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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1949년 오랜 기간 이어진 국공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한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다.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은 성립됐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새로운 중국의 시작, 장세스 역시 대만에서 중화민국을 새로이 수립하고 총통의 자리에 오른다. 얼마후 1950년 6월 25일 이들의 운명을 뒤바꾼 한국전쟁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해군 제7함대를 대만 해협에 급파한 미국, 중국과 대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78번째 역사저널 그날, 대만은 왜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되었나? 두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마오쩌둥과 장제스, 두 거물의 대전인 국공내전을 알아 봤는데 오늘 한국전쟁이 발발하네요
이시원/배우: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건 어떻게 보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또 이 한국전쟁에 대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그건 잘 모르겠거든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많은 분들이 오늘 갑자기 아니 대만 얘기 하는데 왜 한국전쟁이 나와? 이런 생각을 하실텐데 어쨌든 당시 상황을 보면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과 장제스, 누가 이깁니까?
이시원: 마오쩌둥
최태성: 네, 마오쩌둥이 이기잖아요. 장제스가 패하면서 장제스와 국민당 반공시민 등 200만명이 대만으로 넘어가게 돼죠. 그리고 나서 마오쩌둥은 바로 베이징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최원정: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 공화국 선포 8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돼죠. 요 시기에 아시아가 굉장히 역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일이네요.
김지훈/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그렇습니다.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 공화국 수립이 선포된 이후에도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중국은 계속해 가지고 타이완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틀 뒤 미국은 이 전쟁에 개입을 하게 되고 특히 타이완 해협에 미 제7함대 파견을 하게 돼죠.
태상호: 앞으로 우리 이야기에 7함대 이야기가 많이 나올 거예요. 그런데 당시에 7함대 항공모함과 함대 전력들은 필리핀 수빅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0년 6월 27일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대만 해협으로 급파를 하게 돼죠. (항공모함 모형), 지금 여기 있는 이 모형 항공모함은 당시의 항공모함은 아니고요. 커서 대만해협 지도에 삐집고 들어가지 못해서 대만 섬 우측에 놓습니다.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대만과 중국이 서로를 다시 한번 어떻게든 차지하려고 하던 차에 딱 미7함대가 나타나고 한국전쟁도 발발한 거네요.
허준/방송인: 이해가 안 가는게 한국전쟁 발발 직후라면 북한이 엄청나게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거든요. 그러면 저 엄청난 화력은 한국으로 보내야지~
이시원: 한국 쪽으로 가던 길 아니었을까요?
김지훈: 그런 건 아니고요. 당시에 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이 다시 양안 간의 전쟁으로 까지 확대가 된다면 동아시아의 전쟁, 그 이상의 전쟁으로 확전이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제7함대를 보내서 대만 해협을 중립화를 시켜요.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일단 한국에 집중해야 되니까 둘 다 얌전히 있어! 이런 뜻이네요. 미국 입장에서,
허준: 근데 지금도 중국-대만 간에 긴장이 고조되면 제7 함대가 움직였다고 뉴스에 나오잖아요.
-------------KBS 뉴스: 미국 군함이 타이완 해협을 통과하는 작전을 수행했습니다/앵커: 주한미군은 탄도 미사일 요격훈련도 공개했습니다-한반도 등 동북아를 담당하는 미7함대가 서해에서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중훈련을 벌인 겁니다/타이완 해협을 통과하는 통상적인 작전을 수행했다고 미7함대가 밝혔습니다.
최원정: 저는 7함대가 뉴스에 어쩌구 저쩌구 나올 적마다 이게 뭐지..? 뭘까? 오늘 좀 솔직하게 말씀 좀 모릅니다.
이시원: (동영상: 7함대 훈련사진), 이런 멋진 사진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태상호: 일단은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게 몇 함대를 떠나서 함대의 개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함대-해상의 전략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각종 함정-항공기-해병부대 및 육상의 기지시설 등으로 조직된 해군의 편성부대), 함대라는 것은 전략적으로 특히 해군의 전략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함정-항공기-지상기지에 모여서 만든 부대라고 보시면 돼요.
이시원: 배 한 척이 아니라 한 팀이 움직인다 라고 보면 되나요?
허준: 팀이 아니라 한 국가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돼요.
최태성: (대양에서 항공모함 훈련사진), 저것도 함대라고 볼 수 있나요?
태상호: 그럼요, 저게 정확하게 함대 중에서도 중핵, 항공모함 전단입니다. 이 사진을 찍는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구요. 촬영을 위한 대열 맞춤용, 엄청난 연료와 운영비 지출이 있었습니다. 지금 항공모함만 있진 않죠. 이 타이밍을 맞추어서 선도하는 비행기에서 찍었지 않습니까 (한번에 성공해야 한다), 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국가도 전 세계에 다섯 개 국가 밖에 없어요.
이시원: 나르는 Flex 샷이네요.
최원정: 완전 좌우대칭이잖아요.
허준: 저기 초계기 보이죠 (초계기-해상 공역을 비행하며 경계 및 정찰, 공격임무수행), 저게 바다를 쫙 감싸면서 다니면 저 밑에 잠수함들이 가만 있으면서~ 그럼 다 요격할꺼야,
최태성: 저 밑에 잠수함도 있어요?
허준: 그럼요, B-2 스텔스 전투기 있죠(스텔스 전투기-모든 탐지 기능에 저항하는 은폐기술이 사용된 전투기), 얘들도 싹 날라가서 보기 좋게 날라다니고~
최원정: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있어요. 7함대엔 1함대 2함대 3함대~ 쭉 이렇게 번호가 매겨져 있다는 거예요?
태상호: 2함대부터 7함대까지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전 세계의 해양을 6개로 나누어서 각 구역에 함대를 파견해서 그 지역을 관리를 합니다. 맨 왼쪽부터 보시면 중동의 화약고가 있는 인도양에 제5함대가 파견되어 있구요, 서태평양 우리가 지금 얘기하고 있는 7함대가 주둔하고 있구요. 미국의 앞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저 태평양은 3함대가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서양은 6함대가 하고 있고 (2함대는 플로리다 앞 바다, 4함대는 남미 브라질 앞 바다에 있습니다.
최태성: 그런데 7함대 구역이 너무 넓지 않습니까? 혼자 고생하는 거 같애요.
