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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자 집 아저씨 된장 집 아줌마
귀농 4년차 되는 새내기 귀농인 입니다.
제 남편은 경상도 사나이지만 농촌도 어촌도 아닌 얼치기 촌사람 이었고요.
저는 공기 좋은 숲이 가득한 산골도 시골도 아닌,
빌딩숲 가득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태어나 반세기를 도심에서만 살아 왔던지라
벼이삭 보리이삭도 구별 못하는 토박이 서울 각시였습니다.
토목업을 하던 남편은 사업실패 이후 뒤늦게 도농지역인 경기도 평택시에 이주해,
사료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뒤늦게 남편을 알아 결혼 후 남편직장 근처인 농촌 마을에서 터를 잡았습니다.
남편의 직장이 주야간 교대근무를 하는 지라 한 주간씩 낮에 쉬는 날이 많아,
남편과 저는 집근처에서 야산을 일구어 고구마 감자도 심고 휴경지를 임대하여
손쉬운 농작물을 가꾸어 지인들과 나누어 먹으며 정을 나누면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벼이삭도 알게 되고 농부들의 수고와 모든 농산물이
농부들의 피땀 어린 열매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의 세월이 흘러 농사일을 터득하고 전업 농업인들의 흉내를 어렴풋이 내며
농지원부도 만들고 조합원도 되어 퇴직하면
평택을 고향인양 눌러 앉을 작정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퇴직 2년여를 앞두고 청천 벽력같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저희가 셋방 살던 동네가 도시개발이 되고 살던 집은 도로가 되어 집이 헐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문은 소문이 아니라 확정이 되어 시에서는 이주비를 지원해 줄 터이니
이사를 하라는 통보가 날아 왔습니다.
보증금 500만원 전세를 살고 있던 저희는 눈앞이 캄캄 했습니다.
정든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섭섭한 마음보다는 이사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걱정만 앞섰습니다.
도시개발이다 국제화도시라 하여 땅값은 청전부지로 뛰어 올랐고 전세 집값도 덩달아 올랐습니다.
아들딸 모두 4식구니 방 셋이 달린 아파트나 주택은 생각도 못해보고 거리로 쫓겨 나갈 지경이었습니다.
뒤늦게 다닌 직장이라 초봉이 적어 저축은 꿈속에서나 할 형편 이었습니다.
딸아이는 도시락을 싸주며 대학을 보냈으니
대한민국에 도시락 싸들고 다니는 대학생은 저 하나라고 학교 갈 때 마다 투덜거렸습니다.
지방대학 다니는 아들은 점심 굶지 않을 정도의 용돈만 주고 겨우 졸업시켰는데,
퇴직도 하기 전에 이사를 하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부부싸움 제대로 한번 못하고 살던 우리 부부가 볼 때 마다 토닥거리니
12살 연하인 앞집 아줌마가 자기 집은 사랑채만 헐리고 안채는 헐리지 않으니
자기 집 텃밭에 조립식이나 지어서 같이 살자고 저를 위로 했습니다.
12년 이웃 하고 살아온 정이 눈시울이 뜨겁게 두텁고 고마웠지만,
저희 보증금으론 어림없는 일인지라 사양을 하고 다른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회사에서 퇴직금 정산을 미리 하여 시골에 조그만 땅을 사두었다가
퇴직 후에 내려가서 염소 목장을 하자고 말했습니다.
아이들 공부 다 시켰으니 어떻게 하든 2년간만 버텨내면 되고,
안되면 월세 집이라도 구해 이사를 해 살다가 내려가자며 대단한 묘책이나 되는 양 제안을 했습니다.
그날부터 토요일이면 휴가를 내어 전국에 싼 땅을 사려고 헤매고 다녔지만
그 어디에도 남편이 하고 싶어 하는 염소 목장 자리는 없었습니다.
얼마 안 되는 퇴직금으로 염소가 마음껏 뛰어 놀만한 넓은 땅을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동산에 투자하여 번번이 재미를 보고 부를 축적하신 지인이
충남 태안에 야산이 있는데 하시며 귀띔 해 주셨습니다.
야산이란 말에 귀가 번쩍 뜨여 그날로 지인과 함께 지적도 한 장 달랑 들고 태안을 내려갔습니다.
