌鎭이고 호는 가헌稼軒인데 『가헌집』 8권을 남겼다. 조부는 김정한金鼎漢이고 호는 동천東川인데 『동천집』 6권을 남겼다. 아버지는 김해동金海東이며 호는 달우達于인데 『달우일고』2권을 남겼다.
내용은 처사들의‘문집文集’형태 그대로이다. 시詩, 서書, 발跋, 기記, 만사輓詞, 제문祭文 등의 글 모음이다. 처사들의 글은 일상의 기록이고, 기록이 그대로 문학이 되었다. 이것이 안동 선비의 삶이었다. 담백한 인생이었던 만큼 글 역시 향촌사회를 살아간 이력의 기록으로 잔잔하고 진솔하게 표출되어 있다. 글 가운데는 ‘만사輓詞’가 적지 않다. 만사는 망자亡者에 대한 추모사이다. 글로서 고인을 추모하는 이 예법은 매우 소중한 일이지만, 지금 문득 이 전통이 사라졌다.
‘난포蘭圃’는 난이 자라는 텃밭이다. 난포 김학규는 난 같은 인생을 살고자 했다. 친구 류연즙柳淵楫이 쓴 ‘난포기蘭圃記’에“내가 일찍이 난포의 집을 들려 방안의 도서들은 보니 애연藹然하기가 난실蘭室에 들어온 것 같고, 자제들의 순근온아淳謹溫雅 돈상효제敦尙孝悌한 모습은 삼삼森森하기가 마씨馬氏 형제의 줄란茁蘭 같고, 역사와 경서 공부에 개으르지 않은 모습은 올올兀兀하기가 한공韓公의 분난焚蘭 같았다”고 했다. 두분은 서산 김흥락 제자였다.
난은 선비가 지향하는 이상이다. 안동의 선비가 난을 좋아함은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난 같은 인생은 결국 처사지향, 문학지향의 인생이다. 난포의 집이 그런 만큼 만휴정은 더욱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만휴정은 겹겹의 산들에 둘러싸인 한 지점에 살포시 내려앉은 한 포기 난이다. 시詩는 이를 구현하는 수단이다.
『난포집』 에 만휴정 시 7편이 있다. 선조 시를 따라 짓고, 마루 위 시판을 보고 짓고, 중수하고 짓고, 주사廚舍 건립하고 짓고, 향음주례 하고 짓고, 시집을 보고 짓고, 벗들과 모임하고 지었다. ‘만휴정을 중수하고(晩休亭重修)’지은 시는 난같이 담백하다.
六十五年老 65세 늙은 몸
形骸世俗垢 때 낀 세속의 형체
往洗松巖瀑 송암 폭포에 씻으려 갔건만
瀑泉不受垢 폭포수에는 씻을 수 없었네
出谷山還笑 돌아 나와 웃었다
奈何肺腑垢 마음의 때를 어찌하랴
난포는 전형적 처사로 학문에 매진하며 학생을 가르쳤다. 보백당종택을 ‘고심전력苦心專力’하여 지었으며, 구전종택 구미당九未堂을 보수했으며, 『보백당실기』간행을 비롯한 온갖 문중 대소사를 처리했다. 실로 보백당 가문을 중흥한 분이라 할 수 있다.
가헌稼軒 김창진 역시 뛰어난 학행이 있었으며, 난포처럼 많은 인물들과 교류했다. 당대 인사들의 만사, 재문의 글들이 국학진흥원에 기탁되어 있다. 동천東川 김정한의 생애도 다르지 않다. 시골 전원은 선의 세계이며 서울 정치는 악의 세계이기에, 생애 전반이 일관되게 선을 지향하고 있다. 한마디로‘착한 인생’이고, ‘맑은 인생’이 이들 처사들의 삶이었다. 글 가운데 난포와 가헌은 놀랍게도 국문시가 4수를 남겼는데, 난포의 시가는 재목이‘백수청산가白水靑山歌’다. 농암의 ‘어부가’, 퇴계의 ‘도산6곡’, 송암 권호문의 ‘독락8곡’으로 이어지는 영남 강호가도의 맥락을 잇고 있다.
