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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피조물인가, 아니면 신이 피조물인가
볼테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69ㆍ캠브리지대 명예교수)이 천국·사후세계는 없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또 다시 유무신론 간의 끝없는 논쟁이 시작됐다. 호킹은 지난 15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천국이나 사후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믿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화일 뿐"이라면서 "마지막 순간 뇌가 깜빡거림을 멈추면 그 이후엔 아무것도 없다.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없다"고 말했다.
호킹 박사는 이날 인터뷰에서 “천국이나 사후 세계보다 죽음 이전의 삶을 최대한 영위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21세 때 루게릭병 진단과 함께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는 자신이 약 49년 동안 조기 사망의 가능성을 안고 살았지만, 이로 인해 인생을 더 즐길 수 있었다며 “죽음이 두렵지 않지만 빨리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고도 했다.
이러한 호킹의 주장은 지난해 『위대한 설계(Grand Design)』에서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주가 필요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가디언>은 해석했다. 현존하는 최고의 우주물리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호킹이 무신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게다가 호킹의 무신론은 다른 무신론자들의 그것에서 볼 수 있는 염세주의나 허무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종교계는 크게 당혹해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1988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간의 역사』에서 ‘만물이론’(통일장 이론)이 나온다면 인간 이성의 궁극적 승리로,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던 호킹이 지난해 저서와 이번 인터뷰에서까지 ‘창조주 부재 증명’을 거듭 확인한 것에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개신교 광신자들로부터 ‘죽어봐야 아는 것 아니냐’, ‘전신불구의 시한부 인생을 살다보니 신을 부정하다 못해 저주하고 싶었던 것 아니겠느냐’는 인신공격과 저주에 가까운 반발이 일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호킹은 “(내세가 없으므로) 현세에서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활용해 잠재력을 실현할 필요가 있다”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몰지작한 광신도들을 뻘줌하게 만들기도 했다.
호킹의 이러한 발언에 대한 종교계(기독교계)의 반응은 대체로 학적인 권위를 앞세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지난해 『위대한 설계』때 언론을 통해 보여준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지난해 국내 언론에 게재됐던 내용들을 소개해본다.
첫째, 호킹의 이론을 자신들의 무신론적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서 과학적 가설들을 사용하는 수준이라고 폄하하는 주장(맥그라스 교수)을 인용한 뒤 과학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서 합리성과 중립성을 지켜야 과학의 입지가 튼튼하게 될 것이라고 강변하거나(국민일보), 둘째, 호킹의 독선이 탈레반 수준이라고 강변하는 주장(그린필드 옥스퍼드대 교수)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의 오만을 경고하면서 과학의 자세는 오만이 아니라 호기심과 열린 자세라고 훈계한다거나(서울신문), 셋째, 호킹이 훌륭한 과학자임에는 사실이겠지만 그가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 종교의 영역을 침범하는 오만을 저질렀다는 목사의 주일 설교를 소개한 뒤(이수영 새문안 교회 목사) 양자이론이나 중력도 결국에는 만들어져야 존재한다거나(크리스찬 투데이), 넷째, 과학이 인간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과학이 필요한 것이지만 과학이 인간의 다채로운 영역을 협소하게 만들 수 있음을 강조하며, 종교도 과학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과학도 종교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교황(베네딕토 16세)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뉴시스).
종합해보면 기독교계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과학의 입지를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는 신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갈렐레이 등 중세 과학계와의 안 좋은 추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싶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호킹이 제기한 것은 일종의 과학적 가설이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쪽에서 반증을 할 필요가 있는데, 어차피 유신론자, 그것도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자라면 논쟁거리가 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저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된다.
하지만 지난해에 이어 이번에 더욱 강력한 인터뷰가 나온 여파에다, 오만방자하기가 국제수준보다 조금 더 한 것이 분명한 국내의 교계와 크리스천 과학자 등으로부터 호킹의 무례한(?) 언행에 대해 반박하는 목소리가 이어지면서 논리박약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억주 한국교회언론회 대변인은 “무신론자인 호킹 박사가 신의 세계를 말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일고의 가치가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호킹은 무지하고 교만한 과학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호킹의 발상은 마치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양을 측정하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덧붙였다.