운명의 날 입니다. 내려가는 길에 군청 앞에 있는 공인중개소에 들려 길을 물으니
“ 땅을 사두어도 내려와 살지는 말아요.”
“ 텃세가 심해서 그 동네 외지인(뜨내기)은 못살아 ”
하시며 길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공인중개사의 말은 들은 듯 만듯 귓결에 흘리고,
우리 이름으로 재산세 내는 날을 그리며 야산에 다다랐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의 표현으론 꼭대기 산이라 하는 우리의 산을 만난 것입니다.
지적도를 내밀며 이산은 ‘맹지’라고 하는 지인의 말도 이상하게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산 앞에 가로질러 있는 무시무시한 고압선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등성이는 나무가 다 베어져 이름 모를 묘목이 심어져 있었는데
그 어느 한 가지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오직 퇴직금에 맞아 떨어지는 땅값과 남편이 하고 싶어 하던 염소목장에 부합되는
16,456㎥의 넓은 평수에 홀딱 반하여 어느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맞선 본지 27일 만에 결혼식을 해치웠는데
이렇게 좋은 산을 망설일 필요 없다며 ‘맹지’ ‘산림보존지역’ 등의 단어들이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두 번 다시 물을 필요 없이 회사에서 퇴직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계약완료를 하였습니다.
곧 바로 등기이전완료 하여 일사천리로 진행한 2003년 7월 23일 이날 이후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으며 로또 복권 당첨 된 마음으로
이사할 집은 구할 생각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설마 엄동설한에 우리를 내쫓으랴 하며 흐뭇한 마음으로 겨울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해동이 되어 꼭대기 산에 다시 와보니 아뿔싸 무시무시한 고압선하며
가파른 경사 에 산등성이는 민둥산처럼 되어 있었고,
이건 야산이 아니라 험산준령 이었습니다.
더욱이 염소를 키우려면 펜스도 쳐야 하는데 그 경비도 만만치 않으니
걱정이 다시 눈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산하여 제일 가까운 이웃 어르신께 인사도 드리고 말을 건넸습니다.
“ 염소목장 하려고 하는데 괜찮지요? ”
하고 여쭈어 보니, 아연실색하여 두 손을 가로 저으며 만류하셨습니다.
“ 꼭대기 산에서 염소 키우면 아랫마을 오염 되서 못써.
“ 이 동네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지! ”
하시며 나가 버리셨습니다.
나가시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기만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부엌 에서 맛있는 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맡아보는 시골된장 냄새였습니다.
“ 꼭대기 산에 왔나?
한 바퀴 돌아오면 배고플 텐데 밥 먹고 가~ ”
하시며 아주머님께서 말을 건네셨습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염치불구 하고 점심을 얻어먹었습니다.
맛있는 냄새의 주인공 된장찌개를 먼저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 순간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 아……. 바로 이 맛! ’
제가 처녀 때 친정어머님께서 끓여 주시던 된장찌개 바로 그 맛이었습니다.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친정어머님이시지만 서울이 빌딩숲으로 개발되고
점점 공기가 나빠진 이후로는 이런 된장 맛을 내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 찌개 맛은 별다른 양념도 안 들어 간 것 같은데
너무 맛있어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한 그릇 더 먹었습니다.
아주머니께 비결을 여쭈어 보았습니다.
“ 으음~ 내가 솜씨가 좋은 게 아니여.
물 좋고 공기 좋아서 그려.
우리 마을 공기가 얼마나 좋은지 아는가?
자네 산 저쪽부터 빙 둘러 소나무산 아닌가!
우린 냉장고 산지도 얼마 안됐어. ”
하셨습니다.
‘ 아……. 친정어머님 솜씨가 없어진 게 아니라
서울 공기가 오염 되서 옛날 된장 맛이 안 나는 것이구나. ’
정말 맛난 점심을 얻어먹고 평택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조심스레 남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 오늘 다시 와서 보니 염소 목장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장류 사업 하는 게 어때요?
된장도 담그고 고추장도 담그고.
종식 씨랑 영식이 엄마랑 우리 된장, 간장 맛있다고 자주 얻어 갔었잖아요.