태상호: 맞습니다. 실제로 작전영역이 무려 1억2천만 평방킬로미터 근데 중요한 건 그 안에 파키스탄, 인도, 중국, 북한, 러시아 5개 핵보유 국가들이 있습니다.
최태성: 7함대 전력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거야?
태상호: 7함대는 세계 최정상급의 핵추진 항공모함이죠. 로널드 레이건호 항모 한 척을 보유하고 있구요. 그리고 이지스 순양함 그리고 구축함 등 60여 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약350대의 항공기를 운영을 합니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세계 6위죠. 대한민국 공군이 몇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을까요?
허준: 110대?
태상호: 420대 정도입니다.
최태성: 함대에 비행기를 거의 비슷하게 다 갖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태성호: 그나마 대한민국은 세계 6위 이니까 비교해 볼 수 있는 수준입니다.
허준: 전 세계 1위 공군력은 미공군이고, 2위는 미해군이다.
최원정: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탑건도 사실 미해군이 배경인 거잖아요?
최태성: 진짜요? 비행기가 나오기에 공군인 줄 알았지,
허준: 그래서 미국에서는 탑건 영화를 상영하는 데 상영하기 전에 광고하잖아요. 미공군 광고를 냈어요.
이시원: 항공모함이 사진으로 커 보이는데 크기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태상호: 항공모함 마다 크기가 약간 상이하기 때문에 정확히 얼마다 라고 말씀 드리기는 힘들고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하기 쉬울 거에요. 항공모함 안에서 수병이 탈영을 했어요. 근데 몇 달 동안 그 수병이 탈영했는지도 몰랐습니다.
최태성: 바다에 빠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배 안에서 사라졌다는 얘기예요?
태상호: 안에 사무실도 많고 공간이 많으니까 근무를 안 들어왔다는 걸 몇 달 동안 몰랐어요.
최태성: 항공모함 안에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겠죠.
허준: 실제로 길을 잃은 사람도 있다구요.
이시원: 그러면 당시 한국전쟁 때 출동했던 7함대도 지금과 맞먹을 정도였나요?
태상호: 아닙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군에서 긴축을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7함대는 지금의 위상과는 다릅니다. 당시의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었구요. 규모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화된 7함대로도 충분히 대만해협을 봉쇄하거나 견제하는게 가능했습니다. 다만 중국하고 대만이 다시 충돌하지 못할 정도로 군사적인 조치였을 뿐이고 실제로 나중에 미국에서 평가한 것에 의하면 미7함대가 중국이 과연 타이완을 공격했을 때 확실히 막을 수 있느냐 그 부분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최원정: 어느 한 쪽이 쓸어지거나 기울어지지 않게 받침돌 고임돌 역할을 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래서 결국 대만과 중국이 한국전쟁으로 붙지 않았잖아요.
최태성: 그럼요.
최원정: 그러니까 미국 작전은 성공을 한 셈이네요.
이시원: 솔직히 영토가 작았던 대만에서 고마워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김지훈: 그런데 꼭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였습니다. 1945년 UN창설 당시 상임이사국이었던 대만~그런데 미국이 개입을 해가지고 서로 너희들 싸우지 말아라. 말렸을 때 마오쩌둥도 장제스도 불쾌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시원: 거기다가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지원을 받았잖아요.
김지훈: 그런데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국민당 정부에 대해서 굉장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미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해주었는데 결국은 부정부패 비리로 인해서 대륙을 빼앗겨 버리는 부분들에 대해서 실망감과 배신감이 있었구요. 그런 상태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승자가 되어버린 중화인민 공화국과의 관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미 영국이라든지 몇몇 서방국가들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해 주고 있었어요.
허준: 아니 근데 우리가 배웠을 땐 공산당이라고 했거든요. 미국도 공산당하면 반공, 공격해라 이런 거 아녜요? 왜 좋게 봐줘요?
김지훈: 결국 국력의 문제인데요. 거대한 강대국 간의 대립 속에서 하나의 카드로 이용이 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아닙니다.
최원정: 국제사회가 냉정해요.
이시원; 어떻게 보면 반공의 슬로건으로 대만을 지원했는데 그게 잘 안 되니까 이제는 어찌 보면 중국을 잘 구슬려보자 이런 거네요.
최태성: 당시 미국이 대만에서 손을 좀 뗐다라고 하는 그런 근거들이 몇 가지가 있어요. 그중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일동: 그게 뭐죠?
최태성: 그게 그 유명한 애치슨 선언~애치슨 선언은 아시겠지만 (애치슨 선언-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 한국과 대만을 제외,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애치슨 라인은 한국만 지나간다고 하지만 조금만 내려가면 대만도 제외 돼요. 그래서 일본과 필리핀을 잇는 라인이 되는 거죠. 이미 대만도 미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된 상황이었죠.
이시원: 맞아요, 애치슨 라인 조금만 안쪽으로 그어주지~그랬던 기억이 나요.
최원정: 사실 애치슨 라인 때문에 북한이 자신있게 남침을 한 거잖아요. 그러면 중국 입장에서도 이거 봐라 대만이 애치슨 라인에 포함이 안 되었어. 나도 뭔가를 해야겠는데 라는 자극이 되었을 것 같은데~
김지훈: 당시 미국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국공내전에 대해서 더 이상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였구요. 그 이후에 인민해방군은 중국 주변의 도서지역을 공격합니다. 국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던 해남도 라든가 도서지역들을 점령하는 작전을 벌입니다.
이시원: 만일 여기서 진짜 반응이 없으면 대만까지 먹어도 되는 거잖아요. 솔직히 대만 입장에서는 우리한테 직접 가슴 아픈 전쟁이 자신의 나라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최태성: 외교라는 게 참 이런 거 같애요. 누구한테는 도움이 되지만 누구한테는 아픈 상처를~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은 엄청난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남은 기회가 오게 된 거죠.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전까지는 손을 뗄까 하다가 전쟁이 터지니까 깜짝 놀란 거에요. 야~ 이렇게 가다간 한국도 대만도 공산화될 수 있겠는데 이러면서 확 정신이 들고 이때부터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된 거죠.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장제스가 제안을 합니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요. 우리 대만 군대 3개 사단을 파병할 수 있게 해달라,
태상호: 3개 사단이면 보통 1개 사단 병력은 11,000명 정도로 잡고요. 그럼 3만 3천명 이죠. 그러면 전투부대를 파병한 순위로 보면 한국전쟁 UN참전국병력, 1위 미국 179만명, 2위 영국 5만 6천명, 그리고 대만이 3위 파병국이 되는 거죠.
