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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스크랩 107.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1)
선교사 추천 0 조회 50 15.04.29 15: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07. 그리스도의 임재, 동행 (1)

 

 

하나님의 임재, 나타나심

다른 표현으로 ‘성령의 임하심’ 이라고도 하는데,

성공과 물질적 복에 빼앗겼던 설교 주제들을 하나씩 되찾아야 되겠다. 

 

 

1. 아브라함의 임재 체험    

   -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시는가?       http://blog.daum.net/ygbhygbh/7310650

   

2. 야곱의 임재 체험        

    2-1.  마하나임의 하나님               http://blog.daum.net/ygbhygbh/6785681

    2-2. 인생을 바꾼 새벽 씨름           http://blog.daum.net/ygbhygbh/6820479

 

3. 모세의 임재 체험  

    -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4. 여호수아의 임재 체험   

    - 하나님은 과연 내 편이신가?         http://blog.daum.net/ygbhygbh/7049114

   

5. 다윗의 임재 체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하나님 한 분만 모시고 만족했다...

                                                     http://blog.daum.net/ygbhygbh/7113662

 

 

 

 

◈1. 아브라함의 임재 체험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시는가?

 

아브라함의 일생을 '하나님의 나타나심, 임재'의 관점에서 본

신선한 설교입니다. 또한 '나는 어느 수준에 와 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너무 '물질의 복' 관점에서 아브라함을 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은 고난과 저주와 문제 가운데 살고 있다.

우리는 그런 문제와 고난을 해결받기 원한다. 예배 때도 그것을 사모한다.


예배를 통해서든지, 개인기도시간을 통해서든지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시면, 임재를 충만히 체험하면

그 문제가 어떤 형태로든지 다 해결된다. (일동 아멘!)


▲성경에 욥의 고난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많은 고난, 어두움, 질병이 있었다.

욥 자신도, 왜 자기가 그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지 못했다.

기도하고 부르짖었지만 깨닫지 못했다.

욥의 친구들도 많은 의견을 내고, 욥이 반론하면서 많은 의견을 나누었지만

그 고난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 과정 가운데,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시자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믿는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저도 15년 전에, 선교지로 가서,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늘 기도하는 제목이

‘하나님, 제게 임재해 주시고, 제게 나타나 주셔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시옵소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하나님은 잘 나타나 주시지 않으셨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다’는 가장 최근의 체험이 언제인가?

(혹시 수 년 된 것 아닌가?)


성경에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의 체험을 살펴보자.

하나님은 자주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주셨다.

이런 임재의 체험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점점 성숙되어 가는데...

우리도 아브라함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줄 믿는다.



◑1st. 하나님의 임재 : 갈데아 우르를 떠났을 때 (회개할 때)


▲부르심 : 세상을 떠나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주님이 먼저 부르셨기 때문이다.

부르심에는, 세상을 떠나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이 있다.


아브라함은 갈데아 지방의 우르에 살고 있었다.

갈데아 우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큰 두 강 사이에 둘러싸인 도시다.

갈데아 우르는 다시 말해서 세상이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둘러싸여 살았다.


▲세상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아브라함이 갈데아 우르를 떠나려면 반드시 그 강을 건너야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으려면, 세상을 반드시 떠나고, 그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세상을 떠나기란 쉽지 않다.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 본토 친적 아비 집을 떠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은 우르를 떠났지만,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하란에 멈추었다. 창 11:31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비로소 아브라함은 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오게 된다.


▲세상의 강을 따라 올라가서 하란에 머무는 사람들

하란은, 우르에서 유브라데 강을 거슬러 올라간 상류 지역에 위치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다는데 세상의 강을 건너지 못하고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산다. 하란의 아브라함과 같다.


하나님을 따르지만, 그 강을 건너지 못하는(않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부르셨지만, 세상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삶에는 고난과 어려움이 계속되고, 증대된다.


▲아브라함이 체험한 1st 임재

- 아브라함이 하란을 과감하게 떠날 때 : 세상을 떠날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진짜 떠날 때,

그래서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첫 번째로 그에게 나타나 주셨다.

아래 성경을 읽어보시라. 이것은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나타나심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 12:7


▲세상을 떠날 때, 그 강을 과감하게 건널 때

신앙생활에 처음으로(1st) 주님을 체험하는 순간이 내게 찾아온다.


어떤 이는 금식기도하며 회개하며 눈물 콧물 흘리며 주님을 만나기도 하며,

어떤 이는 회개를 통해 세상을 끊고, 주님을 만나기도 한다.


중생(거듭남)의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기도 한다.


마음에 기쁨이 충만해지고, 나를 붙잡고 있던 귀신의 영들이 떠나가며,

또한 질병도 치료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중간지역, 회색지대 하란에 머물고 있다. 혹은 양다리 걸치고 있다.

과감하게 강을 건너지 않고, 강을 따라 (하란으로) 올라갈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가나안)의 유업도 못 받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라(가나안)의 축복을 점점 누리게 되는데... 


오늘 철야기도에 참석한 많은 성도들도 과거에 이런 회개의 체험이 있다.

과거에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반드시 있다.

그러나 이런 임재의 체험은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현재도 계속되어야 할 줄 믿는다.



◑2nd 임재 - 롯에게 양보했을 때 (주님 뜻에 따를 때)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 : 실족

사람들은 가나안에 이르면, 모든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쉽게 부어질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의 보니,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 도착했는데,

얼마 후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된다.

아브라함은 생존을 위해 다시 애굽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세상을 건넜지만, 그래서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왔지만,

세상의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도 세상의 방법을 또다시 취하기 쉽다.

다시 세상(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애굽 땅을 그리워하였듯이...)


▲심적 고통이 따르다 : 후회

아브라함이 그랬다. 애굽에 내려가서 생존을 위하다 보니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그 덕분에 집도 얻고 재물도 얻었다. 창 12:16


그런데 세상에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물질적 어려움은 해결했더라도,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맞아, 내가 하나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인내했어야 했었는데...’

‘내가 애굽(세상)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후회를 많이 했으리라 본다.


우리도, 신앙생활 중에, 중생한 후에도 한 두 번씩 세상에 내려가기도 한다.

그 때 약간의 즐거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브라함처럼 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어...’ 후회하게 된다.


▲실패를 통한 교훈 얻음

‘내 눈에 좋아 보여서 내가 선택했지만, 그것은 결코 좋지 않구나!’ 후회한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안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그것을 사모하게 된다.


