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버지 양세봉 장군 못지않게
나의 아버지 양시봉도 독립군이었다”
'독립군 양시봉'의 딸, 양의복씨의 눈물어린 호소
“양세봉의 가짜후손에게 도둑맞은 훈장 꼭 찾아야 합니다”
“저에게는 큰아버지가 되시는 양세봉 장군의 친척이라면서 어떤 사람들이 한국의 국가보훈처로부터 훈장을 타갔다고 하는데 그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그는 그냥 친척이라고 사칭을 한 후 서울 동작구 흑석동 현충원 국립묘지에 큰아버지 비석을 세우고 훈장을 타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30년대 남만 일대를 주름잡으며 항일투쟁을 벌려 명성을 떨친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조카딸인 양의복(69.사진)씨의 말이다.
양세봉 장군의 형제를 보면 양세봉 장군이 첫째이고 둘째가 양원봉, 셋째가 양시봉, 넷째가 양정봉, 다섯째가 양봉녀(여)로 5남매다. 지난해 여름, 중국 심양에서 기자가 만난 양의복 씨는 바로 셋째인 양시봉 씨의 막내 딸이고 양의관은 큰 아들로 양의복의 오빠가 된다. 현재 양세봉 장군의 직계 혈통인 아들 양철수(61)는 북한에서 아동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양의복-양의관 남매가 양세봉 장군의 후손을 자처한 가짜 양씨가 훈장을 타 간 것을 알게 된 것은 1995년도 광복50주년 기념으로 한국초청을 받고 한국에 가서 최초로 알게 되었다.
양의복 씨는 말하길 “큰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북한에서 그의 가족들을 모두 데려갔다. 그래서 중국에는 어느 누구 아무도 없다. 때문에 양세봉 장군의 친척이라고는 중국에 있는 우리 친척 12명 뿐 이다. 그런데 우리가족 말고 훈장을 누가 가져갔는가?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억울해서 어떻게 하든 그 훈장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큰 아버지 양세봉 장군도 한때는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 억울하게 오명과 수모를 당했지만 다행히 뒤늦게 진정한 독립군의 명성을 찾게 돼 다행이다”고 말했다.
양세봉의 동생 양시봉, 김구의 한국독립당입당 활동
식량, 돈, 총 감추는일 담당하면서 형의 활동에 적극협조
양의복 씨는 이어 “그러나 유감스런 상황이 있다. 그래서 나는 꼭 이 문제를 확실하게 짚어보려고 한다. 우리 아버지 양시봉도 큰 아버지 양세봉장군 못지않게 독립군 활동을 했다. 아버지는 김구의 한국독립당에 가입을 하여 재정부장을 맡아 큰 형의 독립군혁명 활동을 돕다가 청원현 감옥에서 1년을 살았고 해방 후, 문화대혁명 때는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가 독립당 당원으로서 당시 활동을 한데 대하여는 10여명의 증인들이 있고 당시 고문으로 핏물이 흠뻑 고인 옷도 있다. 아버지는 당시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했던 정미소 사장이던 김성삼 씨와 함께 독립군들을 도왔고 김성삼 씨는 해방 후 한국으로 갔다. 그 후 한국에 가서 김성삼 씨를 만났는데 그의 증언으로는 아버지가 독립당에 가입한 증거서류가 보훈처에 제출 돼 있다는 말도 들었다”고 기자에게 밝혔다.
결국 양의복 씨는 자신의 부친이 큰 형인 양세봉 장군과 함께 항일혁명 활동을 하고도 오늘날 현재까지 그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기자에게 털어놓는 하나의 호소였다. 양 씨는 또 “아버지는 우리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나는 민족한테 한 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 나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운 한국독립당의 당원이었음을 밝혀 달라’는 절절한 애원을 남겨놓았다. 나의 아버지께서 생전에 당한 설움과 억울함을 우리 자식들이 풀어 드려야 하는데 그날이 언제가 될지 참으로 걱정이다”고 말했다.
양시봉은 1900년 12월 22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리면 면상동에서 출생, 1917년, 큰형인 양세봉을 따라 만주로 이주, 농사일을 했다. 양시봉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형인 양세봉을 도와 민족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을 하였다. 1918년에 그는 홍경현 홍묘자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3.1운동에도 참가를 했다.(참고자료: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연구 625p) 양시봉의 3.1운동은 실패를 했지만 그의 투쟁의지는 더 높아졌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는 더 강렬하게 타 올랐다. 이후 형 양세봉은 집을 떠나 독립운동에 참가를 하고 동생 양시봉은 아내 김화순과 함께 산골에서 형의 가족들을 돌보면서 독립운동을 돕기로 했는데 시봉은 형과의 약속대로 양식과 돈을 모으는 일에 힘을 쏟았다.
양시봉 아내는 독립군 옷, 양말 등을 빨고 깁는 일
독립군이 노획한 총 감추고 부상자 피신시키는 일 전담
특히 홍경에서 양세봉이 인솔하는 유격대원들이 사용하는 총을 감추는 아주 위험하고도 중요한 일을 시봉이 모두 했다. 날이 갈수록 독립운동의 조직력이 확대되고 일제의 타격이 커져감에 따라 이미 일제의 타켓이 된 양세봉과 그의 가족 모두를 살해하라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양세봉과 일가족들은 거주지였던 신빈을 떠나 양씨 성을 김씨로 고치고 청원현 소산성자로 이주를 했다.(참고자료: 國民府朝鮮革命軍의 獨立運動回顧 桂基苹 419p) 그 후 소산성자에서 양시봉은 김성삼 이란 지주의 소작료를 가꾸면서 온 집안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몇 년 후 김성삼이 청원거리에 정미소를 경영하자 그곳에서 억척스럽게 일을 하면서 돈과 양식을 독립군에게 전달, 지원을 했다. 즉 양시봉은 후방에서 독립군을 돕는 일을 하다가 1933년에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국독립당에 입당을 했다. 그의 독립당 입당을 도운 사람은 만주 산성진 조선족중학교 교장인 김소묵 이었다. 양시봉은 독립당에 가입 후 줄곧 비밀리에 혁명 활동을 했다.