아주머니 말씀 데로 태안은 공기가 좋으니,
평택보다 더 맛있게 담글 수 있을 거예요. ”
하면서 하며 남편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너무나 쉽게 동의 했습니다.
그리하고 싶어 하던 염소목장인데 어찌 그리 쉽게 대답하느냐고 답문하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 아까 어르신 표정 보았잖아.
텃세 심한 동네에서 마을 주민들과 화합 못하면 우리 같은 뜨내기는 살지도 못해.
산도 너무 가파르고 고압선도 동물에겐 해롭다고 하잖아. ”
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보다 성품이 더 급한 저는 평택으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장류 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하며 돌아 왔습니다.
저녁을 먹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항아리가 문제야’ ‘항아리’ 하면서 고민하였습니다.
새 항아리는 값도 비싸고 유액을 칠해 숨도 못 쉬고 안 좋으니
남편의 고향인 경상도 흥해 에서 옛날 항아리들을 사오자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또 급행열차 타듯 꼭대기산에 집도 짓기 전에 중고 1톤 트럭을 구하여 고향 흥해로 내려갔습니다.
장터 근처 차안에서 새우잠을 자고 장보러 나오는 할머니들 짐을 들어 드리고
집으로 쫓아가 항아리들을 사들였습니다.
길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 차는 큰길에 세워놓고 남편이 등짐을 지고 항아리를 옮겼습니다.
쌀 한가마니 무게 되는 항아리를 등짐지고 나르니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남편의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저는 행여나 남편이 다치지는 않을까봐 걱정했습니다.
그 고생한 것 말로다 어떻게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를 수차례 꼭대기산 평평한 땅에 내려놓으니 어르신들의 표정이 어리둥절하였습니다.
“ 염소목장 한다드만 웬 항아리여 ”
하시며 어루만지시는 아주머니께
이 지역에서 소금 제일 잘 만드는 집이 어디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 아따 이 사람들 우물 앞에 숭늉 찾아.
소금은 아무 때나 사남.
5월이 되어야지 송화 가루 날릴 때 사야 몸에 좋은 송화소금 되는 거야. ”
하시며 제일 잘 만든다는 소금 집을 알려 주셨습니다.
“ 이제 보름만 지나면 집짓고 이사 와서 된장 사업 할 것이니 잘 봐주세요."
하며 내려올 때 시장 들러 사온 자반고등어를 드렸습니다.
“ 그려. 그려. 잘 해봐.
아암~ 염소 키우는 것보다 백번 낫지.
이 동네에는 콩 농사도 많이 지으니 안성맞춤이여. 어여 집짓고 이사와. ”
하시고 등까지 두드려 주시며 환하게 웃어주셨습니다.
누가 말했던가! 시작이 먼저라고 안강, 강동, 청송, 등지에서
몇 차례 더 항아리를 실어 나르고 5월 중순이 되어
소금까지 사서 쌓아 놓으니 재벌이 부럽지 않았습니다.
항아리 실어 나를 때 힘들고 어려웠던 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새 힘이 불끈불끈 솟아올랐습니다.
어느덧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고 꼭대기산 입구에 텐트를 쳐가며 준비를 했습니다.
지난 4월에 전 소유주가 심어 놓은 이름 모를 죽은 묘목을 뽑아내고
다시 과목(매실 복숭아 감나무)등을 심었습니다.
나무를 가꾸어 주고 풀을 메주고 어르신 댁에서 물을 길어와 밥을 해먹으며
며칠씩 지내는데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 났습니다.
비교적 방수처리가 잘 되어 있다는 텐트를 치고 자는데 동이 트기도 전에 온몸이 물 솜 같이 되고
바위가 되어 일어나니 편안한 집 생각이 간절히 났습니다.
낯의 행복했던 마음은 싹 가시고 새벽이면 신음 소리가 절로 났습니다.
다행히도 평택 집은 도시계획이 보류되어 당장 쫓겨나지 않게 되니
무더위나 피하고 초가을부터 집을 짓고 꼭대기 산으로 오려 했습니다.