‘내가 하나님 음성 듣고 움직여야지, 내 멋대로 했다가는 큰일 나는구나!’

- 를 깨닫는다.


‘가나안에 왔다가 다시 세상에 내려가면 이렇게 어려움, 고통을 당하는구나!’

- 를 깨닫는다.


그래서 실패 후에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게 된다.

다시 믿음의 생활로 되돌아온다.

이제 내 주장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굳게 다짐한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실패를 통해, 믿음이 좀 더 성숙되었다.


그 증거가 아래 사건에서 드러나는데...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목축업에는 목초지와 물이 필수 요건이다.

그래서 서로 좋은 땅과 우물을 갖기 위해 다투니까 덕이 안 되었다.


“롯, 너와 나는 핏줄이다. 또 믿음의 형제끼리 서로 싸우는 것은 안 좋다.

네가 먼저 선택해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애굽의 실패를 통한 체험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이라고 선택해 봐야 - 그것이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내 축복은 오직 하나님이 선택해서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내가 움켜쥔다고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를 애굽에서 깨달았었다.


그렇다. 축복은, 내가 움켜쥐고 남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다. 그래서 겸허해진다.

아등바등 남들과 싸워서 쟁취하려고 하지 않는다.


▲저는 카자흐스탄 선교지에서 큰 도시, 수도(알마타)에서 사역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싸우고 다투었으면 쟁취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허하게 마음을 비웠다.


결과는 내 소원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소도시(침켄트)에 계속 남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주님은 놀라운 축복을 그 소도시에 주셨다.

거기서 사역이 잘 되어 신학교도 세우고, 큰 교회도 이루고,

당회장님을 모시고 성회도 개최하는 복들을 누리게 되었다. 


만약 내 스스로 선택해서 큰 도시로 나갔더라면, 그런 복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선택이 아니라, 주님의 선택을 겸허히 따랐더니

내 원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것이 큰 축복이 된 것을 체험했다.


▲2nd 임재 - 겸허히 내 뜻을 포기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스스로 복 받으려고 애쓴다. 경쟁을 불사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겸허해져서, 기꺼이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4-15


▲내 뜻을 버릴 때 - 임재가 나타난다.

‘이제 나를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때 - 임재가 나타난다.

그리고 동서남북을 보이시며, 보다 넓은 비전을 허락해 주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이익과 이권 등으로 남과 다투면서

롯처럼 좋은 쪽을 취하겠다는 사람은 - 임재를 체험하기 어렵다.


자기도 싸울 수 있지만, 싸우지 않고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지만,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겸허히 따르는 삶을 살 때 - 하나님은 나타나 주신다.

우리는 임재의 놀라운 영광을 체험하며 살게 된다. 



◑3rd 임재 - 롯을 구해주었을 때 (영혼구원 사역을 할 때)


성경을 ‘임재/말씀하심’의 관점에서 순서대로 읽어보면

롯을 구해준 다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또 나타나 말씀하셨다.

창세기 15장 전체가, 임재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14장에서 조카 롯을 구해준 다음에 일어났다.


롯을 영적으로 마귀에게서 구해주었을 때, 다시 말해 복음의 사역자가 될 때

-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주신다.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타인의 영혼을 돌보며 사는 것이다.

구역장, 조장, 장로, 집사 등 각종 직분을 가지고 섬기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고난과 문제들을 놓고 대신 중보기도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헌신하며 살 때 - 하나님은 나타나 주신다.


네 왕에게 붙잡혀간 롯처럼

세상 마귀에 붙잡혀서 절망과 고통을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우리 교구에, 구역에, 직장에, 이웃에 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며

상담하며, 전도하며, 교회로, 주님께로 인도할 때

그들의 영혼을 구할 때 - 하나님이 나타나 주신다. 창 15장처럼.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 15:1

 

▲당시 아브라함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지만 - 아들이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데, 단 한 가지가 부족할 때가 있다.

꼭 기도를 응답받아야할 중요한 것 한 가지씩 - 각자에게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기도를 응답받지 못 한다.

부수적인 작은 문제들은 쉽게 응답을 받아도

나에게 가장 큰 문제, 결정적인 문제는 - 응답을 못 받을 수 있다.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처럼.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구하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다 보면

주님은 어느 날, 그 큰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비전을 주신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창 15:2, 4.



◑임재의 중단 - 이스마엘을 낳자 (육신으로 봉사하자...)


▲인내심의 고갈

아브라함은 영혼구원 사역 중에 후손의 약속을 받았다.

그렇다면 더 열심히 봉사하며, 인내하며 기다렸어야 했는데...


아내 사라가 먼저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래서 주님의 약속을 받고도, 그는 아내의 요청을 덥석 수락한다. 16:2

그래서 하갈을 취하고는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 때 아브라함은 86세였다. 16:16


▲아브라함이 99세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17:1

앞서 75세~85세까지 수차례 나타나신 하나님이  12:4

86세~99세까지 13년 동안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으셨다.


왜?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는 불순종 때문에!



◑4th 임재 - 은혜로, 육신이 죽음 


하나님은 그 동안 답답해하시다가 99세에 드디어 은혜로 나타나 주셨다.

어떤 의미에서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에게 징계의 기간이었다.

오직 은혜로, 사랑으로,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나타나 주셨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7:1

너는 할례를 받으라 17:11-14


▲할례의 언약을 맺으심

할례는 구약에서 죽음을 의미한다.

포피를 베면 피가 나오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그것은 침례(세례)를 의미한다.


저는 선교지에서 침례를 줄 때, 수세자를 일분 정도 물 속에 누른다.

그러면 20-30초 지나면 숨이 차서 버둥거린다. (일동 웃음)

그 이유는, 옛 사람이 죽으라고 침례를 받는 것이니

실제로 물속에서 숨이 차서 죽을 것 같은 체험을 해 보면서,

그 죽음을 잊지 말고, 남은 생애 오래도록 기억하라는 뜻이다.


▲육신이 죽어야...

교회에서 봉사할 때, 자아가 죽지 못하고, 자기 열심이 앞서는 사람 있다.

하나님은 갈 2:20절처럼,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을 원하신다.

예수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고 하셨다. 요 3:6

자기 육신의 힘으로 아무리 열심히 봉사해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 육신의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다.

자기 육신의 힘으로 하는 교회 봉사, 교회 개척... 주님이 노하신다.

우리는 말은 그렇게 하지 않지만, 사실은 자기 영광을 나타냄이 많다.

반드시 자기 이름, 영광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너무 많아서 탈이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기는 중에 많은 이스마엘을 낳았다.

