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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시 읽기의 몇 가지 방식 / 2023 시와사람 가을호(김동원 시인 · 평론가)
신춘문예가 걸어온 길
한국의 신춘문예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신춘문예는‘여러 부문의 문학 신인 선발을 목적으로 신문사에서 매년 행하는 문예행사’로 정의할 수 있다. 1912년 2월 9일 매일신보의‘현상모집’은 신춘문예의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그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당시엔‘각지기문(各地奇聞), 속요(俗謠), 소화(笑話), 시(詩), 단편소설(短篇小說), 서정서사(敍情敍事)’의 6개 부문에 걸쳐 작품을 모집했다. 이후 1914년 12월 10일자에는‘신년문예’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신춘문예라는 제도화된 용어의 최초의 출현이다. 신년문예모집 공고를 보면 모집 장르로는‘시, 문文, 시조, 언문줄글, 언문풍월, 우숨거리, 가(唱歌), 언문편지, 단편소설, 화(畵)’등이 있었다. 그리고 심사위원의 경우에는 단순히 선자(選者)로만 표기했을 뿐 그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이후 1919년 12월 2일의 현상모집에서는 신년문예 대신 신춘문예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한시, 신체시, 시조, 미어(謎語, 수수께끼), 만화를 모집했다. 이렇게 보면, 신춘문예의 시작은 우리 신문의 창간과 맥을 같이한다. 1925년과 1928년에 각각 신춘문예를 시행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의해, 신년 문학작품 모집 제도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잡게 된다. 당시엔 각 장르마다 과제(課題)가 주어졌으며, 반드시 본격 문예 작품에 한정하지는 않았다. 주제가 여럿이면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썼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현상금이란 말 대신 ‘박사진정(薄謝進呈·사례로 얼마 안되는 돈이나 물품을 준다)’이라 했다. 소설의 경우 1등에게는 60원, 2등에게는 30원. 당시 쌀 중급품 한 가마가 30원, 택시 요금이 1원(균일가)이다. 첫해에는 4편의 소설과 8편의 시가가 뽑혔다. 주제는 ‘싸움이야기’와 ‘용이야기’였다. (참조. 위키백과 및 이재복,「신춘문예 우리문학사에 어떻게 기여했나」,『시인세계』, 2002 겨울) 현재 시행되고 있는 대표적인 신춘문예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국경제≫, ≪경향신문≫, ≪세계일보≫, ≪서울신문≫, ≪매일신문≫, ≪광주일보≫, ≪부산일보≫, ≪국제신문≫, ≪문화일보≫ 등 25곳이 있다. 최근 2019년 ≪뉴스N제주≫에서 처음으로 시행한 ‘디카시’ 신춘문예 신설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내일을 가늠하는 지남(指南)으로서 신춘문예 제도는 신인 작가 발굴은 물론 문단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은 주로 ‘참신한 언어 실험’, ‘응시와 발견’, ‘언어의 조탁(彫琢)과 감각’, ‘현실의 부조리와 풍자’, ‘압축 혹은 형상화의 미학’ 등을 위주로 한다. 최근 성향에는 ‘소통과 흡인력이 높은 작품’, ‘독창적 체험의 깊이를 확보한 날이미지’의 개성적 작품이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응모작의 수준은 골라야 하며, 기성 시법의 모방과 표절은 금기이자 탈락의 대상이다. 신춘문예의 활성화는 전문 시인들의 배출뿐 아니라, 고급 독자층의 확보 및 아마추어리즘을 걸러내는 검열의 기능을 갖기도 한다. 1990년대 이전까지의 신춘문예 작품은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곤 소통에 별반 문제가 없었으나, 2000년대 이후에 오면 대다수의 작품이 불통의 문제로 곤혹스럽다. 전자가 시적 소재와 대상, 형식과 내용, 주제 의식과 형상화의 방법을 ‘세계의 자아화-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란 전근대의 방식으로 풀어냈다면, 후자는 미래시의 영향으로 신인마다 주체를 끌고 가는 방식이 자아의 분열과 확장, 극적 전개와 타자성으로 인해 크게 변모한 게 사실이다. 하여, 2010년에서 2022년까지 당선작 중 다수는, 독해 자체가 암호화된 기호처럼 보인다. 이런 언어의 분리와 단절성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기상천외한‘실험’과‘파격성’이야말로 신춘문예에서만 가능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제 오독을 전제로 한 신춘시 읽기의 몇 가지 방법을 보기로 하자.