白水야 네가 무슨 백수냐 우리 할배 백수이지
靑山아 네가 무슨 청산이냐 우리 할배 청산이지
靑山白水 맑은 길로 우리 할배 따라가노라
선조의 청백 정신을 노래했다. 청산백수보다 ‘우리 할배가 더 청백하다’하며, 그 길로 따라가겠다고 했다. 가헌은 ‘태평가太平歌’, ‘세석가洗石歌’, ‘백발가白髮歌’ 3수를 지었는데, 그 가운데 백발가의 이미지는 ‘백수청산가’와 비슷하다. 청송, 녹죽이 불변하듯, 백발의 자신도 ‘일편단심 변하지 않겠노라’ 했다.
靑松은 불변하고 綠竹도 불변 하리라
白髮아 저 靑松綠竹 보았느냐
一片丹心은 그대로 두어라
달우達于 김해동은 기국이 크고 덕행이 뛰어났다. 그래서 “외모는 준일하여 유림의 으뜸이었고, 국량은 호연하며, 기품은 난같이 향기로왔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골상이 준수하여’증조부 난포처사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난포가 쓴 글과 시가 있는데, 제목이‘戒曾孫海東’,‘戱作讀法二句題示曾孫海東’,‘命曾孫海東移菊偶吟’,‘戒曾孫海東入校’등이다. 번역하면, ‘증손 해동에게 주는 글’,‘희롱삼아 독법 두 구를 지어 증손 해동에서 써서 보여주다’와 ‘증손 해동에게 국화를 옮기라고 하고 지었다’와 ‘증손 해동의 입교에 훈계 한다’였다. 비록 어린 증손자에게 쓴 것이지만, 그 뜻은 후손 모두에게 보내는 염원이리라.
1989년 운명하자 향내에서 유림장儒林葬을 결정했다. 유림장은 존경받은 장석丈席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달우일고』에는 많은 친지, 벗들의 만사輓詞, 제문祭文이 있다. 그 가운데 이동은李東恩 퇴계종손의 이채로운 국문 제문에는‘지기知己’라 하고, “약관에 상종하여 경술국치 이후 8.15까지 구절양장 겪으면서 살아온 일은 필설로는 어렵다”고 했다.
선친과도 오랜 우정이 있어, “공公과 더불어 세상일을 공론公論함이 지금 십 수 년이 되었다”고 하고, “문사門事 상의는 한 결 같이 관후하게 처리하여 그 마땅함을 잃지 않았으니 대게 그 성품이 그러하였다”고 회고했다. ‘관후함’은 보백당의 ‘持身謹愼 待人忠厚’의 유훈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달우 종손이 그런 분이였다. 유림장은 향내 인사 800여 명이 개좌開座한 장관의 행사로, 보백당 종택의 오랜 세월 지워지지 않은 그림으로 남으리라 생각된다.
안동에서 4대 문집을 낸 가문은 흔하지 않다. 김주현 종손도 국문 문집을 낸바 있다. 그러니 5대 문집이 나왔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전주유씨 박실(朴谷) 수정재壽靜齋(柳鼎文) 가문의 대를 이은 문한文翰으로 그 명성이 전 영남에 자자한 바 있지만, 그 밖에 어떤 집이 있는지 모르겠다. 후일 이들 문집들의 학문적 성과가 보고되겠지만, 이번에 반질한 문집 자체에서 보백당 종택의 전통과 명예,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보백당 종손들은 종손으로서의 모범임은 말할 것도 없고, 안동 선비의 전범 같은 생애를 보냈다.
‘보백당종택’은 이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국가칙령國家勅令과 더불어 이미‘정헌定獻’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났으므로 ‘국불천위종택國不遷位宗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런 자부심에 더하여 역대 종손들의 ‘글에 의한 전통’은 보백당종택을 명실상부한 명문의 종택으로 한층 격상시키고 있다.
글 문화 전통은 안동의 전통가치와 부합 되고, 이런 태도가 재경 안동김씨가 노론으로 경도될 때 유일하게 남인의 길을 걸어간 토대가 되었다. 그 옛날 김계권, 김계행은 형제였지만, 그 자손들의 여정은 금성과 화성 같은 멀고 다른 길을 가도록 했다. 인생은 그런 것인가?