우리의 열심을 낳았고, 우리 이름을 드러냈고, 우리 영광을 자랑했다.

→ 문제는, 그럴 때 하나님은 절대로 나타나 주시지 않는다는 것!


▲자비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할례를 통해, 다시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아브라함은 자기 육신이 죽고, 영적으로 더 성숙되어졌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통해, 신앙생활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영적으로

완전히 죽이는(깨어지는) 것임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철저한 육신의 깨어짐 후에, 영적 성숙 후에

아브라함은 고대하고 바라던 후손의 축복을 받게 된다.

백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던 것이다.


우리가 언제 이삭 을 얻을 수 있는가?

마음의 할례를 받을 때,

곧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혀 죽을 때 - 일어난다.


▲영적 침체

우리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85세 이전 아브라함처럼)

주님의 임재를 자주 체험하다가

어느 순간, 주님이 통 나타나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내 육신으로 주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을 낳기 때문이다.

그 때는 빨리 마음의 할례를 받고, 언약을 새롭게 갱신해야 한다.

그런 영적 죽음과 자아의 깨어짐의 훈련을 통해서,

신앙이 점점 더욱 성숙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며

나아가 때가 되면 이삭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받을 것이다.



◑5th 임재 - 이삭을 바치라 (오직 주님만 나의 우상)


▲드디어 이삭의 축복을 받고... 가정이 회복되고 사업의 복도 받았다.

자녀들도 변화되어 믿음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고백하며

예수 믿는 것이 즐겁다.

그럴 때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시험하신다.


▲이삭을 바쳐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업의 축복을 - 거두어 바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행복을 - 주께 바치라고 하신다.

주님을 위해 쓰고, 헌신하라고 하신다.


그럴 때 대부분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적인 많은 연단을 받았던 아브라함은 - 그것을 했다.

그래서 사흘 길을 가서, 이삭을 결박하고, 죽이려고 칼을 쳐들었다.


▲하나님의 임재 -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2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8


히브리서는 같은 내용을 더 강조체로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히 6:14


▲이런 축복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삭의 복(직장, 자녀, 사업 등)을 받지만

그러나 그 이삭이 우상 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상 이 되기 원하신다. (사랑하고 섬긴다는 의미로!)

그런 시험을 통과하고 받은 이삭의 축복은 -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업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영원히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자손이 영원히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처럼 영원히 지속되는

영원히 변치 않는 기업의 복을 받았다.


◑마치는 말


이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적어도 5번 이상 나타나 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①세상이란 강을 건넜을 때 - 나타나 주신다.

②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면서

타인의 이익과 복을 위해 기꺼이 양보할 때 - 임재해 주신다.

③다른 영혼들의 문제를 돌아보며 사역에 헌신할 때

- 임재하셔서 방패와 상급의 복을 주신다. 이삭의 약속도 받는다.

④그래서 사역을 하는데, 처음에는 내 힘과 내 열심으로 한다. 

그래서 육신적으로 화도 내고, 원망도 하면서 마찰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점점 깨어지면서, 다시 영적 죽음의 체험을 통과하면서

- 새롭게 임재를 경험한다. 그리고 이삭의 약속도 받는다.

⑤그래서 사역도 잘 되고, 사업도 잘 되고, 자녀도 다 잘 되는데

그 잘되는 그것도 - 바치라고 요구하실 때가 있다.

그것마저 바칠 때, 하나님은 임재하셔서 영원한 복을 주신다.


▲지금 나의 이삭은 무엇인가?

나는 처음에 10년만 선교사역하고, 그 후에는 다른 사역을 하기 원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보낸 지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너는 또 15년을 더 선교사역 할 수 있겠느냐?’ 라고 주님이 물으시면

나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아마 개인적으로 이것이 나의 이삭 같다.

‘15년 더 선교지에서 일하는 것’이 나에게 개인적으로는

‘이삭을 바치는 것’이 되는 것 같다.


▲옛날에 한 번 주님이 나타나신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

하나님은 계속 나타나시고 임재하셔야 한다.


▲계속되는 임재를 통해 큰 축복을 사모하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6-18


우리 하나님은 ‘나타나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올바른 영적 생활을 하면 - 반드시 나타나 주신다.

주님이 여러분께 다섯 번째 나타나시기를 축원드린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 나타나시기를 축원드린다.


<양병초 선교사님 설교 발췌 요약  *원제목 :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시는가?


.......................................................

 

 

◈2-1. 야곱의 임재체험

 

-마하나임의 하나님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님이라 하였더라 (창 32:1~2)



위기를 만난 야곱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야곱이 당할 위험을 미리 아시고 (4백인의 군사와 맞부딪히는)

미리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를 앞서 보내주셨다.(32:1~2절)


야곱은 자기 무리들과 동행하는 군대를 보고,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 이라 지었는데, 그 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1. 보호하시는 하나님

마하나임은 히브리어로 ‘두 개의 진영’, ‘두 개의 부대’란 뜻이다.


혹자는, 그 군대가 야곱의 일행을 앞 뒤 2개의 부대로 동행했다고 말한다.

혹자는, 그 군대가 야곱의 일행을 좌 우 2개의 부대로 호위했다고 말한다.


무엇이든 간에, 핵심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라반의 역할도 필요하다.

앞서 31장에, 가나안으로 떠난 야곱을 뒤쫓아서

삼촌 라반의 일행은 7일 길을 줄곧 분노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날 밤에 라반에게 나타나 ‘너는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고 경고하시니... 라반이 야곱을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었다.(창 31:24)


라반은 지난 20년간 얼마나 극심하게 야곱을 괴롭혔는가?

10번이나 품삯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정했다.

그런데 그 20년 동안에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라반을 제동 걸지 않으셨다.

왜 그 때는 하나님이 라반의 착취를 막지 않으셨을까?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하면서 마음에 큰 은혜를 받았다.)

그것이 야곱에게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간사한 야곱, 꾀돌이 야곱이 진짜 고수를 만나서

엄청 깨어지고 마음고생 하면서 야곱이 다듬어지는데

강력했던(?) 라반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는 라반을 묵인하셨다.

지금은 (31장) 라반의 학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그래서 꿈에서 라반을 제지하신 것이다.


▲회사에서 여러분을 괴롭히는 아무개 과장님,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듬는 도구로 여기시기 바란다.

내일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그 분께 뜬금없이 이렇게 인사해 보시기 바란다;

‘김 과장님, 알고 보니 하나님이 제게 보내신 분이셨군요!’

