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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후집 제12권
●서(書)
○잔치에 참석케 한 데 대해 최 상국(崔相國) 종준(宗峻)에게 사은하는 편지 도읍을 옮기던 해에
죽었다.
다음처럼 모(某)는 머리를 조아리고 상국(相國)에게 글을 올립니다. 모(某)는 어제 부름을 받고
영광된 자리에 참석하였다가 밤에 수레 위에 쓰러져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사한 은혜 깊이 명심하는 바입니다. 다만 취중에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미치광이의 옛 태도가 다시 발작했던걸까요.
옛 서울에서 여기로 옮긴 이후로는 사대부집들이 창졸간에 술을 빚을 겨를이 없으므로, 웬만한
술을 어쩌다가 간혹 만나기도 합니다만, 좋은 술은 아예 바랄 수조차 없는 실정이온데, 상국께서
주신 술은 독하고도 맛이 있었으니, 비록 백일 동안에 아홉 번 빚은 술이라 할지라도 그 술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찍이 술에 익숙하지 못했다가 이와 같은 술을 마셨으니, 취하지 않으려
한들 취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또한 관현(管絃)의 소리와 같은 것도 이 땅에서만 들어보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어디서나 들어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연전 폄류(貶流)된 이래로 관현의 소리라고는 들어보지 못하여
우울한 심정을 달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요전에 갑자기 생가(笙歌)와 소적(簫笛)의 우렁찬
소리를 듣게 되니 - 원문 2자 빠짐 - 비록 냉담한 서생(書生)일지라도 목석 같은 심장이 아닐진댄
그 소리를 즐겨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관현은 모두가 품질이 뛰어나고 불러온 악관들도 모두가 한때의 명수였으니, 어찌 - 원문 1자
빠짐 - 들리고 - 원문 1자 빠짐 -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성악(聲樂)에 대해서 비록 공부한
일은 없습니다마는 천성이 본래 성악 듣기를 좋아하므로 그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들먹거렸으니 가소롭습니다.
상국께서는 저에게 일찍이 맛보지 못했던 것을 먹여 주시고 또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 주시어 매우
즐겁게 해 주셨으니, 평생에 처음 흥겨운 일로 아마 후일에는 저번 날과 같은 때가 없을 듯합니다.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조석으로 축수할 뿐입니다.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아 머리가 무겁고 손이 떨려서 글씨가 엉망이니 매우 황공하옵니다. ……
[주C-001]도읍을 옮기던 해 : 1232년(임진) 즉 고려 고종 19년 7월에 몽고의 침략으로 인하여
강화(江華)로 도읍을 옮겼다. 당시 이 상국은 65세였다.
上崔相國 宗峻 謝宴書 移都年
右某頓首呈相國左右。某昨蒙寵召。參赴華筵。迨夜方倒載還家。感荷之情。深所銘刻。但不省醉中導
何等語也。狂奴舊態復發耶。且自舊京移此已來。凡士大夫家倉卒未暇醞釀。故賢或罕逢。値聖非望。
今相國所賜。旣冽且旨。雖十旬九醞。所不敢較也。以未嘗慣飮之口。飮如此之酒。雖欲勿醉。得乎。
又若絲竹之聲。非唯此地之未聞也。僕自前年流貶已來。猶不聞一絲一竹孤彈隻弄之音。鬱悒無所陶寫
久矣。今忽聞笙歌簫笛之交激난001。▣▣雖冷淡書生。非木腸石心。能不樂乎。其一絲一竹。品皆奇
絶。而所召伶官。皆一時名手。則得不난002▣於耳而난003▣於骨耶。況僕之於聲樂。雖未得自工。性
本嗜聽。聽之不覺搖肩。可笑哉。相國旣啖以口所未嘗之味。又樂以耳之所嗜之聲。以此侑歡。平生酣
暢。想後日莫今日若也。未知何以報之。但朝夕祝壽而已。酒猶未醒。頭重手顫。下筆草草。不任惶懼
之至。云云。
[난-001]激 : 激下二字缺
[난-002]不 : 不下一字缺
[난-003]而 : 而下一字缺
○송광사주(松廣社主) 선사(禪師) 몽여(夢如)에게 부치는 편지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 저는 전번에 세속의 잡된 일을 이지식(頤知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지식으로 말하면 바리때 하나로 지내는 중일 뿐인데 제가 그에게 무슨 기대를 걸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다만 제가 염치가 없어서 직접 대화상 장하(大和尙丈下)께 말씀드리지 못하므로,
혹 그의 입을 빌면 대화상 장하께 대충 알려지리라는 것을 기대했을 뿐입니다. 서생의 크게 염치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하여 이지식의 편지를 받은 결과, 그가 보내 준 물건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넘쳤습
니다. 비록 그의 편지에는 자신이 보낸 것이라고 말했지만, 필시 대화상 장하의 주선으로 보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물건을 삼가 받아 돌아오매 감사한 마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니하였더라면,
근래에 매우 호번한 유가(儒家)의 경비를 지탱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 세상을 구제하는
대법왕(大法王)이 아니라면 어찌 이처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편지로는 뜻을 다 전하지 못하오니
황공하고 황공합니다. 오직 법(法)을 위하여 몸 보전에 유의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寄松廣社主禪師夢如手書
右啓。僕曩以塵雜細故。達于頤知識者。頤老特一鉢浮屠耳。予安有所冀而乃爾耶。以顔厚不得逕達於
大和尙丈下。庶或藉其舌。略聞于左右耳。書生之大寡廉恥如此。果蒙頤老手簡。其所送物件。大過始
望。雖於其簡以自送爲辭。知必出於大和尙方丈。祗領已還。不勝感荷。不然。儒家之經費。比來頗甚
繁浩。殆不得堪支也。噫。非救世大法王。疇及是哉。書意未悉。惶恐惶恐。惟冀爲法珍重。
○이지식(頤知識)에게 답하는 편지
모(某)는 아룁니다. 법체(法體)가 편안하심을 알게 되니 기쁘고 기쁩니다. 제가 전번에 세속의
잡된 일로 장하(杖下)께 말씀드린 것은, 사주 대화상(社主大和尙)께 말씀을 잘 전달하여 동당
(東堂)의 경비를 조금 도와서 일이 잘 이루어지게 해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보내 주신
물건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넘쳤습니다. 이것은 실로 비구(比丘)들의 입에서 이야기되어 사주
(社主)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어려운 부탁을 하게 되매〉 처음에는 매우
부끄러웠었는데, 결국 승락을 해 주시니 끝내는 매우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축수할 뿐입니다. 법을 위하여 몸을 아끼시기 바랍니다. ……
[주D-001]동당(東堂) : 식년과(式年科)나 증광시(增廣試)를 말한다.
答頤知識手簡
某啓。伏審法履淸勝。欣抃欣抃。僕曩以細事冒黷于丈下者。庶或善爲之辭。微達于社主大和尙。以小
助東堂經費。加一簣於九仞耳。所惠過望。是實出比丘之口。而成社主之心者也。褁十重之鐵甲。始也
甚慙。承一諾之黃金。終焉失喜。何感如之。祝壽而已。伏惟爲法善嗇。云云。
○송광사주에게 답하는 편지
모(某)는 아룁니다. 이달 1일에 보내 주신 편지를 받고 법체가 편안하심을 알게 되니, 한없이
기쁩니다.저는 전년에 사세가 부득이하여 부탁 드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너무도 지저분한 것이기 때문에 황공하여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 지식에게 넌지시
알렸을 뿐이었는데, 이내 법왕 장하께서 보살(菩薩)의 크게 보시(布施)하는 뜻으로써 깊은 은혜를
베푸시어 유문(儒門)의 대사를 이루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감명은 지금도 오히려 골수에 박혀
있습니다.
그때에 왔던 사람이 늦게 돌아가게 되어 답서를 매우 늦게 올리게 되었으므로 죄책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뜻밖에 장하께서 다시 편지를 보내어 원만히 위로해 주시고, 게다가 사실에
지나친 칭찬으로 하늘까지 추어올리셨으니, 이것은 못난 제가 어찌 감당할 바이겠습니까.
저는 비록 모둔(耄鈍)하나 멀리서 장하의 명성을 들어온 지 이미 오랩니다. 그러나 직접 수업하지
못하게 됨을 항상 한스럽게 여기지만, 한갓 이런 뜻만을 품고 있을 뿐 감히 스스로 말씀드리지
못하였는데, 장하께서 먼저 제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는 말씀을 하셨으니,
분에 맞지 아니한 말씀이라, 한편 놀라고 한편 감격합니다. 그러나 장하의 말씀은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장하와의 관계는 실로 자연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높은 산의 흰 구름
속에 은둔하여 도를 닦는 분이 세속의 선비를 알지 못하는 것은 자연한 이치이온데, 무슨 한스러
움이 있겠습니까.