이때 시봉의 아내인 김화순도 양씨 전 가족을 이끌면서 온갖 고생을 했다. 그녀는 1910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후 일찍 양친부모를 여의고 13세에 양씨 가문에 셋째 며느리로 들어 온 후 그때부터 식솔 13명이 되는 큰 집안의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그때 양세봉은 이미 독립군에 참가를 했지만 세봉의 아내인 윤재순은 신체가 너무 허약해 그녀가 모든 일을 했고 특히 독립군들이 두고 간 옷과 양말 등을 빨고 깁는 일과 독립군들이 빼앗아 온 총을 감추는 일, 그리고 부상자들을 피신 시키는 일은 김화순이 모두 했다.
그녀는 시집을 와서부터 일본놈, 한간, 마적들의 시달림으로 하루도 편하게 살수 없었고 일본 놈들이 마을에 온다는 소식만 들으면 한밤중에도 산속으로 피신을 해야 했고 숱한 아이들을 건사해야 했다. 당시 지방의 마적 떼는 오직 양씨 가문의 사내애들만 잡아 인질로 삼았는데 그 목적은 식량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1931년 그녀가 22살 때 일본군이 양씨가족을 멸족시키라는 지시를 받고 들이닥치자 피신을 하면서 양세봉의 12세 딸과 자기 아이를 업고 그네터를 지나다가 일본군의 비행기 폭격으로 양세봉의 딸은 즉사를 하고 자신도 두 다리에 수많은 파편들을 박혀야 했다.
해방후에는 독립운동 미명으로 1년 수감생활
중국 문화대혁명때는 감금과 고문에 시달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양세봉 장군이 독립군 요원들을 이끌고 집에 들리면 햇밥도 지어주고 돼지도 잡아 따듯이 대접을 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을 맞아 모두가 기쁨을 맛보는데 양시봉 가족들은 불행하게도 양시봉이 한국독립당 당원이고 독립운동 민족주의 분자라는 미명으로 양시봉은 청원감옥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감옥에서 변소청소 등 온갖 궂은 일로 괴로움과 학대를 받았으며 가족들은 마을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 후 무순시와 청원현에서 공작대가 내려와 양시봉을 석방 시켰다.
1970년, 문화대혁명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양시봉은 3개월간 감금이 돼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 당시 그의 등에는 ‘반혁명분자’라는 글자를 붙이고 마을을 돌면서 조리돌림을 당했는데 그 광경을 본 일부 악당들은 시봉을 석가래로 또는 몽둥이로 때려서 목의 핏줄이 터져 온 몸이 상처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돼 거의 반죽음의 상태로 귀가를 해야 했다. 그때 시봉은 원래 살던 집도 정부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고 고농인 최태화가 살던 오막살이 단칸방으로 옮겨 살아야 했고 집에 있던 가재도구까지 모두 가져가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다.
양시봉의 아내와 자식들은 생산대 에서 나가서 일을 했지만 임금은 남의 절반밖에 주지를 않았다. 설상가상 최 씨의 집에서 7개월간을 사는 사이에 시봉의 며느리가 해산을 했지만 아래를 걸칠 이불도 없었다. 이때 마침 마을의 마음씨 고운 한족 여인이 마대를 얻어 줘 그 마대로 몇 달 동안 신세를 졌다고 한다. 그처럼 해방 후에도 시봉은 온갖 중국정부의 운동 때 마다 고초와 시달림을 받다가 뇌혈전 으로 1979년 9월 9일,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임종 시 가족들에게 “나는 민족한테 한 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다. 나도 민족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유언을 했는데 그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마지막 운명을 하는 그 순간까지 이 한마디를 외쳤을까? 아마도 한이 어름덩어리처럼 가슴에 응고가 된 채 저세상으로 떠난 양시봉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그의 가족들은 눈물 보다도 더 답답한 가슴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때문에 이제라도 그가 독립군 활동을 인정 받는 것이 그가 구천에서 미소를 지을 수 있다고 본다. 양의복 씨는 끝으로 기자에게 “우리 어머니와 큰 어머니가 함께 찍은 사진과 또 큰어머니와 김일성 주석이 함께 찍은 사진도 보여 드리겠다”면서 “현재 보훈처에서는 중국 대련에 살고 있는 오빠인 양의관을 좋지 않게 보고 있는데 그것은 오빠가 수차례 보훈처에 찾아가 도둑맞은 훈장을 돌려달라고 너무도 그들과 다투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유골은 모시지 못한 허묘이다. 국내에 유족이 없어 다른 묘비와는 달리 '공훈판'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게 특징이다.양세봉 장군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릉을 조성한 유일한 인물이다.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독립운동 단체들과 역사학계는 반발했다.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을 들고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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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ocutnews.co.kr/news/4038229#csidxa1a6357ba24b7caac6b1519bf162c78 유골은 모시지 못한 허묘이다. 국내에 유족이 없어 다른 묘비와는 달리 '공훈판'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게 특징이다.양세봉 장군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모두 릉을 조성한 유일한 인물이다.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 장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독립운동 단체들과 역사학계는 반발했다. "총칼 한번 안 잡아본 정치인에게는 일등공훈(대한민국장)을 주면서, 평생 총칼을 들고 싸운 양세봉 장군에게는 3등훈장(독립장)을 수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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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세봉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