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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영화속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12월 12일이라는 시간 속에 영원히 갇혀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휘둘렀다.
매일 똑같은 날의 반복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차피 거의 똑같은 일상이라지만, 그래도 같은 날을 영원히 산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 박선생님, 어디 아파요? 안색이 영 안 좋네. "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흔드는 그녀를 보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동료 여교사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 예? 아, 아니요.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 "
그녀가 말끝을 흐리자, 그 동료 여교사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 에이, 젊은 사람이 뭘 그렇게 생각할 게 많이 있어요? 애인 생각? 호호호. "
그녀는 미나의 기분은 생각지도 않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미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을 뿐, 더 이상의 대꾸는 하지 않았다.
" 그럼 오늘 원생들 데려다주는거 교대할래요? 아무리 봐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
그녀가 미나가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한 번 물었다. 아마도 스쿨버스로 아이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어제 - 실은 오늘이지만 -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 따지고 보면 그녀가 시간을 되돌리기를 원했던 것도 버스 안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지 않았는가.
' 그래, 버스에 타지 않으면 어제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 '
미나가 그녀의 말에 막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 들었다.
" 무슨 짓이야! "
날카로운 하이톤의 목소리. 그녀는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주변엔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는 다른 여교사들 뿐,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지금...저한테 뭐라고 하셨어요? "
미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옆자리의 여교사에게 물었다. 미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미나의 느닷없는 질문에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방금 오늘 원생들 데려다 주는거 교대해준다고 얘기했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
그녀는 여교사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 아니요, 그거 말구요. 그 다음에 저한테 무슨 얘기든 하지 않으셨어요? "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미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러실 것까지는 없어요. 잠깐 화장실에...... "
화장실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통수에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여교사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휴우...... "
찬 물을 얼굴에 끼얹자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서 자신에게 들렸던 그 목소리의 정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 대체 그건 어디서 들려 온 목소리지? '
그 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분명 미나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어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목소리. 그녀에게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라고 부추기고, 그녀에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냐고 물었던, 바로 그 목소리.
' 대체 넌 누구야? '
그녀가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그 때, 뜻밖에도 대답을 바라지 않은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 그렇게 알고 싶어? 내가 누군지? "
미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 곳에는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청소도구함 뿐이었다.
" 넌 누구야? 어디에 있는 거지? "
그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공허한 울림이 되어 화장실에 퍼져나갔다.
" 난 네가 원하는대로 해 주었을 뿐이야. 분명 네가 그랬잖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구. 그러지 않았던가? "
상당히 앳된, 아직까지 장난기가 가득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 모습을 드러내!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
" 빌어먹을, 너의 그 위선이 싫어. 선생이랍시고 아이들을 위하는 척 구는 그 꼬락서니가 보기 싫단 말이야! "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분을 토했다. 미나는 그 목소리에서 어딘지 알 수 없는 슬픔이 배어나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 그게....무슨 소리야? "
"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거야. 네 년이 나에게 한 짓. 네 년과 그 기사라는 자식이 나에게 한 짓을. 그러면서 뭐? 네가 아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미나의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목소리의 누군가는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당신에게 뭘 했다고 그러는거지? 넌 누구야! 일단 모습을 드러내! "
어둠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그래? 모른단 말이지...... 난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이건 게임이다. 너와 나의 게임. 그 댓가는 너의 목숨이야. "
" 게임? 대체 무슨 게임을 한다는거야! "
" 게임은 이미 시작됐어. 네가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한 그 순간부터. 이제부터 난 네 앞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낼 거야. 난 널 조종할거다. 내 뜻대로. 네가 내 뜻대로 움직이는 한 넌 이 시간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해. "
미나의 머릿속에 뭔가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아이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했던 것, 그건 모두 이 정체불명의 존재가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 그랬군....네가 어제 그 이야기를 하도록 조종했다는 건가? "
" 난 매일 밤 네 귀에다 대고 내가 이 세상에서 들은 가장 무서운 이야기들을 하나씩 해줄거다....넌 아마 다음날이면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아이들을 달래기 위해 그 이야기들을 해주겠지....그러면 넌 지는거야. 아이들은 공포에 떨며 그 조그만 입을 놀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부모들에게 모조리 일러바치겠지. 내가 너에게 해주는 이야기는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평생을 잊혀지지 않을거다. 어떻게 해서든 나에게 벗어나도록 해봐. 단 네 번의 기회를 주지. 한 번은 이미 사용했고, 이제 세 번 남았어. "
미나는 어제 이미 이 빌어먹을 존재가 자기 멋대로 그녀에게 준 기회를 써버린 것이다. 그녀가 어둠 속을 향해 의미없는 항의를 퍼부었다.
" 그런 말도 안 되는.....어제는 내가 몰랐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게임이 어디 있어? "
그녀 역시 이 게임에 참가할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해버린 것이다. 상대는 시간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존재다. 그의 말대로 그녀의 목숨을 뺏아버리는 일 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바에야 이 녀석과 게임을 해서 이겨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나였다.
" 난 어제도 내게 분명히 말했었어....다만 네가 기억을 하지 못할 뿐....난 앞으로도 네게 이 게임의 규칙을 설명해 줄거야. 매일매일....하지만 그 규칙은 지금 네가 이 곳을 나가는 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될 거다..... "
" 뭐야? 그런...... "
" 게임이잖아, 게임. 게임에 한 층 더 재미를 줄 수 있는 부분이지..... "
그 목소리는 다시 한 번 기분좋게 웃었다. 그 - 혹은 그녀 - 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가득 배어 나왔다.
" 기대하고 있겠어.....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라구...... "
그 말을 끝으로 미나의 주변이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어딘가로 가버린 듯,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귀신의 존재같은 걸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이건 그런 얘기가 아니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관자놀이 부근을 꾹 눌렀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습관이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그녀의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녀석은 자신과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을 하자고 제의해 온 것이다.
( 사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녀석의 말에 의하면. )
녀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버스에 탄 뒤, 어제처럼 아이들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찬물을 얼굴에 끼얹은 뒤, 거울을 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분명 사라지는 기억은 이 화장실 안에서의 기억뿐이라고 했다. 어제 괜시리 아이들에게 그런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었다가 혼쭐이 났던 그녀였다.
굳이 이 말도 안 되는 게임이 아니더라도 오늘 다시 한 번 어제와 같은 실수를 저지를 이유는 없었다.
그래, 이 게임은 나의 승리다. 그녀는 화장실을 나서며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그녀가 화장실을 나서자마자 갑작스런 현기증이 그녀의 머리를 뒤흔들었다.
미나는 화장실 문 옆에 있던 커다란 철제 쓰레기통을 붙잡고서야 간신히 그녀의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무실로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