내가 잘 다듬어 지면, 그 분의 학대를 주님이 제지해 주실 것이다.



마하나임이 주는 두 번째 교훈은

◑2. 현실도피하지 못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


어떤 군대가 두 진영에서 양쪽으로 동행하는 것은 ‘보호’의 뜻도 되지만

<현실도피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뜻도 된다.


지금 창 32장 상황은 20년 전과 똑같은 상황이다.

20년 전에도, 형 에서가 격분해서 야곱을 잡아 죽이려고 했고

20년 후 지금도, 형 에서가 격분에 차서 4백인을 소집하고 있다.


20년 전 위기 상황에서는 벧엘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셨는데

20년 후 지금 상황에서는 마하나임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신다.


그러나 20년 만에 다듬어진 야곱은 지금 좀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위기를 당하면 현실도피하며 도망가 버렸던 야곱이

지금은 위기를 당했으나 현실도피 안 하고, 도망가지 않는다.

“낙타 머리를 돌려라! 다른 길로 가자!”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담대하게 되었을까?

-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양편 군대를 보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 군대가, 야곱이 현실도피 못 하도록 몰고 가시기 때문이다.



▲성도는 두려운 일이 생기고 도망가고 싶은 일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군대가 자기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결코 현실도피하거나 도망가지 않는다.


그래서 신실한 크리스천은 항상 진취적이다. 등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워도 쉽게 “이혼 해 버리자!” 하지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몸부림친다.


▲우리는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우리 이 땅에서 초라하게 살지 말자. 

조그만 난관만 닥쳐도, 뒤돌아서고 현실도피 하는 식으로 살지 말자.


어려울 때, 위기가 찾아 왔을 때

마하나임, 두 진영의 군대로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후퇴하지 말고, 계속 전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 또한 주님이 후퇴 못 하도록 막으시는 면도 있다.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한 번 경험하면, 이후로 계속 전진하는 인생이 된다.

사람이 살다보면, 때때로 난관과 어려움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번 돌파한 경험을 쌓은 사람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비록 야곱 같은 인생이라서, 종종 실수와 허물을 범한다.

거기서 후퇴하는 사람이 있고, 야곱처럼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무흠한 요셉이면 좋으련만...

요셉은 무흠한 예수님의 표상이고, 

허물 많은 우리 죄인들의 표상은 야곱이 더 가깝다.

그래서 야곱에게서 우리는... 인간미를 느낀다.)


이 마하나임의 은혜가,

①위기 상황에서 앞서 보호하시는 은혜

②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 은혜가 여러분께 임하기를 축원 드린다.


<이찬수 목사님 설교 발췌, 요약  06.04.02. *원제목 : 두렵고 답답한 일로 근심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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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야곱의 임재 체험 

 

-인생을 바꾼 새벽씨름



▲큰 싸움에서 이기면 세계 정상급이 된다.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은 한국 야구사에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중국, 대만은 물론 일본까지 꺾고, 심지어 세계최강 미국까지 꺾은 것은

한국 야구의 수준을 세계적으로 끌어올렸다.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공을 뿌려대던 한국 투수들,

홈런을 펑펑 쏘아올린 이승엽 선수, 최희섭 선수를 보면서

온 국민은 가슴이 후련해졌다.


2002년 월드컵 대회에서 한국 축구가 세계 강호들과 겨루어 이기고

4강에 든 경험은, 한국 축구의 자신감과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젠 누구와 맞붙어도 기가 죽지 않는다. - 이것이 큰 수확이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큰 경기를 치르고 나면, 우리 신앙의 실력이 물씬 자라난다.

큰 씨름하고 나면, 다음 씨름에는 자신감이 생긴다.

큰 시험을 이기고 나면, 작은 시험정도는 가지고 놀 수도 있다.


큰 씨름 경기에서 이겨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칫 늘 쫀쫀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의미에서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사람이었다.

이제 그 어떤 것과 싸워도 이길 만큼, 정상의 실력자가 된 것이다.

야곱처럼, 이런 멋진 씨름 한 번 해 보고 싶지 않으신가?


▲에서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다

야곱은 타국에서 20년 망명 생활을 하는데, 그 중

14년은 부인을 얻기 위해서, 6년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허비한다.


형 에서에게 보낸 예물은 암염소가 2백, 수염소는 20

암양은 2백, 수양은 20, 암낙타 30과 그 새끼 

암소가 40, 황소가 10, 암나귀가 20, 그 새끼가 10마리였다.


철저히 암놈이 많다. 동물들은 암놈이 수놈보다 훨씬 비싸다.

한마디로 정성을 다한 좋은 선물이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야곱은 가족과 재산을 3무리로 나눈다.

가장 선두에는 첩의 자식들과 그 재산을,

중간에는 레아의 자식들과 그 재산을,

맨 나중에는 사랑하는 라헬과 자식과 그 재산을 배치했다.

그리고 자신은 제일 나중에 섰다.


야곱은 20년 고생할 만큼 했지만, 여전히 졸장부 기질을 버리지 못했다.

그가 진정 변화되었다면, 위기상황에서 자신이 가족들 앞에 섰을 것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당당히 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 졸장부!


삼촌 라반과는 싸워 이겼지만, 아직 제대로 된 큰 싸움은 겪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불안한 것이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두 강을 건너보내고, 혼자 얍복강 나루터에 남았다.

밤이 되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인생을 바꾼 새벽씨름


깊은 밤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을 걷어찼다.

그래서 얍복강 나루터의 밤중 씨름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씨름을 걸어오신다.

이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께 매달린 것이 아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서 주어는 “어떤 사람”이다. 야곱이 아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32:25

여기서도 주어는 “그 사람”이다.


무슨 얘긴가?

지금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고 철야기도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야곱을 붙들고 그를 연단하며 씨름하고 있다.


야곱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는데, 야곱이 아직 받을만한 준비가 안 되었는지

하나님이 야곱을 붙들고 씨름하고 계신다.


창 28장에서 야곱이 본 사다리도, 야곱이 하나님을 찾아가려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하늘에서 야곱을 찾아온 사다리였다.


야곱은 자기 혼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야곱을 찾아오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

그 분은 오늘도 내 인생을 간섭하시고, 내 사건 속에 찾아오셔서 개입하신다.


야곱 같은, 오래 믿었으나 아직 완전히 변화되지 않은 사람의 삶 속에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붙들고 씨름하신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32:24

내가 홀로 남은 시간, 고독을 느끼는 시간은 - 주님이 찾아오시는 시간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 속에 휩싸여 바쁘게 살아갈 때 - 자신을 보지 못한다.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때 - 자신을 과장하며 허세를 부린다.