이시원: 그런데 대만이 쫓겨나서 그럴 처지가 돼요?
최태성: 중국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병력을 빼~
김지훈: 당시에 대만의 군사력은 60만 이상이 되었다고 얘기를 하고 있구요. 그 가운데서 3개 사단 정도 보내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다만 거기에 대해서 미국이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던 이유는 대만군대 군사력이 크게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문제가 있었고~
최태성: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력이 아니고 무기다. 이렇게 탐탁치 않게 여겨 가지고 무산이 되는 거죠.
허준: 우리 쪽으로 파병을 하겠다는 데는 한국이 만주 베이징에 가깝잖아요. 연합군 승리시 바로 중국 본토수복을 염두에 두었지요.
최원정: 한국을 발판 삼아 중국 진출을 노린 장제스~
허준: 이거 가능한 거 아닙니까?
최원정: 가능성 없이 파병을 외치지는 않았을 거예요.
김지훈: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공산당을 물리치고 다시 중국을 세우겠다 수복하겠다는 강한 비젼을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그 부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이 계속 집권하는데 정당성 자체가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런 강한 의지를 보였다 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최태성: 그거 아세요? 장제스가 우리나라에 왔었어요. 6.25 전쟁 이전에 1949년 8월 이었나요? 장제스가 우리나라 진해에 옵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까지 해요. 그러면서 아시아 민족이 공산당으로부터 똘똘 뭉쳐가지고 막아내자 하는 공동선언도 발표하는 일이 있었어요.
허준: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대만과 손을 잡으면 이후 중국과의 상황이 더 큰 위기로 올 수도 있었습니다.
이시원: 근데 저는 대만이 한국전쟁 초기에 참전을 했으면 분단이 안 되지 않았을까?
김지훈: 선후관계를 생각해 봐야 하는데요,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아직 중국이 참전을 결정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대만의 국민당 군대가 참전을 하게 된다면 자동으로 중국도 참전하거든요 그렇게 되면 전쟁의 확산이 되겠죠. 트루먼 행정부는 확전을 막을 노력을 했고~ (동영상) 해리 트루먼/당시 미국 대통령: “전쟁이 한국으로만 제한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우리의 젊은이들의 목숨을 더는 낭비해서는 안 되며 우리와 세계의 안보가 위협 받아서는 안 되며 3차 대전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최태성: 중요한 건 뭐냐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미 행정부의 생각이고 맥아더는 원치 않았어요.
이시원: 맥아더 장군은 대만군이 계속 참전 하라고 했겠는데요.
태상호: 맥아던 장군이 누구냐가 중요한 데요. 미극동군 사령관이에요. 이쪽 지역을 다 관할하는 사람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동원해서 중국의 주요 공업지대를 폭격하고 해안선을 봉쇄하자 그리고 난 다음에 인천상륙작전을 끝내고 멈출 생각이 없이 공산군을 국경 너머까지 밀어낼 것이다 라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그랬더니 미국 행정부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죠. 아니 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군사령관이 우리와 다른 의견으로 따로 놀아~
최태성: 사실 한국전쟁 발발 한 달 후에 장제스가 맥아더를 초청합니다. 대만 군대를 보고 쓸만하지 않냐 참전시킬 수 있는 부탁을 할려고 오라고 초청을 했어요. 근데 미국 행정부는 워라고 했겠어요? 가지 말아야 해~ 거길 왜가! 맥아더는 그냥 갑니다. (1950년 7월 31일 미행정부의 입장과 달리 직접 대만을 방문한 맥아더), 어떻게 보면 맥아더는 미행정부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 자체가 폭탄인 셈이다. 그래서 맥아더는 결국 1951년 4월 11일 해임, 그때 맥아더 장군은 유명한 연설을 하지 않습니까, 1951년 4월 19일, 더글러스 맥아더: 노병은 죽지 않고 오직 사라져갈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노래 속의 노병처럼 저도 이제 군복을 벗고 사라져 갈 뿐입니다.
최원정: 그렇게 3년 넘게 진행된 한국전쟁이 마무리되고 대만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옵니다.
내레이션: 한국전쟁 이후 마오쩌둥은 다시 대만으로 눈을 돌린다. 중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장제스와 국민당이 차지한 영토를 점령하려는 계획, 이번 목표는 대만의 최전방인 진먼섬이었다. 1954년 9월 시작된 제1차 대만 해협위기, 이후 대만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두 나라가 정식으로 손을 맞잡은 것이다.
---------------이광용/아나운서: 1954년 맺은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을 두고 대만의 장제스는 얼마나 좋았으면 “흑암 속에 비친 한 줄기 서광” 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깜깜한데 저기서 한 줄기 빛이 비추었다. 조약 이후 미국은 대만에 5천명의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최대 3만명의 미군 주둔, 또 대만 전역에 미군 기지를 개설 하는 등 대만을 마치 가라앉지 않는 미국의 거대한 항공모함처럼, 모양도 꼭 항공모함이잖아요. 그렇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대만을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됩니다. 상호방위조약체결 4년 뒤인 1958년 중국은 진먼섬을 공격합니다.
이시원: 진먼섬이 어디예요?
이광용: 진먼섬, 중국어로는 진먼다오, 한국어로는 금문도 金門島, 여기가 대만이에요 어디냐, 대만에서는 멀리 떨어지고 중국 본토에 가까이 위치해 있는 진먼섬, 대만이 중국과 2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근데 진먼섬은 중국과 1.8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최태성: 우리나라 연평도 같다 라고 봐야 할까요
태상호: 연평도는 사실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이시원: 한강 폭이 그 정도 되지 않나요?
이광용: 맞아요, 한강 폭이 2킬로미터 안팍이니까 제가 축구 중계하는 소리로 하면 다 들리는 거예요. 손흥민 슛 골!~ 하면 들리는 겁니다.
허준: 중국 샤면시 시민이, 뭐야, 어디서 축구해?
이광용: 아무튼 대만방어의 마지노선인 거죠. 중국 입장에서는 얼마나 걸리적 거리겠어요, 끊임없이 중국의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걸 대만해협위기라고 하고요. 총3번의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제4차 대만해협 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죠.