J. F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자작축시를 읊은, 미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로버트 프루스트의 명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의 한 구절이 이 시간 너무 생각난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보백당 현창에 안동의 선현들이 대거 참여한 일은 전연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른다. 이미 보백당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함’과‘청백淸白의 표방’은 심대한 원인遠因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역사는 진실 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 즉 眞善美한 것만 남는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성찰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금년 ‘보백당 김계행 선생 서세 500주년 기념행사’는 이런 가문의 전통을 더욱 빛나게 하는 중간결산이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천년 시작의 출발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하다.
아버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보백당 김계행 선생 서세 500주년’을 맞이하여 글을 쓰려니, 문득 안동김씨 가문과 우리 안동 영천이씨永川李氏 가문과의 세의世誼가 생각이 나서 이번 기회에 대략 소개하려 한다. 보백당의 조카 김영균金永勻(진사, 봉사)은 나의 17대 조상인 농암선조(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께서 개최한 초기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의 일원이었다. 당시 참석하여 축하 시를 썼다. 농암이 안동부사 시절 ‘안동양로연’을 개최했는데, 역시 참석하여 축하 시를 지었다. 시 한 구절은 이러하다.
美事合傳朝野說 아름다운 일 회자되어 조야에 전해지고
縟儀宜畵子孫連 그림으로 남아 자손에게 이어지네
白頭我亦頻承喚 백발의 나는 자주 초청을 받아
叨揖淸光忝錦筵 맑은 모습 마주하고 비단 자리 더렵혔네
이 시는 농암종택에 친필로 보존되어 있다. ‘애일당구로회’의 회원 모두가 예안禮安(현 도산)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음으로 볼 때 아주 이례적 참여이다. ‘자주 초청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각별한 친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삼구정의 효심’과 농암의 손서孫壻 창균 김기보金箕報(음, 현감) 때문일 수도 있다.
조카 김영수의 아들 삼당 김영金瑛(문과, 관찰사)은 농암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했고, 1495년(연산군 1년) 생원 동방급제 했다. 『농암집』에 시가 남아 있고, 농암종택에 ‘안동양로연’과‘애일당구로회’의 친필 시가 남아 있다. 동방급제 인연과 환로宦路 우정 때문인지 사돈이 되었다. 창균 김기보는 삼당의 손자였고, 분천汾川 처가에 가서 상당기간 살았다. 금계 황준량黃俊良(문과, 현감)과 동서로 농암종택에서 ‘두 서방’이라 했다.
삼당은 신동이라 했고, 보백당이 “장차 우리 가문을 크게 빛낼 아이”라 했다. 학자, 관료로서 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등 당대 명현들과 교류하여 소산 안동김씨를 명문으로 도약하는 기틀을 쌓아 장동파의 적통인 오늘의 ‘삼당파’가 있게 했다. 창균 김기보의 안동 낙향은 안동김씨의 최초 역귀향이며, 문인으로 생애를 보내 오늘의 ‘소산파’가 있게 했다. 여기에는 처조부 농암과 장인 이문량李文樑(음, 찰방)과 처삼촌 이중량李仲樑(문과, 관찰사), 이숙량李叔樑(진사, 왕자사부), 동서 황준량 등의 영향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퇴계의 제자가 되었다. 서애 류성룡, 송암 권호문權好文 등과 교류했고, 사후 묘갈명을 대제학 소세량蘇世讓, 성현成俔이 각각 썼다. 이로써 소산파가 사림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 역활을 했다.
창균의 현손 구재 김계광金啓光(문과, 군수)은 『농암집』을 간행했다. 엄청난 경비를 감안할 때 선외가先外家 조상의 문집간행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농암집』 목판 일부가 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는데 최근까지 소산 청원루에 보관되어 있었다 한다.
이들이 남긴 문집이 『삼당집』,『창균집』,『구재집』인데, 소산 안동김씨 최고의 문화자산이다. 삼당의 아버지 김영수가 남겨놓은‘양소당養素堂’은 이로써 ‘안동김씨대종택’이 되었으며, 영수 형제들이 88세 어머니에게 효도하기 위해 지은 삼구정三龜亭은 소산의 가장 정채 있는 문화유적이 되었다. 김영균이 대제학 성현成俔에게 부탁한 기문記文과, 삼당의 시와 창균의 소회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창균의 글에는, “당시 애일의 정과 색동옷의 즐거움이 어떠했으랴(當時 愛日之情 戱綵之樂 當何如哉)”했다. ‘애일愛日’은 “부모님이 살아 계실 날이 많지 않음을 아까와 한다”는 뜻이 있다.
