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국지>의 세계에 탐닉하다
- 1부 황하의 영웅 (163) -
제 3권 춤추는 천하
제 23장 영광과 교만 (3)
그 무렵, 주왕실에서도 은밀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주혜왕(周惠王)은 제환공이 수지에서 회합을 갖는 것이 태자 정(鄭)을 위한 것임을 눈치채고 불쾌한 마음을 가졌다.
'이는 왕실에 대한 간섭이다.'
마지못해 태자 정(鄭)을 보내기는 했으나 제환공에 대한 불쾌감은 더욱 심해졌다. 거기에 위기감을 느낀 혜후 규씨와 왕자 대(帶)가 주혜왕을 들쑤셨다.
- 제환공(齊桓公)이 태자를 불러낸 뜻이 불순합니다.
- 이대로 두었다가는 왕실마저 제환공의 수족이 될 판입니다.
마침내 주혜왕은 마음을 정하고 태재(太宰) 공(孔)을 불러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제환공이 비록 초나라를 쳤다고는 하지만, 그가 초(楚)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제환공이 수지에서 태자를 떠받들고 있는 것은 엄연히 왕실에 대한 월권이다. 왕실의 일은 왕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태재는 지금 곧 나의 밀서를 정문공(鄭文公)에게 전하라."
주혜왕의 이 같은 말을 들은 태재 공(孔)은 당황했다.
"제환공(齊桓公)과 초성왕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왕실과 중원이 두루 평안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제환공의 공입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제환공은 불순한 자다. 그가 여러 제후를 모아놓고 무슨 짓을 꾸밀지 누가 알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정해졌다."
주혜왕은 밀서 한 통을 태재 공(孔)에게 내주었다.
밀서는 굳게 봉해져 있었다. 태재 공(孔)은 내용이 궁금했으나 차마 뜯어볼 수 없었다. 결국 심복 부하를 시켜 그 밀서를 수지 땅에 머물고 있는 정문공(鄭文公)에게로 보냈다.
태자 정(鄭)이 부왕의 명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무리를 모아 당을 짓고 있어 도저히 왕위를 계승시킬 수 없다.
나의 뜻은 차자인 왕자 대(帶)에게 있다. 정백(鄭伯)은 제(齊)를 버리고 초(楚)와 함께 왕실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편안케 하라.
난데없이 주혜왕으로부터 이같은 내용의 밀서를 받은 정문공(鄭文公)은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 제환공은 많은 수고와 공적을 이루어낸 주왕실의 대리인이고, 초나라는 왕호를 참칭(僭稱)하며 마지막 남은 주왕실의 자존심까지 밟아 버린 남방 오랑캐가 아니던가.
그런데 주혜왕은 별안간 제(齊)나라를 버리고 초와 함께 왕실을 안정시키라는 밀명을 내린 것이었다. 아무리 태자 정(鄭)을 미워하고 왕자 대(帶)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다해도 쉽게 내릴 수 있는 명이 아니었다.
'잘못된 밀서..........?'
여러 번 밀서의 내용을 곱씹어보는 중에 정문공(鄭文公)의 머릿속에는 차츰 주혜왕이 의도하는 바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제환공(齊桓公)의 지위와 행동에 대해 불안과 위협을 느끼고 있구나. 후계자 선정 문제가 아니었다. 보다 근원적인 것은 날로 위세가 커지고 있는 제환공에 대한 경계의 마음이다' 라고 정문공은 단정했다.
'그 첫번째로 정과 초의 연합 세력을 구축하는 것.'
정문공(鄭文公)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벙긋 벌어졌다.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가고 있었다.
'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나도 패공(覇公)이 될 수 있다.'
그날 밤, 정문공(鄭文公)은 비밀리에 수행 신하들을 불러 밀서를 내보이며 말했다.
"우리 선군인 정무공, 정장공께서는 왕실의 경사(卿士)로서 모든 제후를 호령했었소. 그러던 것이 중간에 세도가 끊어져 지금까지 다른 제후의 명에 따르는 신세가 되고 말았소. 특히 나의 부군이신 정여공께서는 지금의 천자를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우셨으나 아무런 대우를 받지 못했소. 나는 이 점이 늘 아쉬웠는데 이제 왕명이 나에게 내렸으니, 이는 우리 정(鄭)나라가 패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오. 그대들은 모두 나를 축복해주시오."