그러나 직위, 박수갈채 이런 것들이 내 곁을 떠날 때가 홀로 남는 시간이다.

탕자도 친구, 재물 이런 것 “다 없어진 후에” 스스로 돌이켰다. 눅 15:14


얍복”이란 말 뜻은 - “비운다, 털어버린다, 쏟아낸다”의 뜻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헛된 자기 인생을 쏟아내는 자리였다.

자신을 위한 야망, 욕망을 털어내고 비워버리는 자리였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려면, 먼저 얍복 = 비워야 한다.


▲마침내 환도뼈가 부러지다

환도뼈는 골반과 다리를 연결하는 뼈다. hip joint

인체 중에서 “가장 강한” 뼈며, 그래서 왠만한 힘으로는 부러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다 되더라. 내가 마음먹기만 하면

안 되는 일 없더라>는 야곱의 강한 자만심을 내리 치신 것이다.


실제로 야곱은, 장자의 명분 빼앗은 일, 라헬과 결혼한 일,

라반의 양떼를 교미 조작으로 많이 자기 소유로 만든 일 등,

지금까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안 되었던 일은 없었다.


그러나 환도뼈가 부러진 지금,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일이 되게 되었다.

도망을 치려고 맨 나중에 남았는데, 이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붙들 수 있는 것이 오직 한 가지 남았는데, 그것은 하나님뿐이었다.


이렇게 건강에 자신만만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은 건강이란 환도뼈를 치신다.

주머니에 항상 돈이 있어 주님을 의지할 줄 몰랐는데, 어느 날 그게 사라진다.

자기 능력 때문에 늘 자신만만하던 사람이, 자신감이 부러지는 날이 온다.


‘이제 내가 붙들 분은 하나님밖에 없구나!’ 고백하는 날이 온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님 은혜 없이 살 수 없네!’ 진실하게 고백하게 된다.


▲가장 진실한 눈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못 떠나십니다! 32:26 

뚝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천사의 다리를 붙잡고 처절하게 매달린다.

 

그 때 야곱은 울며 그에게 매달렸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여... 호 12:4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으면 기뻐해야지 왜 우는가?

이 눈물은 깊이 감추어두었던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눈물이었다.

자기 체면과 가식과 자신감이 모두 깨어질 때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억척스럽고 씩씩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수록 더 외로웠던 속마음

겉으론 강해 보였지만, 속으론 불안과 한없이 약한 모습이 숨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그런 부끄럼을 적나라하게 토하는 눈물이었다.

가장 진실한 눈물! 가장 정직한 기도! 가장 처절한 몸부림의 시작이었다.


▲새벽 신앙

이렇게 얍복에서 깨어지며 기도하던 시간은 바로 새벽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씨름을 해 보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 만약 있다면...

직업적으로 숨돌릴 겨를 없이 바쁘게만 살아오신 분은

이런 야곱 같은 새벽씨름이 있기를 축원드린다.


새벽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로 결단했던 시간

새벽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시간

-인생의 가장 위대한 결단이 일어나는 시간이 새벽이다.


새벽에 예수님은 실패해서 고기 잡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셨다.

-인생의 빈 그물을 들고 낙심할 때, 주님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 새벽이다.


1907년 한국 교회 부흥도 새벽기도로 시작되었다.

-우리 인생에 가장 위대한 일들이, 새벽에 일어날 것이다.

 

▲큰 씨름에서 승리하면 큰 인물이 된다.

이름을 바꾼다는 의미는, 새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야곱(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이

  남의 복을 가로채서 살겠다는 사람이...

  자기 꾀와 권모술수로 남과 경쟁해서 살겠다는 사람이...

이스라엘(승리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이름이 바뀌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하지만, 실제로 야곱이 KO패 당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 주셨다.

역설이지만, 하나님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께 지고 항복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기는 길은, 사실상 쉽지 않은 큰 싸움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 어렵지만 큰 싸움을 치르고 나면

이후부터 그는 큰 인물이 된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 허벅다리로 인하여 절었더라 32:31

깨어져서 변화된 야곱이 본 태양은, 어제 보던 태양과 달랐다.

만물이 새로워진 것이다.


과거에 에서의 얼굴은 두려움을 주는 얼굴이었다.

이제 에서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처럼 변했다. 33:10  두려움이 사라졌다.

에서가 변한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변한 것이다....


<류영모 목사님 설교 발췌, 요약  06.04.02. *원제목 : 인생을 바꾼 새벽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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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모세의 임재 체험

 

-모세가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출 3:1-12)       


 

▶지도자인가, 지배자인가?

지도자하면 흔히 남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을 연상케 된다.

그러나 지도자와 지배자는 엄연히 다르다.

사람들은 지배자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지도자가 되기는 어렵다.


지배자는 군림하는 사람이지만, 지도자는 존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지배자는 많으나 지도자가 많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이며,

지도자는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다.


▶부러움의 대상인가, 존경의 대상인가?

지도자중에는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가 있다.

한국의 많은 기업가들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존경의 대상이 못 되는 이가 많다.


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부러움의 대상은 되지만

진정한 존경의 대상이 못 된다면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 될 것이다.


▶가치와 가격은 다르다

내 재산이 얼마인가, 지식이 얼마인가, 월급이 얼마인가?

가격은 되지만 가치는 될 수 없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어떤 일에 쓰임 받는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디에 가든지 거기서 쓸모 있는 사람,

꼭 필요한 존재, 가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집안에 그릇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가치 있는 그릇이 있다.

밥그릇, 국그릇, 된장그릇 등은 작은 그릇이지만 매일 쓰임받는 그릇들이다.

그러나 찬장 높이 올려놓고 이사 갈 때나 한 번 쳐다보는 그릇도 있다.

혹시 비싼 그릇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쓰임 받는 그릇은 아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데 있다.

사람이란 밥을 먹고사는 존재가 아니라,

보람을 먹고사는 존재요 가치를 먹고사는 존재다.

사람은 잘 입고 잘 먹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이다.’ 라는

생각을 할 때, 거기에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다.

내가 하나님께 지도자로 붙들리고 쓰임 받는다는데 나의 행복이 있다.

사람의 행복은 내가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데 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쓰신다.

하나님은 ‘지배자’를 쓰시지 않는다.

