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조의미론(Structural Semantics)-그레마스(A. J. Greimas)-주근옥 역
번호 목 차 발표지 1 제1장 과학적 의미론의 조건 시문학 통권 399호(2004.10.01) 시문학 통권 400호(2004.11.01) 2 제2장 의미작용의 기본구조 시문학 통권 401호(2004.12.01) 시문학 통권 402호(2005.01.01) 3 제3장 언어와 담화 시문학 통권 403호(2005.02.01) 4 제4장 표출된 ...
www.poemspace.net
기본적으로 이 이론은 언어학에 속하지만, 폴 페롱(Paul J. Perron)이 언급한 것처럼 옐름슬레우의 텀 “내포기호학(connotative semiotics)”이 텍스트의 양의연동의 적합한 기술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존재하는 “외연기호학(denotative semiotics)”으로 변형된 그 총체성(totality)의 예문을, 보다 더 엄밀히 말해서 내포화(virtualizing)와 외연화(actualizing; 선언)의 종합·실현화(realizing; 연언)로서의 인식론차원의 예를, 시와 소설에서 많이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먼저 자연과학과 인간과학을 식별하고, 구조의미론은 공통단자를 추구하는 바로 이러한 인간과학임을 천명한다. 언어학이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역설적인 장면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역설적 장면이란 실제적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한 장소에 이중의 복사가 방출되는 것(환원된 단자 같은 것)을 말한다. 이 이중 복사는 사회학이나 심리학에서도 추구했던 것으로서 전위적인 잡지에 확산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진부하고 뒤틀린 것(은유와 상징 같은 것)이라고 치부한다. 그러면서 그의 이론은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음을, 즉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라캉, 롤랑 바르트 등의 영향을, 12장에서는 칸트의 경험론과 합리론의 결합과 헤겔의 절대지, 결국은 후설의 현상학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의미작용의 기본구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제2장에서, 그는 전통적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전승(轉乘, transfer)을 연속적(통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이것은 비통시적이고 불연속적인 단기지속성(permanence, 신화)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쉬르가 언어의 위치는 화맥 속에 정해져 있다고 하는 혁명적인 성격에 대해 인정하고 동의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기본구조는 어느 한 극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휘소와 같이 극은 극이되 양극의 관계, 의미의 축(figure+figurative=인식론적인 차원)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옐름슬레우의 용어를 빌려 형식과 실체(form과 substance)의 관계임을 밝히기도 한다.
제3장은, 언어와 담화에 대해 언급. 일반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의미작용에 관한 것으로서, 결국 제2장에서 언급된 관계의 표출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제4장은 언어구축을 담화가 떠받치고 있다고 한다. 즉, 그 담화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간 만남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자유의 모순적 위기와 커뮤니케이션의 방해와 그리고 타성과 역사의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위력에 기인하여 의미작용을 왜곡시키고 있는 장소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담화는 변칙적으로 만들어진 발판처럼 나타나고, 그 커뮤니케이션의 단위는 의미작용의 기술을 위한 구조로 제공하기에 부적당하게 보였던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어휘소, 준어휘소, 결합어휘소라고 하는 것도 차원과 구조가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의 단위일 뿐이라고 하는 생각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미작용의 관점에서 보면, 그 단위들은 종종 비교가 가능하고 때로는 동등한 것으로도 보인다.
제5장에서는 구조의미의 기호학적 레벨과 상징기호의 편차에 대해 언급한다. 의미세계를 반사운동, 외견상으로만 체계화된 상징기호적 표상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병존설(concomitance)과의 동치(同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며, 그 외견상만의 몸짓은 언어학적 접근과 일치할 수 없는 정신상태의 방법론적 교묘히 다루기(책략, 속임수, manipulation)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제6장에서 그는 이렇게 언급한다. 「만약 우리가 언어학적 활동의 병리적 양상(aspect, 은유 또는 상징과 같은 표현)을 무시한다면, 표출의 이러한 유형의 극단적인 예는 “현대시(modern poetry)”라고 일컬어지는 것에 의해 재연(再演)될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것은 흔히 “통사론을 파기하는 것(abolishing syntax),” 즉 함수적인 메시지의 수를 가능한 만큼 감소시키고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동류체(isotopy)의 지배와 함께 복합표출의 좋은 예로서 그 실현화의 어떤 무엇으로 나타난다. 단순 불가결의 최소한도에 실제적 동류체가 환원하는 것으로 인하여, 첫눈에 그것은 신화적이며 자질적인 표출로 동시에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살아있는 작품(life of work, theése d'une vie)”으로서의 거대한 괴물의 설정에 의해서만 연기(실행)된 대파괴(havoc)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대파괴라는 용어는 해체라고 하는 용어와 치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병리적 양상으로서의 독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형태소 또는 음소는 온전히 남겨둔 채 핵의미소를 파괴한다는 것이 되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핵의미소를 우주 밖으로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캐내는 것과 같이 변이의미소(변수)와 핵의미소(상수)의 치환이 이루어짐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그는 이렇게 기술하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담화의 두 동류체간의 대당을 용어법적 강조에 의해 보다 더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텍스트와 메타텍스트의 용어는 표출측면과 잠재측면의 이것들보다 덜 타협적일 것이다. 텍스트와 메타텍스트의 이러한 편차는 오로지 작용적이거나 적어도 처음부터 아주 일반적인 의미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보통수준”의 식별에 의지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관점에서, 꿈을 꾸는 것 같은 텍스트는 동시에 독해가 가능하거나 부조리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기괴한 몽상가에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의 텍스트는 다음처럼 독해가 가능하면서 부조리하다(readable and absurd).
