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상황일지 --- (5월 민주화운동 기간 / 이후) ---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신서, 발간 1997.5.10.)
자료 출처 : 5.18특파원 리포트 http://bille.pe.kr/5.18.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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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민주화 운동 기간
5월 민주화 운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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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21:40 비상 국무 회의, 비상 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3:00 민주 인사 등 예비 검속
- 23:40 비상 계엄 선포 지역 24시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
▶18일
- 00:05 광주 지역 민주 인사 등 연행
- 01:00 광주 일원 공수 부대 투입
- 02:00 계엄군이 전남대, 조선대, 광주 교대 등을 점령하고 학생 등 112명 체포
- 08:00 전남대 등 대학교 휴교령(9월 10일까지)
- 09:00 전남대생 등교 시작
- 10:00 전남대 정문 앞에서 시위
- 10:20 전남대생 500명이 공수부대와 투석전 충돌. 전남대생 계엄철폐를 외치며 도청으로 진출
- 10:30 전남대 후문에서 계엄군이 시민 연행
- 10:50 광주역 앞 전남대생 200여 명 집결
- 11:00 시위대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 연좌 시위. 시위대 충장로 파출소 앞 대치
- 11:30 시위대 가톨릭센터 앞에서 대치
- 11:49 한일 은행 앞 시위대 600여 명이 가톨릭 센터로 진출
- 11:50 한일 은행 앞 시위대와 가톨릭 센터 앞 시위대가 합류. '비상계엄 해제하라' 플래카드 들고 시위
- 13:00 공수부대의 시내 투입. 수창초등학교 앞에 공수부대 차량 20여대 집결
- 13:20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들이 페퍼포그차 1대 불지름
- 14:42 도청 앞, 금남로 일대 1,500여 명, 충장로 일대 1,600여명의 시위가 격렬해짐. 경찰이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시위대 진압 명령 수령
- 15:00 7공수가 시내 진압 작전 실시, 가톨릭 센터(33대대), 충장로(33대대), 시위군중 337명 체포, 공중에서 헬리콥터 3대 선회
- 15:30 충장로와 광주 공원 일대 300~600명 단위 시위대 운집
- 16:00 파출소 파괴 등 적극 공세로 시위 양상 전환
- 17:00 경찰 20~30명이 시위대에 포로로 붙잡힘
- 18:00 계림동 일대의 치열한 육박전
- 20:15 100여명의 시위대가 한일 은행 부근에 모였으나 별다른 충돌 없었음
- 20:20 노동청 앞 등 전 시가지 2,000여명 산발적 시위
▶19일
- 00:05~05:20 11특전여단 광주 도착, 진압군 재편성
- 08:00 계엄사, 민주 인사 및 학생 549명 검거(전국 통계)
- 아침 금남로에 교통 완전 차단
- 09:00 금남로에 군중들 운집 시작
- 09:50 33대대 시위 진압 투입
- 10:00 헬리콥터 수천명의 시위 군중에게 해산 종용. 대동고생 교내 시위
- 10:20 금남로, 경찰 및 공수부대 진압에 화염병으로 맞섬
- 10:40 충장로, 광주은행 앞, 도청 앞, 광남로 사거리 등 다발적 시위. 시위 광주시대 전역으로 확산. 계엄군이 장갑차 4대, 군용 트럭 30여대로 시위대 포위
- 10:52 공수부대가 군용 트럭 1대로 시위대 연행
- 11:00 공수부대가 시위 잔압에 탱크 동원. 공수부대 잔혹한 구타, 연행, 총검 사용. 광주 시내 학교 수업 중단 귀가 조치
- 12:00 수업 받던 학원생 연행
- 13:00~15:00 가톨릭 센터 앞 시위
- 11:30~13:00 시위대 107명 연행
- 14:00 계엄군이 현행자를 트럭에 싣고 조선대, 전남대 운동장을 감
- 14:50 일반 시민들의 합류로 시위대 급증. 계엄군이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 사용
- 15:15 가톨릭 센터 내 CBS 점거 파괴
- 15:30 결렬해진 시위대 광주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 시위대가 광주 MBC 건물 앞에 세워진 승용차 5대 방화
- 15:55 35대대 도청에서 금남로 쪽으로 시위 진압
- 16:00 고등학생들까지 투쟁 대열에 합류
- 16:50 최초의 발포. 광주고와 계림 파출소 사이 동원 빌딩 앞에서 고장난 장갑차 1대 발견, 시위대 150여 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
- 17:30 광주일고 앞에서 시위대 40여 명 연행. 시외버스공용 터미널 앞에서 500여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광주역 앞에서 500여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가톨릭 센터 부근에서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2000여 명 재집결
- 17:40 시외버스공용 터미널 앞 시위대 완전 분산. 비가 내리기 시작
- 18:00 시외버스공용 터미널 주차장에서 시체 7~8구 목격됨. 광주공원에서 시위대 수천명 '전두환 타도'외침
- 18:30 광주공원에서 특전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혀 원산 폭격 기합을 줌
- 19:20 시외버스공용 터미널 에서 시위하던 2.000여명 시위대 해산됨
- 19:40 광주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1,000명이 시위하다 경남 번호판의 화물 트럭 방화
- 19:45 시위대가 유동에 세워진 대형 아치 방화
- 20:00 시위대 누문동 파출소 점거. 임동 파출소 방화, 전소
- 21:00 통행금지에도 불구하고 시위 지속
- 22:00 광주 곳곳의 시위대가 역전 파출소 점거, 북구청사 유리 파손, 양동 파출소 파괴
- 23?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20일
- 01:00 제7여단 계엄군이 서로의 지역대를 편성
- 04:00 시민궐기 호소문 살포됨
- 07:20 서2동 전남 주조장 공터에서 월산 2동 김행부(35)가 대검으로 난자, 살해된 변사체로 발견됨
- 오전 대체로 소강(비가 내림).