뭔가 많이 가진 지배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지도자’가 되기 원하신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서 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건강해도 쓰임 받지만 병들어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

재산이 많아야 쓰임 받을 것 같지만 없어도 얼마든지 쓰임 받는다.

시간이 많아서, 재주가 많아서 쓰임 받는 것 아니다.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쓰시기 원하신다.


과거에 실패해도 괜찮다. 지난 한 해 동안 큰일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다.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과 경륜이 있다.

지금까지 내 모습에 큰 업적이 없어도 괜찮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쓰시기 원하신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부름이요 소명이다.


▶ “내가 누구관데....” 고백의 의미

모세는 “내가 누구관데 바로에게 가며... 인도해 내리이까?” 하소연한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


①‘나는 살인자입니다’는 고백이다.

‘제가 한 때 백성을 인도해 내려고 나섰지만 결국 살인자라는 오명만 남기고

말았습니다.’는 말이다. ‘나는 실패자입니다. 나는 패배자입니다’는 고백이다.


②‘나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

처가살이로 연명하는 사람, 이미 이방과 세상에 오염된 사람입니다’는 뜻이다.

직업도 변변치 못하고 재산도 없다는 고백이다.

양이나 치면서 큰 꿈을 버린지 오랜 사람입니다’는 뜻이다.

그런 내가 누구관데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③‘너무 늦었습니다!’는 고백이 담겨있다.

이제 내 아이 80세, 하나님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이 늙은이가 누구관데? 이것은 지나친 겸손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못 마땅한 것은 고사하고,

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도 쓸모없이 보인다.

지도자가 될 만큼 잘난 구석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런 모세의 모습이 바로 내 우리 자신의 모습인데도,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지도자로 불러 쓰시기 원하신다.  


④호렙산 중턱 떨기나무 불꽃은 나무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모세를 태우는 불이었다. 어제까지의 실패를 태우는 불이었다.

못난 과거를 태우는 불이었다.

모세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을 태우는 불길이었다.


‘나는 이제 자신감이 없습니다’는 절망을 태우는 불길이었다.

믿음을 일으키는 불길이었다.

꺼졌던 소명감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불길이었다.

우리의 과거의 좌절과 낙담도 오직 성령의 불길에 의해서만 소멸되어진다. 


▶임재를 경험하면 과거를 해석하는 눈이 달라진다.

모세는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나온 과거와 현재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졌다.

그전에는 자신은 거저 비극적인 운명의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피압박 민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단 말인가,

갓난아기 때에 어쩌다가 강에 버려졌던가,

어쩌다가 물에서 건져낸 아이(모세)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며 자신의 출생을 한없이 한탄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을 듣고 나니, 어릴 적 사연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내가 물에서 건짐 받았듯이, 버림받은 내 백성을 건져내라는 메시지가

자기 삶 속에 들어있었다.

애굽 왕궁에 들어가 공부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훈련이었다.

양을 치는 목자로 전락한 것을 한탄하며 살아왔지만, 그것 모두가 겸손하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요 계획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동 속담에 “미련한 양을 쳐보지 않은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 목자의 생활 속에서도, 미련한 양떼 같은 이스라엘을 인도해내는

지도자 수련을 쌓았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부름을 받은 사람은,

지나온 과거를 보고 해석하는 눈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떨기나무 체험의 의미 

①모세가 부름 받은 자리는 황량한 광야요, 초라한 떨기나무 앞이었다.

아더 핑크는 “이 떨기나무는 실상 모세 자신의 모습 이었다!”고 말했다.

사막에 아무렇게나 버림받은 보잘 것 없는 그 흔한 떨기나무! 모세는

자신이 그 떨기나무 한 그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줄 알고 그 열정으로 민족을 구원해 보려 했지만,

불과 한 시간 만에 그 불은 꺼져 버리고 말았다.

하루를 채 사르지 못하고 재만 남겼다.


②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나는 많이 배웠잖아, 이만하면 나는 중산층 이상은 돼.

이 정도면 지금까지 신실하게 살아온 결과야,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다’며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면 비로소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고백한다.


그러나 떨기나무 불꽃의 임재를 체험하고 나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리라’는 담대한 고백으로 바뀌게 된다. 


③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시작되어진다.

임재를 경험할 때 영광스러운 도구로 쓰임받는 지도자로 변화되는데,

그 임재의 경험은 예배시간을 통해 -설교, 찬송, 기도- 가장 잘 얻어진다.


④신 33장에는 모세가 소천을 앞두고 백성들을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내 백성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16절).


모세는, 남겨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지도자들이 되고

복을 받고 잘 될 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백성들은 떨기나무 체험이 있으면 잘된다는 것이다.


▶신을 벗는 의미

이것은 역설paradox이다.

모세가 사명을 잘 감당하려면 신을 신고 열심히 쫓아다녀야 되는데,

도리어 하나님은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

신을 신는다는 것은 활동을 시작한다는 의미요,

신을 벗는다는 것은 활동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력서는 밟을 리(履) 신발바닥 력(歷), 신발이 걸어온 경로라는 뜻이다.

이것은 땅의 이력서를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네가 이제껏 자랑하고 왔던 인생의 이력서를 지워버리라는 뜻이다.

세상 이력서를 내려놓고 천국 이력서를 쓰기 시작해야 지도자로 쓰임 받는다.

천국은 땅의 이력서로 가는 곳이 아니므로,

내 잘난 이력서를 지워버릴 때 비로소 천국의 이력서가 써진다.


교회는 신발을 벗는 곳이며, 세상 신발 벗는 자가 교회의 지도자이다.

신발을 벗지 않으면 현관에서 서성일 뿐,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이렇게 신발을 벗는 것은 세상 자랑 업적뿐만 아니라,

과거의 실패의 족적까지 모두 벗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어느 퇴직자가 받은 은혜

좋은 직장에서 정년퇴직 하고 나서 수심에 찬 어느 성도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퇴직retire이란 말을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re(재) tire(타이어)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는 것이다! 그는 눈이 번쩍 떠졌다.


세상을 달리던 타이어를 떼어내고,

이제는 천국 가는 타이어로 바꿔 끼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세상 타이어를 갈아 끼워야 하고,

옛 신발을 벗어야 한다.

세상에서 받는 존경을 교회에서도 똑같이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우리가 끝까지 거절하면 다리를 꺾어서라도, 손을 묶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도자로 세우신다.

하나님의 종들의 실력은 학위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그것은 ‘순종’이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 쓰신다.


▶장로의 사명

흔히들 ‘장로의 사명은 목사를 잘 도와서 교회 일을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로가 없는 교회도 하나님이 도우셔서 잘 유지된다.