태상호: 게다가 최근에는 중국 쪽에서 드론을 이용해서 대만군 초병들을 도발하고 있어요.
허준: 돌 같은 걸 던져 가지고 SNS에 조롱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왔어요.
태상호: 맞습니다. 그래서 대만 정부에서는 이제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광용: 사실 양안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이 진먼섬은 살얼음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먼섬에는 이런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세히 보시면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최원정: 스피커가 보이네요.
이광용: 스피커예요, 이거 어디서 본 느낌?
허준: 대북 확성 방송하는 그거요?
이광용: 아나운서 중에 국군심리전단에서 근무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북한을 향해서, 인민군 하전사 여러분, 자유대한의 품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중국 선전용 스피커입니다. 4층 높이에 무려 48개의 스피커가 촘촘이 박혀 있구요. 전방 25킬로미터 까지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8킬로미터를 넘어서 한참 더 멀리까지 중국본토까지 들린다는 거죠. 여기서 바로 몇 년 전까지 이런 방송이 나왔다고 합니다.
최태성; 어떤 방송인데요?
---------------(중국어 방송), 친애하는 대륙의 동포 여러분, 저는 지금 진먼 방송국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자유중국의 최일선에 서게 되어 기쁘다는 것입니다. 대륙의 동포들이 우리와 같은 민주와 자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풍요로운 생활환경에서만 개인의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민주 만세! 감사합니다. 들으면 계속 뭔가 나를 끌고 가는 듯한 거예요.
최태성: 목소리 좋아요.
이광용: 천상의 목소리 그분을 소개합니다.
허준: 여기 나왔다고!
-------------(스튜디오 등장) 안녕하세요, 저는 덩리쥔입니다. (덩리쥔-1970~1990년대 대만, 일본, 홍콩 등지에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대만 출신가수),
덩리쥔/요요미代役: 노래: 월량대표아적심 (月亮代表我的心) (달이 내 마음을 대신하네-1977년 발매된 대만가수 덩리쥔의 대표곡) 당시 실제 진먼 방송국 녹음실을 재현한 모습입니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제 마음은 떠나지 않을 거고
제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달이 제 마음을
대신하고 있어요
가벼운 한번의 입맞춤은
이미 제 마음을 움직였죠
깊었던 한 순간의 마음은
지금까지 절 그립게 만들어요
당신은 제가 당신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냐고 물었죠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 봐요
한번 바라봐요
달이 제 마음을
대신하고 있어요
이광용: 대만의 대표 가수, 아시아의 가희, 덩리쥔, 그 덩리쥔의 환생이라는 우리 귀요미 요요씨(한국가수)를 소개합니다.
요요미/한국가수: 안녕하세요
이광용: 제가 덩리쥔이라고 소개를 했잖아요. 나이 좀 있으신 분들에게는 장년층은 등려군이 더 익숙할 수도~ 너무 비슷하고 빨려들어가는~ 대만 분이신 줄 알았어요.
허준: 한국분 이세요?
요요미: 네, 한국 사람이에요.
이시원: 나도 대만 분이신 줄 알고 있었어요.
이광용: 요요미씨가 덩리쥔 노래 카버 영상을 올린 후에 중통령이라는 별명을 얻었어요. 중국 대통령이 아니고 중년들의 대통령~
요요미: 덩리쥔의 노래를 추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시더라구요. 그래서 커버를 했는데 진짜 많이 좋아해 주셔서 행복했어요.
허준: 그럼 아까 진먼섬 안내 방송의 주인공은?
이광용: 그 목소리가 진짜 덩리쥔이 진먼섬을 방문했을 때 실제 방송목소리입니다. 요요미씨는 1994년생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떻게 그런 영상을 올릴 수 있는 생각을 했는지?
요요미: 저는 일단 덩리쥔을 처음 알았던게 영화 첨밀밀을 먼저 들었어요. 가수를 찾다보니까 (첨밀밀-1997년 여명, 장만옥 주연의 홍콩영화, 덩리쥔의 노래들이 OST로 쓰이며 큰 사랑을 받음), 덩리쥔이라는 가수구나, 그때부터 알게 됐는데 많은 분들이 얼굴도 둥굴둥굴하고 이목구비도 닮았다고 하나~ 그럼 아쉬워 한 곡 더~
요요미: (노래 부름)
달콤해요
당신의 미소는 달콤해요
마치 봄 바람에 핀 꽃처럼
봄바람에 핀 꽃이지요
어딜가요
어디서 당신을 만났던 걸까요
당신의 미소는 낯이 익어요
잠시 생각이 나질 않네요
아 꿈 속이었어요
이광용: 오늘 방송 끝~ 요요미 노래들어~
이시원: 이런 노래 들으면 중국 병사들이 헤엄쳐서 건너왔을 수도
최원정: 교수님 표정보셨어요? 너무 흐뭇하셔서~
이광용: 진먼섬에 대만 군인들이 있잖아요. 10만명이 있는데 그 군인들을 위해서 덩리쥔이 위문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덩리쥔의 아버지가 국민당 정부 장교였어요. 그래서 국공내전 패배후에 장제스가 대만으로 넘어올 때 덩리쥔의 아버지와 가족이 넘어옵니다. 14살에 가수로 데뷰하고 대만과 홍콩에서 큰 인기를 얻다가 일본에 까지 진출을 해요. 그래서 아시아의 가희라는 표현까지 많이들 쓰게 되는 데요. 하지만 국적이 대만이라는 이유 때문에 국제 정세에 따라서 덩리쥔은 힘든 시간을 상당히 오래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요미: 사실 덩리쥔의 노래가 중국에서는 1987년까지 금지됐습니다.
최태성: 실제로 단속하는 공안들 마저도 덩리쥔의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그래요.
최태성: 이해합니다, 이해합니다,
이시원: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가 사랑 받는 것과~
김지훈: 그래서 당시 국가 최고 지도자가 덩샤오핑이었는데 낮에는 덩샤오핑의 이야기를 듣고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 라는 이야기가 있구요.
허준: 낮에도 덩, 밤에도 덩이네~
요요미: 그게 바로 노래의 힘인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불운의 가수라고 하시지만 덩리쥔 노래 자체는 제 생각에 평화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어요.
최태성: 하긴 누구자 다 좋아 하니까 이념 구분하지 않고,
이광용: 요요미씨도 그런 가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요요미: 고맙습니다.