더 이상 텐트 생활은 무리다 싶어 앞당겨 집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군청 담당 공무원에게 농가 주택을 건축하려 한다며 절차를 문의하니
임야이기 때문에 산지 전용허가를 받고 건축은 해야 되는데
민원인이 하기 힘드니 허가대행 사무실에 의뢰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허가를 받되 농가주택은 안 되고 일반 단독주택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평택에서 농사를 지어 농업인인데 왜 농가 허가가 안 되냐 되물으니
평택에서 농사지은 것은 필요 없고
태안에서 2년 이상 농사를 지었어야 농가를 지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자체 이후로 지자체 법에 따른 것이라 항의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산지전용허가 대행 사무실을 찾아가 준비한 서류를 내밀며 허가대행 의뢰를 하였습니다.
소장님은 지적도를 보시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지적도 확인하시고 임야를 구입했느냐 물으셨습니다.
현 도로가 있어도 지적도상 ‘맹지’이기 때문에
도로 소유주들에게 사용승낙서를 받아야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지인(소개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 이산은 ‘맹지’이다. 맹지…….‘
“ 도장만 받아오면 되나요?
도장만 받으면 고압선 피해서 우리가 원하는 자리에다 집을 지을 수 있어요?
하고 재차 물으니 사장님 땅은 산림보전지역이 2/3이상 이라
관리지역은 얼마 안 돼 원하는 곳에 지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토지이용계획 확인서에는 ‘산림보전지역일부‘ 라고 따져 물으니
5,000평중 10평만 관리지역이고 나머지 4,990평이 보전지역이래도 ‘일부’라고 쓴다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다 막히는데 소장님은 한술 더 떠서 도장 받기 쉽지 않을 테니
어떻게든 받아 오셔야 서류구비가 되니 꼭 받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까짓 것 받아오면 될 거 아냐 하며 소리치고 소유주들 찾아다니며 설득 했습니다.
간청하고 때를 써 봐도 굴욕감이 들 정도로 거절뿐이었습니다.
인천 서울 등지로 수차례 오르내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홀로 살던 친정언니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진단 결과 말기 암 판정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으니 당연히 간병은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혼자 살던 성품이라 낯가림이 유난히 심해 간병인도 뭐라 하고 조카들도 싫다 하고 나만 찾으니
사경을 헤매는 언니를 병실에 홀로 두고 도장 받으러 다닐 수 없어 허가고 뭐고 다 포기하고
24시간 언니 곁에서 간병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안 마을어르신들이 어떻게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고
동네에서 도와줄 테니 포기 하지 말고 일을 진행 하라 하셨고,
연세도 많으신 개발위원장님과 이장님께서 인천 등지에 몸소 오르내리시며 도와주셨습니다.
“ 우리 동네 살러오는 사람 도와주어야지.
우리 동네 그런 동네 아녀~ 열심히 살라는 사람을 내치는 게 아녀. ”
하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마을 어른 들게 감사한 마음과 이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겨 찾아가고 또 찾아 갔습니다.
마침내 설득하고 이 씨 땅을 비롯하여 6사람의 승낙서를 받아 대행 사무실에 서류를 내밀었습니다.
소장님 실장님 깜짝 놀라시며 큰일 해냈다 대단하다며 우리를 치켜 세워주셨습니다.
다 동네 어르신들 덕분이라 공을 돌리니,
그 텃세 심한 사창리 동네에서 어떻게 신임을 얻었냐며 놀라셨습니다.
“ 누가 사창리 동네에서 텃세 심하다 해요.
얼마나 개방적이고 인정이 많으시던데.
우리 같은 외지인도 쌍수 들어 환영하시며 이렇게 도와주시는데 말이에요. ”
소장님은 웃으시면서 연락해 드릴 테니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날아갈 듯 한 마음으로 언니의 병실로 돌아오니 주치의가 면담을 청하였습니다.
하루 빨리 퇴원 하라고 했습니다.
수술도 실패고 어차피 한두 달 밖에 못 사시는데 집에 모시고가 편안하게 모시라고 했습니다.
퇴원을 해야 되는데 평택집은 화장실도 불편하고 공기도 예전 같지 않아 많이 오염되어
어차피 이사 갈거 꼭대기산 마을에 빈집을 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집 지을때 까지 살 요량으로 수소문 해보았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습니다.