장로에게 목사를 돕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은혜 받는 일’이다.


장로가 목사의 설교에 은혜 받지 못하면,

그 교회는 원활한 목회가 되지 않는다.

장로가 은혜 받지 않고 교회 일만 하려드니까 교회에 마찰이 일어난다.

순종하는 일을 배우지 못하고 교회 일부터 먼저 배우려 나서니까

교회가 어지러워진다. 그러므로 장로의 사명은 먼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풍성한 은혜를 받는 일이다.


▶금년 한 해의 목표

다른 직분자도 마찬가지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봉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의 성공자’가 되는 길이다.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성공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의 오늘의 삶은 진정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내 삶을 붙잡으실 때(임재) 우리는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난다.

꺼진 불같은 인생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불길이 타오른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절망한 사람이 있는가?

혹시 넘어진 자리에서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절망하고 좌절하는 분이 있는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바로 <지도자>다.

당신도 지도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 결단하고 일어나라!


<01.01.06. 한소망교회  류영모 목사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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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호수아의 임재 체험

 

-하나님은 내 편이신가?


 

▲너는 누구 편이냐?

편 가르기는 어느 사회에도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도 좌, 우편의 편 가르기,

양극화의 편 가르기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방선거도 따지고 보면 후보자 인물의 됨됨이 보다는

‘어느 당 소속이냐는 편 가름’이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어떤 편 가름 식 싸움이 나온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관문 도시인 여리고 성에 맞닥뜨렸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그 때 여호수아 앞에는 정체불명의 건장한 한 사나이가 출현했다.

칼을 빼어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여호수아가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수 5:13

한 마디로 “너는 우리 편이냐, 상대편이냐?”의 질문이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정체불명의 그 사람은 아주 아리송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수 5:14


“아니라” 라는 단호한 대답에서 볼 때,

그는 아군과 적군으로 편 가르는 여호수아의 질문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나는 너희 편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리고 편도 아니다”

“나는 너를 도울 너의 아군도 아니고, 동시에 너를 대적하는 적군도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다. 나는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나는 전혀 다른 편에 소속해 있다. 나는 하나님 편일뿐이다.”


아니! 여호와로부터 오신 군대장관이라면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이스라엘 너희를 위해 싸우러 왔노라”

라고 말씀하셔야 되질 않는가?


그런데도 성전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네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쪽도 편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것은 후에 벌어진 결과를 놓고 봐도 사실이었다.

여호수아는 그 후 전쟁에서 무조건 이기지 않았다.

만약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이스라엘과 여호수아 편을 들어주었다면

그는 모든 전쟁에서 당연히 백전백승 했어야 했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리고 성에서는 이겼지만, 아이 성에서는 패하지 않았는가!


▲부족 神들은 철저히 자기편만 들어 줌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관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당시 가나안 부족 신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가나안은 바알, 아세라, 아스다롯, 다곤 등 제각기 부족 신을 숭배했다.

각 부족은 자기들의 신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드렸다.


이때 제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제사장은 부족과 부족 신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였다.

그런데 바라던 번영과 축복을 얻지 못하면 그 제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 제사장은 더 큰 치성을 드릴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농사도 풍작을 거두고, 자손도 번창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제사장이 요구하는 대로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바라던 축복이 번번이 다가오지 않으면

마침내 제사장이나 부족 신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결국 나약하기 짝이 없는 자기들의 제사장과 심지어 그 부족 신마저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더 강한 신과 그에 따른 새로운 제사장을 선택한다.

부족의 번영과 축복을 확실히 보장받기 위해서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족신은 사실상 그 부족을 편들어 주는 인간의 도구였다.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고안해 내고, 자기를 위해 선택하는 신이었다.

그 신을 섬기지만, 그 신이 도리어 인간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켜 줘야 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셨다.

어느 한 쪽 편에 서서 무조건하고 그들 편만을 들어주는

그런 분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당시 정황은 한 사람의 지원군도 아쉬운 때였다.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니

“아니라”는 대답은 여호수아에게 얼마나 충격적이며 섭섭했겠는가?


우리도 누구랑 싸워서 하소연할 때,

믿었던 사람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얼마나 섭섭한지 잘 안다.

 

▲네 신을 벗으라! - 종이 되라는 의미

그렇다면 편도 들어주지 않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출현하셨는가?

여호수아가 그것을 물었다;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수 5:14


이 때의 답변을 주목하시라!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수 5:15


왜 여호수아가 서 있는 그곳이 거룩한가?

그 장소가 원래부터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인가? - 아니다!


그 땅이 거룩한 이유는

지금 거룩하신 여호와 자신이 그곳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거룩성은 하나님 때문에 주어진다.


하나님이 내편으로 끌어오려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여호수아는 신을 벗어야 했다.


옛날 모세가 호렙산에서 소명 받았을 때도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꼭 같은 요구를 하셨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출 3:5


지금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 지방 사람들의 풍습에 의하면 노예나 종들은 신을 벗어야 했다.

이 풍습이 예수님 때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눅 15장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탕자는 맨발이었다.

그 탕자는 남의 집 종살이하다 왔기 때문에 그랬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신을 벗는다는 것은

“주여, 저는 당신의 종이요, 당신의 노예입니다.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저를 마음대로 쓰실 수 있고,

저는 오직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

당신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살아가겠습니다.”

라는 결단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네 종이 아니다. 네가 나의 종이다.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 그는 이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패전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다보니 이기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어야 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도 당연히 우리 편이 되어주시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사는 이런 여호수아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린 것이다.

“나는 누구의 편이나 들어주는 가나안의 부족 신들과는 다르다.

나는 너의 종이 아니다. 네가 나의 종이어야 한다.

나는 무조건하고 너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다.

네가 나의 편에 서야 한다.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다.

너는 나의 방식대로 나의 전쟁에 참여하는 나의 도구여야 한다.

그래서 네가 신을 벗어야 한다.”


(오늘 날 세상에서 여러 가지 생존경쟁을 치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무조건 내 편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 가나안 신 방식이다.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신을 벗는 것 - 여호와 하나님 방식이다.)


▲질문이 달라지다.

이제 여호수아가 던지는 질문은 더 이상

“주님은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 편이냐?”를 따지는 것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과연 신을 벗은 여호와의 종인가?

그래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여호와의 편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신 벗기를 거부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등진 자인가?”

를 늘 물어봐야 했다.