저로 말하면, 나이도 늙었으니 마땅히 벼슬을 팽개치고, 가서 장하를 뫼시는 것이 불가한 일이
아닌데도 뜻처럼 되지 않으니, 직접 수업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시기가 늦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대화상 장하께서는 천리를 멀다 않으시고 항시 서찰로 정서(情緖)를 곡진하게 보내시니,
저는 매양 서찰을 대할 때마다 장하를 직접 뵙는 것과 같아 조금이나마 이것으로 자위를 할 뿐입
니다. 이것은 또한 제가 다행히 법주와 한 세상을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때로 자애
(自愛)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答松廣社主手書
某啓。今月九日。忽承慈旨。備省法體動用。嘉勝萬順。欣抃倍切。僕於前年。勢有不獲已而冒浼者。
然事極塵累。故惶恐不能直達。但微扣于頤老耳。尋蒙法王丈下。以菩薩大布施之意。流暢深恩。俾得
辦儒門大事。其爲銘感。至今猶在骨髓中矣。其時緣來人廻緩。奉謝大晚。方俟罪責。不意丈下復枉珍
緘。慰訊周至。申之以過情之褒。抗之於雲霄之上。是豈蕞然所敢當哉。僕雖耄鈍。尙逖聽淸風爽韻者
久矣。然常以未親炙爲恨。徒齎此志。偶未敢自達。而丈下乃先及以不識僕面爲恨之辭。非分之語。且
驚且感。然丈下之言。似爲大過。僕之於丈下。信自然之意也。何者。靑山白雲肥遁卓行者之不識俗士。
理固出於自然矣。何恨之有哉。如僕者。年亦老矣。當掛冠早謝。往陪甁錫。不爲不可。而反不如意。
則其以不親炙爲恨。理則然矣。但言之晚耳。然大和尙丈下。不以千里爲迂。常以書札曲通情緖。僕每
蒙來敎。宛若親覿。粗以此自慰耳。是亦予之幸與法主忝同一世故也。惟冀爲時自愛云。
○돈유 수좌(敦裕首座)에게 답하는 편지
아룁니다. 모(某)는 모월 모일 시자(侍者) 모(某)가 이르는 편에 하서(下書)를 받아, 법체가 만복
(萬福)하심을 알게 되어 매우 위로됩니다. 접때 부탁하신 두 가지 일은 일일이 여쭈었습니다.
겸하여 보내 주신 해소(海蔬)와 모모한 물건들을 받고 나니, 매우 감격됩니다.
근자에 들으니, 법왕 장하께서 나이가 많은 것을 핑계하시어 다시는 서울 땅을 밟을 뜻이 없다
하신다니, 참으로 그렇습니까? 참으로 그러신다면 목마르게 사모하는 소자(小子)의 심정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방소(方所)에 구애없이 노니는 대도자(大道者)의 뜻이 아닙니다.
소자가 바라는 것은, 간단한 행장으로 잠깐 이 땅을 밟으시어 새 서울의 양상이 어떤가를 보시
면서 하루 동안 서울에 머무신 뒤에 한가한 구름이 산봉우리로 돌아가듯 유연히 떠나시더라도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잘 재량하시기 바랍니다. 운운.
答敦裕首座手簡
啓。某月日。侍者某至奉手敎。伏審法體萬福。頗慰傾佇。所諭兩段事。一一承稟。兼蒙辱貺海蔬某某物
件領訖。深感深感。近聞法王丈下。以大耄爲辭。殊無意復蹈京塵。信然乎。若爾。非特乖小子渴仰之情。
亦非大道者之遊方無礙之意也。所冀以一筇一鉢。暫履玆地。閱新京態樣何若。而雖一日流潤京師。然後
悠然如閑雲返岫。去也庸害乎。惟法鑑裁之。云云。
○돈유 수좌에게 답하는 편지
아룁니다. 모(某)는 근일에 하서를 받아 법체가 만안하심을 알게 되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이에 앞서 편지를 올려서, 법왕께서 서울 땅을 밟지 않으심에 대해 규간(規諫)하였는데, 이제 하서
에는 그에 대한 뜻을 보이지 않으셨으니, 아마 그 편지가 들어가지 않은 듯합니다.
부탁하신 것은 모두 여쭈었습니다. 저도 또한 늙고 병들었으며 벼슬에서 물러날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뜻과 같이 된다면 폭건(幅巾)과 단갈(短褐) 차림으로 가서 장하를 모시고 우울한 회포를 토로
하는 것이 마땅하나 신병이 이와 같으니 그렇게 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결혼을 시키지
못한 자식이 있으니, 상평(向平)의 뜻이 없지 않습니다. 흉중의 착잡한 생각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법왕께서 서울에 오지 않으신다면 일생에 뵐 기회가 없을 것이니 겸해서 이 뜻을 진중하게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총거(悤遽)하여 자세한 말씀 드리지 못하니 못다한 말씀은 이 뒤에 다 드리
기로 하겠습니다. 오직 법체가 만안하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운운.
[주D-001]상평(向平)의 뜻 : 자녀의 성혼을 다 마치는 일. 동한(東漢) 때 상장(向長)은 자가 자평
(子平)인데, 자녀의 성혼을 다 마치고 명산을 찾아 놀았다. 《後漢書 逸民列傳》
同前小簡
啓。某日奉慈緘。備諳法體萬順。稍慰傾渴。前此寄尺牘。以法王不蹈京師爲規。今蒙來敎。不以其意
廻示。想其書未達也。所諭皆祗稟。僕亦迫老病。方有乞退之心。若果如志。以幅巾短褐。往奉杖屨。
一瀉鬱懷宜矣。然疾恙如此。其復與未。猶未可知。加之一子有未婚者。不能無向平之志。胸中塵累。
可勝言哉。若法王便不至輦下。則竟一生無見期。宜兼炤此意毋輕也。怱遽未詳。俟後悉陳。惟冀自嗇。
云云。
○시랑(侍郞) 이수(李需)에게 주는 편지
월 일에 모(某)는 이군(李君) 족하(足下)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지어 주신 문집 서문을 이제
받으니 기쁘고 감격합니다.
대저 문집 서문이란 한 문집의 선구적(先驅的)인 것이며, 범위를 확대해서 작자의 쌓인 지식을
소개하는 것이니, 작자를 위한 표적(標的)이기도 합니다. 옛사람의 문집에 반드시 서문이 있었던
것은 대개 이 때문입니다.
나의 아들 함(涵)이 나의 시문을 거두어 전집(全集)을 엮고 나서 나에게 묻기를, “문집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서문을 앞에 붙여야 하겠는데 누가 적당합니까?”하기에, 나는 부자(夫子 이수
(李需)를 가리킴)를 내세우면서 말하기를, “나의 마음을 알고 나의 시를 아는 분은 이군(李君)
모(某)일 뿐이다. 이 분을 두고 그 누가 적당하겠는가?”하였더니, 함(涵)이 이 말을 듣고는
부탁했는지, 얼마 뒤에 좋은 글을 받아서 이미 책머리를 빛냈습니다. 그 글을 보니 문체가 찬란
하고 사지(辭旨)가 정밀하여 족히 나의 문장을 윤색하고 나의 명성을 드날렸으나, 너무 과다하
므로 천박한 자의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옛날 이양빙(李陽氷)은 이백(李白)의 종숙(從叔)이고, 이한(李漢)은 한유(韓愈)의 사위였으니,
그들은 친척의 문집을 서문하는 데 있어서 모두 혐의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백과 한유는 천하의 웅재(雄才)였으니, 비록 이백을 ‘천재독보(千載獨步)’라고 추어
올리고, 한유를 ‘주정공사(周情孔思)’라고 밀어올렸으나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혐의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부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대는 나에 대해서 혐의를 받을 처지가 아닙니다. 만일
공정하게 서문을 한다면 나의 시문 같은 것은 억눌러야 하지 추어올려서는 아니되고, 배척해야지
밀어올려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서문을 지으면서 도리어 억누르고 배척한다는 것은 이치상 만무하다고 한다면,
그대의 입장에서는 문집이 지어진 그 본말을 말하는 것만도 족할 터인데, 어찌해서 지나친 칭찬의
말로 추어올리고 밀어올렸습니까. 마치 무염(無鹽)ㆍ모모(嫫母)를 꾸미듯이 나로 하여금 이태백과
한퇴지의 수레와 나란히 달리게 하려 하였으니, 어찌 과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의심
하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 양빙과 이한은 친척 관계인데도 결국 세상 사람의 혐의를 받지 않았던 것은 능히 친척에게
공정하게 했기 때문이요, 그대는 소원한 관계인데도 사람들의 의심을 면치 못할 듯함은 소원한
처지에 사(私)를 썼기 때문이구료. 내가 그대에게 이처럼 큰 누를 끼쳤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
습니까.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나의 시문이 서문으로 인하여 썩지 않고 전해진다면 또한 영광일 것이니,
감히 깊이 명심하지 않겠습니까. 서문을 받은 뒤 오랜 병으로 인하여 즉시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못하여 황공합니다. 재배하고 삼가 아룁니다.
[주D-001]무염(無鹽)ㆍ모모(嫫母) : 무염은 추부(醜婦)로 유명한 전국 시대 제(齊) 나라 무염읍
(無鹽邑)의 여자이자 제 선왕(齊宣王)의 정후(正后)인 종리춘(鍾離春)이며, 모모(嫫母)
는 황제(黃帝)의 넷째 비(妃)로 역시 추부였다. 여기서는 자기 글을 낮추어 추부에 비유한
것이다.