힘들게 태안 읍내 외곽에 오래된 아파트를 구해 언니를 모시고 남편과 읍내 아파트로 이사를 왔습니다.
사경을 헤매던 언니는 공기가 좋아서인지
병원에 계실 때 보다 컨디션도 좋아졌고 식사도 조금씩 하셨습니다.
집도 짓기 전이니 우리는 봄이 되면 장을 담가 지인들을 통하여 아름아름 팔려고
꼭대기 산에 가마솥을 걸었습니다.
메주도 쑤어 말려 띄어놓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식으로 허가 없이 식품을 만들어 팔면
형사 처벌에 벌금을 엄청나게 물어야 한다는 친정오빠의 엄포와 조언에
정식으로 허가를 내려하니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퇴직금을 올인 하여 이 꼭대기 산을 샀으니 집지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은 있다는 말이 있듯,
남편이 갖은 고생을 다하여 폐자재를 구하고 손수 흙을 바르고 천신만고 끝에 집을 지었습니다.
중요한 전기공사와 지붕공사 빼고는 거의 남편이 혼자 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3개월에 걸쳐 힘들게 집을 짓고 나니 이제는 잘 수 있겠구나하고 감격에 벅차올랐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 사경을 헤매는 언니를 집에 홀로 놔두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60이 된 남편은 허리가 휘도록 등짐을 져 항아리를 나르며 고생 했던 것을 생각했습니다.
농가주택 허가고 뭐고 다 접고 포기하려해도
너무 억울하여 이리 주저앉을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생각다 못해 마을 개발 위원장님께 다시 찾아가 상의 드리니
농업기술 센터에 찾아가 상담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일이 농민들 영농교육 지원해 주는 일이니까
저희 사정을 얘기하라고 군청에서 들은 말을 전했습니다.
우리들은 농가가 아니라 농가주택 허가도 내주지 않아 일반주택을 지었는데
우리를 어떻게 지원해 주겠느냐 생각 했습니다.
가봐야 또 냉대만 받지 생각 하면서도
한편으론 죽은 묘목을 뽑고 난 민둥산과도 같은 야산에 적합한 나무가 있을까 해서
어렵게 문을 두드렸습니다.
이 지역은 과목이 잘 안되니 알아서 심으라며 시큰둥하게 답변하여 성큼 내키지 않았지만,
한번쯤은 가보리라 마음먹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12월7일 태안 앞바다에 기름 유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우리 마을 앞바다는 비교적 피해가 덜했지만 모항, 신두리등
검은 재앙은 태안군민 뿐만이 아니라 전 국민을 경악케 하였습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 기름때 제거 총력전을 벌이니 우리 동네에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척추연골이 두개나 닳아 없어져 평소에도 요통이 심했지만,
기름때 작업 후 두통이 심하고 팔다리까지 통증이 심해 아무 일도 못하고 쉬고 있었습니다.
태안기름유출사고 이후 불철주야 방제작업을 진두지휘 하시느라
자택에서 잠도 못 주무시고 바쁘신 면장님께서 사과 한 상자를 사가지고 오셔서 격려해 주셨습니다.
가슴이 뭉클하여 아무 말씀도 못했습니다.
“ 촌에 와서 수고 많아요. 힘내시고 열심히 하셔서 마을과 면의 발전에 도움이 되어주세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 오시구요. ”
라고 부탁의 말씀까지 하시며 우리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차 한 잔 드시지도 않고 돌아가시는 면장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우리가 이산을 산 게 대형 사고를 친 것이 아니라 대박 사고를 친 것 입니다.
보잘것없는 우리를 면장님께서 이렇게 성원해주시고 격려해 주시는데 앞으로 무슨 일을 못 하겠습니까.
마을 어르신들은 물론 이웃마을 주민들 이장님들께서도 관심을 갖고 성원해 주셔서
정말 잘 내려왔다 생각했습니다.
