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가정에서 주부로만 살아오신
친정어머니는 세상 물정을 몰라``
유산상속 절차를 도와주겠다고 자처하는
아버지 지인을 믿으시고``
인감과 등기 서류를 맡기셨다.
부모님이 피난민들을 위하여
조석(朝夕)으로 밥과 국을 제공하셨는데``
그때 알게 되었던 북에서 피난 온 분이었고``
인천 제3교회를 출석하셨던 분이었다.
인천에는 북에서 피난 온
성도들이 많아... 교회를 개척하면```
지역(동)에 따라
제1, 제2, 제3, 제4, 제5, 제6 ,제7, 제8
교회 이름을 명칭하였다.
제3교회(송림동)는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
바로 아래 동생 목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였다.
처음 교회 천막을 쳤을 때```
(지금 위치는 옮겨 간 곳)
친정아버지께서 교회 부지와 여러 가지
물품을 제공하셨고... 교회도 출석하셨으며```
우리 형제자매도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였다
(친정 외할아버지께서
월남 이상재 선생님의 형제로
서천군 한산면에 처음으로 선교사님이
들어오셨을 때``
교회 부지와 학교 부지를 제공
건축을 도우셨다고 한다.
또 친정 친 조부모님도
청주에서 성결교회를 출석하셨다고 한다.)
평소 그 지인은 친정아버지를 형님`` 형님 ``
따랐고 가깝게 지냈던 터라...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맡겼는데```
집과 작은 밭만 남기고
전답을 모두 몰래 팔고``` 도주를 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가을걷이가 되면
앞마당 큰 창고에는 많은 쌀가마니가 쌓였었고```
김장철에는 넓은 밭에서 김장 배추를
거두어 파시고``` 항상 한 모퉁이는
피난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셨다.
그 충격으로 친정어머니는
거의 실성 상태로 식음을 전폐하시고```
몇 달을 지내시다가``` 교회를 등지시고
무속에 심취하시게 되었으며
목사님과 성도들이 심방 오시면...
물을 끼얹고``` 대문을 걸어 잠그시고
욕을 하시고``` 비방을 하셨다...
(우리도 교회 얼씬도 못하게 함)
무속인(여자 무당, 남자 무당)들의
지시(점)에 따라 움직이셨다``
특히 쇠 금(金)이 들어간 성씨
나무목(木)이 들어간 성씨는
부정탄다고 만나지 못하게 하였고``
못을 박거나 뽑는 것도``
부정탄다고 무당의 지시대로
어디를 가도`` 동서남북 가려서 가야 하고``
옷을 살 때도 색깔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였고``
장사를 할 때도 지시를 따라 하고...
연말과 정월이 되면 부정탄다고``
아무하고 인사도 말도 하지 말고
벙어리로 살라고 했고....
문지방을 밟으면 복이 달아난다고
절대로 밟아서는 안된다고 했고...
걸핏하면 굿하고 푸닥거리하고
우리는 무당의 종이 되어
늘 겁먹고 조급하게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