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5-05-31 06:28:26
[70대 한정판으로 나온 ‘광복 70주년 기념’ 라이카M 카메라. 필름 카메라로 35·50㎜ 렌즈가 포함돼 있다]
며칠 전 신문에서 ‘광복 70주년 기념’ 라이카(Leica) 카메라가 만들어졌다는 기사를 봤다. 김효진 반도 카메라 대표가 기획하고 독일 본사에 의뢰해 만든 한정품이다. 필름 카메라 1대와 기본 렌즈 2개를 합친 가격은 3800만원. 디지털 카메라가 넘쳐나는 요즘, 필름 사는 것도 쉽지 않고 가격까지 비싼데 귀가 솔깃했다. 왜냐하면 ‘라이카’이기 때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생라자르역 뒤에서’, 브레송이 즐겨 썼던 라이카 M3]
파리 생 라자르 역 뒷문 부근에 있는 물웅덩이를 폴짝 뛰어넘는 남자의 사진을 기억하는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낸 사진작가로 유명한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그 유명한 사진 ‘생 라자르 역 뒤에서’가 바로 라이카 M3로 찍은 것이다. 크기가 작아 언제 어디서든 휴대가 가능하고 거리계와 뷰파인더를 하나의 창으로 통합한 거리계연동(레인지 파인더)식이어서 등배 파인더를 통해 두 눈을 뜬 상태에서도 촬영이 가능한 라이카는 물웅덩이를 뛰어넘는 남자의 결정적 순간을 잡는 데 용이했다. 조리개를 밝게 만들어 빛이 부족한 곳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기동성과 현장성 면에서도 뛰어나 역사적으로 “완성도가 가장 높은 카메라”로 꼽히는 게 바로 라이카다.
그래서 평소 지갑 사정은 안 되면서도 남대문 카메라 점 앞을 지날 때면 수시로 진열대 속 라이카를 흘깃하곤 했다. 나도 저 카메라를 가지면 뭔가 그럴듯한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디지털의 홍수시대에서 아날로그 제품을 사용한다는 건 일종의 고집이고 ‘간지(멋)’다. 그것이 ‘명품’으로 소문난 것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 영국의 디자이너 폴 스미스다. ‘클래식에 위트를 가미해’ 영국 패션의 새 지평을 연 그는 2000년 영국 패션산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식지 않는 열정으로 70대의 나이인 지금도 매년 컬렉션을 여는 현역 디자이너다.
2010년에는 서울 대림미술관에서 ‘인사이드 폴 스미스’ 전시회를 열었고, 그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바로 그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벽면 한가득 붙어 있던 사진들. 횡단보도 신호등, 거리 간판, 하늘, 이름 모를 작은 꽃, 부서지고 버려진 쓰레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말 평범한 것들이 폴 스미스 카메라의 대상이었다.
이 사진들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니 이것은 폴 스미스의 ‘사진일기’였다. 어려서부터 지독한 난독증을 앓고 있는 폴 스미스는 단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읽거나 철자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우울해하는 11살짜리 아들에게 작은 카메라를 선물한다. 그때부터 폴 스미스는 하루 동안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사진에 담아두는 ‘사진일기’를 썼다고 한다. ‘클래식과 위트의 접목’이라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아마도 그런 일상의 장면들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거리의 실제 삶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다양성이 혼재돼 있으니까.
얼마 전 폴 매카트니의 부인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을 다녀온 후배가 말했다. “사진은 정말 평범했어요.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그런 사진들 말이죠.” 물론 린다가 찍은 인물들이 워낙 유명해서(비틀즈니까!) 사진전까지 열었겠지만 사진 속 결과물은 구도나 기술 등의 미학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일상의 포착’이었다는 얘기다.
[라이카 빈티지 카메라 제품들을 본뜬 휴대폰 케이스]
라이카. 꼭 한 번 갖고 싶은 카메라지만 그걸 굳이 내가 가질 필요가 있을까. 내가 사진작가도 아니고, 무엇보다 내가 찍고 싶은 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이니 그저 조용히 내 느낌에 충실하게 사진을 찍으면 되지 않을까. 휴대폰 카메라가 라이카보다 ‘간지’는 떨어지겠지만 나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줄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요즘 휴대폰 케이스를 수색 중이다. 라이카 카메라를 꼭 빼닮은 케이스. 진짜 라이카의 우아함 대신 위트를 소유하기 위해서다.
서정민...중앙일보디지털시너지팀장...
서정민의 견물생심보고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한다. 패션, 뷰티, 푸드, 리빙 등 다양한 분야의 라이프스타일 기사를 담당해왔고 현재는 중앙일보 뉴미디어 부문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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