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과 곤고의 날 전 7:11-14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복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맞다. 하나님은 생명과 복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르신 신자가 하나님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생명이고 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땅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것이기에 땅의 것을 복과 화로 나눌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지만 그 복에 우리가 원하고 기대하는 땅의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머리로는 인정이 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것을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면서 좋은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인간의 한계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땅의 것은 복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땅의 것을 구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마음 상태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땅의 것을 복으로 구하지 않는 것이 하늘의 것만 소망하는 믿음이라 여기고 그런 믿음이 되려고 땅의 것을 바라는 욕심을 버리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믿음을 벗어나 마귀의 시험에 드는 결과일 뿐이다.
인간은 항상 땅의 것에 마음을 두고 살게 되어 있다. 그런데 땅에 것에 마음 두고 사는 것이 곧 죄가 생산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항상 땅에 것으로 마음이 끌리는 인간은 죄를 생산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은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죄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피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거룩한 자 되게 하셔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로 인해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또한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죄를 보게 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3~14)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두 가지를 병행하여 두시고 행하신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형통한 날을 주시고 못하면 곤고한 날을 주시는 것일까? 이것이 세상에 마음을 둔 인간의 계산속이다. 사람들은 형통을 행복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형통을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형통하면 성공하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곤고의 날은 반대로 불행과 연결 짓는다. 힘들고 괴로운 날이 행복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에 형통한 날이 있게도 하고 곤고한 날이 있게도 한다. 우리가 어떤 날을 원하든 무시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주시는 날이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곧게 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곤고한 날이 있을 때 자신의 믿음 상태를 살피며 고칠 것을 고치면 곤고의 날 대신에 형통의 날을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사탄의 생각이다.
전도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라고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형통의 날에는 기뻐한다. 굳이 기뻐하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기뻐하며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형통의 날이 되면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형통이 계속 되면 마음이 어떻게 변할까? 처음의 감사가 있는 마음이 그대로 유지될까? 그렇지 않다. 형통이 계속되면 하루하루의 형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감사의 마음은 희미해지고 사라진다. 자신이 누구로 인해 사는가?를 잊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알수 있다. 형통한 날이 지속되면서 하나님을 잊고 죄를 짓는 모습, 그리고 회개없는 속에 멸망을 당하고, 그러고 나서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습들이 그렇다.
그래서 곤고한 날에 되돌아보라고 하는 것은 형통의 날을 살았던 것이 자신이 누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형통한 날에 기뻐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형통한 날도 곤고한 날도 죄인을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가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곤고한 날에 되돌아 볼 것은 형통의 날이다. 자신의 힘으로 살게 된 형통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현재의 곤고의 날 역시 주께서 인도하시는 은혜의 날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유자로 존재하는 신자이다. 형통과 곤고에 매이지 않고 모든 날에서 주의 인도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에 있는 참된 형통인 것이다. 이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 우리의 인생에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을 병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이치이다.
누구에게든 형통의 날과 곤고의 날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병행하시며 주를 바라보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통은 복이고 곤고는 화, 또는 징벌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시시하게 보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형통의 날과 곤고한 날 두 가지를 병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삶에서 주께서 행하신 일로 감사하는 자로 세우기 위함이다. 세상에서의 형통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을 포함하여 모든 날에서 주가 동행하시고 주의 행하심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감사하게 한다.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지혜 있는 자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