與李侍郞需書
月日。某頓首李君足下。昨蒙所貺集序。奉戴欣感。夫所謂集序者。一集之先驅也。引而伸之。導作者
之蘊。爲之標的者也。古之人所以有集而不可無序者。蓋亦以此耳。兒子涵旣收拾予詩文。緝成全集。
因問之曰。集已成。宜有以序。而冠之者誰當之。予以夫子應之曰。知吾心知吾詩者。獨李君某耳。捨
玆誰可。涵方以此微逮。而尋蒙落玉唾珠。已光于編首矣。觀其文彩曄然。辭旨精緻。足以潤色我文字。
飛揚我名聲。侈乎非淺薄所敢當也。昔李陽氷。是李白之從叔也。李漢。乃韓愈之子壻也。其於集序。
皆不得無嫌者也。然李白韓愈。天下之雄才也。則雖抗白以千載獨步。躋韓以周情孔思。世不爲嫌。而
猶以爲歉也。吾子之於僕。無嫌者也。若以公而敍之。則如僕之詩文。宜抑而不可抗。宜斥而不可躋者
也。然爲人作序。而反抑且斥。萬無此理。則爲子計者。第言集之所作因由本末。亦足矣。胡奈以溢美
之辭。抗之躋之。畫無鹽飾嫫母。欲使僕齊驅於太白退之之駕。則得不爲大濫乎。人不得無疑矣。噫。
陽氷李漢。以親也而竟不落世之嫌者。以能公於親故也。吾子以疏也。而似未免乎人之疑者。以其私於
疏故爾。僕之厚累吾子如此。尙何言哉。雖然。萬一吾詩文。以序故傳之不朽。亦榮也。敢不深銘。自
得序。緣久痾。不以時奉謝。惶恐。再拜謹白。
○동년(同年)인 노생(盧生)에게 주는 편지
모(某)는 아룁니다. 며칠 전 서액(西掖)에서 숙직(宿直)하고 그 이튿날 정오를 지나서 막 물러나려
다가 전날 밤에 부쳐온 편지를 보았습니다. 적힌 내용은 다 알았습니다만 미처 다 보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측연(惻然)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근래에 국고가 비어 제때에 봉록을 받지 못하므로 자주 곤궁한 경우를 만납니다.
이것은 그대가 아니면 자세히 모를 것입니다. 상상컨대 그대 집의 오리 소리가 내 집보다 크므로
이렇게 부탁해 온 듯합니다. 이는 바로 매성유(梅聖兪)가 말한 ‘큰 가난이 작은 가난에게 구걸
하게 되니 어찌 서로 웃을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니, 그대가 나에게 구걸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있고 없는 것을 자세히 알 수 없으므로 누가 덜 가난하고 더 가난한가를
따지지 않겠습니다.
간직한 쌀 약간을 보내니, 적게 보냈다고 나무라지 말기를 바라오. 남은 말은 보류해 두었다가
상면할 때 하기로 하겠습니다.
[주D-001]오리 소리 : 애들의 울음소리를 말한다.
與同年盧生手簡
某啓。昨直西掖。明日過午漏方退。閱前夕所惠小簡。具悉來意。未及周覽而心已惻然矣。僕亦近以邦
廩虛耗。不以時給俸。故屢遭在陳。此非子所不詳知也。想君家鵝雁之聲。有甚於吾家。所以及之也。
此梅聖兪所謂大貧丐小貧。安得不相嗤者也。宜乎子之丐我也。吾不可以有無爲解。不爲之緩急也。罄
倒橐貯白粲若干餉之。幸勿以些少爲誚。餘留面宣云。
○이 학사(李學士)에게 부치는 편지
모(某)는 아룁니다. 어제 취한 것이 아직 깨기도 전에 갑자기 편지를 받았습니다. 놀라서 일어나
펼쳐 보았더니, 근래에 지은 나의 시문을 요구한 내용이었을 뿐입니다.
내가 근래에 지은 것들은 모두 정신이 흐리거나 취중에 지은 것이어서 볼만한 것이 못되고 더구나
지금 난고(亂藁)가 마치 흐트러진 실같아서 권질(卷帙)을 이루지 못하므로 즉시 부쳐 드리지
못합니다.
만일 끝내 요구하신다면 아들을 시켜서 권질을 이룬 뒤에 부쳐드려도 늦지 않겠으므로 대충 말씀
드립니다. 재배하고 삼가 아룁니다.
寄李學士小簡
某啓。昨醉未醒。忽奉手簡。驚起披閱。則索予近所著詩文者已。予比來所著。皆昏眊及深醉中所作也。
不足以觀之也。況今皆亂藁。如絲之棼然。未得成秩。故未敢卽寄耳。若要之。當使兒子緝之成秩。然
後寄之未晚也。草草不宣。再拜謹白。
○문 대선사(文大禪師)에게 부치는 편지
모월 모일에 모(某)는 머리를 조아리고 아룁니다. 법후(法候)가 안녕하신지요.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제가 일찍이 듣건대, 장하(杖下)께서 본사(本寺)가 적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실 수가 없어서, 수제자인 각 선사(覺禪師)가 머무는 운문사(雲門寺)로 가시다가
중로에서 적을 만나 사세가 매우 급박하였는데, 적 가운데 다행히 양반의 아들이 있어서,
그가 부득이해서 붙잡힌 자들을 여러 모로 구제하여 놓아준 뒤에야 화를 면하고 그 절로 돌아오
시게 되었다 하니, 매우 기쁩니다. 길이 멀어서 즉시 위문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죽을 죄를 지었
습니다. 저는 이런 뒤에야 법덕(法德)의 수승(殊勝)함이 이와 같음을 알고 매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사께서 그 절에 가신 지 얼마 안 되어서 제가 재상이 되었으므로 선사로 하여금 저를
직접 보지 못하게 된 것이 한스럽습니다.
전에 부탁한 일은 일일이 여쭈어서 재가를 받은 뒤에 준비하여 인편에 부치려 하오니, 다시 염려
마시고 법을 위해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운운.
寄文大禪師手簡
月日。某頓首啓。伏惟法候淸勝修眞。瞻戀萬萬。僕曾聞丈下以本寺爲賊藪。未得歸安。將至上足覺禪
師所住雲門寺。於半路逢賊。勢甚窘迫。賊中有兩班子不得已被驅逼者。多方救解放之。然後獲免得歸
其寺。喜抃良深。路遠未卽問慰。死罪死罪。予然後知法德之殊勝如此。甚歎甚歎。師歸其寺未幾。
予得宰相。恨不令師親見之也。前所諭事。一一祇稟。取後准備。因風奉寄。幸不復慮。爲法自愛。
云云。
○문 대선사에게 답하는 편지
모(某)는 아룁니다. 제가 일전에 짤막한 편지를 멀리 연계(蓮階)에 부쳤으나, 거리가 천리 정도나
멀므로 아직도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이제 부쳐 주신 편지를 받고 보니 그
편지가 이미 전해졌음을 바야흐로 알았고, 겸해서 법체(法體)가 편안하심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
니다.
아, 저는 일찍이 장하께서 거처를 잃고 남의 집에 우거하시게 된 데 대해서 슬프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들으니 주인인 각선사(覺禪師)는 바로 장하의 수제자이고, 절도 또한 제일
큰 절이라고 하니, 필시 그 조석 봉양(奉養)을 거르지는 않을 것이므로 그 한 가지 일만은 기쁩
니다. 부탁하신 것은 모두 여쭈었습니다. 오직 법을 위해 몸조심하시기 바라면서 삼가 아룁니다.
[주D-001]연계(蓮階) : 절을 가리킴. 연화세계(蓮花世界), 연대(蓮帶)라는 말이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答文大禪師小簡
某啓。予前以短簡。遙寄于蓮階。想千里遼遠。至今猶未呈似。今蒙所寄手緘。方諳已達。兼認法體佳勝。
欣抃欣抃。噫。予未嘗不悲丈下之失穴離巢。託人僑居。然聞主人覺禪師。乃丈下之上足也。寺亦弟一
大伽藍。則其朝夕奉養。必不至匱。是獨一段喜事耳。所諭一皆稟受。伏惟爲法珍重。謹白。
●표(表)
○교방(敎坊)이 팔관(八關)을 하례하는 표(表)
운운. 조종(祖宗)께서 행하시던 것을 따라 팔관(八關)의 아름다운 자리를 마련하여,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니 온 나라의 환심(懽心)이 같습니다. 기쁨이 천지에 가득하고 경사가 조야에
넘치나이다.
삼가 생각하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신도(神道)로 가르침을 베풀고 태평으로 성업(成業)을 유지
하며, 무위의 정치를 펴시매 자신은 하는 일 없으나 백성은 절로 다스려지고, 생활이 안락하매
백성들은 임금의 덕으로 그렇게 된 것임을 모르고 지내나이다.
지금 중동(仲冬)에 거룩한 예식을 크게 여니, 상서로운 징조가 마구 이르러 자라는 산을 이고
거북은 그림을 졌으며, 온갖 악기를 다 벌이니 용은 피리를 불고 범은 비파를 타나이다.
첩(妾) 등은 궁중에 처한 몸으로 뜰에 나아가 구주(九奏)의 소리를 들으니, 균천(鈞天)의 음악을
꿈에 듣는 듯하옵니다. 만수무강을 빌어 올리되 숭악(嵩岳)의 환호를 간절히 기약하나이다. 운운.
[주C-001]교방(敎坊)이 팔관(八關) : 교방은 고려 시대 기생의 학교, 팔관(八關)은 토속신(土俗神)
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인 팔관회(八關會)의 약칭이다.
[주D-001]자라는……졌으며 : 《열선전(列仙傳)》에 “신령스런 큰 자라가 봉래산(蓬萊山)을 등에
지고 춤추었다.”라는 말이 있고, 《서경(書經)》홍범(洪範)에 “우(禹) 임금 적에 신귀
(神龜)가 도(圖)를 지고 하수에서 나왔다.”는 말이 있으므로 감대(感戴)하는 뜻을 나타
낸 것이다.