‘애일의 정과 색동옷의 즐거움’은 농암이 분천汾川 강가에 건립한 애일당愛日堂의 내력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삼당과 창균이 모두 애일당구로회의 축하 시를 남겼는데, 삼당의 시에, “늙은 사람 누구를 위해 애일을 할까(老子爲誰知愛日), 애일당 오르니 흐르는 눈물 견디기 이렵네(不堪哀淚到君堂)” 했고, 안동양로연 축하 시에도 지극한 효심을 나타내고 있다. 시 한 구절은 이러하다.
三秋光景時方吉 가을 하늘 맑고 좋은 시절
萬壽杯觴袂正連 축수하는 자리 소매들이 이어졌네
風樹造哀孤子慟 풍수의 슬픔을 안은 나는
三龜亭上奈虛筵 삼구정 위의 빈자리를 어찌할까
삼구정, 애일당의‘색동옷 효 전통’은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본가와 사가와 처가에 있는 효의 정자에 모두 ‘노래자의 효도’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농암은 사실 이때 70노구의 몸으로 98세를 사신 아버지를 위해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런 연유로 안동김씨 주요인물을 보백당의 청백, 김영수 형제의 효도, 김영, 김기보의 문장, 김상용, 김상헌의 충절, 김창협, 김창흡의 학문으로 대별함도 전연 근거 없는 논의는 아니다.
보백당 현손 구전 김중청金中淸(문과, 승지)은 농암의 종증손서從曾孫壻(조카 李國樑의 손서)로 농암에 대한 추모 글을 남겼다. 여헌 장현광張顯光, 석담 이윤우李潤雨, 인재 최현崔睍 등의 인물들과 교유했다. 아들 주우柱宇(문과, 지평)는 농암 88세에 농암과 퇴계 및 금계 황준량, 탁청정 김유金綏 등 친지들이 쓴 축수 시 10수를 대자大字로 써서 열 폭 목판을 남겼다. 봉화 구전종택 가보家寶이다. 농암종택은 이를 10폭 병풍으로 만들어 오랜 세월 제사 병풍으로 사용해 왔다. 이번 행사에 즈음하여 농암종택의 이 병풍 글씨를 근거로 다시 판각하고 복제품 30개를 한정 제작하여 양가 희망자에 갖도록 했으며, 판각원본은 국학진흥원에 가탁, 전시하도록 했다. 이 일은 나와 보백당 차종손 김정기, 구전 후손 김세현이 함께 추진했다.
구전의 농암 추모 글은 농암의 정계은퇴에 대한 소감인데, 그 수사가 빼어나고 보백당과도 무관하지 않아 소개한다. 구전은 농암의 정계은퇴에 대해 “우리나라 유사 이래 단 한 분 뿐이라”했다. 구전이 당시 보백당 연보를 꼼꼼히 챙긴 정성으로 볼 때, 아마 본가와 처가의 두 조상을 함께 생각하며 지은 글이라 생각된다. 『구전집』의 기록은 이러하다.
“ 아아! 선생의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오, 벼슬과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有史 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와 당나라의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 천 년을 내려왔는데, 오직 우리 농암선생께서 쇠퇴한 세사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광, 소수, 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했다.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 소수가 떠날 때의 1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우리 농암 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임을 진정 흠모하게 되었다.”
