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국의 EBS 바둑교실은 이렇게 '경구'로 시작한다. 5월 14일 1164회의 녹화분은 맨 먼저 '이 말'로써 시청자를 찾아갈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23년의 세월이 한결 같다.
서울 우면동 EBS 방송센터는 초여름 빛이다. 우면산 자락 끝에 있어 지하철 양재역에서 택시를 타고 오면 맨 끝 도로에서 내리게 된다. 프로기사 양상국 9단은 일행을 맞이하고, EBS 관계자와 프로그램 내용을 상의하며 분장실에서 방송 준비를 마친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하호정 3단은 나이 차를 떠나 양상국 9단의 오랜 벗이기도 하다.
하호정 프로가 기자들을 발견하고 인사하며 입을 뗀다.
"1시간 프로그램이라 준비가 많이 필요해요. 양 사범님이 방송에 필요한 대부분을 거의 준비해오세요. 방송국엔 한 번도 저보다 늦게 온 적도 없으시구요. 정말 배울 점이 많아요."
EBS의 장수 프로그램, 'EBS 바둑교실'은 1990년 EBS 개국과 함께 문을 열어 2010년 4월 4일 1000회 방송을 기록했다. 만 20년을 기록한 것이다. 진행자가 바뀌지 않고 방송 개국시부터 이어온 프로그램은 '바둑교실'이 유일하다. 한국 바둑팬들의 사랑을 받고 자라온 바둑교실이기에 그렇다.
○● 23년의 약속, 23년의 한결같음
이런 기록은 양상국 9단의 자기관리 덕분이기도 하고 바둑보급에 대한 사명감이기도 하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다. 1시간의 방송 분량을 위해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나 자세는 자연스런 생활이 되었다. 녹화의 첫부분에 나온 '깨달은 사람(達人)'처럼 그런 노력은 티가 나지 않고 물처럼 자연스럽다.
"방송은 방송을 준비하는 사람, 시청자, 그리고 만나는 모든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에요. 이 프로그램만해도 관련 인원이 20명이에요. 스튜디오를 하루 반나절 이상 써야합니다. 그렇게 준비해서 하는데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요. 못 하겠어요' 하는 건 안되는 거에요. 자격이 없는 거죠."
◀ 분장실의 양상국 9단, '저는 분장이 5분이면 끝나요. 하호정 사범은 30분 걸립니다. 하호정 사범을 많이 찍어주세요. 하하"
방송으로 봤을 땐 자연스러운 표정과 명징하고 재미 넘치는 바둑 해설이었지만 때론 진통제를 맞아가며 녹화를 진행한 적도 있다.
몇 가지 일화들, 장인의 발인날짜와 녹화날짜가 겹쳤을 때도 일단 녹화시간을 지켰다. 걷기 힘들정도의 다리화상이 생겼을 때도 진통제를 먹어가며 녹화시간을 지켰다. 편도선이 붓거나 병원을 찾아가야 할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아도 일단 녹화에 대한 약속이 먼저였다. 만 23년 이상 이어가는 방송 프로그램에는 이런 정도의 자세가 뒷받침이 되어 있다. 양 9단은 이렇게 감당해야할 부분에 대해선 매우 확실하고 엄격하다. 다만 상대에 대해선 배려가 우선이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녹화 중간에 졸도한 여류프로 진행자가 있었어요, 아휴 아찔했죠."
23년간 같이 진행했던 여자 프로기사는 총 10명 정도다. 하호정 이후로는 바뀐 적이 없다. 이렇게 하호정 프로와 호흡을 맞춘 지가 벌써 7년이다. 지금은 '척하면 척'일 정도, 사전 조율만 맞추면 별다른 대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호흡이 잘 맞는다.
"인연입니다. 지금은 하호정 프로와 프로그램을 같이 하는 게 제일 편안합니다."
방송 호흡이 어느정도 잘 맞는지는 녹화시간에서도 드러난다. 1시간의 방송분량이면 녹화시간은 1시간을 조금 초과할 정도다. 예전에 2시간 이상 걸리던 것이 짧아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방송이 1시간인데 녹화 시간은 약 1시간 15분 내지 20분 정도에요. 1시간을 초과하는 부분은 설명을 위해 바둑판위에 돌을 놓는 시간이죠, 사전에 맞추는 거도 많지 않아요. 원고가 있지만(필요 없을 정도) 볼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됐어요 "
▶ 하호정 사범은 "알아서 잘 하는 스타일"이라 최고에요.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같이 하는데는 서로간의 믿음과 호흡이 필수다.
1990년 7월 27일 EBS 개국과 함께 첫 방송이 나간 이래 양 9단은 많은 시간을 이 프로그램에 투자해왔다. 공중파 방송으론 유일한 바둑강좌 프로그램이었고, 방송용 바둑강좌의 프레임을 만든 첫 사례이기도 했다. 처음이니만큼 자료가 많지 않다는 것도 시작 당시엔 한 가지 문제였다. EBS 바둑교실은 오프닝과 클로징의 한자 경구와 4자성어가 있고, 바둑입문편, 사활과 맥, 오늘의 수담(아마추어 실전 분석), 시청자 퀴즈 등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프로 입단 전부터 바둑으로 생기는 수입을 바둑 책에 투자하던 것이 도움이 됐다.
양 9단이 소장중인 바둑 책들은 과거 故 조남철 선생의 소장량을 제외하면, 바둑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초반에는 일본 바둑 책들을 많이 모았다. 당시 돈으로 10만원~20만씩 하는 거금을 책 구입에 썼다. 시리즈 물로 되어 있던 것이 많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샀다. 최근에 더는 소장하기가 곤란해져서 상당량의 책을 서산 서광사의 도선스님에게 기부했다.