[주D-002]용은……타나이다 : 이 말은 장형(張衡)의 서경부(西京賦)에 “흰 범은 비파를 타고 푸른
용은 피리를 분다.[白虎鼓琴蒼龍吹篪]”라고 보이는데, 이선(李善)의 주에 의하면,
범이나 용은 가면(假面)이라 한다.
[주D-003]구주(九奏) : 음악을 아홉 번 연주하는 일. 구성(九成)과 같다.
[주D-004]균천(鈞天)의……듯하옵니다 : 균천은 천상(天上)의 음악인 균천광악(鈞天廣樂)의 약칭.
진 목공(秦繆公)의 꿈에 천상에 가서 옥황상제가 균천광악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한다.
《虞喜志林》
[주D-005]숭악(嵩岳)의 환호 : 임금의 수(壽)를 축수하는 말. 한 무제(漢武帝)가 숭악에 오를 때
옆에 있던 이졸(吏卒)들이, 숭악이 세 번 만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漢書 武帝紀》
敎坊賀八關表
云云。率祖攸行。講八關之嘉會。與民同樂。均萬國之懽心。喜洽神祗。慶騰朝野。恭惟聖上陛下。神
道設敎。大平持盈。拱手垂衣。我無爲而人自化。安土樂業。帝有力而民何知。爰屬仲冬。大開盛禮。
休祥沓至。鼇戴山而龜負圖。廣樂畢張。龍吹篪而虎鼓瑟。妾等身棲紫府。迹簉彤庭。聞九奏聲。似入
鈞天之夢。奉萬歲壽。切期嵩岳之呼。云云。
○최종번(崔宗藩)이 판소부사(判小府事)를 제수한 데 대해 사은하는 표 이상 두 표는 옛날에 지은
것인데, 지금 습득하였으므로 전집(前集)에 싣지 못하였다.
운운. 직급은 경상(卿相)과 비등하고 관청은 천부(泉府)라 칭하오니, 분수를 헤아리매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므로 명을 받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기국이 용렬하고 성품이 또한 혼매한데, 외람되이 과거에 올라 유림(儒林)
에 붙이게 된 것이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일찍이 벼슬에 오르게 된 것은 거의 세록(世祿)의 은택
을 힘입은 것입니다. 선대적부터 항시 내정(內庭)을 모셔왔으므로 매일 용곤(龍袞)의 빛을 우러러
보게 되니 더할 수 없는 영광이었으나, 아미(蛾眉)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되어 뜻에 자못 부족함
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시대를 만나 비로소 법종(法從)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5년 동안 제고(制誥)를 맡았지만 아직까지 전려(典麗)의 문장을 써 본 적이 없고,
3년 동안 형법을 맡았지만 단상(端詳)의 판결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직무 수행을 제대로 못하여
오히려 비방을 받을까 염려되는데 다시 궁궐에서 은명을 내리시어 특별히 자급을 3품을 높여 주셨
나이다.
이는 대개……천박한 자들까지도 모두 포용하시고 총명을 널리 쓰시려는 때문에 이 우둔한 자질을
가진 신으로 하여금 위로 은택에 참여하게 한 것이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본업을 더욱 연마하여 처음 먹은 마음을 통절하게 가다듬지 아니하겠습니까.
저의 재주를 다 쏟게 된다면, 혹 한 잔의 물도 큰 바다에 보탬이 될 것이옵고, 절개를 변하지
않는다면 곧은 소나무가 추운 날씨를 견디오리다. 운운.
[주D-001]천부(泉府) : 군수품의 출납을 맡은 관아.
[주D-002]아미(蛾眉)의 반열 : 당(唐) 나라 관제에서 양성(兩省)의 공봉관(供奉官)이 동서에서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을 아미반(蛾眉班)이라 하였다. 《夢溪筆談 故事》
[주D-003]법종(法從) : 임금의 거가(車駕)이니, 즉 근신(近臣)을 뜻한다.
崔宗藩謝判小府事表 已上二首。皆昔所著。今方拾得。未附前集。
云云。秩視月卿。署稱泉府。循涯未副。聞命若驚。伏念臣器本庸虛。性惟昏蔽。濫收科第。反慙附贅
於儒林。夙涉班聯。蓋藉餘膏於世祿。自從先代。常侍內庭。每瞻龍衮之光。榮則多矣。未側蛾眉之列。
意頗慊如。及値聖辰。始參法從。五年掌制。訖無典麗之詞。三載司刑。莫有端詳之聽。自惟曠職。猶
恐興譏。復墮眷於九重。特崇資於三品。此蓋云云。摠包微薄。務廣聰明。故令樗散之資。與沐露濡之
澤。臣敢不益硏素履。痛礪初心。旣竭吾才。勺水儻裨於海大。不渝其節。貞松堪耐於歲寒。云云。
●잡저(雜著)
○수미산(須彌山)에서 담선회(談禪會)를 열 때에 참석한 학인(學人)들이 조사(祖師)의 진영(眞影)
을 뵙는 데 대한 문(文)
운운. 마음을 전하는 자를 조(祖)라 하고 법맥(法脈)을 이은 자를 손(孫)이라 합니다. 달빛이 밝듯
유영(遺影)이 흰 깁에 완연히 있으매, 높은 덕을 우러러 뭇 중들이 모두 뜰에 늘어서서, 사모하는
성의를 다하여 영령의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운운.
談禪會須彌山。參學等謁祖師眞文。
云云。傳心曰祖。嗣脈者孫。白月朗然。遺影宛存於紈素。高山仰止。群髡共造於庭階。第勤拜扣之誠。
覬荷恩靈之庇。云云。
○성주산(聖住山)에서 담선회를 열 때에 참석한 학인들이 조사를 뵙는 데 대한 문
삼사납(三事衲)을 떨쳐 입고 구름 돌고 물 흐르는 곳에 와서, 일판향(一瓣香)을 가지고 단청으로
꾸며진 영정(影幀) 아래에 절하오니, 밝게 살피시어 산문(山門)을 힘껏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운운.
[주D-001]삼사납(三事衲) : 납(衲)은 중이 입는 가사를 말하며, 삼사는 5조(條)가사ㆍ7조가사ㆍ
9조가사를 말한다. 즉 여러 층의 중들이 많이 모였다는 뜻이다.
[주D-002]일판향(一瓣香) : 일판심향(一瓣心香)의 준말이니, 선승(禪僧)이 남을 축복할 때 쓰는
향인데 전의하여 성경(誠敬)ㆍ열복(悅服)의 마음을 비유하여 쓰기도 한다.
同前聖住山。參學等拜祖師文。
拂三事衲。出從雲水堀中。拈一瓣香。來拜丹靑影下。仰惟道鑑。曲護山門。云云。
○가지산(迦智山)에서 담선회를 열 때 조사를 뵙는 데 대한 문 이상 세 글은 모두 미관(微官) 시절
에 지은 것인데, 지금 비로소 습득하였다.
멀리 운장(雲嶂)을 떠나 바야흐로 옥경(玉京)을 밟으셨나이다. 나다니기 싫어하시는 걸음인데도
발바닥이 부르트는 것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오셨으니 제자들은 머리를 두 번 조아리고 모두
경배(敬拜)의 정성을 다했나이다. 조사께서는 거의 제일의 산문(山門)으로 하여금 먼저 무한한
법음(法蔭)을 입게 하시고, 선석(選席)에 오르시어 종승(宗乘)을 빛냈나이다. 운운.
[주D-001]종승(宗乘) : 다른 종파의 교의(敎意)를 여승(餘乘)이라 한 데 대하여 자기 종파의
교의를 종승이라고 한다.
同前迦智山。拜祖師文。已上三首。皆微官時所著。今方拾得。
邈離雲嶂。方蹈玉京。足重趼而來。未息倦遊之步。首再至曰稽。共勤敬拜之誠。庶令第一山門。
先被無邊法蔭。飛騰選席。焜耀宗乘。云云。
○수암사(水嵓寺)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기 위해 결사(結社)하는 데 대한 문
대고(大孤)는 말씀드립니다. 빈도(貧道)는 일찍이 화엄(華嚴)에 몸을 바쳐 그릇 선불장(選佛場)에
올랐는데, 얼마 뒤에 명예에 얽매여서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여 드디어 명리(名利)를
팽개치고 사방을 다니면서 진리를 닦고 학문을 강론할 장소를 구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대저 부도(浮屠)를 복전(福田)이라 하는 것은 대개 중생(衆生)의 복을 마치 좋은 밭에 곡식을
심듯이 심기 때문입니다. 소승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않고서, 복을 심을 마음을 가졌으나
복을 심을 장소가 없으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녔을 뿐입니다. 항시 이것을 자탄한 끝에 뜻을 같이
해서 도를 닦을 벗들과 함께 산암(山庵)에 기거(寄居)하여 매일 화엄(華嚴)을 강론하고 보현행
(普賢行)을 닦은 지 얼마 안 되어 이 소식을 듣고 모인 자가 무려 5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정하게 거처할 장소가 없어서 모두 산곡(山谷)에 흩어져 거처하게 되었고, 때로는 혹
시주(施主)의 청에 따라서 한데 모여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동지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2~3명이 거처할 곳이면 8척(尺)의 방도 족하지만, 50여 명이
한데 모여서 학문을 강론할 것 같으면 넓은 사찰이 아니고서는 마땅치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겠
는가.”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들으매, 추밀 상국(樞密相國) 박공(朴公) 문비(文備) 이 일찍이
고성(固城)의 원으로 나가 있을 때 창건한 수암사(水嵓寺)가 그 고을의 동북쪽에 있어,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흐르고 뒤로는 높은 산을 등져 수림이 우거졌으므로 신수(薪水)가 풍족하니,
중들이 살기에 알맞은 곳인데, 상국이 전지(田地)로 삼을 수 있는 넓은 땅을 그 절에 들여놓고,
거기다가 또 사노비(私奴婢) 10여 명과 약간의 곡식을 들여놓아 자모(子母)의 법을 써서 그 비용
이 영영 끊어지지 않기를 기약한다 하니, 우리들이 모일 곳은 이만한 땅이면 족합니다.
