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5:42-57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이러한 영적 진리들을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죄 용서에 대한 실감이 오지를 않아 마음에 별 기쁨과 감격을 느끼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예수님 믿으면 죄용서 받는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에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받고 지옥간다? 별로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용서가 무슨 의미이고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고 사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죄 용서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병사가 보초를 서다가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순찰하던 장교에게 적발이 되었습니다.
전시에 보초가 잠을 자는 죄는 최고 형인 사형입니다.
그 병사는 즉시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헌병들이 사형 언도를 받은 병사의 군복을 벗기고 죄수복을 입힙니다.
양 손에 수갑을 체우고 양 발을 쇠사슬로 묶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수감합니다.
외부와 차단된 좁은 감방, 습기가 차고 음침한 방에서 그 병사는 사형당할 시간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비참함을 한번 생각해 보고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병사에게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 병사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도 가치가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돈도 명예도 가족도 친구도 약혼자도 미래도 무가치하고 무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마16:2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가 자신의 생명과 함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병사는 그때야 비로소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이 병사는 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병사가 죽으면 그 집안의 대가 끊어 집니다. .
그래서 부모가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동정 여론이 확산되면서 국민들이 선처를 부탁합니다.
그래서 링컨 대통령이 사면을 해 줍니다. 죄를 용서해 준 것입니다
사면을 받은 병사의 손에서 수갑이 발에서는 쇠사슬이 벗겨지고 푸른 수의가 벗겨지고 군복을 다시 입습니다.
습기가 찬 차디찬 어두운 감방에서 나옵니다. 쇠창살로 된 옥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옵니다.
생명을 다시 얻었습니다. 자유의 몸이 됩니다. 감옥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재산이 명예가 가족이 친구가 약혼자가 미래가 이제는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 병사는 그때야 비로소 죄 용서가 얼마나 기가 막힌 축복인가를 실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 법정에서 사면을 받았습니다.
하늘의 법정에서의 사면은 이 세상 법정에서의 사면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사면입니다.
이 세상 법정에서의 사면은 일시적인 사면이지만 우리가 받은 하늘의 하나님 법정에서 사면은 영원한 사면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면이 얼마나 기가 막힌 사면인지 지금은 실감도 안나고 잘 모릅니다.
그러면 언제 실감나게 아느냐?
그 때는 죽음의 문을 지나 세상을 떠날 때라고 생각합니다.
하늘 법정에서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천군 천사가 마중을 나옵니다;
그러나 불신자로서 죄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천사가 나타나서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영원히 죄에서 심판에서 사망에서 해방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웃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용서 받은 우리의 믿음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의 특징은 잘 안 웃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목사님이 한국에 와서 설교를 하는데 한국 성도들 표정이 너무 어두워서 놀랬다고 합니다.
미국 목사님이 느끼기에 마치 싸움하러 나온 사람들 표정같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란 미국 목사님이 한국 목사님에게 "아니, 한국 성도님들은 왜 저렇게 표정이 어둡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한국 목사님이 엉겁결에 "한국교회 성도님들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해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미국 목사님이 "그렇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은 아직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단 말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죄용서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의 천사의 체포에서 해방되고 심판에서 해방되고 사망에서 해방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가 갈 본향 천국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나그네 길을 웃으면서 기쁘게 가는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