‘농암선생퇴휴병발문聾巖先生退休屛跋文’
양가 혼인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구전 사위 이모李慕(문과. 수찬)는 계문고제溪門高弟인 간재 이덕홍李德弘(유일, 현감)의 아들이고, 간재는 농암의 종손자이다. 이모는 형 이점李蒧(문과, 한림)과 더불어 구전의 제자이기도 하다. 구전종택의 보물인『부경별장』 에는 이모, 이점의 친필 글씨가 수록되어 있는데, 글머리와 끝에 ‘함장과函丈’과 ‘문생門生’이라 썼다. 중국 사신을 가는 스승에게 ‘시 4수를 지어 노자路資로 올린다’고 하고, 최고의 수사로 전송하는데, “나아가고 물러남이 기린처럼 상서롭고, 지모는 장량과 한신처럼 웅대하다”고 했다. 이들 사제師弟들은 또 다른 형제인 이강李茳(문과, 교리)과 더불어 구전의 스승인 월천 조목趙穆(유일, 공조참판)이 도산서원에 종향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구전 아들 주국柱國은 영천이씨 협莢(음, 찰방)의 사위가 되었고, 맏손자 종열宗烈(柱旻의 아들)은 이모李慕의 사위가 되었다. 구전 입장에서는 손자가 외손녀와 결혼했으며, 3대 중첩 혼인을 한 셈이었다. 그렇지만 퇴계-월천-구전, 혹은 퇴계-간재-선오당(李蒔)으로 이어지는 이들 예안의 퇴계학맥은 대북파를 견지한 까닭에 인조반정과 더불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1791년 10월, 동야 김양근金養根(문과, 참의)은 농암 산소(청량산 남록 소재) 면례緬禮 당시 산역山役에 참석하고 제문을 했다. 동야는 삼당 김영과 창균 김기보로 이어지는 소산 안동김씨 대종가의 종통을 이은 인물이다.
1998년 4월, 묵계서원 복설고유復設告由에는 김주현 종손께서 나의 선친(庸軒 李龍九)을 도집례都執禮로 초청하셨다. 선친은 그때 와병臥病(5월 타계)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봉안문奉安文을 남겼는데, 절필의 글이 되었다.
농암은 문화관광부의‘2001년도 문화인물’선정되어 다양한 행사가 있었다. 그때 청량산 아래 가송리佳松里 입구에 안동청년유도회 주관으로‘농암시가비’를 세웠는데, 그 부지 주인이 건설업을 하는 김수원이었다. 그는 김태사의 후손으로 50평의 땅을 조건 없이 기증했다. 내가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 기회에 이를 적어 둔다.
삼구정, 애일당 효 전통 뿐만 아니라, 당시 양가의 여러 세의世誼가 머릿속에 그려지는데, 글 쓰는 내내 머리에 맴도는 것이 보백당과 농암의 인생 궤적이 너무 흡사하다는 점이었다. 연산군시대 재조在朝하여 대간臺諫으로 근무한 점과, 그로인해 갑자사화에 피화된 것과, 끊임없는 사직요청과 궁벽한 곳의 낙향이 그러했다. 과거 합격도 병과 21등, 20등으로, 33명 정원에 31등, 30등 했다. 턱걸이 합격이었다. 대감이 되지 못하고 물러난 것도 같다. 농암은 ‘영감’인 호조참판에서 물러났다.
은퇴 이후도 그렇다. 다같이‘수복강영壽福康榮’ 했다. 수壽는 87세, 89세였고, 복福은 생전에 관직에 있는 자손이 7명, 9명이었다. 강康은 장수하면서도 아팠다는 기록이 없으며, 유언도 아주 소박했다. 영榮은 은퇴 이후 모두 대감이 되었고, 영예로운 시호까지 받았다. 아름다운 유적을 남겼고, 이름을 남겼다. 그것도 영원히 존경받을 이름을 남겼다. 깨끗한 국가봉직이었고, 향기로운 은퇴생활이었다. 만휴정과 애일당은 두고두고 사랑받을 정자임을 말할 것도 없다.
인생은 두 종류 유산을 남긴다. 부채를 남긴 인생과 은택을 남긴 인생이다. 두 분 생애는 참으로 큰 은택을 남긴 인생이다. 후손들에게는 더 없는 ‘긍지矜持’라는 선물을 남겼다. 이로써 묵계유적과 가송유적은 서로 호응한다.