이것을 상국에게 청해야 마땅할 것이나 상국을 평소에 뵌 적이 없으므로 직접 찾아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소승은 이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곧장 상국의 집에 찾아가서 그 의견을 다 말씀
드렸더니, 공(公)은 말하기를, “내가 이 절을 창건한 것은 지원(志願)한 바가 얕지 않았네.
그러나 능히 향화(香火)를 주관할 만한 진인(眞人)과 정려(精侶)를 만나지 못했었는데,
이제 자네가 와서 나의 마음과 딱 맞는 의견을 이야기하니, 이는 어찌 숙세(宿世)의 소원이 같은
소치가 아니겠는가?”하였습니다. 이날로 임금에게 아뢰어서 제가(制可)를 얻은 다음에 드디어
우리 도반(道伴) 중의 혜자(惠資)라는 사람을 사주(社主)로 삼았으니, 이 조사도 역시 일찍이
화엄업문(華嚴業門)에서 선불장에 오른 사람인데, 이제 명리를 버리고 유방(遊方)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함께 약속하기를 ‘해마다 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를 하되, 평상시에는 초저녁에
경(經)을 강하고 밤중에는 좌선(坐禪)하고 낮에는 장소(章疏)를 강하여 깊은 뜻을 열심히 연구
하는 것으로 일정한 규식을 삼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성수(聖壽)를 축수하고…… 지원(志願)이
많았는데, 이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비록 우리들이 환향곡(還鄕曲 열반(涅槃)을 뜻한다)을 부른
이후라도 도를 닦으려는 자들이 계속 와서 항시 법륜(法輪)을 전하기를 바랍니다. 제불 다천
(諸佛多天)은 살피소서.
[주D-001]선불장(選佛場) : 불조(佛祖)를 선축하는 도량(道場). 즉 선당(禪堂)ㆍ승당(僧堂)
[주D-002]보현행(普賢行) : 한 가지의 행실을 닦으면 일체의 행실을 갖춘다는 화엄 원융(華嚴圓融)
의 묘행(妙行).
[주D-003]동안거(冬安居)와 하안거(夏安居) : 음력 10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15일까지의 겨울
석달 동안과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여름 석달 동안은 중들이 외출하지 않고
일정한 처소에서 수행하는 일.
[주D-004]자모(子母)의 법 : 돈이나 곡식을 꾸어 주고 이식을 내는 것을 말함. 자는 이자(利子)
모는 원금인데, 그 예(例)는 1년에 이자가 원금의 2할을 넘지 않게 되어 있다.
水嵓寺華嚴結社文
大孤言。貧道早投華嚴。謬升選佛之場。尋念拘名。不可以如志。遂豁棄名利。飛錫四方。求所以修眞
講學之所久矣。且凡號浮屠爲福田者。蓋種群生之福。如種穀於良田耳。髡不揆庸愚。有種福之心。無
種福之所。棲棲遑遑。蓬轉萍泛而已。常以是自嘆。因與同志精修善友輩。寄居山庵。每講華嚴。修普
賢行。而未幾希風踵來者無慮五十餘人。然未有常棲之所。率皆散居山谷。時或因施主之請。迺聚作冬
夏安居而已。予謂同志者曰。如吾兩三人之所棲。雖八尺之房足矣。若與五十餘人同棲講學。則非寬敞
寺宇。未宜矣。如何而可哉。適聞樞密相國朴公 文備 嘗出守固城時所創水嵓寺者。在州之艮隅。前臨
澄溪。後負秀嶺。林藪幽邃。薪水贍足。宜釋子棲眞之地。相國迺以空曠陂澤可以爲田者納于寺。申納
私臧獲十殳난001。納穀若干。期爲子母之法。永永不絶。吾等所集。莫過斯地。宜以此請於相國。然
相國非素所謁知。似難於自進。髡於是包羞忍恥。徑造門屛。悉陳其意。公曰。予之創此寺也。志願不
淺。然未遇眞人精侶之能主張香火者。今聞子之來扣。若合符契。此豈宿劫同願之致然耶。是日。奏聞
於上。蒙制可。然後遂以吾道伴中名惠資者爲社主。是師亦曾於華嚴業門。登選佛場者也。今捨名遊方
如此。因共約每歲作冬夏安居。於常時則初夜講經。中夜攝念坐禪。晝講章疏。商酌耽味。用爲常式。
因以祝聖壽云云。志願多。今不具書。雖我輩唱還鄕曲已後。欲道輩之衮衮不絶。窮未來際恒轉法輪者。
惟諸佛多天鑑之。
[난-001]殳 : 殳疑數。
○ 달마(達磨)의 화상(畫像) 족자 위에 쓰는 문
대저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와서 마음을 동쪽에 밝혔으니, 무릇 마음을 구하는 자는 누가 조사
에게 절실히 사모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산인(山人) 모(某)라는 자가 있어서, 달마의 풍도를
높여 주야로 그의 도를 사모하고 그의 상(像)을 생각하여, 남을 시켜서 존상(尊像)을 그렸다.
그의 지원(志願)도 또한 번거롭지 아니하여 나에게 글을 지어서 간략하게 족자 위에 써 주기를
청한다. 나는 그가 너무도 간략하게 써 달라는 것을 괴상히 여기고 거짓말로, “또한 찬(贊)을
지어서 그 뒤에 붙이는 것이 좋겠는가?”하였더니, 그는, “좋기야 좋지만 족자가 좁으니 그
내력만을 기록하고 싶을 뿐이오.”하였다. 나는 그가 아주 간략하게 써 달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드디어 그의 뜻에 따라 대략 줄거리만을 적을 뿐이다.
書達摩畫像㡠額文
夫祖駕西來。心燈東燭。則凡求心者。孰於祖師。有不痛仰痛慕者耶。有山人某者。高達磨之風。夙夜慕
其道想其像。倩人畫尊像。其志願亦不煩。而求予爲文。略書㡠上。予怪其最略。佯謂之曰。亦作贊系
其後可乎。曰。美則美矣。緣㡠地窄。但欲誌其端由耳。予幸其至簡。遂從其志。粗書大槩耳。
○진 시황(秦始皇)이 주역(周易)을 태우지 않은 데 대한 논(論)
어떤 기록에, “진 시황이 천하의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하여 유생(儒生)을 묻어 죽이고
시서(詩書)를 불태웠으나,《주역(周易)》은 점치는 글이라 해서 그것만은 불태우지 않았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하늘의 뜻이요, 진 시황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가 하면, 진 시황이 이미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기 위하여 시서를 불태우고 유생
을 묻어 죽였다면 오경(五經) 중에《주역》보다 더 예지롭고 신묘한 것은 없는데, 어찌 이 책만
을 남겨 두어 도리어 백성을 신묘하게 하고 지혜롭게 했단 말인가.
만일 그가 점을 치기 위해서였다면 점이란 오직《주역》의 이치를 깊이 아는 자라야만 잘 할 수
있는 것이며,《주역》의 이치를 깊이 아는 자는 유자(儒者)의 유인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든
유생을 묻어 죽인 취지가 어긋난 것이다.
만일 사람은 그대로 두고 책만 없앤다면 다른 경서(經書)도 역시 불태워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든 시서를 불태운 취지가 어긋난 것이다.
또 하늘이 신비한 물건을 내었으니, 시귀(蓍龜)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를 마련하고 이어서 성인(聖人)을 내었다. 성인이 천명(天命)을 받고 나서 팔괘(八卦)를 연역
하고 건곤(乾坤)을 정하여 신명(神明)의 덕을 통하였으므로《주역》이 있게 된 것이다. 경(經)에, “
건곤이 이루어지면《주역》이 그 가운데 존립하게 되니,《주역》이 나타나지 않으면 건곤이 거의
종식될 것이다.”고 이르지 않았는가. 이것으로 본다면《주역》이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
하늘이 그를 없애려 했다면 애당초 내지 말아야 했을 것이고, 진실로 없애려하지 않았다면 어찌
진 시황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여, 시황으로 하여금 그것을 불태워서 천지의 도를 없어지게 하겠
는가. 이런 때문에 나는, “이것은 하늘의 뜻이요, 진 시황의 뜻이 아니었다.”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책과 마찬가지였을 터인데, 그것이 어찌 신명한 책이 되었겠으며 천지의
중요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주D-001]시귀(蓍龜) : 점칠 때 쓰는 시초(蓍草)와 거북. 시초는 줄거리를 잘라서 점칠 때 수를
계산하는 산가지로 사용하고, 거북은 껍질에 글자를 새겨서 그것을 불에 데워 터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吉凶)을 점침. 시초를 사용하는 방법을 서(筮)라 하고, 거북을 사용
하는 방법을 복(卜)이라 한다.
