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 행하기(눅 11:27-28)
* 오늘 본문의 첫 절은 엘리사벳이 예수를 수태한 마리아를 보고 찬양한 내용과 유사하다.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이 구절을 마리아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라고 여기기도 한다. 예수가 타락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 귀신을 예로 들어 설명한 뒤 누군지 모르는 한 여인이 큰 소리로 마리아를 찬양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예수의 달변(達辯)에 감탄한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배후에 있는 신적인 권위를 발견했기 때문에, 예수를 찬양하기 위해 소리 높여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찬양했을 것이다.
* 그런데 예수는 여인의 찬사에 대해 아무 평가를 하지 않는다.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말한다. 사실상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여인이 생각하듯 하는 일반적인 행복-우리가 요즘 자주 쓰는 '소확행'-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녀의 아들 예수가 가는 길은 가난하더라도 오순도순 서로를 보듬어주며 사는 일반적인 가정의 행복과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예수가 여인의 말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학자들은 예수의 반응이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깝다고 해석한다.
* 이어지는 구절은 학자들의 해석의 근거가 된다. 다만 예수는 행복의 다른 기준을 제시함으로서 마리아가 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물론 이 말은 마리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군중과 기록된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예수가 생각하는 복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나 강해가 아니라 성서에 기록된 내용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성서를 "읽고"가 아니라 "듣고"라고 기록한 이유는 뭘까?
* 성서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예수 당시의 문맹률이 97% 정도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람어를 사용했고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귀족이나 종교지도자들 정도만이 성서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중해 각지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들을 위한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70인역)되기도 했지만 그 번역본을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도 역시 극소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당에 모여 성서를 읽은 것이 아니라 사제가 읽어주는 내용을 들었던 것이다. 스퐁 주교의 <마태복음>을 보면 당시 정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 유대인들의 회당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는 그들이 모세의 책들이라고 부르는 다섯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 다섯 책은 유대 경전 중에서 "가장 거룩한 것(holy of holies)"이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 예배에서 1년 동안 토라를 완독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기간 동안 토라를 완독한다는 것은 안식일마다 토라를 읽는 시간이 최소한 3~40분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이 토라 읽기는 새해의 첫 안식일에 창세기를 읽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해의 마지막 안식일에 신명기를 읽는 것으로 마쳐졌다. 그것은 법궤에 보관된 거룩한 문서를 엄숙한 예식에 따라 꺼내 읽는 것이었다.
*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전통적 회당에서 행해지던 1년 주기의 토라 읽기를 3년 주기로 대체하기도 했다.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단서에 따르면, 회당예배에서는 율법서를 낭독한 뒤 "예언서"를 읽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 등 두 종류의 예언서가 있었다. 회당에서는 이 중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소예언서(12권을 한 개의 두루마리에 기록) 등 후기 예언서 4권을 4년 주기로 읽는 경향이 있었다. 네 권의 후기 예언서들은 서로 비슷한 분량이 되며, 안식일마다 한 장씩 읽으면 1년에 1권씩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우리는 세종대왕 덕분에 읽고 쓰는 일에 불편함이 없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한자만 사용되던 당시에 문맹률이 엄청 놓았던 것(양반 2% 중인 일부 포함해야 10%)을 생각하면 예수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듣고"라는 단어를 현대어로 바꾸면 "듣거나 읽고"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뜻인 것이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 중 누가만이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바로 앞의 내용은 그대로 기록하면서 이후의 정황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다.