연산군 시대 대간들의 죄는 괘씸죄였다. ‘임금을 능멸했다’고 했고, ‘능상지죄凌上之罪’라 했다. 사화士禍는 ‘능상지죄’의 단죄였다. 보백당과 마찬가지로 괘씸죄에 걸린 사간원정언 농암의 길은 하나였다. 죽음의 길이었다. 귀양지에서 다시 잡혀 올라와 모진 장형杖刑 끝에 하옥下獄 70여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어느 날 문득 석방되었는데, 이는 연산군이 죄수 방점傍點을 잘못 찍은 실수 때문이었다. 갑자년 사화 절정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만년, 인기와 여망을 한 몸에 받았을 때 전격 은퇴 했다. 그것도 영감 신분으로 했고, 궁벽한 분강汾江(도산면 분천동)으로 낙향했다. 분천을 찾은 모재 김안국金安國(문과, 판중추부사)이 ‘마치 도원桃源에 들어와 신선을 만난 것 같다’ 했으니, 묵계의 선항仙巷과 어찌 그리 유사한가! 폭포에 귀를 막기 위해 찾은 곳이 묵계黙溪의 송암松巖인가. 여울에 귀를 막기 위해 찾은 곳이 분강汾江의 농암聾巖인가. ‘만휴晩休’하기 위해 지은 집이 만휴정인가. ‘애일愛日’하기 위해 지은 집이 애일당인가!
낙포 이굉李浤과 동생 이명李洺의 정치여정도 두 분과 유사하다. 아니 똑같다. 이때 함께 낙향했고,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를 본받아, 강을 두고 남북으로 나누어 지은 정자가 귀래정歸來亭(1513년 건립)과 임청각臨淸閣(1515년 건립)이다. 삼구정 건립이 1495년이고, 만휴정이 1501년이다. 농암이 ‘귀거래도’를 벽에 그리고 지은 명농당明農堂이 1510년이고, 애일당이 1512년이니 모두 이때였다.
‘임청’은 ‘귀거래사歸去來辭’의 한 구절인 ‘臨淸流而賦詩(맑은 물가에서 시를 쓰겠다.)’에서 유래했다. 안동문화가 관료지향에서 학문중심으로 방향을 트는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계문溪門 3처사處士’인 후조당 김부필金富弼, 매암 이숙량李叔樑, 송암 권호문權好文의 등장은 그 반증이었다. 농암이 귀래정, 임청각 두 정자에 가서 시를 쓰고 교유했음은 시대적, 사상적 취향을 함께했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백당의 교유는 점필재 김종직 뿐 만 아니다. 제자로 목숨을 잃은 용재 이종준李宗準, 망헌 이주李冑는 물론이고, 낙포 이굉, 화산 권주權柱, 허백당 김양진金楊震, 농암 등의 당대 안동 인물들과 틀림없이 교유했으리라 생각된다. 동향으로 동시대 급제했고, 같은 조정에서 대간 벼슬을 주고받았으며, 생사가 오고가는 무오, 갑자사화를 함께했다. 낙포는 동방이며, 화산과 허백당은 바로 이웃이고, 용재는 삼구정 현판을 썼고, 농암은 조카 삼당과 동방同榜이니 안 만났다고 함이 도리어 이상하다.
조령鳥嶺 남쪽 궁벽한 시골, 안동 각 가문의 문을 연 첫 문과급제자 들이었으니 그 감격과 포부들이 어떠했겠는가. 아프리카에서 동창을 만난 인연 보다 더 큰 인연을 이미 맺고 있었다. 사실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영혼들이 계시어 안부를 주고받지 않을까. 이번 행사에 즈음하여서는 보백당과 농암 두 분은 이런 감회의 말씀을 나누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보백당 “그때 우리 참 고생했지.”
농암 “저야 한 번이였지마는 대감께서는 세 번이나 고초를 겪지 않으셨습니까, 망헌 대감, 화산 대감, 용재 대감, 허백당 대감, 그리고 동료, 선배들의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고 목이 메어옵니다.”
보백당 “그래, 그때 우리 얼마나 울고 울었나,..그런데 들으니, 내 죽은 후 양가 혼인도 많았다하고, 전에 대감 후손이 나를 위한 글을 지었는데, 지금 그 자제께서 다시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하니 가상하기 그지없는 일이로고...자손들이 내 죽은 500주년을 기념한다나, 어쩐다나...아무튼 그 때 밥 먹으로나 오게.”