[주D-002]하도(河圖)와 낙서(洛書) : 하도는 복희씨(伏羲氏) 때 용마(龍馬)가 황하(黃河)에서
나오매, 그 등에 있는 무늬를 본받아 팔괘(八卦)를 그렸다는 것. 낙서는 하우씨(夏禹氏)
가 홍수(洪水)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글이 나오자, 그것을 연역하여 홍범(洪範)을
만들었다 한다.《周易 繫辭上》
秦始皇不焚周易論
傳有秦始皇欲愚天下黔首。坑儒生焚詩書。而以周易爲卜筮之書。獨不焚之。予以爲此天之意也。非秦
皇之意也。何以言之。秦皇旣欲愚黔首。而焚詩書坑儒士。則五經莫智莫神於羲易也。豈獨置此書。
乃反神其人智其民耶。若要其卜筮。則卜筮者。惟深於易者。然後能之也。深於易則儒之流也。然則向
之坑儒之意左矣。若存其人而亡其書。則他經亦爾。然則向之焚詩書之意戾矣。且天生神物曰蓍龜。申
之以河圖洛書。繼之以聖人。聖人受命而生。演八卦定乾坤。以通神明之德。於是乎有易焉。經不云乾
坤成則易立乎其中。易不可見則乾坤幾乎息矣。由此觀之。易者。生於天者也。天欲廢之。則如勿生。
苟不廢焉。則寧不勝一秦皇而使焚之。於以滅天地之道耶。予是以。曰是天之意。非秦皇之意也。不然。
與他書同矣。烏在爲神明之書。天地之用歟。
○당사(唐史)에 나타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데 대한 논
내가 당기(唐紀)를 보니 이런 말이 있다. “습유(拾遺) 후창업(侯昌業)이, 희종(僖宗)이 친히 정사
를 보지 않고 유희(遊戲)하는 일에만 힘쓰는 것을 지적하여 소(疏)를 올려서 극력 간하자, 희종은
그를 죽였고, 또 보궐(補闕) 상준(常濬)이 글을 올려서 ‘번진(藩鎭)의 세력이 너무 심한데도
오히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전형(典刑)을 떨쳐서 사방에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간하자,
희종은 또 그를 죽였다.”
두 신하의 말은 절직(切直)하다고 할 만하다. 그 말을 따르지 않는 것만도 족할 터인데, 죽이기
까지 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았는가. 전후 임금 중에 간신을 죽인 일이 왕왕 많이 있었지만,
이제 마침 희종기(僖宗紀)를 보았기 때문에 이 일만을 든 것이다.
또 걸(桀)ㆍ주(紂)가 간신(諫臣)을 죽인 일은 그의 악을 백세의 뒤에까지 드러낸 셈이라, 무릇
입이 있는 사람이면 매우 기롱하고 풍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세의 임금이 간신을 죽인 일은
비록 서책과 사서에 싣더라도 걸ㆍ주의 악을 드러내듯 그 포악을 드러낸 일이 적으니, 나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대저 곰이나 범이 사람을 물어 뜯는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나 다른 것이 물어 뜯는다면 사람들은 모두가 매우 이상하게 여긴다. 이것으로 본다면,
임금이 간신을 죽이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되나, 만일 악한 걸ㆍ주와 같은 경우가 아니면
괴이하게 여긴다. 희종은 당(唐) 나라 말기의 임금이다. 힘이 약하고 권세가 미약했으니, 비록 걸ㆍ
주처럼 악한 짓을 하려 했어도 할 수 없었는데, 오히려 간신을 죽였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보면
이상스럽지 않은가.
아, 한 광무(漢光武)는 한흠(韓歆)에게 그의 말이 절직한 것을 미워하여 그를 이미 고향으로 돌아
가게 하고는 또 뒤에 문책하여 죽였으니, 어찌 그렇게도 심한 짓을 하였는가. 고금을 통하여
대부분 한 광무를 성군(聖君)이라고 하는데, 성군이라는 이름을 듣는 자도 오히려 그렇거든 그
나머지야 말할 것 있겠는가. 사마광(司馬光)이 “그것이 인자하고 명철한 임금의 누가 된다.”
고만 하고 크게 지적해서 말하지 않은 것은 그를 성군이라 하여 숨긴 것인가. 나는 간신을 죽인
것보다 더 큰 악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악이 큰 덕을 덮을 만한데 어떻게 성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현군(賢君)이라고만 일컫는 것도 또한 족할 것이다.
[주D-001]한흠(韓歆) : 한흠은 자가 옹군(翁君)인데, 대사도(大司徒)로 있을 때 전공을 세워
부양후(扶陽侯)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천성이 직언(直言)하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임금 앞에서 흉년이 들 징조를 말할 때에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긋는 등 말이 매우 강절
(剛切)하였다. 그러자 한 광무는 그의 관직을 삭탈, 고향으로 돌려 보내고 다시 사신을
보내서 힐책하매, 흠(歆)과 그의 아들 영(嬰)이 모두 자살하였다.
唐史殺諫臣論
予見唐紀拾遺侯昌業以僖宗不親政事。專務遊戲。上疏極諫。帝殺之。又補闕常濬上書諫藩鎭大甚。猶
未之窹。宜振典刑。以威四方。上怒又殺之。二臣之言。可謂切直。而其不從亦足矣。殺之何甚。其前
後君之殺諫臣。往往多有。今適見僖宗紀。故此獨擧耳。且桀紂之殺諫臣也。暴其惡於百世之下。凡有
口者無有不深譏顯刺者。後之君之殺諫臣。雖載之書史。鮮有暴露其虐如桀紂者。予未知其故。夫熊虎
之咥人。人不以爲怪。而餘則人皆甚以爲異也。以此觀之。無道之君之殺諫臣。不足爲怪也。若其惡不
至如桀紂者。則是可怪已。僖宗。唐季之主也。力弱權微。雖欲如桀紂之惡。不可得也。而猶殺諫臣。
原其狀。不曰異乎。噫。漢光武之於韓韶。惡其言切直。旣放歸田里。又追責逼殺。又何甚耶。古今多
以光武爲聖。名聖尙爾。餘何足言哉。司馬光以爲仁明之累而不大言者。豈以聖而諱之耶。予謂惡莫大
於殺諫臣。其惡可掩大德。而何謂聖乎。謂之賢君。亦足矣。
○위앙전(衛鞅傳)에 대한 논
역사책을 상고하면 이런 일이 있다. “진(秦) 나라 장수 위앙(衛鞅)이 위(魏) 나라 공자(公子)
앙(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옛날에 공자와 나는 친하게 지낸 사이로 지금 와서 두 나라의
장수가 된 처지이니 서로 칠 수가 없다. 서로 만나서 즐겁게 술이나 마시고 파함으로써 진 나라와
위 나라를 편안하게 하자.’ 하매, 앙(卬)은 그 말을 수긍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위앙은 군병을 매복시켰다가 앙(卬)을 쳐서 위 나라의 군사를 멸하였다.”
나는 이것이 매우 의롭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록에 ‘전쟁에서는
혹 속임수를 쓸 수도 있다.’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옳을 것 같은데, 왜 매우 그른 일이라고
하는가?”하기에, 나는, “옛사람이 이른바 속임수를 쓴다는 것은 바로 병권(兵權) 상의 속임수요,
내가 그른 일이라 한 것은 바로 인간 관계의 속임수를 말한 것이다. 무엇을 병권 상의 속임수라
하는가. 이를테면 동쪽에서 소리치고 서쪽에서 나온다든가, 왼쪽은 실하게 하고 오른쪽은 허하게
가장한다는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양호(羊祜)가 기일을 미리 알리고 싸우던 것과
자범(子犯)이 원(原)을 칠 때에 신의를 보이던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병세(兵勢)가 혹 군색할 경우에는 간혹 속임수를 쓰는 것도 좋다. 이른바 인간 관계의
속임수라는 것은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는 것이나 항복한 군사를 속여서 죽이는 따위가 바로 그것
이다. 이것을 만일 위앙에게 비교한다면 일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간사함은 마찬가지다.
비록 나라를 위하여 적을 격파했다 할지라도 나는 취하지 않는다. 반면에 또 공자 앙은 대장인데
적의 말을 믿었다가 속임을 당하여 패하게 되었으니 어찌 그렇게도 지략이 좁고 얕았던가.
우리나라의 속담에 ‘적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데, 이것은 서인(庶人)의 말이다.
공자 앙은 나라의 대장이 되었는데 도리어 서인의 의견만도 못했단 말인가. 위 나라가 앙(卬)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였으니, 그 패한 것이 마땅하다. 대저 속임수는 일시적인 이익이요,
신의는 장구적인 계책이다.”하였다.
[주D-001]양호(羊祜)가……보이던 것 : 양호는 오(吳) 나라 사람과 싸울 때 상대에게 언제나 싸울
날짜를 미리 알리고 싸웠으며, 엄습(掩襲)하는 꾀를 쓰지 않았다 한다. 《晉書 羊祜列傳》
자범은 춘추 시대 진(晉) 나라 호언(狐偃)의 자(字). 원(原)이란 땅을 칠 때, 원의 첩자
가 와서 원이 항복하러 나온다는 것을 알리자, 부하들은 이를 요격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신의를 지키기 위하여 30리를 후퇴하였더니, 과연 원이 나와서 항복하였다 한다.
