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사람 보성 선씨들 ㅡ선세강,선세휘 형제
■ 장흥 포충사
우리 장흥 땅을 지켜온 여러 집안들 중에 <보성선씨>가 있다.
보성 지역에서 이거해온 <내접성>이다.
영천 신잠 선생도 <관산록>에서 '장흥에 있는 <선가원정宣家園亭>'을 기록해두고있다.
안양 운흥에는 <선윤지,선형,선거이,선세강,선약해ㅡ보성선씨 선조 다섯분>을 모신
<장흥 포충사>가 있다.
이들 다섯분은 <선씨 오충신>으로 칭해진다.
보성, 강릉 등 선씨들 집성촌 지역에는 <보성 오충사><강릉 오충사>가 있다.
보성 선씨들은 흔히 무반 집안으로 일컫는다.
■ 선세강 (1576~1637)
그 다섯분 중 <선세강>은 우리 장흥 안양 출신이다.
호는 <매곡>이며, 진사 선봉장의 8남매중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 선봉장은 안양 기산출신,<기봉 백광홍>의 사위이다.
그 아들형제들은 곧 기봉선생의 외손자들이다.
선세강은 무과에 급제하여 안동영장으로 있던중에
병자호란 때 경상감영 중군으로 임명되어 출전했다가
경기 광주 쌍령 싸움에서 순사하셨다. .
향년 61세이고, 장지는 <장흥 안양 성자동>이다.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경기 광주시 <정충묘>에도 모셔져 배향되고있다.
■ 선세휘(1582~1644)
선세강의 동생이다. 호-사촌, 자-덕미.
광해군 13년,(1621) 알성시에 갑과1위, "장원급제"하였다.
춘추관기사,지평,장령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북인ㅡ대북파>에 가담하여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에 앞장섰다"는 보상차원에서
장원급제했다는 비판을 내내 받았다. 그는 유학의 신분으로 폐모론 상소를 올렸었다.
인조반정 이후 삼수(三水)로 귀양갔다가 나중에 해배되었다.
그는 1610년경의<천관산 의상암 아육왕탑이 무너진 전설>속의 등장인물로 남아있다.
선세휘와 위정훈(1578~1662)은 천관산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께 있던 위정훈은 미리 귀뜸받아 구제되고, 선세휘는 곧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났다>는
그 전설이 시사하듯이, 선세휘의 운명은 평탄치 못하였고,
그가 비록 우리 지역에서 보기드문, 모처럼 장원 급제한 문인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 장흥지방에서도, 아마 선씨집안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되고말았다.
보성 선씨집안 역시 중앙 무대에서 더 멀어지고 말았으리라.
<장흥문집해제>에 수록된, 진사 위정훈의 <청금유고>에 <사촌 宣덕미>로 자주 나온다.,
인조반정 이후 망세(亡勢)한 선세휘가 여기저기에서 박대받을 때,
그들의 우정이 어떻게 되었을지 자못 궁금도 하지만.
위정훈이 그 문집<청금유고>에 남긴 <기삼수적소 寄三水謫所><祭선덕미文>를 보면
역시 고향친구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 후인의 소감
어쨌거나 그 명암이 안타깝다.
<형 선세강, 동생 선세휘>의 엇갈린 세상길이 안쓰럽다.
그 분 선세휘의 공과(功過)는 엄히 분별되야할 터이지만,
조선시대의 사색당파 싸움 와중에 실제의 진상이 왜곡 과장된 인물이 어디 한 둘이며
그 인간적 진면목과 그늘을 우리가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인조반정은 곧 광해군과 북인의 이데올로기의 폐기처분 선고에 다름아닌 것이다.
그 시대는 권력이 진실이었다.
ㅡ선세휘 시 / 宣世徽 詩
ㅡ울진 수진사에 남아있다.
산꽃 처음 피고 나 또한 돌아오니 / 山花初發客初歸
눈 덮인 산사의 사립 반쯤 닫혀있네 / 雪頂孤僧半掩扉
일대 시인 모두 모여 시를 하니 / 一代詩人皆贈句
문창성이 묵명이 아님을 처음 알았다네 / 始知文暢墨名非
백광홍[ 白光弘 ]
1522(중종 17)∼1556(명종 11).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 전라남도 장흥 출생. 아버지는 세인(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첨정(僉正)광통(廣通)의 딸이다. 아우 광안(光顔)과 광훈(光勳) 및 종제 광성(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1522년(중종 17) 전라도 장흥에 있는 사자산 아래의 기산(岐山)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태어난 곳의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에서 수업을 하였고, 후에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에 있던 이항(李恒)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이 무렵에 신잠(申潛)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철학을 논했다.
1549년(명종 4) 28세로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명종 7)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정자로 임명되고, 1553년(명종 8) 시부회(時賦會)에서 장원하여 선시십권(選詩十卷)을 상으로 받고 호당(湖堂)에 뽑혔다. 그 뒤 1555년(명종 10) 봄에 평안도평사가 되어 관서지방의 절경과 생활상·자연풍물 등을 읊은 기행가사(紀行歌辭)인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이듬해 1556년(명종 11)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을 내놓고, 귀성하는 도중 음력 8월 전라북도 부안에서 35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그는 천생자질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며 행실이 올바른 성품이었다.
일찍이 김인후(金麟厚)·이이(李珥)·신잠(申潛)·기대승(奇大升)·임억령(林億齡)·정철(鄭澈)·양응정(梁應鼎)·최경창(崔慶昌)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808년(순조 8)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1987년 11월 전국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부산면 호계리 운치(雲峙)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그의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관서별곡」은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고,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기행 노정을 운치 있게 그려낸 것으로, 국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첫댓글 선시계(宣始啓) 시조공 선윤지의 15세손 시조공 선윤지>2안경>3구령>4시중>5상진>6우빈>7대륜>8봉명>9세민>10제>11만영>12형의>13진구>14일덕>15시계.... 관서별곡을 쓴 기봉 백광홍은 선봉장(대륜의 3자)의 장인이다. 선봉장은 선씨 오충신인 선세강과 문과 장원을 하신 선세휘의 부친이시다. 시조공의 7세손 대륜의 1자 봉명, 2자 봉문, 3자 봉장으로 선봉명은 선봉장의 동생이다.
12세손 선형의조는 보성선씨 신유초고(1681년) 수보에 참여하셨고 15세손 선시계조는 을사보(1785년) 수보시 참여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