- 09:30 계엄군이 증원 배치, 상가는 절반 가량 철시
- 10:00 광주 시내 주요 지점마다 집총 경계
- 10:20 금남로 3가에서 30여 명의 젊은 남녀가 붙잡혀 속 옷만 걸친 상태로 기합 받음
- 12:50 계엄군 출동 대기
- 14:20 서방 삼거리에서 공수부대가 화염 방사기 사용, 사망자 및 부상자 발생. 광주역 부근 택시기사 20여 명 조직적 대응책 논의. 금남로 일대 제3공수 11대대가 15만 군중에 포위 당함
- 14:45 계림동 파출소 앞에서 시위대와 계엄군이 대치. 무등경기장 앞에 영업용 택시 집결
- 15:55 금남로에 수천 군중 집결
- 16:18 가톨릭센터 앞 시위대 증가
- 16:20 금남로, 광주고, 충장로 등지에서 시위 확산. 도청으로 연결된 6개 방면 도로에 시위대가 밀어닥침
- 17:00 계엄군 최루탄을 쏘며 시위 진압
- 17:10 시위대가 충금 지하상가에서 계엄 해제를 외치며 시위
- 17:50 충장로에서 시위대가 육탄으로 경찰과 충돌.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은 비켜달라'며 시위대가 경찰과 협상 시도
- 18:00 택시기사 200여 명 무등경기장 집결
- 18:20 택시기사 시위 참여, 택시 100여 대가 3줄로 광주역 쪽으로 진출
- 18:40 전남대 앞 500미터 지점에서 계엄군 1명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사망. 광주역 쪽에서 택시와 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시외버스 공용 터미널로 집결
- 19:00 산수 오거리에서 광주역으로 시위대 이동, 계엄군과 교전
- 19:15 광주고속 앞에 택시 50여 대 집결
- 19:20 금남로 차량 시위, 버스 6대 앞세우고 도청 향해 진격
- 19:45 도청 앞 광장의 공수부대가 시위대에 포위됨. 시위대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으로 진격
- 20:00 시위대 MBC방송국 점거. 계엄군이 체포된 시위대를 도청으로 연행. 시위대가 소방서 점거. 두 대의 소방차 도청 앞 600미터 지점까지 돌진, 계림동 부근의 시위 군중이 수만 명으로 증가(도청 진격). 전남대 부속병원 앞 시위대 만여 명으로 증가(도청 진격)
- 20:10 시위대 MBC에 화염병 투척, 셔터 파괴. 계엄군이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시위대에 화학탄 발사
- 20:50 시위 군중 시청 점령
- 21:00 도청 차고 방화. 외곽지역 주유소에서 화염병 제작. 노동청 앞에서 시위 진압 경찰 4명이 버스에 치여 사망
- 21:30 시위대가 광주역 포위. 2,000여 명 횃불 시위
- 21:40 MBC전소
- 22:00 10만 명 이상의 시위 군중이 광주 시내 모든 거리에 운집. 광주역에 투입된 31사단 병력 퇴각. 금남로에서 3공수 11대대 고립. KBS앞 3공수 15대대 12대대, 2만 시위대와 대치. 전남대 입구에서 100대의 차량 및 시위대 가 3공수 16대대와 대치. 광주시청, 13대대 1만여 명 시위대와 대치. 양동 복개 상가 2,30명 계엄군 시위대에 포위됨
▶21일
- 00:10 대규모 시위가 계속됨. 대형 스피커를 동원하여 여학생이 구호 외치며 시위 주도
- 00:35 노동청쪽 2만 여 군중 경찰 저지선에서 격돌
- 00:45 시위대가 광주세무서 방화
- 01:00 31사단 화염 방사기 소대 출동
- 02:13 시외 전화 불통으로 외부와의 연락 두절. 광주지역 일반 전화선을 지시에 의거 단선 조치
- 02:30 계엄군 20사단 사령부 및 62연대 용산역 출발
- 04:00 광주역에서 계엄군 철수
- 05:00 KBS방송국 방화
- 05:50 광주역에서 출발한 시위대 1,000여 명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연좌 농성
- 아침 계엄사령부 최초로 광주에서 유혈 충돌 공식 발표
- 08:00 시위대 당국과 협상 시도
- 08:45 시위대가 20사단 병력의 광주 진입을 저지. 광주시 진입 및 타지역으로의 이동 봉쇄위한 작전
- 08:50 시위대 광주교도소 기습. 자진 철수
- 08:58 20사단 사령부 송정리에 도착
- 09:00 시위대 아세아 자동차 공장 진입. 대형버스 22대, 장갑차 3대, 군용 트럭 33대, 민간트럭 20대를 몰고 나와 도청으로 진격하거나 외곽에서 도청으로 시민들 수송. 시위대가 금남로 4가에 집결하여 군인의 과잉 진압 사과 요구, 현정부 규탄. 뉴욕 타임스 특파원 심재훈 기자와 르몽드의 필립 퐁스 기자가 광주에 도착
- 09:20 한국은행과 가톨릭센터 사이에서 5,000명 이상의 군중이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와 마이크로'계엄군은 사체 인도하라'고 주장
- 09:49 시민군 장갑차를 이용해 도청 공격 시도
- 09:50 시민 대표와 장형태 도지사의 협상
- 10:00 각종 차량에 '***은 물러가라''*** 석방하라'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 붙이고 다님. 시위군중이 계속 늘어나 10만 이상 운집
