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지우개
최원현
nulsaem@hanmail.net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유행하던 노래를 들으며 새삼 지우개란 말을 생각게 된다. 기억하기 싫은 것을 지워버리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같으리라. 그러나 사람이란 참 묘하게도 잊으려 하면 더욱 선명히 기억되고 기억하려는 것은 오히려 곧잘 잊게 된다. 그러나 만일 신이 인간에게 금방 잊어버리는 복(?)을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사람은 기억 용량이 넘쳐 모두 머리가 터지고 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로 제일 먼저 오는 것이 기억력 감퇴 같다. 어떨 땐 나도 두려울 만큼 깜박깜박 할 때가 많고 분명 내 손으로 했고 내 입으로 한 말인데도 까맣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지우개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언젠가 강남의 초등학교에선 14만원이나 한다는 초 고가 지우개를 쓰는 학생이 있다 하여 네티즌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었었다. 이탈리아 구찌 제품으로 T.V에도 보도되어 참 입맛이 쓰게 했었다. 지우개뿐인가. 에르메스라는 연필은 10여만원, 루이비통 필통은 무려 33만원이라니 그런 연필로 쓰면 글씨가 맘먹은 대로 저절로 써지며 그런 지우개는 제가 알아서 지울 것을 찾아 지우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지우개가 귀하기도 했지만 품질도 형편 없었다. 어떤 것은 글씨를 지운다고 문지르면 공책이 구멍 나 버리거나 찢어질 만큼 딱딱하고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것도 없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연필 글씨를 지우기도 했던 어린 날을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그런데 지운다는 말에선 섬뜩함이 느껴진다. 있던 것을 없던 것처럼 한다는 말인데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아무리 잘 지운다 해도 흔적이 남게 마련이 아닐까.
오랜만에 초등학교 동창회엘 나갔다. 늘 나만 시간이 안 맞아 못 나가곤 했는데 이 또한 나이 드는 증거인지 무리해서라도 죽마고우들을 만나고 싶어진 것이다. 거의 반세기가 흘러 만나는 그들, 그런데 어린 날 나를 참 못 살게 굴던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를 보자 그 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게 아닌가. 그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를 본 내 감정은 바로 반응이 왔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잊어지고 지워져 버릴 만도 한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고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힘은 서로 직접 풀어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요즘엔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된다. 살아온 내 삶의 족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싶어진다. 그저 앞만 보고 가고 가고 했었지만 이만큼에서라도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좌우도 살펴보고 싶어진 것이다. 나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녔겠기에 도움을 주었던 이들을 알아보고 최소한의 인사로라도 감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보다 내 살아온 삶의 날에서 본의 아니게 아픔을 주었거나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생각은 돌아보는 일마저 주저케 한다. 그렇다고 모른 체 지나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용서의 지우개’란 말이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못할 짓을 하여 화나고 밉더라도 용서라는 지우개로 가슴 속에서 그걸 지워버리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용서라는 지우개를 넣어두고 자주 꺼내보라고 했다. 헌데 나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줄 수는 있겠으나 내가 잘못한 것들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내가 내 잘못을 지울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마음속에서 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용서하고 잊어버릴 수 있다면 그만큼 내 실수나 잘못도 지워질 것이다.’ 그렇기도 하겠다. 용서한다는 것, 잊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게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지우는 것이라면 정말 아름다운 지우개다.
삶이 각박해 지다보니 사랑보다는 미움이, 이해보다는 원망이 앞서는 것 같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내 입에선 거친 말이 나가버리고 그 순간 후회를 한다. 14만원이나 하는 지우개라도 단순히 몇 자 틀린 글씨를 지우는 것이라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어쩌면 사람마다 이보다 훨씬 비싼 자기만의 지우개, 다기능의 성능 좋은 지우개들을 갖고 있을 것 같다. 미움을 지우면 사랑의 싹이 봉긋 솟아나고, 원망을 지우면 이해와 용서의 꽃향기가 풍겨난다. 자꾸 지워 크기가 작아지면 그만큼 세상은 아름다워지리라. 지나온 삶보다 살아갈 날들에 커다란 지우개 하나씩 준비하여 열심히 남의 흠을 지워내고 내 교만이나 허영을 지워간다면 세상은 훨씬 맑고 향기 나는 삶의 마당이 되지 않을까. 이 나이에야 비로소 마음속에 꼭 필요한 지우개 하나 품게 되나보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분명 고맙고 아름다운 지우개 같다.
월간 <사학연금> 2008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