내레이션: 1958년 8월 23일 대만의 최전방 진먼섬에서 중국군의 포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500여 문의 대포와 80여 척의 군함, 200여 대의 전투기까지 동원된 중국군의 선제공격, 중국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대만은 고전하였다. 이번에도 미국은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륽 출동시킨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미국의 전면전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최원정: 58년에 중국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거예요. 1958.7.31 진먼 포격전이 근데 약간 위치가 그렇잖아요. 공격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위치다.
허준: 목에 가시잖아요. 사실은 정말 작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신경이 쓰이고 계속해서 저 턱 밑에 있는 총알이 내 쪽으로 날라 올 수 있을텐데~ 이런 신경이 쓰이죠.
김지훈: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죠.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시쵸프가 7월 31일에 비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해요. 그런데 마오는 진먼다오 공격하겠다는 계획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흐루시쵸프가 떠난 다음에 20일 정도 있다가 포격을 시작해요. 근데 이거는 타이완 문제, 대만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은 타협하지 않겠다 이거는 중국의 국내문제이고 대만통일을 위해서는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것을 대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이시원: 이건 중국문제야 강대국들 너희는 신경쓰지마
김지훈: 그래서 미국에게도 경고를 하고 소련에게도 통일을 하겠다 라는 의지를 보여 준 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최태성: 그게 문제니까
최원정: 그런데 지금 미국은 대만과 손을 잡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면 중국이 전략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싸움이 안될텐데~
태상호: 하지만 중국도 그 이전의 중국하고는 달랐어요. 중국도 군사력을 계속 증강을 하고 있었고요. 이제는 우리가 진먼섬을 복속시키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육-해-공군 전력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이시원: 이 조그마한 섬에요?
태상호: 네, 전투의 시작은 1958년 8월 23일 시작이 됐습니다. 중국군은 500여 문의 포를 동원해서 해안가에서 진먼섬을 향해서 포격을 시작했어요.
최태성: 500여 문?
태상호: 네, 개전이 되고 1분 만에 몇 발을 발사했는지 아십니까? 무려 2600발을 발사했습니다.
이시원: 그게 가능한가요?
태상호: 그리고 두 시간 동안 4만 발을 쏟아 부었어요.
허준: 계속~
태상호: 맞습니다. 한 달 정도 전투가 지속되면서 이들이 쏟아 부운 포탄의 수는 47만 발~
최원정: 우리가 중공군하면 인해전술인데 이건 포탄이 해일처럼~
김지훈: 첫날 진먼섬을 방문하고 있던 진먼섬 방위사령부에 6천 발 정도가 개전 초반 15분 만에 떨어져요. 그래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을 했구요. 그 다음에 빗발치는 포격을 가하게 되니까 현지 주민들 같은 경우는 다 방공호에 가서 숨습니다. 방공호에 가서 숨다가 포격이 그쳤을 때 나와 가지고 식량을 마련하기도 하고 그런 생활을 하게 돼죠.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고통스러운 모습이었고~
내레이션: (1958년 진먼 포격전 동영상), 전운에 휩쓸린 금문도의 위기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조그마한 섬에 지난 8월 23일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된 이래 약30만 발의 탄환이 퍼부어졌으며 4만 4천여 명의 금문도 주민 가운데는 수많은 살상자를 내고 있습니다. 공산군의 봉쇄로 말미암아 한 때는 소량의 의료품과 식료품 이외의 보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었으며 바위로 된 이 섬에는 주민들이 자급자족할 만한 식량이 생산되지 않음으로 이곳에 주둔한 10만의 국부군은 거의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시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군요.
태상호: 진먼 섬 포격전으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은 비단 대만인들만 있었던 게 아녜요. 현장에 종군 취재를 갔던 한국인 기자 분이 계십니다. 최병우 기자 분인데요. 취재를 하시다가 현장에서 순직하셨는데 (최병우 기자-해방 이후 한국일보 편집국장 진먼 포격전 당시 종군기자로 진먼 섬을 찾았다가 순직), 그 분이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고 그래요. 한국전쟁 당시에 외국 기자분들이 현장 취재를 위해 오셨다가 17분이나 순직하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 은혜를 갚아야 된다.
최원정: 포탄이 막 날아들었는데 미국은 어떤 입장을 취했나?
태상호: 미국도 역시 7함대가 대만 해협으로 들어갑니다. 7함대가 들어가게 되니까 잘못해서 포탄이 떨어지는 경우에 미국과 상대를 해야 되지요. 그러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제는 포격은 중지 그 다음에 벌어진 게 항공전이 벌어진 거죠. 그래서 미국이 우리가 개입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항공전을 승리로 이끌 방법이 뭘까 생각을 했죠. 그래서 만든게 작전명 블랙 매직~ 블랙 매직이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흑마술~ 어떤 비장의 무기가 갑자기 대만에 쑥 하고 나타납니다.
최태성: 비장의 무기?
최원정: 최신 무기겠죠.
태상호: 혹시 사이드와인더 라고 들어보셨어요? 이게 사막의 방울뱀을 뜻하는 게 사이드와인더인데 (사이드와인더-미국이 극비에 개발한 열 추적 미사일의 이름), 사실은 열 추적 미사일, 미국이 극비에 개발한 열 추적 미사일이었어요.
최원정: 열 추적 미사일이 어떻게 작동하는 거에요?
태상호: 열 추적은 일단은 항공기가 제트기 같은 경우에는 미사일에서 열을 추적해서 따라가는 거예요.
이시원: (동영상), 영화에 나온 거예요?
허준: 여태까지 우리가 뭐 했냐면 우리가 영화보면 적기 발견하면 쫓아가서 뚜뚜뚜 하고 기관포나 기관총으로 공중전을 하였는데 요 전투로 최초로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한 거죠. 발사 후 슈~
태상호: 잘 설명해 주신 것처럼 사실은 제트기와 제트기의 교전은 무장 자체 기관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간의 교전거리가 약 400미터 정도 돼었죠. 그런데 이제 미사일이 달리니까 8배 교전 거리가 멀어진 거예요.
최태성: 그러니까 보이지가 않는 거리예요.
이시원: 어디서 쐈는지도 대충 알 뿐이지 누가 쐈는지를 모르는 거죠.
최태성: 그래서 블랙매직이구요.