- 10:30 군헬리콥터 4대가 도청, 조선대, 전남대에 이착륙하며 도청 지하실에 모아놓은 시체와 진압무기, 주요기밀 서류 공수 시작. 계엄사령관 담화문 발표
- 10:48 군헬리콥터에서 '공수병력 철수시키겠다'방송. 전남도지사, 광주시장도 헬리콥터에서 방송으로 시민 설득
- 10:56 계엄군 서울로부터 코와 귀를 자극하는 CS액 수송
- 11:00 시위군중 계속 집결
- 11:00~12:00 동별로 주민들이 시위대에게 음식 제공
- 11:12 금남로에 시민 30만명 육박
- 11:30 전남지역 학생총연맹 명의로 '오후 2시 도청앞에서 도민 궐기 대회를 갖자'는 전단 배포. "전남대생은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조선대생은 계림파출소, 서강실업과 간호대는MBC, 고교생은 사수오거리, 시민은 도청으로 집결하라"
- 11:50 가톨릭센터 앞에 '때려잡자 ***","물러가라 ***", "사라져라 ***", "비상계엄 해제하라", "칼부림이 웬말이냐", "너와 나 형제 지방색 배격" 등의 구호가 적힌 벽보 부착
- 12:00 12시까지 퇴각하겠다던 계엄군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분노한 시민들이 차량을 앞세우고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분수대까지 퇴각, 최초의 집단 발포. 시민들은 공포탄인 줄 알았으나 도로의 시민들이 쓰러짐. 부상자를 구하려는 시민들에게까지 사격. 계엄군은 도청과 수협, 전일빌딜 옥상에서 정확한 조준 사격을 함. 전남대 정문에서도 발포
- 12:10 시위대의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 4-5명이 쓰러짐. 계엄군은 살상을 예고하듯 분수대 앞에 횡대로 도열
- 12:30 분노한 시민, 각목을 든 채 도청을 향해 돌격. 비무장 시민에게 발포. 시위대 맨 앞의 503벤츠 고속버스가 군경의 저지선으로 돌격하자 계엄군 쪽에서 LMG기관총 난사, 차에 탄 시위대 20여 명 살상당함
- 12:40 버스 4대로 화순에 도착한 시위대가 중앙 파출소에 방화, 화순 주민들과 합세하여 무기 탈취
- 12:43 도청 공격을 위해 트럭 2대가 돌격
- 12:45 시민에게 본격 발포(전교사 작전일지 80-4호). 광주 북쪽 3개 지역 봉쇄
- 12:55 도청 앞 YMCA에서 계엄군 난사, 시민 수십 명 살상. 분수대 앞 계엄군은 횡대로 앉아 금남로 쪽을 향해 거총 자세
- 12:58 광성 여객 버스 2대가 도청으로 진격, 공수부대 발포로 운전사 사망.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진격, 집중사격을 받았으나 학동 쪽으로 빠져나감.
- 13:00 해남읍에 시위차량 도착,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해남 교육청 앞에 집결, 성토대회를 갖고 시가 행진. 시위대 카빈300정으로 무장, 전남대 의대와 경찰쪽을 진출. 도경 쪽에 포위된 군경이 발포 시작, 옥상마다 군인이 올라가 발포. 광산 하남파출소 카빈 9정 탈취
- 13:30 도청 주변에서 계엄군의 사격으로 시위대 및 구경하던 시민들 사망 및 부상 속출
- 13:40 군용 헬리콥터 1대 도청 앞 광장에 착륙, 일반 계엄군 9명 태우고 이륙, 도청 앞 광장 임시 헬리포트가 되어 군용기와 경찰 헬리콥터가 수시로 이착륙, 공수부대로 부상자와 중요 문서 이송
- 13:50 전남도청에서 도지사가 시위 군중에게 요구 사항을 승낙할 테니 해산하라고 방송
- 13:55 '3시까지 연행자를 석방한다'고 군용 헬리콥터에서 선무 방송
- 14:00 월산동 로타리와 전남 도청 부근에서 계엄군이 헬리콥터 기총 소사, 시우대가 총상 환자를 병원으로 후송. 시위대가 무기 탈취를 위해 시외지역의 남평 지서, 나주 경찰서, 무안 현경면 지서, 무안 청계면 지서, 나주 금성동 파출소 등을 습격
- 14:20 시위대가 비아, 영광, 나주, 영산포, 무안, 영암, 화순, 장성 등지의 무기고와 화약고에서 카빈, M1소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등을 탈취하여 무장. 시위대가 광주 효덕동 파출소 무기 탈취. 시위대가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원을 잡아 두들겨 패자 공수 부대가 발포
- 14/53 무장 시민군과 계엄군의 무력 충돌. 남평 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무장 시위대 광주 은행 네거리 도착
- 15:00 시민군, 저공 비행 헬리콥터에 사격. 계엄사의 연행자 석방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시민들 더욱 격분. 광주 시내 종합 병원, 개인병원 총상 환자로 가득. 광주 공원, 범원, 유동 삼거리에서 무기 지급. 광주 시청 2층에서 계엄군 발포
- 15:16 시위대가 화순에서 탈취한 무기를 학동에서 시민들에게 지급
- 15:20 시민 1,000여 명 무장. 도청 앞에서 무장 시민군이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임
- 16:00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교전
- 16:30 광주지역 공수부대 철수 명령
