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휴거와 대환난(4)/ † 휴거는 대환난과 주님의 다시 오심의 중심이다(눅21:20-36).
누가복음 21장 20절-36절은 대환란과 주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파루시아(parousia), coming>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오심(coming)의 그리스어 단어가 파루시아이다. 휴거는 주님의 재림의 중심이다. 휴거(rapture)란 요한복음 14장 1-3절의 영접(receive)이라는 단어와 상통하는 것으로 주님에 의해 하늘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말한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보좌에서 또는 공중에서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많은 믿는 이들이 이것을 잘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24장-25장, 마가복음 13장, 다니엘서 7장-9장, 요한계시록, 바울 서신들을 함께 묵상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24장 2절에 예루살렘 성전의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주님의 영적인 통찰력이다. 사람이 보는 것은 단지 눈앞에 있는 것이며 바깥에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주님의 통찰력은 우리와는 달리 꿰뚫어 보시고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아름다운 것으로, 모든 물질적인 것들을 세련되고 품위 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세상은 아름답고 좋지만 결국 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왜 주님께서는 그같이 훌륭한 성전을 황폐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것은 성전의 영광이 금과 은과 보석에 있지 않고 주님의 임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영적인 통찰력에 따르면, 물질적인 것들의 요소들은 불에 의해서 태워져 버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땅의 것들을 염려하는가? 성전은 교회의 예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라! 그것은 헛된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 그리스도의 실제(reality)를 잃어버렸다. 비록 예배가 있지만 필연적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황폐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이것을 주의하도록 깨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밖의 외양만을 가지고 있는가? 마태복음 21장 8-19절은 세상 종말의 징조들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마21:20-27절에 나오는 예언은 이 시대의 마지막 삼 년 반, 곧 대환난의 때이며(마24:21), 다니엘서 9장 27절에 예언된 마지막 이레의 나머지 절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이 기간은 성전 안에 적그리스도의 형상, 곧 우상을 세우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마24:15),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오심으로 마칠 것이다(눅21:27).
마태복음 21장 20절은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1) 타이터스가 로마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멸망시킨 때인 주후 70년에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이 절은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2) 또 한 면에서,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과 마태복음 24장의 주제가 대환난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장군 타이터스에 의한 거룩한 곳의 파괴는 단지 대환난의 상징일 뿐이다. 앞으로 올 대환난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그 둘레는 이스라엘이다.
눅21:22절은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땅”은 온 땅을 가리키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거룩한 땅인 유대 땅, 곧 팔레스타인 땅을 가리킨다.
눅21:23절의 “백성”은 유대 민족을 의미한다. 유대 땅과 유대 민족은 적그리스도의 손아래서 고난당할 것이다. 24-27절은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이방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방민족들의 때가 다 찰 때가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질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원문 참조)고 말한다. 하늘에서의 이 초자연적인 재난들은 대환난에 이어 이 시대의 마감 때에 일어날 것이다.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심판의 시간이 오게 된다. 이것은 대환난이 매우 임박했을 때 발생할 넷째 나팔과는 다르다(계8:12). 27절은 그리스도의 공개적인 오심을 말한다. 이것은 그분의 재림의 공개적인 방면이다. 누가복음 21장 20-27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대환난, 적그리스도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 주님의 재림을 가리킨다.
계속해서 눅21:28-36절은 주님께서 제자들의 구속과 이기는 자들의 휴거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 속량, 곧 몸의 부활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체험할 것이다. 21장 28절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구속)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의 “속량”은 우리 몸의 구속, 곧 우리 몸의 변형을 가리킨다. 28절의 “속량”은 우리 영이나 혼의 속량이 아니라 우리 몸의 속량이다. 몸의 속량은 우리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속량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체험할 것이다. 29-31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는 무화과나무는 마태복음 21장 19절에서 저주받았다.
이것은 1세기로부터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 때인 주후 1948년까지 긴 겨울을 통과했다. 그것은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그 잎사귀들을 내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이 시대의 끝에 관한 표징이다. 무화과나무가 연하여지는 것은(마24:32) 생명이 소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눅21:30절의 잎사귀를 내는 것은 외부의 활동을 상징한다. 겨울은 마르는 시기, 곧 환난의 때를 상징하는 반면, 여름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시작될 왕국의 회복(30-31)의 시대를 상징한다. 이와 같이 대환난이 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게 될 것이다. 30절에서 주님은 여름이 가까운 것을 말씀하시고, 31절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운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까운”이란 말은 어떤 일이 며칠 안에, 혹은 몇 년 안에 일어나리라는 뜻은 아니다. 주님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므로 주님께는 이천년 후에 일어날 사건도 여전히 가까운 것으로 간주 된다.
눅21:32-33절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 세대”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전우주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그때 살고 있는 세대를 가리킨다. 이 세대는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믿는 이들이 모든 세대를 통해 그렇게도 소원했던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4-35절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 닥칠 것이다.”라고 말한다. “방탕함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정욕에 빠져 만취와 방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삶의 염려를 낳는다. “갑자기” 예기치 않게, “그날”이 덫과 같이 그들 위에 덮치는 그물처럼 그들에게 임할 것이다. 이 덫은 주님께서 장차 온 땅에 임할 시험의 때, 곧 환난의 때이다(계3:10). 그러므로 대환난은 온 땅 위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 위에 덫으로 임할 것이다. 방탕함과 만취와 생활의 염려가 오늘날만큼 팽배했던 적은 결코 없다.
사상과 이념과 이단과 망상과 속임과 교활함이 어느 것이 진실인지? 어느 것이 가까인지를 모르게 할 만큼 난무하다. 사람들은 쾌락을 위해 미쳐가고 있고, 한편으로 그들은 생활의 염려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다. 마태복음 17장 27절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라고 말한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가는 것은 휴거를 예표한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 홍수로부터 구출되었듯이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대환난으로부터 우리 믿는 이들을 지키실 것이다(계3:10). 노아의 때의 상황과 오늘날의 상황이 너무나도 똑 같다. 홍수가 갑자기 온 것처럼 주님의 오심도 갑작스러울 것이다.
36절은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고 말한다. 대환란을 피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은 깨어 있음과 기도함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모진 시험이 될 대환난 전(前)에 데려감을 당하는 것, 곧 휴거되는 것을 상징한다(계3:10; 누가17:34-36; 마24:21).
깨어 있는 자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깨어 있는 것은 주의하며 매일 실족할 가능성에 대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믿는 이들이 휴거될 것이라면 깨어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휴거 되는 것은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에 보호되는 것이다(계3:10). 더 나아가 “이 모든 일”은 대환난의 일들이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 앞에 서는 것은 계14:1절에 나오는 사람들의 서 있는 것과 일치한다. 이것은 휴거된 이기는 자들이 대환난 전에 하늘의 시온 산에서 구주 앞에 서리라는 것을 암시한다(계12:5-6, 14).
36절에서 “늘 깨어 기도하여라”고 명하신다. 영적으로 무감각하고 둔해지는 대신, 우리는 영 안으로 돌이킴을 훈련함으로써 우리의 영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는 오늘 세상적인 것들에 붙잡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힘은 오직 영을 접촉하면서 성령의 미세한 움직임까지도 간과하지 않는 것이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