태상호: 그래서 흑마술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최원정: 이 정도면 진먼 포격전에서는 대만의 승리네요.
최태성: 근데 44일이 지나고서 중국이 인도적 차원에서 1주일간 포격을 중지하겠다고 발표를 합니다. 근데 이게 지금 이긴 건지 진 건지 알 수가 없죠. 그리고 나서 10월 5일 일주일 동안 포격을 중지하겠다 라고 얘기를 해요. 1주일 지났어, 그랬더니 2주 더 포격을 중지하겠다 이렇게 질질 끄는 거예요. 중국이 이런 계획까지 발표를 하는데 그 계획이 뭐냐면 단타쌍불타(單打雙不打), 단 타에서 單이 뭐냐면 홀숫날 이예요 쌍 雙이 짝수예요 (단타쌍불타(單打雙不打)-홀숫 날엔 공격하고 짝수 날엔 공격하지 않는다), 홀수에는 打 때리고 짝수에는 不打 안 때린다. 어디 쏠 때 공격위치 까지 미리 알려준다.
이시원: 알아서 잘 피해라.
최태성: 공격 방식이 변했는데 이번엔 섬에다 쏘고 이번엔 바다에다 쏘고 지나면 그냥 공포탄 쏴요.
이시원: 단타 쌍불타 이거는 이 날은 안 쏘니까 잘 돌아다녀도 되고 이 날은 쏘니까 돌아다니지 마 격일제로 돌아다니라는 말이잖아요.
최원정: 쏘는 위치까지 알려주는,
김지훈: 이거는 정치적인 측면들이 강한데 타이완에 처음으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60년 6월 18일에 방문을 해요. 그런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문 했을 당시에는 포격을 하지는 않았어요. 앞뒤로 포격을 하게 됩니다.
최태성: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있을 때 포격을 했다가는
김지훈: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을 떠난 다음에 국민당군도 반격을 가해요. 그런데 이거는 마치 연상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돌아간 다음에 대만 섬 그 주변을 포위를 하고 군사작전을 하고 미사일을 쏘고 하죠. 그런 걸 보게 되면은 이것이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의 행동이었다 할 수가 있구요. 1997년 1월 1일에 미국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교를 합니다. 그 이후에는 이런 포격을 하지 않습니다.
최원정: 예나 지금이나 지금 얘기를 들어보니까 국제 사회의 어떤 관심을 끌기 위해서 대만을 인질로 삼은 것 같애요. 얼마나 불쌍해요.
이시원: 근데 아까 1979년 1월에서야 그걸 종결했다고 했잖아요. 첫 진먼 섬 포격이 58년이면 무려 21년 동안 포격을 했다는 거잖아요. 이곳 진먼 섬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버티기 힘든 상황 아닌가요?
김지훈: 그래서 전 섬이 군사화 되어 가지고 거의 밤낮으로 연습을 했구요. 남녀불문하고 조직에 다 가입을 해야 했어요. 대개 여성분들은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한 다음에야 일종의 병역 의무가 해제가 됩니다.
최태성: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냉전시대라고 보는데 그 네 글자 냉전시대에 들어가 보면 진먼섬은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은 또 하나의 역사를 보는 듯 했습니다.
-------------이광용: 여러분, 아직 오늘의 이야기가 제대로 끝난 게 아닙니다. 정리 하시면 안돼요. 오늘 이야기에서 이것이 빠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명욱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명욱/세종 사이버대학교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 안녕하세요,
허준: 잠깐만 주류(主流) 비주류 or 주류(酒類), 술 마시는 주류?
이광용: 酒類, 수십년간 냉전의 최전선에서 살아야만 했던 진먼섬의 주민들과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것! 과연 무엇일까요? 금문 고량주입니다.
최태성; 저게 어떻게 된 거야?
이광용: 금문 고량주가 금문도 그러니까 진먼도에서만 생산되는 술이 맞아요?
명욱: 맞습니다. 금문 고량주는 중국과 대만의 전쟁 상황 속에서 태어난 술이에요. 계속 포격을 받다 보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긴장하고 힘들었겠습니까. 공포심으로 늘 충만한 상태였겠죠. 그거를 이겨내고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술이 바로 금문 고량주입니다. 그래서 당시 진먼섬의 방위사령관 이었던 후롄 장군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진먼섬에서 직접 술을 빚고 이걸 주민들과 군인들과 마시면서 공포심을 이겨내자고 해서 시작한 술이 금문 고량주입니다.
이광용; 잠깐만요, 장군님이 지시를 했으면 군인들이 직접 만들었을 거 아녜요?
명욱: 맞습니다.
이광용: 그럼 군용이네요.
명욱: 맞습니다, 군납 면세용입니다. 1992년도 까지 금문도에 계엄령이 사라질 때까지 군에서 만들다가 그 이후에 민간으로 이관이 되었습니다. 고량은 우리말로 수수입니다. 수수 술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수수를 찌고 거기에 누룩을 넣어 버무린 다음에 이걸 증류하면 그 질퍽한 찰흑과 같은 수수 덩어리와 누룩이 버무린 상태에서 알코올이 쫙 빼어 올라와서 향이 아래로 쫙 떨어지죠. 그래서 향이 어마어마하게 많고 높은 술이 됩니다. 게다가 이 금문 고량주에 정말 특별한 게 하나 있습니다. 어디서 숙성시키느냐? 바로 포탄이 떨어졌을 때 숨어야 되는 지하갱도에서 숙성을 시키고 있는 거죠. 그리고 온습도가 일정합니다. 어떻게 보면 완벽한 술 저장고입니다.
이시원: 군인들 항상 긴장 상태에 있을 것 아녜요 그래도 밤에 자기 전에 금문 고량주 한 잔 마시면서 애환을 달래지 않았을까.
최태성: 애환을 달랜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제 정신으로 버틸 수 없으니까 일종의 진통제? 취해서버텨야 했던 그런 상황이었던 거 같애요.
명욱: 우리나라도 이런 부분에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은 군대라는 곳이 힘든 곳이잖아요. 그런 힘든 곳에서 함께 있었던 존재 자체가 너무 소중한 거죠. 그래서 군부대 주변에 양조장이 많구요. 그걸로 유명해진 막걸리들이 포천 막걸리, 이동면에 이동 막걸리 일동 막걸리 라든지~
이광용: (금문 고량주 견본) 금문 고량주 지금 58도 잖아요. 이게 58년에 있었던 진먼 포격전을 잊지 말자 그런 의미라는 데 이게 맞습니까?