《春秋左傳 僖公 25年》
衛鞅傳論
按史。秦將衛鞅遺書魏公子卬曰。往與公子驩。今爲兩國將。不可相攻。可與面相見。樂飮而罷。以安
秦魏。卬以爲然。會飮。鞅伏甲攻卬滅魏軍。予以爲此甚非義也。或曰。傳有兵或用詐謀。則此亦似可。
而何謂之甚非也。予曰。古人所謂用詐者。迺兵權之詐也。吾所以非之者。乃人奸之詐也。何謂兵詐。
如聲東出西。左實右虛者之類是已。此亦猶未若羊祜之剋日乃戰。子犯之伐原示信者也。然兵勢或窘。
則間或用之可也。夫所謂人詐者。迫人於險。紿殺降卒之類是已。若比之衛鞅。則事雖不同。其姦則類。
雖爲國敗敵。吾不取也。抑又公子卬。大將也。信敵人之言。見紿被敗。何智略狹淺之至是也。
吾邦俗諺亦云。敵者之言。何可聽也。是庶人之言也。公子卬爲國大將。而反不如庶人之意耶。魏使卬
將兵。宜其敗也。夫詐者。一時之利也。信者。久長之計也。
○검교군기소감 행상서공부낭중 사자금어대(檢校軍器少監行尙書工部郞中賜紫金魚袋) 오군(吳君)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무술년 10월에 공부 낭중(工部郞中) 오군(吳君)이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였다. 아, 오군은 참
으로 고인의 곧은 유풍을 지닌 자이다. 혹 벼슬이 뜻에 맞지 않은 것으로 불만을 삼은 적도 있다.
그러나 나는, “선비가 시골에서 태어나 도보로 서울에 와서 비로소 출세하여 내외의 관직을
거쳐서 5품까지 올랐으니, 이것은 누구나 다 얻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불만이라고 하겠는가.”
말하였다. 오군의 휘는 천유(闡猷)요, 본관은 해주(海州)다. 족보를 보면 대대로 모두가 고을
아전이었다. 아버지 모(某)는 그 고을의 부사호(副司戶)였고, 외조부모도 역시 그 고을 사람
으로 권사호(權司戶)였다.
오군은 일찍부터 학문이 넓고 문사(文詞)를 잘했다. 기유년에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여 합격
하고 드디어 태학에 들어갔으며, 또 갑인년에 과거를 보아 합격하였다. 과거를 보러 갈 때 꿈에
거북 한 마리를 잡았다. 그래서 이름을 일귀(一龜)라고도 하였다. 방방(放榜)하기 하루 전에
시관(試官)의 꿈에 거북 한 마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함께 공부한 사람들은 모두 급제하였는데,
나 혼자만 버림을 받았다.”하였다. 시관이 모두 놀라 깨어서 버려진 중에서 가만히 찾아내어
병과(丙科)의 우두머리로 뽑았는데, 방(榜)이 발표될 때에 보니 바로 오군이었다. 대화(大和)
병인년에 박주 통판(博州通判)에 보직되었다가 체직되었더니, 드디어 정우(貞祐) 무인년에 연희궁
녹사(延禧宮錄事)에 제수되었으며, 이어서 대관승(大官丞)ㆍ상서도사(尙書都事)를 지냈는데,
모두 군직(軍職)을 겸하였다. 조금 뒤에 경성부 주부(慶成府注簿)에 전직되었고, 정
해년에는 권지각문지후(權知閣門祗候)에 제배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고부군(古阜郡)의 수령으로
나갔는데,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너그럽고 화평함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백성들은 그것을
편리하게 여겼다. 경인년 겨울에는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로 부름을 받았고, 여러 번 전직
하여 상승봉어(尙乘奉御)ㆍ공부원외(工部員外)ㆍ시례부(試禮部)ㆍ공부 낭중(工部郞中)에 이르렀다.
향년 71세에 졸하였다. 그가 졸할 때 또한 병이 없이 홀연히 서거하였다.
오군은 사람됨이 근신하고 진실하며 겉치레가 없었으니, 참으로 진실한 유자(儒者)였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떻게 이름과 녹을 보전하며 또한 유종의 미를 이처럼 거둘 수가 있었겠는가.
앞서 좌우위 낭장(左右衛郞將) 안 필공(安弼公)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수승(壽升)은 과거에 급제하고 현령(玄齡)은 지금 신호위 낭장(神虎衛郞將)이며, 딸은 모관(某官)
모(某)에게 시집갔다.
부인 안씨가 훙(薨)하자 다시 중랑장(中郞將) 김의광(金義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
는데, 아들 현성(玄成)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딸은 하나는 모관에게 시집가고 하나는
모관에게 시집갔다. 부인 김씨기 졸하자, 다시 공부 낭중(工部郞中) 신유보(申惟甫)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거기서는 자식이 없었다.
장사 지낼 때에 그 아들 현령 등이 내가 일찍이 오군과 같은 해에 진사(進士)에 올랐다고 하여
와서 매우 간절히 명(銘)을 요구하므로, 나는 부득이하여 다음과 같이 명한다.
근면한 그 분은 옥처럼 온화하고 화살처럼 곧았다. 행동에서는 뜻을 가다듬었으니 굽어보나
우러러보나 부끄러움이 없다. 벼슬이 기국에 맞지 않았으나 또한 어찌 개의했으랴. 울창한 저
산에는 소나무와 가래나무 빽빽하네. 편안도 하고 좋기도 하니 그대가 거처하기에 마땅하고
후손에게도 이로우리라.
檢校軍器少監行尙書工部郞中賜紫金魚袋吳君墓志銘 幷序
龍集著雍淹茂南呂之月。工部郞中吳君。卒于私第。嗚呼。眞古之遺直者歟。有或以官不稱意爲慊者。
予謂之曰。士起鄕閭。徒步入京師。刷翮濯鱗。歷官中外。至登五品。斯非人所皆得者。何謂慊哉。
君諱闡猷。海州人也。版籍世皆爲州吏。考某爲州副司戶。外祖某亦其州人也。爲權司戶。君早博學工
文詞。越己酉歲。擧司馬試中之。遂入大學。又於甲寅。擧春場中之。將赴試也。夢捉一龜。因假以爲
名。先放榜一日。試官夢一龜告曰。所與一時成功輩。皆已第矣。而予獨見擯。試官皆驚悟。於擯中暗
求之。擢爲丙首。及榜出。迺君也。大和丙寅。補博州通判。及替。遂於貞祐戊寅。除延禧宮錄事。因
歷大官承,尙書都事。皆兼軍簽。俄遷慶成府注簿。丁亥。拜權知閣門祗候。明年。出守知古阜郡。爲
理尙寬和。人便之。庚寅冬。以右正言知制誥見召。累遷尙乘奉御工部員外試禮部工部郞中。卒享年七
十一。其卒也。亦無疾恙。倏然而逝。君爲人謹諒無華實。恂恂然坦率儒者也。不然。何完名保祿。亦
克有終如是耶。先娶左右衛郞將安弼公女。凡生二男一女。曰壽升。登第。曰玄齡。神虎衛郞將。女嫁
某官某。安氏薨。更娶中郞將金義光女。生一男二女。男玄成。祝髮爲禪者。女一適某官。一適某官。
金氏卒。復娶工部郞中申惟甫女。無息。及葬。子玄齡等以予嘗與君同年登進士。故來乞銘且勤。予不
得已而銘之曰。
亹亹夫子。溫如玉兮直如矢。行已礪志。俯仰無愧。官不偶器。亦豈介意。有鬱其山兮。植植松梓。
孔寧且臧兮。宜子之寢位。以利于後嗣。
○고(故) 조의대부 사재경 우간의대부 보문각직학사지제고 사자금어대(朝議大夫司宰卿右諫議大夫寶
文閣直學士知制誥賜紫金魚袋) 이군(李君)의 묘지명 병서(幷序)
이군은 휘가 세화(世華)요, 자가 거실(居實)이며, 관향은 진주(眞州)다. 아버지의 휘는 모(某)인데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이요, 어머니 해양군부인(海陽郡夫人) 김씨(金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딸이다.
이군이 어릴 적에 그 아버지가 비록 장관(將官)이었지만, 그의 천성이 영오(穎悟)하므로 필시
스스로 통달할 것임을 알고 일찍이 글을 배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이군은 학문에 힘쓰고 작문을
공부하였다.
무오년 봄에 성균시(成均試)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임술년에 와서 과거를 보아 병과(丙科)에
뽑혔다. 희종 때에 다방(茶房)에 관적을 두었더니 얼마 뒤에 공사(公事)로 인하여 면직되었고,
뒤에 다시 내시(內侍)에 관적을 두었더니, 마침 강종(康宗)이 붕(崩)하자 규례에 따라 면직되었다.
이군은 지방관을 지내지 않고 녹을 받기 위한 벼슬을 얻었으니 즉 견주 감목(見州監牧)에 제수
되었다. 병자년에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에 전보되었더니, 정축년 가을에 나아가서 정융분도
(定戎分道)가 되었는데, 원수(元帥) 조공(趙公)의 신임을 받았다. 이군이 체직하게 되자 조공은
표(表)를 올려서 막하(幕下)에 머물게 한 다음 일을 맡기고는 그를 매우 귀중히 여겼다.
조공이 조정에 돌아와서는 이군을 힘껏 천거하여 대영서 승(大盈署丞)에 제수되었다.
경진년 봄에 나아가서 백령진장(白翎鎭將)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그 고을에는 예부터 향교(鄕校)가 없었는데 이군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치니, 몇 해 안 가서 모두 인재를 이루었으며, 공거(貢擧)에 응시한 자까지 있게 되매,
온 고을이 그를 사모하였으며, 여러 번 글을 올려서 그의 아름다움을 포장하였다.
