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유래 7. 월림리(月林里)
월림리는 옛날 안의군 현내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 함양군 안의면에 편입시켰다. 교북리에서 갈라진 화림동 계곡을 따라 오르면 서하(西下)면의 경계까지의 달바위 모퉁이까지인 마을들을 합한 동리다. 황대(黃垈)마을, 다수(多水)마을, 방선들마을과 높은지마을이 합해진 방정(放亭)마을 그리고 성북(城北)마을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행정상의 동리인 것이다.
먼저 황대(黃垈)마을은 황석산의 힘찬 줄기가 뻗어 내려온 명당이라 일컬어온 곳으로서 황석산의 황(黃)자와 명당의 집터라 하여 집터대(岱)자를 따서 황대(黃垈)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 또한 황씨 성을 가진사람이 제일 먼저 이 명당자리에 터를 잡았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황대(黃垈)라고 지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취락을 이루고 마을로 개척한 시기는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수(多水)마을은 물이 좋고 많다 하여 多水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약 5백여년 전 경주최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아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다. 옛날에는 마을에 화재가 많이 발생하여 마을 뒤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해마다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가 화재 예방으로 혹은 화재 발생 시에 사용했다고 하며 그 후로는 화재가 발생지 않기를 기대하는 뜻에서 해마다 당산재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다.
방정(放亭)마을은 방선들과 높은지(高亭)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흐르는 계곡에 넓은 반석이 아름답게 깔려있고 자갈밭 사이로 바위덩어리가 많은 계곡에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명승지로 유명한 곳인데 농월정이 방화로 소실되어 굴레 벗은 망아지 꼴을 하고 있다.
복원을 위하여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곤 했지만, 밀양박씨 문중과 함양군 간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아, 안고 없는 찐빵신세를 올 여름 휴가철에도 면치 못하고 있다.
계곡 주위에는 마을 앞뒤로 논밭이 돌로 쌓여있는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은 배설이라 하여 우물을 파지 못하였으며 높은지(高亭)마을은 방선들마을 아래 높은 곳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현재의 마을 뒤 하천에 전답과 마을로 형성되어 있었고 지금의 마을은 하천이라고 한다. 마을에 욕심이 많은 만석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탁발승이 와서 목탁을 두드리면서 구걸을 하는데 심한 매질을 하여 쪽박까지 깨버리고 내 쫓았다. 그 결과 심한 홍수로 논밭과 그 부잣집이 흔적도 없이 떠내려가고 하천으로 변하여 현재처럼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主) 성씨로는 경주이씨의 집성촌이다.(전설집:우리 고장의 전설 참조)
월림리에는 갈비봉, 건는들, 높은지, 대밭골, 무실미, 배나무징이, 북서들, 피바우, 서당암, 등 지명이나 바위가 있다.
성북(城北)마을은 4백전 전 지족당 박명부께서 제일 먼저 입촌하여 성북마을이라고 이름하였다. 안음현의 관아 소재지 뒤 대밭산이 있는데 대밭산 너머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성북(城北)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가 주성을 이루고 있는 박씨 집성촌이다.
우리친구 중에서 보리 장정자와 물방앗간집 딸 백영순이가 이 마을에 살았었다.
※ 농월정(弄月亭)
안의에서 제월대(霽月臺)를 왼편에 바라보면서 오른편으로 맑은 물 금천을 거슬러 서상(西上)쪽으로 포장이 잘 된 국도를 약 4㎞ 달리면 서하(西下)면과 경계점인 속칭 달바위 모퉁이(月淵岩)에 있는 농월정에 이르게 된다. 안의면 月林里 방정마을이다. 산모퉁이는 높이 치솟았는데 바위벽이 자연적으로 둥글게 마치 달 모양으로 깎여져 있어 달바위인 월암(月巖)이며, 달못인 월연(月淵)이 되었다고 한다.
이 곳 녹수를 사이에 둔 양쪽 산기슭의 송림(松林)은 거문고 현을 퉁기는 듯, 수양버들은 천 줄기 실로 낚시질하는 듯하며, 맑은 물이 급한 굴곡을 이루는 곳에 커다란 반석이 가로 펼쳐져 있다. 반석 위를 흐르는 물이 달빛을 받아 금물결 은물결을 이루며, 역시 바위 위에 세워진 아담한 정자 농월정(弄月亭)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풍광이 아름답고 고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지나는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아름다운 절경에 스스로 도취되어 그 자리에 섰노라면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 마치 도원경(桃源境)에 꿈꾸는 환상으로 나를 잊어버리게 한다. 농월정은 화림동(花林洞)의 초입에 자리하고 있음과 같이 화림동을 장식하는 가장 뚜렷하게 이름난 곳이다.
농월정은 거창·대구·진주·그리고 멀리 부산 등 큰 도시와 호남인 진안(鎭安)과 전주 등을 이어 주는 국도 변에 위치하여 공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관광버스와 승용차 편으로 찾는 관광객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농월정(弄月亭)은 나라의 신신(藎臣:충신)이며 고을의 선사(善士)인 지족장 박명부(知足堂 朴明榑)가 머물던 곳이다. 하여 월연암에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支所)”새겨 놓았는데 세월이 흘러 이젠 흐릿하게 보인다. 이는 “지족당이 지팡이 짓고 머문 곳”이란 말이다.
지족당은 안의현 출신으로 大科에 급제하신 분이다.
근처에는 선생이 가르치며 훈계하던 종담(鐘潭)서당이 고색이 창연한 그대로 남아 있어 찾는 이를 잠시 숙연하게 하기도 한다. 지금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농월정에 모여들어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며 담론(談論)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농월정은 단순히 후생(後生)들의 놀이터이기 전에 훌륭한 선인(先人)들의 끼친 덕행(德行)을 일깨우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첫댓글 방정(放亭)마을은 방선들과 높은지(高亭)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평소에 마을 앞을 지나면서 왜 하필 방정마을인가? 방정맞은 생각을 했는데 이해가 되네요.ㅋㅋㅋ
아담한 정자 농월정(弄月亭)은 이름 그대로 달을 희롱하고 있는 듯하다. -->
아담한 정자?
맞는 것 같아요. 지난번 배영호 친구 자녀 혼사때 처음 봤는데, 아담한 정자씨가 맞는말 같아요.
'농월정'과 연결 지어서 농(弄) 한번 해 봤시유ㅋㅋㅋ
역시 애정남이 관심을 갖여 주어서 힘이 납니다.
아직도 안의를 다하려면 아직도 봉산, 신안, 귀곡, 대대, 도림, 초동, 하원, 상원이 남았고,
수동면도 상백, 내백, 도북, 하교, 우명, 원평,
지곡면 남효, 시목, 마산, 덕암, 개평,
서하면,황산, 봉전, 다곡, 운곡, 송계, 화림동
서상면 대남, 도천, 옥산, 금당, 중남, 상남리 등을 알아 볼 예정인데 이번 여름에 다 할 수 있을까 한다.
우리 친구들의 호응이 없으면 안의만 하고 말까 생각 중이다.
계속해 주시면 감사, 댕큐, 쒜쒜~~
무더운 날씨에 글 쓰느라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