* 마태복음은 예수가 타락한 이스라엘의 상황에 대해 귀신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을 때 예수의 가족이 찾아온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때 예수는 "누가 나의 어머니며,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라고 물은 후 제자들을 가리키며 "보아라,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도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 강조된다. 즉 상황은 다르지만 마태나 누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알고 따르는 일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 약자였던 유대인들이 지금은 강자의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을 괴롭히는 등 문제의 여지가 있지만 수천 년 동안 7개 제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고 급기야 1800년 이상 유랑하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토라와 토라에 대한 에스라의 해설(미드라쉬)로부터 시작해 수백년 동안 집대성된 탈무드였다.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은 후 ‘책의 민족’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성서와 탈무드를 평생 읽고 연구하며 그 가르침을 따르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성전(聖殿)의 민족이 성전(聖典)의 민족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성서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에게 더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으로 인해 유대의 휴머니즘과 철학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알려졌다.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성서를 플라톤 철학으로 해석했다. 플라톤에 심취했던 필론은 유대 신앙을 그리스 철학과 융합한 최초의 학자였다. 이후 바울이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지중해 지역 사람들은 이미 <구약 성경>을 접했기 때문에 그의 교리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 우리가 흔히 읽는 <탈무드>는 다이제스트판이지만 탈무드의 형성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구전된 토라를 모아 편집한 것이 미쉬나(반복)이고, 이 미쉬나가 탈무드의 본문이며, 미쉬나 본문에 대해 논쟁하고 설명한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 게마라(완성)이다. 처음에는 게마라만 탈무드로 인정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쉬나와 게마라를 합쳐 탈무드라 부르게 됐다. 탈무드는 '학자', '가르침', '공부'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탈무드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유머와 지혜가 담긴 것으로 알려진 이 책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 남유다가 멸망한 이후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유대인들은 구전된 토라를 편집하고 예언서와 문학서 등을 쓰면서 구약으로 분류되는 성서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때 탈무드의 기초도 마련됐고 예루살렘 성전이 마지막으로 무너진 후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은 신약으로 분류되는 성서를 집필한 반면 예수를 따르지 않던 유대인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탈무드를 완성해나갔다. 예수 당시 97%에 달했던 유대인들의 문맹률은 급속도로 낮아졌고 아랍인들로부터 '책의 민족'이라고 인정을 받을 만큼 토라와 탈무드를 깊이 연구했다.
* 반면 기독교는 중세까지 그리스어와 라틴어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교인들이 거의 없었다. 가톨릭에서는 교인들이 글을 읽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성경만 읽거나, 교인들이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왜곡된 교리를 전파할 것을 두려워해서 성서 읽는 것을 금지할 정도였다. 그 결과 중세 가톨릭 교인의 문맹률이 98%나 될 정도였다. 마틴 루터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던 것이고 이는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게 전해진 성서를 우리는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읽고 묵상하는가.
* 한국인은 한국인이 되기 위해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유대인은 유대인이 되기 위해 토라와 탈무드를 공부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일상적인 활동에 받아들여, 유대인의 행동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물들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토라가 종교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유대인의 관심을 과학과 이론의 영역으로 확장시켰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민족주의적 유대인을 만들었다면, <탈무드>는 어디에서나 적응 가능한 유대인을 창조했다는 말이다.
*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말은 모르지기 신앙인이라면 성서는 당연히 열심히 읽어야 하고, 성서의 세계에만 갇히지 않기 위해 세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서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성서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올바른 신앙인은 성서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성서를 읽어야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성서 이외의 양서들을 읽으면서 시대적 한계에 의해 성서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진리에 대한 수많은 기록들을 섭렵해야 한다. 성서는 특수계시, 신문은 일반계시를 상징하는 말인데, 유대인들은 탈무드인 것처럼 신문을 다른 어떤 책으로 바꿔도 상관없을 것이다. 두 가지 계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깨닫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1주일에 1시간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리는 이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지만 이 시간 이상의 노력의 필요하다.
* 지난 금요일이 한글날이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한글로 기록된 성서와 수많은 양서들을 읽으면서 이 아름답고 청명한 가을을 보내시기 바란다. 코로나19로 인해 불편하고 힘든 일들이 많지만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을하늘 공활한데"라는 애국가의 가사에 걸맞는 한국의 가을 하늘을 되찾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말했다. 이 두 말씀을 깊이 기억하며 살아가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