요즘은 한국 바둑교재가 많이 발전해 흡족하다. 예전에는 한국 바둑 책이 쓸만한 것이 없었단다.
"50년간 책을 모았어요. 일본 잡지부터 일본 단행본 한국에서 출간된 책까지 전부요. 예전에 우리 교재는 일본과 비교가 안됐어요. 격이 달랐죠. 일본의 사전 시리즈 같은 건 지금 봐도 대단해요. 현재는 정말 한국교재들도 좋아졌어요. 충암도장에 한 번 갔더니 직접 만든 교재들 수준이 상당하더군요. 권갑룡 도장에서 출간한 책들도 그렇죠. 나중에 바둑방송 등 하던 일을 은퇴하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부할 생각도 있어요."
○● "재능이 안 되면 빨리 다른 길로 가는 것도 좋아"
양상국 9단이 프로입단을 준비 하던 때와 지금은 환경이 다르다. 양 9단은 1970년에 입단했다. 양 9단의 지론은 간단하다. - '바둑재능이 있어 프로기사가 되면 좋다. 그러나 바둑 재능이 없으면 프로가 되는 길을 빨리 접고 다른 일을 선택하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프로기사가 되는 것 보다 더 괜찮은 선택일 수 있다.'
"가끔 도장에 재주있는 아이들을 소개해 주는 경우도 있죠. 그럼 그 아이들과 꼭 약속을 해요. 열심히 공부해서 6개월안에 한 점이 안 늘면 다시 학교 공부하는 거다. 그렇게요. 요즘은 옛날(일본 위기연감 한 권 가지고 절에서 프로입단공부하던 시절)과 달라요."
▶ "바둑재능이 있는 사람은 바둑을 두면 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일을 택하면 된다. 프로가 되기 어려우면 즉시 길을 바꿔서 더 큰일을 하면 되지 않나? 인생은 좀 더 길게, 크게 보자"
"바둑 전문도장 시스템과 교재가 훌륭해요. 그런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데 실력이 안 늘면 얼른 다른 길로 택하는 게 좋은 거죠. 제 말 듣고 학교 공부로 턴 했는데 서울대 의대를 간 아이도 있어요. 프로가 못 됐어도 괜찮잖아요. 프로가 되려고 공부한 방식이 학업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된 거에요. 하루에 10시간 가까이 집중을 유지하던 아이들인데 학교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죠. "
다른 예도 있다. 김기선 현역 국회의원이다. 19대 국회의원 중 최고의 바둑실력이다.
"김기선 의원도 전에 저랑 같이 입단대회를 나온 적이 있었다네요. 전 몰랐습니다만 이야기를 나눠보니 입단대회에 같이 출전한 거에요. 김 의원이 고등학교 때 바둑에 빠졌던 거죠. 으하하.프로가 못 되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공부를 했으니 지금 국회의원을 하는 거잖아요. 나쁠 게 없죠. 지금은 다른 국회의원들을 세 점으로 접는다는데 말이에요. (바둑TV 수담사랑 (手談舍廊) 출연)"
EBS 바둑교실에서는 프로들의 기보 대신 꼭 일반 아마추어 팬들의 실전으로 대국을 보여준다. 아마추어 팬들의 기보가 실전에서 나올만한 수들이 많고 훨씬 재밌기 때문이다.
"이세돌 같은 프로들의 바둑도 볼만하지만 어렵고 머리 아픈 것도 많아요. 아마추어들 바둑에 배꼽잡는 수가 많죠, 그래서 아마추어 실전을 '오늘의 수담'에서 소개하는 거지. 단 실명을 그대로 공개하진 않아요. 본인들이 부담스러워 하니까"
아마추어 실전보는 양상국 9단이 100% 직접 기록한다. 양 9단이 오랫동안 진행해온 성균관대 사회 대학원 강좌를 통해 나온 것들도 많다.
하호정 프로가 하소연 하는 점이 하나 있단다. "엉뚱한 데를 많이 둬서 재밌기는 한데 방송중에 어디를 뒀는지 수순이 잘 기억 안 나는 단점이 있다." 며 웃는다.
2013년 7월말까지 가면 1177회를 채운다. 양상국 9단은 "지금은 바둑TV도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바둑을 배우고 실력을 늘릴 수 있는' 최초의 프로그램이었다. 바둑보급에 있어서 이 프로그램은 가장 적합했다.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다."며 만 23년을 맞은 감회를 전했다.
讀十年書 天下無不可醫之病 10년간 책을 읽으면 천하에 고칠 수 없는 병이 없으리라.
"뜻을 세워 10년간 공부하니 천하의 일을 앉아서 손금보듯 훤히 알겠다. 지난 날의 어리석고 미혹한 생각들이 떠올라 낯을 들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 양상국 9단이 소개하는 한자성어의 클로징멘트가 1편 분량의 녹화가 끝났음을 알린다. EBS 바둑교실은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50분부터 EBS 플러스2채널에서 방영된다.
[취재 : 최병준, 박주성]
○● 동영상, 양상국 9단의 1164회 EBS 바둑교실 녹화현장, 인터뷰
▲ 양상국 9단과 하호정 3단, 녹화 시작 전
▲ 방송 전 분장을 하고 있는 하호정 프로
▲ 오늘의 수담, 아마추어의 실전보를 놔보면서 그날 강의의 맥점을 찾아 낸다.
▲ 요즘 우리 남편(이상훈 티브로드 감독)이 그러던데 이런 포석이 유행이래요.이상훈 감독의 티브로드는 KB바둑리그에서 연승행진중이다.
▲ 우면동 EBS방송센터, 밖으론 아파트 촌이 있지만 뒷쪽으론 우면산을 기대고 있어 숲이 우거져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