두 달을 못산다던 언니가 1년을 더 사시고 지난해 5월 생을 마감 하셨을 때도
마을주민들이 보내주신 조의와 위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되어 기쁜 마음으로 명절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하니
전과는 달리 매우 친절하고 상세하게 농업기술센터 교육과정과 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농업기술센터 교육에 참여하면 하는 사업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란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기름유출사고 이후 모든 공무원들의 자세와 친절이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농업기술센터 임직원들의 친절과 열의도 달라져서 우리들의 마음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그날 이후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는 교육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3월부터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주관하는 벤처 농업인 대학에 두 부부가 나란히 다녔습니다.
처음 장류 사업을 시작 할 때에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 없이 저희 가족들 생활이나 유지할 마음으로 시작 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으며 매번 느끼고 도전을 받는 것은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농어촌의 모든 농어민이 함께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주 교육하는 강사들은 틀리지만 주제는 하나였습니다.
FTA에 사는 우리 농어촌이 살아남을 경쟁력은 교육이고 지식입니다.
바야흐로 농촌생활에도 신지식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마을도 노동연령이 고령화되고 홀로 사는 노인이 많아
농업기술센터에 직접 가셔서 교육받을만한 분이 별로 없었습니다.
농사짓기도 힘겨우신 분들인지라 교육은 먼 세상이야기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우리 두 부부가
그동안 주민들에게 받은 사랑과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매주 강의가 끝날 때 마다 다짐했습니다.
방제작업을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이시는 태안군 모든 공무원들과
또 군민을 위하여 방제작업을 위하여 애쓰시는 군수님과 사랑의 자원봉사자들이 있었기에
저희 부부의 도전은 시작 되었습니다.
온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우리 태안 기름유출사건은
이전보다 더 깨끗한 바다를 만들어 꿋꿋하게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
저희 부부도 힘든 정착의 시작이었지만
자원봉사자 같은 이웃과 주위 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다시 일어 설 수 있었습니다.
청정해역을 다시 만들어 주신 모든 국민에게 저희도 꼭 보답하리라 다짐 했습니다.
이제 제2의 고향 태안에 저희 뼈를 묻을 거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 갈 것입니다.
정착이 별거 인가요. 귀농해서 돈 많이 벌고 논밭 많이 사는 것이 성공한 정책일까요.
어떤 이유로든 하던 일을 정리하고 새로 이주한 농어촌에서 마을 주민들과 동화되어 사는 것이죠.
마을에 애정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에 애착을 가지고,
마음이 안정되어 살고 있다면 그것이 정착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꼭 마을 주민들과 훈훈한 정을 나누며 살겠습니다.
정착의 비결은 첫째로 둘째로 내가 먼저 주민들에게 다가가 화합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배우며 그분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작은 수고와 배려에도 크게 고마워하며,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훈훈한 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만하면 성공한 귀농인 이 아닐까요?
마을 어르신들은 저희들 보시면 이미 ‘메자집 아저씨 아녀’ ‘된장집 아줌마 아녀’ 로 통했습니다.
올해 2월에는 동네를 위하여 꼭 맡아 주어야 한다며 부녀회장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구순이 다 된 대밭집 할머님도 저를 만나면 회장님 나오셨시오 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반가워하십니다.
지난 5월에는 마을 분들의 도움으로 ‘주 함께하는 농원’이란 영농조합법인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이 넘치고, 외지인들을 토박이 주민들과 똑같이 환대해 주시는 마을이 또 있을까요.
혹시 제 글이 여러분들에게 읽을 기회가 된다면 귀농 귀촌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 하신 분들,
아직 귀농지역을 찾지 못했다면 우리 마을로 귀농하여 함께 살아오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은 꿈을 꾼대로 이룬다는 말을 떠올리시고
정이 넘치고 공기 좋은 우리 마을로 귀농하시는 꿈을 꿔 보세요.
조금은 농어촌 생활에 불편 할지 몰라도,
맑은 공기와 깨끗한 자연이 여러분들을 여유롭게 할 것입니다.
출처 : blog.daum.net/reru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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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운 역경을 잘 헤쳐나온 인간승리의 단편을 보는 것 같네요.
다른이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선구자가 되시길 빕니다.
파이팅!!!!!!!!!!~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정도 결심과 노력 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없겠습니다,
귀농계획에 교훈으로 삼겠습니다.
고생 하신 보람이 있을 거예요,, 당신이 진정한 WINNER,, 입니다..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