- 16:40 전남대 주둔 제3여단에 교도소 사수 명령. 도청에 있던 공수 부대가 11여단, 35대대 순으로 철수
- 16:43 전남대 부속 병원 옥상에 기관총(LMG) 2정 설치, 본격적인 총격전 대비
- 16:45 전남방직, 일신방직, 연초제도창 무기고 탈취
- 17:00 시민군 총기교육 후 지역 방위대 편성. 광주공원 광장에서 특공대 편성. 헌혈하고 돌아가던 여학생(박금희)이 헬리콥터에서 쏜 총에 맞아 즉사. 도청에 남은 계엄군 화순 주남 마을 쪽으로 철수
- 17:18 시위대가 화순 광업소에서 차량 1대분의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와서 국민은행 앞 대기
- 18:20 20사단 병력 광주시 외곽에 배치. 남금동 구시청 앞에서 발포
- 18:25 3공수 광주교도소에 도착
- 18:30 35대대 철수 준비
- 18:50 계엄군 광주시 외곽 봉쇄. 광주와 목포간 도로 차단 위해 송암동에 병력 투입, 송정리 확보, 톨게이트 봉쇄
- 19:00 광주역에서 시청 쪽으로 군부대 트럭 질주(철수). 남평과 효천간 도로 부근 야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 집단 발포
- 19:50 광주역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격전을 벌임
- 21:00 시민군, 광주 목포간 도로 입구에서 경계근무. 학운동 지역방위대 편성
- 21:15 백운동지역 자체경비대 편성
- 22:11 효천지역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
- 24:00 외신 기자, AP통신 테리 앤더슨, 타인 사진기자 로빈 모이어 광주 도착
▶22일
- 00:40 교도소 앞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
- 04:55 계엄군 증원 병력(20사단 60연대) 광주 도착
- 05:00 남평에서 매복 중인 겨엄군의 사격으로 시위대 1명 사망, 3명 부상
- 07:00 광천동 공단 입구에 지역방위대 배치
- 07:30 전남대 교정에서 암매장된 고교생 시체 발견
- 아침 뉴욕타임스와 르몽드가 1면 머릿기사로 광주 상황 보도, 처음으로 광주 소식이 세계에 알려짐
- 08:10 도청 간부 수습 대책 논의
- 08:20 광주시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이 시민 탑승 차량에 발포
- 09:20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격전
- 09:30 계엄군이 피난 행렬에 집중 사격
- 10:00 문화동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
- 10:50 시민들이 도청 앞 궐기대회를 준비하면서 국무총리가 도착하길 기다림
- 12:00 도청 앞 5만 시민 궐기대회 개최. '5.18수습대책위원회'결성. 전남일보 현관에서 무기 회수
- 12:00 수습위원, 계엄사 방문 협상 시도
- 12:30 종합병원에 사망자 인상착의 적은 벽보 부착
- 13:00 무등도서관 앞에서 총격으로 시민 1명 사망
- 14:00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 시민궐기대회 열림
- 14:30 광주시장 비행기에서 호소전단 살포
- 15:00 도청 앞 시민궐기대회 개최. 매일 오후 3시와 9시 2차례 도청 앞 광장에서 궐기 대회 개최 결정
- 15:18 관위에 태극기를 덮은 시체 18구 도청 앞 분수대에 안치, 추도식 거행
- 16:00 부상자를 위한 모금 운동 시작
- 16:10 영암 미암지서 무기고 습격
- 16:30 영암지역에서 무기 회수 시작
- 17:00 계암사와의 협상 결과 보고. 국군 광주 통합병원 입구에서 병원 통로를 확보하려던 62연대 2대대와 시민군 교전, 시민 3명 사망, 10명 부상, 25명 연행
- 17:55 전남북 계엄분소, 연행 시위대 848명 석방
- 18:00 학생수습위원회 구성. 도청 상황실에서 증명서 발급. 쌍촌아파트 교전, 시민군 4명 및 계엄군 1명 중상
- 18:40 연암, 월야 무기고 습격
- 19:00 계엄사령부, 광수사태에 대해 발표문 발표
- 19:10 사망자 56명을 입관한 후 도청 앞 광장에 놓고 추도식
- 20:00 계엄군이 담양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시위 차량의 바퀴를 쏘아 멈추게한 후 집단 발포. 도청 앞 광장에 모였던 대부분의 청년들이 도청에 남아 치안 담당
- 22:00 무기 회수를 둘러싼 시민군 내부 대립 심화
▶23일
- 00:40 지원동 숙실마을(조선대 뒷산)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총격전
- 01:00 해남 우슬재에서 시위대와 계엄군 교전, 시위대 20명 이상 사망, 다수 부상
- 02:00 충정작전 계획 건의
- 06:00 광주시 안정 회복. 남녀 고교생 700명 시내 전역 청소. 장례반, 총기회수반, 차량 통제반으로 구분. 도청 중심으로 대자보, '민주시민강령'선포.(1.시민은 시민군을 믿고 적극 협조합시다. 2.시민군은 위장된 계엄군 및 불순분자를 주의합시다. 3. 질서회복에 힘씁시다. 4. 평소 생활로 복귀합시다.)