그러고는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정문공을 보고 대부 공숙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간한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군주는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경솔히 행동하면 친한 이를 잃고, 친한 이를 잃게 되면 근심이 오게 마련입니다. 제환공(齊桓公)은 우리 정나라를 위해 초나라까지 원정을 한 은인입니다. 이제 와서 제를 버리고 초와 친하다면 그것은 곧 배은망덕입니다. 더욱이 태자 정을 돕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입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딴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천자의 명을 따르고 돕는 것을 어찌 경솔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왕실의 대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적자와 장자(長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지러움만 초래할 뿐입니다. 지난날의 일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숙의 말은 이어졌다.
"주유왕(周幽王)이 백복(伯服)을 사랑하고, 주환왕이 왕자 극(克)을 사랑하고, 주장왕이 왕자 퇴(頹)를 사랑하다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주공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결국 왕실을 어지럽히고 목숨만 잃었을 뿐 아무런 공적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주공께서는 옛 사람들이 저지른 허물을 어찌 다시 되풀이하시려는 것입니까?
만일 이번에 주혜왕을 돕고 제환공(齊桓公)을 배신한다면 주공께서는 반드시 후회하시게 될 것입니다."
공실 세력이 만만치 않은 공숙이 결사적으로 만류하고 들자 정문공(鄭文公)은 한풀 기가 껶였다. 그때였다.
대부 신후(申侯)가 앞으로 나서며 정문공을 부추겼다.
"공숙의 말은 틀립니다. 우리는 천자의 신하이지 패공의 신하는 아닙니다. 주공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시려는 것은 천자의 명을 받아서일 뿐, 제환공(齊桓公)과는 아무런 의리도 없습니다. 태자 정(鄭)과 왕자 대(帶) 중 누가 다음 왕위에 오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공께서는 일단 본국으로 돌아가시어 사태를 관망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부 신후는 망국(亡國)의 후예였다.
과거 신(申)나라 군주의 생질이었다. 신나라가 초에게 멸망당하자 신후(申侯)은 초문왕의 신하가 되었다가 초문왕이 죽자 다시 귀화하여 정나라 대부가 된 사람이었다. 구변 좋고 욕심 많고 아첨에 능한 사람이었다.
신후(申侯)의 말에 정문공은 다시 용기를 가졌다.
"그대 말이 옳소. 나의 마음은 정해졌소."
- 정문공(鄭文公)이 사라졌다!
날이 밝았을 때 정나라 공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럴 리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정나라 공관을 지키던 관리로부터
- 국내에 급한 일이 생겨서.
라는 말을 전해듣고 제환공(齊桓公)은 안색이 돌변했다.
"당장 태자를 받들고 정(鄭)나라를 토벌하리라!"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패공으로서의 권위와 지위가 몸에 밴 제환공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수지(首止)의 분위기는 살벌해졌다.
그런 제환공을 달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관중(管仲)이 앞으로 나서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공께서는 대범하십시오. 이는 틀림없이 주혜왕이 제후들의 분열을 노리고 정문공(鄭文公)을 유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鄭)나라가 빠졌다고 해서 주공의 큰 계획에 지장이 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아직 태자를 위한 맹약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맹약부터 한 후 정나라를 정벌해도 늦지 않습니다."
제환공(齊桓公)도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는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제후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짐짓 그래본 것뿐이오. 내 어찌 대사를 앞에 놓고 경솔히 행동할 수 있겠소."
며칠 후, 수지(首止)에 모인 여러나라 군후들은 제환공이 마련한 제단으로 올라 태자 정(鄭)을 가운데 앉혀놓고 입술에 피를 바르고 맹약의 의식을 치렀다.
우리는 다같이 힘을 합해 태자를 돕고 왕실을 바로잡을 것을 맹세하노라. 신명이시여, 이 맹세를 배반하는 자 있으면 결단코 그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수지(首止) 동맹은 끝났다. 태자 정(鄭)은 제환공을 비롯한 7개국 군주들의 충성 맹세에 감읍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군후들이 이렇듯 주(周)왕실을 잊지 않고 나를 도우니, 나 또한 어찌 군후들의 은혜를 잊을 수 있으리오."
제후들은 회맹이 끝나고도 10여 일을 더 그곳에 머물며 태자 정(鄭)을 위해 연회를 베푼 후에 각자 본국으로 돌아갔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