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
박 순 철
어제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연차대회를 마치고 춘천의 문우 두 분괴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낯선 곳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 터라 두 시쯤 깨어 뒤척이다가 동이 틀 무렵 잠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어제 도착해서 잠깐 본 장령산자연휴양림 숙소 앞 금천계곡은 무척 맑고 깨끗했다. 천연기념물인 어름치가 사는 곳이라 하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문경에서 하계 세미나를 마친 이튿날 새벽에는 등산하는 문우들을 더러 볼 수 있었는데 오늘은 내가 너무 일찍 나와서 그런가 보다. 산중의 새벽은 더디게 그것도 우리 고장보다 더 차가운 기온으로 다가왔다. 10월말 기온 치고는 너무 차갑다는 생각도 든다.
어스름 새벽 계곡 상류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멀리 사람 모습이 보인다. 이 쌀쌀한 새벽에 반바지 차림이다. 가까이 다가온 사람은 어제 서울 문우들을 태우고 온 관광버스 기사였다. 그는 대번에 나를 알아본다. 앞가슴에 달린 명찰이 있어서였을 거다. 그의 건강미가 부럽기만 하다.
금천계곡에 흐르는 물은 온통 파란 물감이다. 그곳에 하얀 비단을 담근다면 아주 아름다운 색으로 물 들 것 같은 그런 풍경이다. 손을 담가보고 싶은 충동도 일어난다.
내가 걷는 이 길이 간절히 염원하면 이루어지는 소원길이란다. 부귀영화와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으니 우리 가족의 건강을 빌고, 또 요즘 제자리에 멈춰있는 글쟁이의 안목이나 넓혀달라고 빌어야 할까 보다.
어느덧 ‘건강 걷기 코스 1,5KM 돌아가는 지점’이라 쓰인 곳까지 왔다. 뒤에 인기척이 느껴진다. 필시 우리 문우이리라. 그러면 그렇지, 어찌 이 수려한 경관을 놓치랴. 그런데 남자가 아니고 여인이다. 나이도 비교적 젊어 보인다. 우리 문우 중에 저런 분이 있었던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명찰도 달지 않았고 낯선 얼굴이다. 그 여인도 나를 보고는 멈칫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산에 일찍 가시네요?”
“네.”
여인의 대답이 뜨악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오던 보폭으로 보면 내 옆까지 왔을 법한데 발걸음을 조금씩 늦추는 게 느껴졌다.
“우리 문우 아니시죠?”
내 이름 위에 “2019년 수필문학추천작가회 연차대회”라고 쓴 명찰을 들어 보였다. 여인은 그제야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 쓰는 분이시군요.”
사회는 각박해도 글쟁이의 인식은 그리 나쁘지 않은가 보다. 명찰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아니었으면 여인도 나도 상쾌한 기분에 출발한 아침 산책이 얼룩으로 변질 될 뻔했다.
첫댓글 박순철 선생님, 세상 인심이 인색해지고 성범죄가 많아졌는데 호젓한 산 길에서 남자를 만났으니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 여인의 표정이 그려집니다. 명찰의 의미로 반전시켜 놀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미덥지않게 본다는 사실이 무척 불쾌하기도 했었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순철선생님, 명찰 덕을 톡톡히 보셨습니다. 그 여인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것도 흉흉한 세상에 산속에서 남자를 만났으니요. 명찰 덕분에 그 여인도 안심했을 터이고 선생님 품격도 더 높아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호젓한 산 길, 그것도 이른 아침에 낯선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불안감이 들기도 했겠지요.
정말 명찰이 아니었으면 그 여인이 돌아서 내려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