- 06:10 해남 우슬재에서 총격
- 08:00 교도소 앞 총격
- 09:00 녹두서점에 모인 교수 학생 시민궐기대회 계획
- 09:35 도청에 학생수습위원회 본부설치
- 10:00 수습대책위원회 조직 개편
- 10:30 남녀 고교생 100여 명이 플래카드 앞세우고 시위
- 11:00 부녀자들이 시위대에 식사 공급 시작
- 11:50 민간인으로 위장한 공수부대원 2명 체포. 학생들이 간첩용의자 연행
- 12:00 800여 정 총기 회수, 차량 통제반 차량 단속
- 13:00 계엄사 연행 학생 34명 석방
- 13:30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 '미국은 5.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발언
- 14:00 주남마을 양민학살, 18명 사망. 수습위원 10명, 무기 100정 반납
- 14:10 영암읍 입구에서 시위대가 시민군에게 실탄 지급
- 15:00 제1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장례준비 모금운동 전개 100만 원 대책위에 전달.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총격전. 계엄사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광주시 전역에 살포
- 16:00 지원동 민가에 계엄군 난입. 계엄군이 피난가는 시민을 향해 난사. 학운동 자위대 무기 반납하고 해산
- 저녁 투사회보 제6호 배포
- 19:00 교도소 앞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교전
- 21:00 목포역 시국 성토대회를 갖고, 5만여 명이 횃불시위
▶24일
- 새벽 수습위 위원 4명이 외곽지역 돌아다니며 무기 회수
- 08:00 광주시내 생필품 품절. 무기 자진 반납 시한 12:00까지 연장
- 09:00 충정작전을 위한 계엄군 배치
- 09:25 학동 대치지역에서 총격전
- 10:30 계엄군 오인 사격. 호남고속도로상에서 31사단 96연대 3대대와 기갑학교 병력의 오인 사격으로 5명 사망, 11명 중상, 11명 경상
- 10:35 특전사령관 광주교도소 방문
- 12:00 고등학생 3명을 사살한 후 암매장했다는 계엄군간의 무선 교신을 도청
- 13:00 계엄사, 무기 반납 시한을 18:00로 연장
- 14:05 계엄군의 오인사격. 표천역 전방 1킬로미터 지점에서 11공수와 보병학교 병력의 오인 사격으로 9명 사망, 33명 부상. 진월, 송암동 양민학살, 초등학생 등 사망
- 15:00 수백의 공수부대원 송정리 비행장에서 이동. 송정리에서도 헬리콥터 기총 소사.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열림
- 16:30 도청 앞 상무관에 미확인 시체 40여구 안치
- 17:30 궐기대회 준비를 위한 집행부 구성
- 18:00 기동순찰대 활동
- 21:00 민간인으로 위장한 계엄군 시내 투입
▶25일
- 08:00 조작된 독침 사건 발생
- 09:50 시위차량으로 외각지역 주민, 도청으로 수송
- 11:00 학생 청년수습위, 민주인사 의견 수렴위한 회의 개최
- 11:05 목사들이 초교파적인 모금 운동, 시체 12구로 늘어남
- 12:35 목포, 비상구국기도회 열림
- 13:00 국군 광주통합병원으로부터 각 병원에 산소 공급
- 13?35 피난가던 청년 2명이 산속에서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
- 14:00 남동 성당 수습위, 도청으로 합류
- 14:30 계엄사 탄약검사반 초청 투입
- 15:00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궐기대회 후 검정 리본 착용, 가두시위
- 19:00 광주시 영세민에게 가구당 5,000원씩 지급. 정부미 6,000가마 시장에 방출
- 22:00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
- 23:00 3개조의 취사부 편성
▶26일
- 04:00 외곽지역 주둔 계엄군 광주 진입
- 15:00 시민수습대책위'17명이 총알받이로 나가 계엄군을 막자'고 결의, 진입현장에서 탱크 앞에 드러누워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
- 07:20 계엄군의 시내 진입을 알리는 방송
- 09:00 수습위의 계엄분소 방문, 4시간 30분 동안 대화
- 11:30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 12:00 기동타격대 조직
- 14:00 광주시장에게 9개항 요구(1일 ㅇ백미 1가마씩 제공하라. 부식 및 연료를 제공하라. 관 40개를 제공하라. 앰뷸런스 1대를 지원하라. 생필품 보급을 원활케 해달라. 치안문제는 경찰이 책임져라. 시내버스를 운행하도록 하라. 사망자 장례는 도민자으로 하라. 장례비를 지원하라)
- 15:00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 '우리는 왜 총을 들게 되었나.'낭독
- 16:00 광주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성용 신부 탈출. 김요셉이 수행
- 19:00 외국인 207명 광주에서 철수
- 20:10 기동타격대 시내 순찰
- 21:00 전교사 문관 도청 잡입, TNT뇌관 불리제거 후 복귀
- 23:00 시민군 병력 배치.(계림국교, 유동삼거리, 덕림산, 전일 빌딩, 전남대부속병원 옥상, 서방시장, 학동, 지원동, 학운동)
▶27일
- 00:00 계엄군 시내 진입(20사단. 상무대병력. 31사단. 7공수. 3공수. 11공수)
- 00:00 시내전화 끊김
- 02:00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가두 방송
- 03:00 계림국교앞 교전
- 03:30 계엄군 광주 전격 기습
- 04:00 31사단 병력 시가지 압축
- 04:30 도청 함락
- 04:00 계엄군이 도청 앞을 완전 포위, 금남로 중심으로 시가전
- 04:40 YWCA격전.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 접전. 헬리콥터로 군방송 시작
- 05:00 계엄분소장 담화 발표. 광주KBS 행진곡과 함께 군의 진입을 알리는 방송
- 05:04 11공수가 관광호텔과 전일빌딩 점령, 무등경기장,광주천변,백운동 장악
- 05:06 7공수 광주공원 완전 점령, 광주시 주요 공공기관 점령
- 05:23 광주시가 계엄군에 완전 점령