명욱: 그런 설이 많이 존재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퀘스쳔 마크다. 이 정도만 얘기합니다.
최태성: 그럴듯한 주장인데요.
허준: 58년 이니까 58도면 1968년 이었으면 68도 예요.
명욱: 실제로 굉장히 좋은 술들~ 마오타X도 53도고 수정X도 52도인데 굳이 왜 58도로 했느냐예요. 그것에는 뭔가 코드가 있잖아요.
최태성: 저는 이건 58년도에 연결된다에 한 표입니다.
이광용: 만약 중국 본토에서 이름난 술보다는 우리가 위여야 된다
최원정: 경쟁을 해야 된다.
이광용: 이런 심리가 반영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여러분들도 강렬한 눈빛이 병에 꽂혀서 (금문 고량주 한 병), 저희가 병을 열어서 따라 드려야 될 것 같애요.
최태성: 저거 진짜죠?
명욱: 진짜입니다.
이광용: (소주 잔) 지금 이 잔에 반 정도 따르겠어요.
명욱: 3분의 1 정도~
최태성: 고량주는 반 정도 따르는 겁니까?
명욱: 너무 가득 채우면 향을 못 느낍니다. 왜냐면 잔 벽에 알코올이 묻어지면서 향을 느껴지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향을 못느낍니다.
최태성: 한번에 마셔요? 몇번에 나누어 마셔요?
명욱: 한 번에 바로 드세요.
이시원: 독하지 않나요?
명욱: 그래서 금문 고량주를 만드는 곳에서는 물하고 같이 마십니다.
이시원: 컵에 물도 함께 준비해요?
이광용: (역사저널 물컵) 이 물컵이 오늘을 위해서 준비된 거예요.
최태성; 향을 지금 맡았는데 쎄지는 않아요.
최원정; 엄청 쎈데요.
허준; 증류를 많이 했기 때문인데 그 도수가 올라가면 한 마디로 숙취가 돌거든요. 금문도 사람들이나 군인들이 숙취가 있으면 될까요? 안 될까요?
이시원: 안돼죠.
허준: 살기 위해서 도수를 높혔을 수도~ 어찌보면 슬픔의 술이라고 할 수도~
이광용: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지난 2015년에 중국 시진핑 주석과 당시 대만의 마잉주 총통의 회담이 있었거든요. 그때 선물로 줬던 술이 이 금문 고량주였습니다. 그래서 양안 화해의 술 이라는 이름을 또 하나 얻게 되었습니다.
명욱: 고량주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의 화해와 용서와 포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술이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취하는데 있는 게 아니고 아픔을 위로하고 화해를 끌어내는 진정한 술의 의미라는 것을 되새기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광용: 그런 의미를 우리가 느끼면서~
최원정: 이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78회 ② 대만은 왜 동아시아의 화약고가 되었나? 에서 정리).
① 1949년 오랜 기간 이어진 국공내전은 공산당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장제스와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한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을 건국한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새로운 중국의 시작, 장세스 역시 대만에서 중화민국을 새로이 수립하고 총통의 자리에 오른다. 얼마 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동년 6월 27일 미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필리핀 수빅만에 있던 7함대를 대만 해협으로 급파한다.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만약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이 다시 양안 간의 전쟁으로 확대가 된다면 동아시아의 전쟁, 그 이상의 전쟁으로 확전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제7함대를 보내서 대만 해협을 중립화를 시킨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장제스는 한국전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장제스가 패하면서 장제스와 국민당 반공시민 등 200만명이 대만으로 넘어갔다.
② 미국은 전 세계의 해양을 6개로 나누어서 각 구역에 함대를 파견해서 그 지역을 관리한다. 중동의 화약고가 있는 인도양에 제5함대가, 서태평양에 있는 7함대가, 미국의 앞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저 태평양은 3함대가, 대서양은 6함대가, 2함대는 플로리다 앞 바다에서, 4함대는 남미 브라질 앞 바다에 배치되어있다. 그런데 7함대 구역이 너무 넓다, 작전영역이 무려 1억2천만 평방킬로미터 근데 중요한 건 그 안에 파키스탄, 인도, 중국, 북한, 러시아 5개 핵보유 국가들이 있다. 7함대는 세계 최정상급의 핵추진 항공모함이다. 로널드 레이건호 항모 한 척을 보유하고 있다. 이지스 순양함 구축함 등 60여 척의 함선을 보유하고, 약350대의 항공기를 운영을 한다. 대한민국의 군사력이 세계 6위에 항공기 420대다. 전 세계 1위 공군력은 미공군이고, 2위는 미해군이다. 미국은 어느 한 쪽이 쓸어지거나 기울어지지 않게 받침돌 고임돌 역할을 하였다. 결국 대만과 중국이 한국전쟁으로 붙지 않았다.
③ 1945년 UN창설 당시 대만은 상임이사국이었다,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무기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국민당 정부에 대해서 굉장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면 미국민의 세금으로 지원을 해주었는데 부정부패 비리로 인해서 대륙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승자가 되어버린 중화인민 공화국과의 관계를 고려하게 되었다. 이미 영국이라든지 몇몇 서방국가들은 중국을 국가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국제사회는 국력의 문제로 강대국 간의 대립 속에서 약소국을 하나의 카드로 이용한다. 지금도 그렇다. 당시 미국은 대만에서 손을 좀 뗐다라고 하는 근거들이 있었다. 그게 애치슨 선언이다, 애치슨 선언은 1950년 1월 미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하고 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다,
④ 애치슨 라인 때문에 북한이 자신있게 남침을 하였고 대만도 애치슨 라인에 포함이 안 되었다. 당시 미국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국공내전에 대해서 더 이상 개입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그 이후에 인민해방군은 국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던 해남도와 도서지역들을 점령하였다. 외교라는 게 누구한테는 도움이 되지만 누구한테는 아픈 상처를 남긴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대만은 엄청난 위기 속에서 구사일생 살아남게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그 전까지는 손을 뗄까 하다가 전쟁이 터지니까 깜짝 놀란 거다. 이러다간 한국도 대만도 공산화될 수 있겠다 라는 생각에 대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장제스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대만군대 3개 사단을 한국 파병을 제안한다, 미국은 거기에 별로 적극적이지 않았다. 대만군대 군사력이 크게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문제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력이 아니고 무기다.