The black sun of melancholy(우울의 검은 태양)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폐적자(廢嫡者)”
이에 반하여 메타텍스트는 독해가 불가능한 채 존속하지만 분석적 독자에게는 의미심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즉 독해가 불가능하면서 분명하다(unreadable and clear). 그 편차의 작용적 성격은 정의적 텀(term)을 필연적으로 전도시키게 될 상상력이 풍부한 독자, 신비주의자, 연금술사, 또는 어느 다른 비법전수자가 논리적인 독자를 대신하자마자 즉시 나타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경험담을 이야기한다. 「필자는 옛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가 뇌출혈로 인하여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동안 두 번째 동류체의 형식에 표시된 시적 의미작용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비극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 메타텍스트라고 하는 존재의 예리한 의식은 포착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라고. 한국의 경우 다음 시에서 메타텍스트의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산 뽕잎에 빗방울이 친다
멧비둘기가 난다
나무등걸에서 자벌기가 고개를 들었다 멧비둘기 켠을 본다
―산비(백석)
그는 해변 가에 차를 대고
빗방울 흐르는 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옆에 앉아있는 늙은 개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어느 해변에서(피천득)
이러한 응축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의미소 “계약·응축”은 처음에 동적 양상(aspect)으로, 두 번째는 안정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 다음에, “계약·응축”은 2개의 의미소(고체성 + “약동적 vs 안정적”)로 분해 될는지 모른다. 그리고 take와 hold의 핵의미소의 대당은 다음처럼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의미론적 기술 안에서 논리적인 구축의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어떤 장소를 명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분석이 주어진 자연언어로부터 출발하거나 제한된 목록과 함께 작용함으로써, 그 역할은 분석이 그 장소를 종합하는 것에 의해 심층에 존재하게 된다. 목록을 확대하고 있는 동안에 또는 단순하게 분석된 언어 안에서 몇몇 목록이 비교되고 있는 동안에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중재언어의 구성을 관망하고 있는 몇몇 자연언어의 병치기술(또는 후소기술[後素記述], parallel description)을 속행하지 않으면 안 될 때(기계적인 번역-전격이나 문헌자료인 것처럼) 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때 그 기술은 동시에 나타나고 동시에 모순 된 2개의 원리에 순종한다.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실재성(reality)을 확실하게 고찰하려고 하는 그 욕망(desire)의 견지에서는 귀납적이고, 구성모델의 결합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견지에서는, 그리고 기술에 종속된 발화자료체와 동연인 보편성에 도달하려고 하는 필연성의 견지에서는 연역적이다. 화해를 위한 탐구 상에 설립된, 그러한 기술절차의 개념은, 그것이 과학적 기술의 종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객관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인식내용(주관)이기도 한 묘기(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의 이러한 언급은 후설의 지향성(intentionalität)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 같다. 한전숙에 의하면, 지향성이란 의식이 정적으로 일대일 대응한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형성한다는 성격 다시 말해서 주객상관관계의 동적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두 개의 실재(은유나 상징과 같은 것)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아주 간단한 환원으로서의 사태만을 일컫는 것이다. 이 상관관계(형성작용) 중에서 관념적 대상 쪽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질 때 수학자나 논리학자의 입장이 생기고, 그와 상관적인 주관 작용 쪽에 비춰질 때 현상학의 입장이 생긴다고 한다. 이 현상학의 입장은 파악(auffassen)과 통각작용(Apperzeption)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대상파악 즉 인식이란 체험된 감각 내용을 “무엇으로서,” 어떤 특정한 의미로서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파악작용이란 비지향적인 감각(초재가 아닌 내재로서의) 또는 작용질료(Hyle가 아니라 Aktmaterie, 즉 표상과 판단 다시 말해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결합된 기호로서의 선빈사적[선술어적] 자연)를 다시 어떤 의미를 가진 대상으로 파악하여 활성화함(혼을 넣어 줌, 빈사적)을 일컫는 것이 되겠는데, 이 말은 곧 새로운 의미부여작용 또는 의미형성작용(광의의 noesis에 의한 noema의 구성)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일반적이며 무제약적인 필연성의 선험 즉 초재(정적 a priori가 아니라 동적 transzendenz로서의 초재라고 해서 대상과 같이 초월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객관이면서 주관이기도 한 양의성을 가지고 있다)로서의 본질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판단중지에 의한 선험적 전환. 후설의 생활세계는 이 전환의 전환 세계).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은 바로 이러한 지향성과 상호주관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며, 문학의 모더니티 또한 여기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근옥님이 요약한 그레마스의 기호학 도표
노트: 위의 도표는 아래의 도표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감성은 구조에서 이동하거나 초월한 것이 아니라 총체구조 안 현상계의 하위개념이며, 초월은 이성계가 현상계를 초월한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총체구조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