임기가 차자 신호위 녹사(神虎衛錄事)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다시 도병마(都兵馬)를 겸하게 되었
으며, 이어 여러 번 전직하여 내원서령 비서랑(內園署令祕書郞)이 되고, 갑신년 여름에는 중서주서
(中書注書)에 전임되고, 그해 겨울에는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제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전임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 받았으며, 얼마 안 가서 우사간 지제고
(右司諫知制誥)로 전임되었다. 정해년 봄에는 나아가서 남원부(南原府)의 원이 되고 그 이듬해에는
동주(東州)의 원으로 전임되었는데, 또 정치를 잘한다고 알려졌다. 경인년 봄에는 시어사 금자
(侍御史金紫)로 부름을 받았고, 그 이듬해 가을에는 나아가서 경상도(慶尙道)를 안찰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몽고(蒙古)가 국경을 크게 침범하므로 5도(道)의 염안사(廉按使)가 모두 군사를 거느
리고 구원하러 가게 되었는데, 이군은 재촉해서 군사를 정돈하여 다른 도보다 먼저 약속된 시기에
달려갔고, 또 군사를 지휘하는 것도 마치 노숙한 장수처럼 하니, 이를 듣는 사람은 위대하게 여겼다.
임진년에는 예빈소경 어사잡단(御史雜端)에 제배되었다. 이해 여름에 국가에서는 오랑캐의 침범
으로 인하여 도읍을 옮기려 하였는데, 광주(廣州)는 곧 중도(中道)의 큰 진(鎭)이라 해서 조정
의론으로 적임자를 간택하게 되어, 이군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이해 11월에 몽고의 대군이 와서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몇 달 동안을 온갖 계교로 공격하였는데,
이군은 주야로 수비를 튼튼히 하고 수시로 응변하는 일을 그들이 전혀 예측 못할 정도로 하였
으며, 혹은 생포하고 죽인 수효가 매우 많으므로, 오랑캐는 불가한 일임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갔다. 광주는 남쪽 길이 요해지에 해당하니, 이 성이 함락되었다면 기타의 성은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군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위태했을 것이다.
옛날 장순(張巡)이 수양(睢陽)을 지키는 일로 말하면 비록 가상히 여길 만한 의열(義烈)은 있었
지만, 오히려 몸이 죽고 성이 함락됨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이군은 능히 죽음으로써 지켜 살 땅
으로 돌이켜서 마침내 몸도 보전하고 성도 완전하며 만인을 온전히 살렸으니, 그 공렬(功烈)은
장순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모두들 생각하기를, 곧 은총을 입어 부름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오히려 3년이나 그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그것은 아마 조정의 의논이, 이군에게 수어(守禦)하는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바꾸기를 어렵게 생각한 것인가?
을미년 겨울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예부시랑 우간의대부 보문각직학사 지제고(禮部侍郞右諫議大
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로 불러들였으니, 대개 그의 공에 대해 상을 준 것이었다. 얼마 뒤에 이부
시랑(吏部侍郞)으로 전임되고 간의(諫議)의 직은 그대로 가졌다. 정유년 여름에 또 나아가서
청주산성(淸州山城)을 진수(鎭守)하게 되었는데, 이미 그가 수어(守禦)에 능숙한 것을 안
몽고군은 끝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그해 겨울에 조의대부 사재경(司宰卿)에 제배되고 간의의
직은 그대로 가졌다.
무술년 8월 보름에 집에 있으면서 아들과 사위 등을 불러, 달 구경하면서 술을 마시며 조용히
즐기는 중, 막 잔을 들다가 갑자기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더니 새벽에 서거하였다. 아, 이상하도다.
어찌도 이처럼 그리 빨리 떠났을까?
그는 사람됨이 위의와 자질이 심수하고 확실하며, 이미 글로써 세상에 이름이 나고 또 행정에나
전략에 있어서도 모두가 능란하였으니, 온전한 인재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정승이 되지 못하고
졸하였으니 이것은 명이 아니겠는가?
먼저 예빈소경(禮賓少卿) 허경(許京)의 딸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부인이 졸하매, 재차 흥위위장군
(興威衛將軍) 설모(薛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6녀를 낳았다.
아들 수진(守眞)은 남원부 통판(南原府通判)이고, 수년(守年)은 안경부 녹사(安慶府錄事)며, 수심
(守深)은 아직 미관(未冠)이다. 큰딸은 당후관(堂後官) 유경로(柳卿老)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모관 모에게, 셋째 딸은 모관 모에게 시집갔으며, 세 딸은 아직 어리다.
장사지낼 적에 아들 수년과 사위 경로 등이 행장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을 지어달라고
요구하니, 이는 영원히 전하려 함이다. 나 역시 일찍이 이군과 아는 사이라, 의리상 사양하기
어려우므로 드디어 다음과 같이 명한다.
남쪽 지방 광주(廣州)라는 곳은 바로 요충지라. 임금이 의지하는 곳이므로 전국을 수호하듯
하는데 당시 우리 이군이 나아가서 방백(方伯)이 되었네. 오랑캐가 포위할 제 운명을 알 수 없었
는데 이군은 기운으로 눌러 담소하며 적을 물리쳤네. 몸을 돌보지 않고 난을 구제하니 이처럼
공렬이 드러났고, 온전히 만인을 살리니 저처럼 음덕을 끼쳤다. 세상 중론이 떠들썩하기에 정승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등급을 따라 올라가는 것 또한 더딘 걸음이었네. 하늘이 조금도 수명을 빌려
주지 않아 아침 이슬처럼 갑자기 사라졌네. 얼기설기 얽힌 일들 뉘라서 그 까닭 물어보리. 찬란한
그 공명 천고에 빛나리니 구구하게 명을 새기는 것은 큰 붕새의 한 깃에 불과하네.
[주D-001]장순(張巡)이……일 : 장순은 당(唐) 나라 때 사람. 천보(天寶) 연간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군사를 이끌고 수양(睢陽)에 이르러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합세하였다. 이때 적장
윤자기(尹子琦)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는데, 장순은 군사들을 격려, 고수하고
하루 20차례 싸웠으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故朝議大夫司宰卿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賜紫金魚袋李君墓誌銘 幷序
君諱世華。字居實。系出眞州。考諱某。檢校大將軍。母海陽郡夫人金氏。某官諱某之女也。君方妙齡。
父雖將官。知其性穎悟必自達。早令從學。由是力學工屬文。越戊午春。赴成均試中之。至壬戌。擧春
場擢丙第。貞廟朝。籍茶房。俄以公事免。後復籍內侍。會康廟崩。隨例見免。君不經外寄得祿仕。除
見州監牧。丙子歲。遷補都兵馬錄事。丁丑秋。出爲定戎分道。爲元帥趙公所器。及見替。公表留幕下。
委以事甚重之。公還朝力薦。除大盈置承。庚辰春。出爲白翎鎭將。理邑廉平。此郡舊無鄕校。君首創
之。集吏人子弟敎以學。不數年。皆得成其才。至有應貢擧者。一郡慕之。屢騰狀褒美。秩滿。除神虎
衛錄事。俄復兼都兵馬。因累歷內園署令祕書郞。甲申夏。遷中書注書。其冬。拜右正言知制誥。俄遷
殿中侍御史。賜緋魚袋。未幾遷右司諫知制誥。丁亥春。出守南原府。明年。移守東州。又以理最聞。
庚寅春。以侍御史金紫見詔。明年秋。出按慶尙州道。會蒙古大寇邊。五道廉按使皆領兵赴援。君促理
兵。先諸道赴期。又持軍如宿將。聞者韙之。壬辰。除拜禮賓少卿御史雜端。是夏。國家因虜寇將遷都。
以廣州迺中道巨鎭。朝論揀汰。遣公出刺。冬十一月。蒙古大兵來圍數十重。以百計攻之至數月。公日
夜繕守備。隨機應變。出其意表。或俘殺甚衆。虜知不可。遂解圍去。州當南路要會。此城陷則餘可知
已。微君幾殆矣。昔張巡之守睢陽也。雖義烈有足嘉者。猶未免身死城陷矣。君能守之以死。而廻之生
地。卒得身保城完。全活萬人。則功烈可謂優矣。時皆以爲亟被寵見喚。而猶留三年者。朝議豈以公有
守禦之能。而重易其人耶。乙未冬。以朝散大夫禮部侍郞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徵還。蓋賞功
也。俄遷吏部侍郞。仍諫議。丁酉夏。又出鎭淸州山城。公旣閑於守禦。蒙兵竟不敢犯。冬。拜朝議大
夫司宰卿。仍諫議。戊戌仲秋望。在家召子壻等。翫月飮酒。從容甚樂。方擧杯忽仆不起。至曙而逝。
嗚呼異哉。何其大速也如此。公爲人偉儀表。資沈遂난001確實。旣以文鳴世。又吏幹虎略。皆所游刃。
是可謂全才者。然未相而卒。玆非命歟。先娶禮賓少卿許京女。卒。再醮興威衛將軍薛某女。凡生男三
人女六人。男曰守眞。南原府通判。曰守年。安慶府錄事。曰守深。未冠。女一適堂後官柳卿老。次適
某官난002。次適某官某。三女尙幼。其葬也。子守年壻卿老等具行狀。求予爲銘。圖有以不朽者。予亦
嘗與君有舊。理難可辭。遂銘之曰。
南紀曰廣。衝要是扼。帝所倚重。如護全國。時惟我公。出作方伯。方虜之圍。寄命不測。能以氣壓。
談笑却敵。橫身濟難。顯烈如此。全活萬人。陰德若彼。物論僉騰。期以三事。計級而升。亦跬步耳。
天不少借。奄若朝露。糾纏紛軋。孰詰其故。爛然功名。暉映千古。刻銘區區。大鵬一羽。
[난-001]遂 : 遂疑邃
[난-002]官 : 官下當有某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