⑤ 6.25 전쟁 이전에 1949년 8월 장제스가 우리나라 진해에 온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상회담까지 한다. 그러면서 아시아 민족이 공산당으로부터 똘똘 뭉쳐가지고 막아내자 하는 공동선언도 발표하였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대만과 손을 잡으면 이후 중국과의 상황이 더 큰 위기로 올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할 당시에는 중국이 아직 참전을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에 대만의 국민당 군대가 참전을 하게 된다면 중국은 자동으로 참전한다. 트루먼 행정부는 확전을 막을 노력을 했다. 3차 대전이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맥아더의 생각은 달랐다. 장제스가 맥아더를 초청한다. 미국 행정부는 가지말라고 했다, 맥아더는 1950년 7월 31일 그냥 갔다. 맥아더는 미행정부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맥아더는 결국 1951년 4월 11일 해임당했다.
⑥ 한국전쟁이 마무리되고 대만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한국전쟁 이후 마오쩌둥은 다시 대만으로 눈을 돌린다. 중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해 장제스와 국민당이 차지한 영토를 점령하려는 계획, 이번 목표는 대만의 최전방인 진먼섬이다. 1954년 9월 시작된 제1차 대만 해협위기 이후 대만은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두 나라가 정식으로 손을 맞잡은 것이다. 미국은 대만에 5천명의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최대 3만명의 미군 주둔, 또 대만 전역에 미군 기지를 개설 하는 등 대만을 마치 가라앉지 않는 미국의 거대한 항공모함처럼 만들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대만을 차지하려고한다. 1958년 중국은 진먼섬을 공격한다. 대만이 중국과 21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근데 진먼섬은 중국과 1.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우리나라 연평도 같다,
⑦ 대만방어의 마지노선인 진멈섬, 중국 입장에서는 꽤 걸리적 거린다, 끊임없이 중국의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걸 대만해협위기라고 하고. 총3번의 전투가 있었다. 최근 제4차 대만해협 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양안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이 진먼섬은 살얼음판일 수 밖에 없다. 진먼섬에 대만 군인들이 10만명이 있는데 1958년 8월 23일 대만의 최전방 진먼섬에서 중국군의 포격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500여 문의 대포와 80여 척의 군함, 200여 대의 전투기까지 동원된 중국군의 선제공격, 중국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대만은 고전하였다. 이번에도 미국은 대만 해협에 제7함대를 출동시킨다. 중국과 대만 그리고 미국의 전면전이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⑧ 1958년 7월 31일에 소련의 지도자였던 흐루시쵸프가 비공식적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마오는 흐루시쵸프가 떠난 다음에 20일 정도 있다가 포격을 시작했다. 미국에게도 경고를 하고 소련에게도 통일을 하겠다. 그런데 미국은 대만과 손을 잡고 있다. 하지만 중국도 그 이전의 중국이 아니다. 중국도 군사력을 계속 증강하여왔다. 육-해-공군 전력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다. 전운에 휩쓸린 금문도의 위기는 아직도 가시지 않은 채 긴장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중국 본토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조그마한 섬에 지난 8월 23일 중공군의 포격이 시작된 이래 약30만 발의 탄환이 퍼부어졌으며 4만 4천여 명의 금문도 주민 가운데는 수많은 살상자를 내고 있다. 공산군의 봉쇄로 말미암아 한 때는 소량의 의료품과 식료품 이외의 보급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바위로 된 이 섬에는 주민들이 자급자족할 만한 식량이 생산되지 않음으로 이곳에 주둔한 10만의 국부군은 거의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⑨ 진먼 섬 포격전으로 현장에 종군 취재를 갔던 한국인 기자 한국일보 소속 최병우 기자가 취재를 하시다가 현장에서 순직하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17명의 외국 기자들이 순직하였다. 포탄이 막 날아들었는데 미국은 역시 7함대를 대만 해협으로 파견하였다. 중국군이 잘못해서 포탄이 미7함대에 떨어지면 미국과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되니까 포격은 중지되고 항공전이 벌어졌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항공전을 승리로 이끌 방법이 뭘까 생각을 했다. 작전명 블랙 매직이었다. 사이드와인더 공대공 열 추적 미사일이 등장했다. 기관포로는 교전거리가 약 400미터 정도 인데 미사일 교전 거리는 8배가 멀어졌다.
⑩ 1960년 6월 18알 타이완에 처음으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문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문시에는 포격이 없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을 떠난 다음에 국민당군도 반격을 가했다. 이번에 미국의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이 대만을 방문했을 때 돌아간 다음에 중국은 대만 섬 주변을 포위하고 군사작전을 하고 미사일을 쏘고 하였다.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의 행동이었다. 1979년 1월 1일에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정식으로 수교를 한다. 그 이후에는 이런 포격을 하지 않았다.
⑪ 1958년 진먼 섬에 첫 포격을 개시한 후 무려 21년 동안 포격을 했는데 1979년 1월에서야 종결했다. 진먼 섬 사람들 입장에서는 정말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전 섬이 군사화 되었고 거의 밤낮으로 연습을 했고 남녀불문하고 조직에 다 가입을 해야 했다. 대개 여성들은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한 다음에야 병역 의무가 해제되었다. 수십년간 냉전의 최전선에서 살아야만 했던 진먼섬의 주민들과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있다, 금문 고량주다. 금문 고량주는 진먼도에서만 생산되는 술이다. 금문 고량주는 중국과 대만의 전쟁 상황 속에서 태어난 술이다.
⑫ 공포심을 이겨내고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술이 바로 금문 고량주다. 당시 진먼섬의 방위사령관 이었던 후롄 장군이 진먼섬에서 직접 술을 빚고 이걸 주민들과 군인들이 마시면서 공포심을 이겨낸 술이 금문 고량주다. 1992년도 까지 금문도에 계엄령이 사라질 때까지 군에서 만들다가 그 이후에 민간으로 이관이 되었다. 그냥 제 정신으로 버틸 수 없으니까 일종의 진통제 금문 고량주로 취해서 버텨야 했다. 우리나라도 군부대 주변에 양조장이 많다. 그걸로 유명해진 막걸리가 포천 막걸리, 이동면에 이동 막걸리, 일동 막걸리가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