- 06:00 KBS,'폭도들은 진압됐다. 시민들은 위험하니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방송. 영어로 외국인에 대한 방송도 함
- 07:30 공무원 근무개시. 시내전화 개통
- 09:00 계엄군 가택수색으로 청년들 연행
- 10:00 국방장관 광주 방문
- 11:00 목포, 제5차 민주헌정수립을 위한 목포시민 궐기 대회
- 18:00 계엄사 2차 발표
- 22:50 목포시민 3,500여 명 횃불 시위
▶28일
- 04시경 시위대 체포, 연행으로 목포 시위 막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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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 6. 일본,도쿄에서 1만여 명 '광주학살 항의시위'
- 6. 6 5.18광주의거 유족회 발족. 정부, 5.18관련 유족과 부상자에게 재해의연금 명목으로 국민성금 모아 8억 1천만 원의 위로금 지급
- 8. 16 최규하 대통령 하야
- 8. 17 김대중 광주사태 내란음모 사형 선고
- 8. 27 전두환 112대 대통령 당선, 9월 1일 취임
- 9. 4 전두환 취임 직후 광주 방문, '앞으로 광주사태 더 이상 거론 말고 상처 치유'
- 10.25 계엄군법회의 광주 사태관련 피고인 선고, 5명 사형, 7명 무기징역
- 12. 9 임종수, 정순철이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1년
- 2. 25 전두환 12대 대통령 당선, 3월 3일 취임
- 3. 3 광주, 부마, 민청 관련자 5,221명 사면, 복권, 감형. 광주사태 관련 피고인 대법 원심 확정, 사형 3명, 무기 7명
- 5,18 망월동 1주기 추도식, 가두 시위
▶1982년
- 3.18 김현장, 문부식이 부산 미문화원 방화
- 5.18 2주년 합동 위령제, 유족회 주관 125명의 넋을 달램. 같은 시각 유족회 주관 합동 위령제를 무산시키기 위해 전남 지역 개발 협의회가 동일한 시각 무등경기장에서 대규모로 광주시민단합대회를 개최
- 7. 전계량 등이 5,18광주민중 항쟁 유가족 협의회 결성
- 8.15 광복절, 김대중사건, 광주관련자 등 1,286명 특사
- 10.12 5.18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단식투쟁을 하다 옥중 사망
- 10. 5.18광주의거부상자회 조직
- 12.15 광주전남 지역개발협의회 창립총회
▶1983년
▶1984년
- 유화국면, 각 대학 '광주학살진상조사위원회'결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광주방문,'화해하라 뜨거운 화해만이 지난 세월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남김
- 5.17 서울 12개 대학, 광주사태 4주년 교내 시위
- 5.18 광주에서 위령제를 지낸 후 금남로 시위, 추모 예배와 미사
▶1985년
- 3. 6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14명 전면해금조치
- 5.10 5.18광주민중혁명희생자 위령탑 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결성(초대회장 홍남순)
- 5.17 전국 80개 대학(서울 30, 지방 50) 38,000여 명 광주 진상 규명 요구 시위
- 5.18 야권, 광주사태 5주년 맞아 진상규명 촉구
- 5,23 낮 12시 5분,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서울 미문화원 2층 도서실을 점거하고 '미국의 사과 요구'
- 6. 광주 최초의 현장보고서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출간
- 7. 윌리엄 글라이스틴,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한국 경찰의 행동이나 그후 숱한 폭력과 초기의 사상자들을 낸 한국군의 특수 부대의 투입에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한국군 특수 부대는 미국이 알지 못한 가운데 투입되었다. 이 점은 정확한 사실이다.'고 발언(1986년 윌리엄 글라이스틴은 그의 논문 '미국이해의 한 특별한 표적'에서 광주문제에 관해 '한국 정부는 미국측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광주 소요사태에 대처했다. 경찰의 힘으로 진압하기 어려워지자 미군 사령관통제를 받지 않는 특전단을 투입 진압작전에 나섰다.'고 발언.
- 8.15 노동자 홍기일(25)이 광주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금남로에서 분신, 22일 사망
- 11.8 제128회 정기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광주통계연보>를 인용하여 5.18당시 사망자 2,000여 명선 주장
▶1986년
- 4. 5.18광주민중항쟁청년동지회 결성
- 5.16 천주교 대주대교구 정평위, 남동성당에서 유족 등 2,000여 명이 미사후 가두 시위
- 5.20 서울대 이동수, 문익환 목사의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재조명'강연이 있은 후 서울대 학생회관 4층에서 '미제 물러가라'며 분신
- 5.27 한신대, 국내 최초로 오산 교정에 '광주사태 희생자 추모비 건립'
▶1987년
- 1.14 서울대 박종철 경찰고문 사망
- 4.13 전두환 호헌조치
- 5. 1 통일민주당 창당(총재 김영삼)
- 5.18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평위, 가톨릭센터에서'5.18광주의거 추모 사진전'
- 6. 9 연세대 학생 이한열 시위 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부상. 7월 5일 사망. 광주 망월묘역에 안장
- 6.10 야권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6.10 시민항쟁
- 6.29 노태우 민정당 대표, 6.29선언. 시국 수습 8개항 제시
- 7. 2 민정당 광주해결 방안 발표. 위령탑 건립. 정부 유간 표명, 유족에 대한 보훈 연금 수혜. 특별법 제정 보상
- 7. 9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관련 18명, 광주시태 관련 17명 등 시국 사범 2,335명 사명 복권.
