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주말 저녁 부모님을 모시고 딸 내외와 함께 저녁 식사도 할 겸 나들이를 나왔다. 손녀 연서는 아장걸음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신기한 듯 풀도 만져보고 흙도 만지작거리면서 재미있는 듯이 살피고 다닌다. 가끔 엉뚱한 짓을 하기도 해서 제 어미의 주의를 듣는다. 여든을 넘긴 아버지는 기분이 아주 좋으신지 미소를 연방 입가에 흘리시며 사위와 손주 사위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계신다. 아마도 친정집 족보에 관한 것이리라. 벌써 십수 년을 되풀이 해 온 이야기지만 남편은 열심히 듣는 척하고 있다. 이따금 지루한 얼굴로 하품을 참는 눈치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볼펜을 꺼내서 수첩에다 적고 있다. 지금 적고 있는 그 볼펜은 사연이 있다.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이기 때문이다.
4년 전이다. 딸아이가 교제하고 있던 남자를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 듣기를 고대하고 있던 순간이었지만 막상 그 말이 나오니까 긴장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위가 될지도 모르는 그의 됨됨이나 자라온 환경이 우리와 너무 다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딸을 신뢰하고는 있었지만 어떤 사람이 사위가 될지, 매우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위를 맞는다는 것은 또 다른 식구를 맞아들인다는 뜻 아닌가. 그날 밤 남편도 나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회색 양복 차림에 분홍색 넥타이, 손에는 꽃과 와인, 그리고 정성스레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보통의 키에 듬직한 체구다. 얼굴에 계속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역시 긴장이 되는 듯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있는 것이 보였다.
평소에는 침착한 편에 속하는 남편이지만 그에게 자리를 권하는 것도 잊은 채 말문을 열었다.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는데도 그에게 궁금한 듯이 집안 내력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 등을 물었다. 그도 역시 약간 굳은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딸아이를 가운데 세워두고 두 남자가 서로를 탐색하듯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3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남편의 첫 대면은 김포공항에서였다. 당시 외국에 근무 중이셨던 아버지는 혼담소식을 듣고는 예정에 없이 급히 귀국길에 오르셨다. 사람 많은 공항에서 미래의 남편이 될 그이는 어색한 듯 첫인사를 올렸다. 그 장면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남편에게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예리하게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그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엄마도 나도 아버지의 눈치만 살피면서 연신 마른기침만 하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걸으며 다정한 정담을 나누는 듯이 보였다. 아마 신랑이 될 사람의 장래 계획이나 집안 어른들에 대하여 묻는 것 같았다. 그가 택시를 잡으러 간 사이, 어떠냐는 엄마의 물음에 딱 한마디 “키가 좀 작다.” 하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당신이 해외에서 직접 고르셨다며 남편에게 무엇인가를 건네 주셨다. 당시로써는 꽤 고가인 오메가 시계였다. 아직 상견례도 하지 않았고 택일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차까지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무엇인가를 들고 나왔다. 제자로부터 선물로 받아서 자신은 아끼고 아끼면서 쓰지 않던 볼펜이다.
“이거 볼펜인데 자네가 가지게. 내 이름이 새겨진 볼펜이야.” 순간 사위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첫 만남에서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볼펜이 뜻깊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으리라. 앞으로 딸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고, 사위가 당신의 맘에 들었다는 간접적인 표현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장인에게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을 전해주는 의미도 있었으리라. 그날 남편은 기분이 좋다며 거나하게 술이 취해 잠이 들었다. 몇 달 후에 딸아이는 결혼을 했고, 1년 뒤에 손녀 연서가 태어났다.
요즈음 같은 디지털시대에도 사위는 남편의 이름이 새겨진 그 볼펜을 꼭 지니고 다니면서 메모를 하곤 한다. 언젠가 한번은 사위에게 그 볼펜이 잘 나오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직도 30년은 더 쓸 수 있어요, 라고 하면서 큰소리로 웃었다.
사위였던 남편이 어느새 장인이 되고 사위를 맞이하게 되었듯이 언젠가 사위도 손녀 연서와 나란히 손을 잡으며 걸어 들어오는 남자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오래전 장인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될까? 사랑하는 딸이 선택한 배우자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 말이다. 자신처럼 평생 딸을 아껴주고 보듬어 달라고 부탁하는 그 마음을. 나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남편에게, 남편이 사위에게 그랬듯이…….
조문희 미국 뉴저지 . 원석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