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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감을 낡은 옷에 덧 붙이지 말고 ,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말라
누가복음 5장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마태복음 9장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가복음 2장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면 무엇이 낡은 옷이며, 새 옷감조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
바로 율법과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을 통하여 율법을 옛 계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복음, 즉 예수님의 말씀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옛것과 새것에 대한 구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새 옷감조각, 즉 복음을 낡은 옷인 율법에 대고 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자체가 낡아져서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옷을 제공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복음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복음의 차이점을 설명함으로서 이해를 도울 수 있습니다. 종교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천국, 즉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와 복음의 모습은 세상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여 지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의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보다 경건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 산에 오르기도 하고, 사람들과 격리된 삶을 살기도 합니다. 공동체 생활이라는 명분으로 집단생활을 하기도 하며, 학교생활이나 직업을 포기하고 오직 종교 생활에만 전념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겁내지 않을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이들의 종교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지옥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우상들과 거짓 전도자들을 내세워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에도 영생을 줄 수 있노라고 말하면서 헛된 것들을 위하여 수고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람들의 것을 도둑질하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 진리에 이르지 못하도록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주변에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사탄의 종노릇을 하는 자들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복음은 철저히 주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들의 의지로 구원에 이르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오히려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인간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와 복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이 두 가지가 결코 섞여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만일 종교에 복음을 혼합하려 한다면 그가 바로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 결과는 두 가지 모두를 못 쓰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새 옷감 조각에 낡은 조각을 붙이는 경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하는 자는 없지만 실제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경우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으로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의식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물론 그것이 믿음의 삶을 위해 유익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권장할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의식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매우 유전적인 것들이며, 비성경적인 것들입니다. 심지어 많은 부분들이 우상숭배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들입니다. 곧 그것들은 주님이 매우 싫어하시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들에 취해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살게 된다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즉 옷 깁는 비유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지를 바로 알고, 복음 안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만 합니다. 과거부터 행해 왔다고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탄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하여 믿음의 삶에 독이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근신하고 깨어있는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과제입니다. 무엇이 낡은 옷이며, 무엇이 새 옷감조각인지를 바로 알고 바른 분리와 진리에 대한 결단이 있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교회사를 통해 본 수 많은 성도들은 바로 이 일들로 인하여 순교당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영광스럽게 맞이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새 옷감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데 사용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으시겠습니까? 부디 지혜로운 결단을 통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15)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새 포도즙을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사람도 없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즙이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되느니라. 오직 사람들이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넣나니 그리하면 둘 다 보존되느니라.(마태복음9:17)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마태복음에서 뿐만이 아니라 마가복음 2장22절과 누가복음 5장37절부터38절에 이르기까지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 가르침이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준비 과정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떠한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할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말씀의 결론을 정의해 본다면 낡은 가죽 부대는 우리가 주님을 알기 이전에 가졌던 관습이나 고정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 포도즙은 예수님의 피와 관련이 있는 것이므로 복음과 관련을 지어 설명할 수 있으며, 새 부대는 이 복음을 담는 새로운 마음, 즉 성경의 다른 표현으로 가난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 포도즙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교훈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르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관습과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해박하게 알고 있는 자들이었으며,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자들이었고, 그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도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 힘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 하나라도 어길 것이 두려워 언제나 성경을 외우거나 낭송했고, 서로가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구원받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 즉 마귀의 일들을 수행하는 자들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비참한 인생을 살도록 만든 것입니까?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고 유대인들의 지도자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면서 상상속의 메시야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로부터 자신들을 구해내고, 백성들을 가난으로부터 구해내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신들의 민족이 우월하다는 것을 모든 족속들에게 보여줄 왕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메시야, 즉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나셨고, 병든 자나 가난한자, 세리나 창녀와 같은 자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 죄인들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비판하시고, 저주에 가까운 말씀으로 그들을 자극시키셨던 것입니다.
사실상 이러한 생각은 종교지도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사역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셨을 때에 자신들이 어떠한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매우 크게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 제자들은 도망갔고,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도 자신의 손으로 몸을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말했고, 실제로 예수님의 몸을 만진 자입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는 그가 돈을 맡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상황이 결코 건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제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문제점은 바로 자신들의 고정관념이나 관습에 성경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거룩하고 온전한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즙이 낡은 가죽부대에 담겨지게 되면 그것이 터져 포도즙이 흘러나오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복음은 결코 자신의 신념이나 환경이 맞춰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복음을 자신에게 맞추려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헤치는 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 안에는 고정관념이나 관습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상식을 깨고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종의 병을 고쳐 줄 것을 구했던 백부장이나 향유를 든 옥합을 깨뜨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던 마리아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모든 자존심과 고정관념들을 깨고 순수하게 빈(가난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 온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유대를 통치하고 있었던 로마의 권력에 속한 백부장이 자신의 식민지 백성인 예수님께 나아와 오히려 자신에게 명령만 하시면 종의 병이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분과 자존심, 그리고 자신을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까지도 의식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자신을 낮추고 종의 종을 고쳐달라고 구했던 것입니다. 마리아 역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가룟 유다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과 마음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또한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은 새 부대, 즉 새로운 마음 위에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자기 마음대로 받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거나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보고 그들의 수를 헤아려 계산을 하고 주님께 나아오는 빌립의 모습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지혜로움이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결코 노력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인생을 결정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비워져서 주님의 것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