이웅상 한국창조과학회장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컴퓨터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1000억개 이상의 신경세포 조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뇌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건 소가 웃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산소와 질소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며 “인간의 제한된 지식으로 오묘한 창조질서를 설명하려고 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발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종교적 충성심을 제일로 칠 게 분명한 대변인이고 보면 과학적 마인드가 결여될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비과학적인 재단을 했다고 치겠지만 창조과학도 과학인데, 반론을 제기하는 수준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못한 게 역시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에 대한 과학적 반증을 하지 못하고 말꼬리 잡는 은유법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의 존재와 관련된 어쩌면 인류 역사 이래 끊이지 않는 논쟁에 대한 철학자 볼테르(1694~1778)의 어찌 보면 허무한 대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다"고 단언했다.
왜 그랬을까? 신에 대한 질문에는 전쟁과 평화가 걸려 있었다.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개인의 신앙적 고민일 수도 있으나 그에 대한 답인 유신론과 무신론은 20세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이 보여준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같으면 같은 편, 다르면 다른 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신은 누구인가’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와 같은 개인이나 국가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파괴력을 같기 때문이다.
보통은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 대해 비슷한 답이 나오면 갈등의 여지가 줄어들지만 유신론과 무신론 간, 일신교와 다신교 간의 갈등보다 유신론과 유신론, 일신교와 일신교의 다툼이 더 무섭다. 특히 유대교·기독교·이슬람 간의 갈등에서 볼 수 있듯 뿌리가 같은 일신교 간의 싸움이 더 무섭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이면서 다신교 사회를 유지해온 탓에 종교 갈등이 거의 없었다. 불교나 유교가 사회의 지배적 사상체계를 형성하기는 했지만 무속신앙과 대척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신교 사회란 ‘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여럿 있는 사회, 다시 말하면 다종교 사회라는 의미다. 이러한 다문화 사회는 역설적으로 다신교 상황을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단일신교(henotheism)’라든가 ‘교체신교(kathenotheism)’와 같은 유용한 개념들을 고안해낼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일신교 사회보다 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단일신교는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신도 숭배할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다신교다. 교체신교는 믿는 신을 순차적으로 바꾸기도 하는 다신교다. 사회에 단일신교나 교체신교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종교 평화에 가까울 수 있다. 불교나 유교는 태생적으로도, 그리고 전통의 무속신앙과 접목하면서 일신교라기보다는 단일신교나 교체신교 등 다신교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해왔던 것이다. 일신교인 기독교가, 기독교 중에서도 천주교보다는 개신교가 유독 사회적 갈등을 유난히 많이 일으키는 이유는 전통사회의 신앙과 대척관계에 서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이행 중인 것을 감안한다면, 다문화 사회는 필연적으로 여럿 있는 다종교 사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갈등요소가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특히 기독교만큼이나 강고한 일신교인데다 뿌리까지 같은 이슬람교의 등장으로 양 종교 간 갈등이 사회불안으로 비화될 조짐도 없지 않다. 따라서 단일신교나 교체신교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를 더 필요로 한다.
여러 정황상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볼 때 무신론자·불가지론자·무종교 인구는 11억 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신앙을 갖고 있으며,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이슬람·힌두교·불교는 모두 신자 수가 늘고 있다.
인간이 신앙을 갖는 것은 교육·환경이 아니라 유전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볼테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발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기보다는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말이 더 과학적으로는 타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피조물일 수 있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증명해보자.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는 말도 있지만 철학은 신의 존재를 다루는 유용한 학문적 도구다. 형이상학·중세철학·철학적 신학 전문가인 옥스퍼드대 브라이언 레프토(Brian Leftow) 교수의 (기독교의) 신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철학을 정리해보았다.