- 7.11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오항동, 초대회장 정상용)결성
- 12.16 제13대 대통령 선거, 미정당 노태우 후보가 당선
▶1988년
- 2. '민주화합추진위원회'출범
- 4. 1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광주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명명
- 4.26 4.26총선. 국회, 여소야대. 정상용씨(5.18당시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외무담당 부위원장) 국회의원 당선
- 5.18 릴리 주한 미국 대사 모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12.12때도 계엄령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점을 강력히 나타냈다. 그러나 최종 분석에서 그것은 한국 내부문제며 미국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한국이 해야할 일은 광주사태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밝히는 일이다. 나는 미국이 광주사태와 관련, 어떤 동기나 의도를 가졌다든지 하는 근거 없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언
- 8. 국회, 5.18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초로 본격적인 진상규명 착수
- 11.18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1989,2,24일까지 17회, 증인67명). 김대중, 이희성 등의 증언으로 시작
- 12. 전두환, 국회서 광주관련 사과 발언
▶1989년
- 1. 5.18관련 단체, '광주의거 방해관련자처벌법'처음으로 제시
- 2.27 부시 미대통령 방한 반대투쟁
- 5.22 광주 미문화원 잠정 폐쇄(1990년 8월 재개했다가 1996년 완전 폐쇄)
- 6. 미국 국무성 국회 광주특위에 답변서 제출.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은 한미연합사의 지휘권밖에 있는 부대로, 그 이동에 대해서 사전 협의는 물론 사후 통보도 없었으며 광주 사태 수습을 앞두고 군사적 해결보다는 정치적 해결을 촉구했으나 실패할 경우 특전사보다 20사단으로 대치시킨다는 데 대해 마지못해 동의했다. 이와 함께 미국은 17일 밤 정치인들이 연행되는 등 급변하는 상황에서 광주에 파견된 공수단의 동향을 몰랐다.'
▶1990년
- 1. 9 그레그 주한 미국 대사 광주 방문 인터뷰. "광주시민에게 정말 사과해야 할 것은 미국이 지금까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자 않고 계속 침묵으로 일관, 광주 피해자들의 아픔이 더해진 것이다. 당시 광주 비극은 5우러 20일께 알았고 발포 명령자도 알지 못한다."
- 5.18 광주전남민주연합(37개 재야 및 5월 관련단체) 결성
- 7.14 국회, 광주피해자보상법 제정(8월17일 시행령 제정). 민자당 날치기 통과 시킴
- 8.17 광주 피해자 보상 착수(9월 15일까지) 2,690명 신청, 이중 2,226명 인정
▶1991년
▶1992년
- 1.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발족(1994년 상임의장 오종렬)
- 5. 5.18관련 11개 단체가 모여 5.18광주민중항쟁연합 결성(오민련, 초대의장 정동년)
▶1993년
- 2. 문민정부 이후 5월 문제 해결을 위한 장성 대토론회 개최
- 3.18 5.18관련 단체와 남총련이 김영삼 대통령의 망월동 묘역 참배 저지
- 3. 미국부 보고서."대사관 사무관들은 광주의 상황이 서울과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광주에서 항쟁에 대해 들은 것은 그곳에 있던 미문화원장이 대사에게 전화를 했던 19일 아침이었다. 19-20일 광주서 진행된 사건에 대한 미대사관 발표는 미문화원장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정보에기초한 것이다."
- 5.13 김영삼 대통령, '5.18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광주수습책 제시. '12.12는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 5.20 윤한봉씨(5.18관련 마지막 수배자), 12년 만에 미국에서 귀국
- 5.28 민주당, '12,12쿠테타 진상 조사위' 구성키로
- 6. 1 정부,'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지원위원회' 추가보상 신청 접수
- 6.15 오민련 회원 200여 명이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농성
- 7. 5.18유족회 일부 회원이 시청 앞에서 상무대 묘역 성역화를 주장하며 농성(성역화 장소를 놓고 5.18관련 단체들간에 망월묘역과 상무대묘역으로 의견 갈라짐)
- 7.19 정승화시 등 22명이 12.12와 관련, 전두환 노태우를 반란협의로 고소
- 8.16 검찰, 12.12사건 수사 착수
- 9.21 5.18재단설립추진준비모임(오항동과 오민련의 의견대립으로 결렬)
- 10. 재야원으로 9인 소위원회가 오항동과 오민련의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
- 11.14 오민련에서 오항동 탈퇴 선언
- 11.18 오항동, '오월정신계승 및 기념 사업추진을 위한 5.18기념재단'설립 대회 강행(이에대해 오민련이 반박 성명 발표)
▶1994년
- 5.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계승국민위원회'(상임의장 이창복)결성
- 5.13 5.18국민위, 정동년 김상근씨 등 294명 전두환, 노태우씨와 책임자 35명을 5.18사건으로 고발
- 10.29 검찰, 12.12사건 수사 결과 발표. '12.12는 군사반란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나 전,노씨 등 34명 기소유예 처분
- 11.23 서울지검, 5.18광주민중항쟁연합 정동년 상임의장 소환조사, 5.18 수사 본격 착수
▶1995년
- 1.20 헌법재판소에서 '12.12 기소유예 처분은 정당'하다는 요지의 결정
- 4. 2 레이니 미국 대사 광주 방문 인터뷰 "광주는 5.18이란 큰 불행을 당한 도시로 상당 수준의 반미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는 그런 것이 아닌데 상당수의 광주시민들이 5.18을 미국이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알고 있어 반미감정이 더욱 심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 7.18 서울지검, 5.18사건 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7.20 5.18관련 단체 '검찰은 불기소 철회하라'며 명동성당에서 농성