농암 “벌써 500년이나 되었습니까. 세월이 정말 유수 같습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초청 해주시면 꼭 참석하겠습니다. 그리고 글에 대해서 저도 듣기는 했습니다만, 아손兒孫들이 괜히 대감께 누를 끼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보백당 “그건 걱정 말게. 대감 생각하고 쓰면 틀림없이 잘 쓸 걸세, 껄껄껄.”
농암 “문론 그래야지요, 껄껄껄.”
2015년 가을, 김정기金定基 차종손 내외분이 가송 오지로 왕림하여 말씀하시기를, “2017년은 우리 보백당 선조 서세 500주년으로 추모행사를 하고자 한다. 이 행사에 선조의 사적을 우선 자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소설식으로 글을 써 달라”한다. 글도 모르고, 소설은 더욱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탁이었다. 나는‘적임이 아니며 감당할 수 없다’ 하니, “문중 논의에서 내가 자네를 추천했고 족친들도 모두 동의했다”고 한다. 내가 다시 사양하니 이번에는 종부께서 다시 요청하신다. 종부는 나와 대학 동문으로 가끔 우스개도 한다.
답변을 유보하고 헤어진 그 어느 후일, 차종손이 “아버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는 자네 글을 받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말하니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삼구정 효孝 정신이 오늘 차종손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느껴졌다. 양가 인연이 적지 않고, 차종손 내외분과 우리 내외와의 오랜 우정과 진심어린 성의를 거절할 수 없어 외람되이 용기를 내어 쓰지만, 원래 필력이 없는 사람의 글이라 성스러운 행사에 부응하지 못 함은 명약관화 하다. ‘소설식 글’의 요청에는 그저 흉내만 조금 내었을 뿐이다.
세산 류지호柳止鎬의 『보백당실기』 중간 발문에, “한 점 고기 맛으로 솥 전체의 맛을 알 수 있는 것으로(嘗鼎一臠), 선현들의 글에 이미 다 드러나 있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 했다. 이 글 또한 그런 평가에 넘어서는 글일 수 없다. 다만 글 말미에 다시 생각나는 것은‘淸白이 寶物’라는 이집의 당호는 이 집 자손만이 지켜야하는 가훈이 아니라 혼돈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 모두가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하는 최상의 금언 한마디다.
지키고 지키지 않음은 선택의 일이지만 적어도 이 집을 방문하는 길손들은 이 말 한마디를 되새겨봄이 선현을 찾고 종택을 찾는 이의 기본자세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불천위를 모시는 종손, 종부 내외분의 인고의 세월에 조금이나마 위로를 주는 그런 뜻있는 종택 방문이 되기를 기원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진정 오늘 ‘보백당 김계행 선생 서세 500주년 기념’하는 참뜻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이를 진행하는 후손이나 축하하기 위해 모인 참석자 모두에 부과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김주현 종손은 평생을 교육자로 보냈다. 관선, 민선 거듭 경상북도교육감을 역임하며 종택의 위상을 반석위에 오르도록 했다. 이번 행사도 물론 주관하고 계신다. 연세도 90세 가까우시다. 나를 각별하게 생각해주심도 물론이다. 나는 종손의 이력과 위선 사업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신도청개청과 더불어 청사 주변에 묵계서원 주변 소나무 80여 그루를 무상 제공했음을 밝혀둔다. 청사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계씨季氏 되시는 김규현 안동향교 전교 역시 고가유속古家儒俗과 사문斯文 발전에 진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 여기 선생의 정신을 잇고자 설립한 ‘보백당장학문화재단’에 대한 종손의 설립취지문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그 글은 보백당의 유훈을 그대로 다시 다짐하는 글이기도 하다.
“선생의 유훈이신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과 ‘家傳淸白 世守恭謹 孝友敦睦’을 자손들에게 가르치심은 비단 한 가정의 家訓을 벗어나 萬歲 公人들의 龜鑑이다. 자손들은 이 뜻을 깊이 새겨 많은 참여바라며, 앞으로 이 재단의 운영을 통하여 선생의 偉業을 더욱 發現하게하는 사업을 함으로써 이 사회에 귀감을 삼도록 하고 나아가 이 고장과 나라 발전에 一翼을 담당하고자 한다.”
2016年 3月 10日
江湖문학연구소 文學博士 永川 李性源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