‘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레프토 교수는 우주를 창조·유지·통치하는 존재라고 답한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유에 대해 그는 ‘창조는 신의 후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위’라고 말한다. 신은 창조할 필요가 없었지만 피조물들에게 선물을 주려는 큰 바람 때문에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이해에 우열이 있는가 하는 질문, 어찌 보면 ‘신은 존재하는가’ 내지는 ‘신은 누구인가’에 관한 질문에 대해 교수는 우월성보다는 진리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개는 검다’고 말하는 사람과 ‘모든 개가 검은 것은 아니다. 갈색 개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논리상 둘 다 맞을 수는 없다는 그의 답변으로부터 앞서 살펴본 같은 뿌리의 일신교가 왜 더 심하게 갈등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레프토 교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지만 무슬림은 그렇지 않다. 무슬림은 무함마드가 참된 선지자라고 믿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거짓명제보다는 참 명제를 믿는 게 좋다. 보다 많은 참된 명제로 교의가 구성된 종교가 더 참되고 더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며 종교 갈등이 필연적임을 암시한다.
철학과 계시의 관계에 대해서는 순전히 철학적인 관점에서 출발한 철학자들도 기독교 같은 계시 종교와 유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서 아우구스티누스(354~430)로부터 예수의 역할을 제외하고는 기독교의 진리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은 플로티노스(204(?)~270)를 예로 든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같은 이해하기 힘든 교리는 철학적으로 따지기보다는 ‘외우다시피’ 믿어야 하는 신의 신비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삼위일체도 철학적으로 다룰 수 있다면서 뇌수술의 결과 한 사람이 두 개의 인격을 갖게 되는 경우나 물리학자들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시간여행도 삼위일체에 대해 시사하는 점이 있다고 답한다. 예컨대 5분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함께 있게 되는데, 철학은 이런 사례들을 이용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데 사실인가.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시도는 언제 시작됐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1세기 유대인들이 대부분 신을 믿었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입증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항상 있어 왔으며,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구약성경에도 나온다면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적어도 플라톤(기원전 427~34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답했다.
‘전능한 신이 악을 없애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조금은 야속해 보이는 질문에 그는 인간의 ‘도덕적인 악(moral evil)’은 자유의지로 설명된다면서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로 인간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과 무관한 ‘자연적 악(natural evil)’은 자연법의 결과며, 고통은 창조를 위해 신이 치러야 하는 일종의 대가라고 설명하면서 최근의 ‘회의적 유신론(skeptical theism)’에 따르면 신이 고통을 허락한 의도를 우리는 어쩌면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도하는 것은 신의 특징과 부합되는가 하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단언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선하며 인간을 사랑한다고 이해하는데, 그런 존재와 대화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도는 의도적으로 신과 소통하는 것이지만, 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비의도적으로 신과 소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성경에 논리적인 모순은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은 성경에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답했다. 신은 존재하며,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알기를 바란다고 했다.
신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존재 자체만으로 선한 신이 존재하며, 그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바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기 때문이라는 데 그럼에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도덕적 악을 행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는 얘기다. 전지전능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사람들에게 도덕적 악을 행하도록 자유의지를 주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너무 바란 나머지 경쟁하듯 알기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서로 해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그 자유의지로 자신에 대한 충성 경쟁을 하다 서로를 해하도록 했다는 얘기를 어떻게 믿어야 할까?
어떻게 전지전능하다는 것이며, 어떻게 선한 존재라는 것인가. 그건 자체로 전지전능하다는 신의 잣대로 본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의 잣대로 만들어낸 전지전능하고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는 실수인 셈이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반증, 다시 말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피조물인 신에 끌려 다니는 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 즉 우상숭배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보면 모든 종교는 다 우상숭배인 셈이다. 당연히 남의 신뿐만 아니라 나의 신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는 것도 우상숭배며, 내가 믿는 신이 평화의 신이 아닌 전쟁의 신이 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우상숭배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다신교보다는 일신교가 더 강고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셈이다. 호킹 박사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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