- 7.20 전국 대학 교수들 '불기소 부당성 규탄'서명 확산. 전국민적 저항으로 불기소 부당성 규탄 운동 확산
- 10.19 박계동의원이 '노태우씨 비자금 4,000억 원 은닉' 폭로
- 10.20 대검 중앙수사부 노태우씨 비자금 수사 착수
- 10.27 노태우씨, 비자금 실체 인정, 대국민 사과 성명 발표
- 11.16 검찰, 노태우씨 구속 수감, 1992년 대선 자금 의혹 비화
- 11.24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특별번 제정 지시
- 11.30 12.12 및 5.18사건 특별 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 결정
- 12. 2 전두환씨,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담화인 이른바'골목성명'발표 뒤 낙향. 검찰, 12.12사건과 관련 전두환씨 구속 영장 청구
- 12. 3 검찰, 전두환씨를 경남 합천 자택에서 연행 구속 수감
- 12. 5 검찰 '전씨 비자금 특별 수사반'편성
- 12.20 헌법재판소, '5.18 불기소 처분은 위헌'내부 결정. 전두환, 단식으로 건강 악화, 안양교도소에서 경찰병원으로 이감
- 12.21 검찰 전 노씨를 12.12 군사반란 혐의로 기소. 국회 5.18특별법 제정 공포
- 12.27 5.18가건 광주 현지조사 및 광주지검 공조수사 착수
- 12.29 최세창 등 나머지 피의자 35명에 대한 12.12 사건와 전,노씨 등47명에 대한 5.18사건 수사 재개
▶1996년
- 1.17 12.12사건 관련 장세동, 최세창과 12.12 및 5.18에 연루된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에 구속 영장 청구
- 1.18 서울지법, 12.12사건과 관련해 5.18특별법 2조에 대한 위헌심판 제청(장세동, 최세창 구속 영장 보류) 유학성, 황영시, 이학봉 5.18부분만으로 구속 영장 집행
- 1.30 정호용, 허삼수, 허화평 등 현역의원 3명 5.18부분만으로 구속 영장 청구
- 2.16 헌법재판소, 12,12 및 5,18특별법 합헌 결정
- 2.28 12.12 및 5.18 사건 수사 종결. 16명 기소
- 2. 미국의 5.18관련 문서 공개. 밑 샤록 기자 기사화
- 3.11 첫 공판, 전,노씨 등 피고인 16명 출정. 검찰 모두 진술 및 기소요지 낭독, 변호인 모두 진술. 검찰 노씨 신문(이후 1주일에 한 번씩 공판)
- 7. 4 19차 공판, 변호인단 집단 불출석. 재판부, 전,노씨 등 피고인 14명에 대해 국선 변호인을 선임하고 재판 강행
- 7. 8 20차 공판, 전,노씨 변호인단 집단으로 사임계 제출하고 퇴정, 전,노씨 오후 출정 거부
- 8. 1 26차 공판, 채택된 증인 91명 중 신문이 진행되지 않은 50명 증인 취소
- 8. 5 27차 공판. 검찰이 전,노씨에 대해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 구형. 변호인 최후 변론 및 피고인 최후 진술
- 8.14 재판부, 19일로 예정돼 있던 선고 공판 돌연 연기
- 8.26 선고 공판. 1심 재판 종결
- 10. 7 항소심 첫 공판, 최규하씨 등 33명 증인 채택
- 10. 1 42차 공판 증인신문 개시
- 10. 1 73차 공판, 광주피해자 강길조씨 피해자 진술권 증언
- 10. 2 87차 공판, 최규하씨 증인 불출석, 재소환 결정
- 11.11 10차 공판, 최규하씨 강제구인키로 결정, 검찰 및 변호인측 7대 쟁점 구두변론
- 11.14 11차 공판, 최규하씨 강제 구인, 항소심 결심 및 검찰 구형
- 12.16 12차 공판, 항소심 선고
- 12.26 대법원, 전.노 사건을 형사 1부에 배당
▶1997년
- 2.20 서울 고법, 광주 관련 미 정부문서를 정부가 공개토록 판시
- 2. 전남대, 조선대 5.18연구소 개원
- 4.17 전. 노 재판 상고심 선고(전두환 무기징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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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 [5.18특파원 리포트] 한국 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 모임 / 풀빛신서,발간1997.5.10.
※ 사진 출처 : 5.18관련 홈 : http://www.518.org http://www.may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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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 :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신서, 발간 1997.5.10.)
소개 : 17년 만에 공개된 내외신 기자들의 광주5월민중항쟁 취재수첩
/ 한국기자협회, 무등일보, 시민연대모임 [공]엮음 / 풀빛신서, 1997.5.10. 출간
내용 : 게브하르트 힐서, 샘 제임슨, 심재훈, 조성호 등 내,외신 기자 12명의
광주5월 민중항쟁 취재문을 정리했다.
목차 :
1. <외신기자편> 2.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며/테리 앤더슨 3. 기자 새경와 외교 요청의 갈등 속에서 /헨리 스코트 스톡스 4. 고아주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봉기였다/심재훈 5. 목가적 전원도시에서 펼쳐진 악몽/게브하르트 힐셔
6. 80년대 한국 민주화는 광주항쟁 정신 때문에 성공했다/마쓰나가 7. 항쟁지도부 벽에 새겨졌던 '세계평화'/샘 제임슨 8. 카메라에 담은 5.18 광주 현장/유르겐 힌츠페터 9.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블레들리 마틴
10. <내신기자편> 11. 나의 운명을 바꿔놓은 광주/오효진 12. 아직도 굳지 않는 핏자국/장재열 13. 오월 고아주의 회상/조성호 14. 금남로 아리랑/이충근
15. 아직도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김양우 16. 경상도 기자의 위기일발/류종환 17. 아아 고아주여! 여두운 역사의 통곡이여/서청원 18. 악연으로 만났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광주/김대중 19. 신문사진 한 장이 역사를 뒤바꾸기도 했건만/황종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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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18 특파원 리포트 (풀빛신서, 발간 1997.5.10.) --- 게브하르트 힐서, 샘 제임슨, 심재훈, 조성호 등 내,외신 기자 12명의 광주5월 민중항쟁 취재문을 정리했다.
감사합니다. 퍼갑니다.
우측에 사진이 모두 따른창이 열리도록 수정하였습니다 --- 가능하면 스크렙보다는 복사하여 가시기를.. (why, 복사해가야 본문수정이 가능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