▲본질적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나타나신 것은 이스라엘의 싸움대상

본질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대상은 뜻밖에도 저 여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신을 벗는) 하나님의 종 되길 거부하면서

하나님이 끊임없이 내편에 서 주기만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자신의 본성

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도 하나님께는 중요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합당하게 살아 가야할 이스라엘 “자신”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민답게 하나님편이 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한편이니, 싸움에서 이길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다면

그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은 저들 이방 민족이 이기도록 방치할 것이다.


▲종으로 순종했더니 승리함

여러분! 우리가 비뚤어져 있는데도, 우리가 잘못되어 있는데도

승승장구 바라던 땅을 차지해 간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하게 되겠는가?


여리고 성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방식대로 싸운다.

수 6:2-5절을 보면,

말씀하신 여호와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하며 전쟁에 임한다.

그들은 진정 여호와 편이었고 여호와의 종이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시는 당연한 승리가 6장 전체에 기록된다.

6장 27절은 이 승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하나님과 여호수아는 과연 한편이었다.


▲종의 자세를 버리니 패배함

하지만 두 번째 장애물인 아이 성과의 전쟁은 사정이 달랐다.

아간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바친 물건을 훔친다. 7:1

그는 탐심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아간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써, 전체 이스라엘에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병든 상태에서 아이 성 점령에 실패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에 서 주시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아이 성 공격에 필요한 작전지시를 주시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 지시도 받지 않고 성급하게 아이 성을 공략한다.

이는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속한 군대 작전권을 자신이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신을 벗은 하나님의 으로서 기다려야 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도 이런 이스라엘을 편들어 줄 수 없었다.


▲종의 위치로 되돌아오다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함께 옷을 찢고 회개한다. 종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아간의 문제를 엄중히 처리한다.

바르게 회복된 이스라엘을 보시고 여호와께서는 작전 지시를 내려 주신다.

여호와는 다시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셔서 전쟁에서 이긴다. (후략)


<06.04.23. 이장호 목사님 설교 발췌, 요약, 편집.  *원제목 : 누구를 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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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윗의 임재의 체험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신앙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예수를 믿으면서,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정말 만족하는 사람은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자신 있게 고백하는 사람은

정말 우상 숭배가 없는 진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대부분 성도의 마음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상이 들어있는데...


사람이 정말 한 여인, 한 남자만 진실로 사랑한다면

지구상에 30억이나 되는 다른 남자/여자가 많이 있어도, 별로 필요 없다.

오직 그이/그녀만 있으면 되니까!

한 사람만 있어도 정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한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게 된다.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 고백한다.


▲플러스알파(+α)는 우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당최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 못 하고 산다.

돈도 좀 넉넉하게 있어야 되고...

애들 공부도 좀 잘해 줘야 되겠고...


하나님에다 플러스알파가 붙어야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고 한다.

플러스알파... 그것이 바로 나의 우상이다.

내 신앙이 깊이 못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플러스알파 우상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돌부처나 서낭당에 절하며 섬기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플러스알파 우상이 내 마음속에 떡 버티고 있다.


▲예를 들면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주일날 교회 안 나온다. ← 자식이 우상

돈 버느라 바빠서 오늘 아침에 교회 못 갔다는 사람 ← 돈이 우상

신랑이 야외 나가는데 따라 가는 여자 집사님 ← 쾌락이 우상

다른 일은 다 하는데, 기도할 시간은 없다.

TV도 보고 다 하는데, 성경은 못 본다...


플러스알파도 없으면 억울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에 플러스알파도 없으면, 당최 무슨 재미로 예수 믿는가?


그렇지 않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삶을 살면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그 외에도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런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또한, 배우자, 자녀, 물질, 식욕, 취미활동 등

그것이 죄가 아니고 우상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누리며 즐겁게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

다만, 그것이 도에 지나쳐 죄가 되고 우상이 되니까... 금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우상 이 되어야...

하나님께는 바로 우리가 우상 이다.(애지중지 한다는 뜻)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으니... 그 분에게는 내가 우상 이란 말이 맞다.

적당히 말로만 사랑하셨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나를 위해 죽어버리셨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이 나의 우상 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는 다른 우상 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을 뿌리치고 배신하고, 다른 우상을 마음에 연모하고 있으니...


변치 않는 하나님의 사랑

사람 같으면, 그런 처지에 이르면,

일방적 사랑을 주는데도 배신하면(우리같이)

그만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만 사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신지... 그런 나의 배신조차도 극복하는 사랑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나로부터 배신을 당하면서도 계속 사랑해 주신다.

내가 우상을 섬기는 일이... 잘못임에도 불구하고, 배신임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고 나를 사랑해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꼭 명심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육체로 살아있을 때까지 그런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

사람이 죽고 지옥에 간 다음에도 계속 변치 않고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상 같이 우리를 애지중지해 주시는 사랑은,

우리가 배신해도 변치 않고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사랑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상을 없앤 아브라함

눈에 보이는 바알, 아세라 형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가 우상숭배 안 한다고 여기면 큰 미혹에 빠진 것이다.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의 우상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마음의 우상이 정리되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해서 독자를 바쳤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것은 → 아들이 우상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그의 마음에 우상이 없었다는 증거다.

그래서 그는 마 1:1절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놓고 괴로워서 계속 술로 세월을 보냈는가?

바치고 나서 가정형편이 더 나빠졌는가? 우울증에 걸렸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마음의 우상을 없애면, 바치면,

상황이 나빠질 것 같지만(사탄의 미혹),

환경이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 마음에 천국이 임한다.

하나님이 임재해서 다스리시는 천국!

그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풍성한 삶을 누린다.


▲우상을 섬기면 좋을 것 같지만...

마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에덴동산에서부터, 예수님을 거쳐, 지금까지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런 우상을 사랑해서, 그런 잠깐의 신기루에 빠져서 재미 본 사람 있는가?

→모두 실망, 허탈, 허무, 배신 등... 불 보듯 뻔한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은 그런 참담한 결과를 미리 내다보시고 안타까워하신다.

그래서 마음의 우상을 없애고,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만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신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만...

부모, 자식, 아내, 형제까지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는데... 마 10;37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좋은 게 좋은 거라서 좀처럼 떨쳐 버리기 쉽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님 사랑보다 더 앞서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죄가 아니고, 우상만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죄가 되고, 우상이 된다면

심지어는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돈도...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 우리 삶 가운데 첫 번째가 되신다.

오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고 살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는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다.


<장경동 목사님 설교 요약, 성경으로 세상보기 28강 “교회 안에 또 다른 우상” (37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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