우선‘주체와 객체’를 인식하는 시선이 혁명적이어야 한다. 신선한 언어 감각의 강점을 흡수하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할 때 비밀스런 독해는 비로소 풀리기 시작한다. 개인적 일상과 은폐된 언어 구조의 의미는 더욱 심층화되어 있다. 이런 숨겨진 무의식을 행간 밖으로 끌어내려면 오랫동안 행간을 곱씹어 보아야 한다. 시대가 언어를 규정한다. 이성과 의식의 통제와 지배를 거부하며, 초현실주의의 모호한 기분과 감정을 개인의 극단적인 언어와 이미지로 드러내는 최근 신춘시의 수법은, 갈수록 진화되어가는 느낌이다. 다층적 언어 실험은 언어를 형태소의 최소 단위로 쪼개고, 단어와 기호를 혼합하고, 색채와 시선의 이미지를 분산하여, 수많은 낯선 점으로 찍어 놓은 ‘주체’로 대체 된다. 행(行)과 연(聯)의 갑작스런 단절과 놀라운 비약은 신인의 패기이자 강점이다. 물론, 거칠고 모호한 언어 습관, 외래어 및 외국어의 과다한 사용은, 자칫 한국어에 대한 무시로 비춰질 수 있어 금기의 대상이다. 최근 신춘문예의 역기능도 제기된 바 있다. 문학작품, 특히 시는 ‘느낌’으로서의 작품 읽기가 중요하다. 신춘문예가 ‘불통 혹은, 지나친 언어 조작’으로 인한 시 만들기에 집중되었다는 비판이다. 소위 판에 박힌 신춘문예용 당선작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다는 지적을 낳았다. 또한, 등단 과정에서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도, 작가의 이후 문학 활동을 보장받지 못하는 점은, 신춘문예의 위상을 점점 위축시키고 있다. 특히, 공정한 경쟁과 심사보다는 문단 권력화로 인한 ‘나눠먹기식’ 심사의 폐단은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춘문예가 한국어 사용자들의 공동 관심사이자 신춘문예 당선작과 등단 작가는, 문학 지망생들에겐 새해의 소망이자 로망roman이 아닐 수 없다. 뿐아니라, 신춘문예는 “우리 자신보다 더 예민하게 앓고 노래해 줄 새 소리꾼, 새 예언자를 기대하는 사회적 형식”(2014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황현산/김사인)이란 점에서 더욱 새로운 관심을 환기한다. 이 글에서는 2000년에서 2020년까지 신춘문예 당선작 6편의 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응시와 발견
2000년 이후의 신춘문예 당선작은 미래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미래시는 과거 유산과의 결별, 형식의 해체 및 언어의 절대 자유, 산문시의 실험, 낯선 어법, 새로운 상상력을 들고나왔다. 기존의 문법을 파괴한 서술 구조의 단절과 행간의 비약은 소통 불가의 장치이지만, 언어 지층에 각인된 연대기를 우주적 상상력으로 확장한 힘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런 현상은 스마트폰의 등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포노사피엔스(Phonosapiens)로 지칭된 이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 공간에서 가상의 생존 방식을 익혔다. 기존 인류의 문명은 무너지고, 4차, 5차 디지털 혁명으로의 진화는 속도의 시대이다. 로봇과 AI, 유튜브, 넷플릭스, OTT 등의 스마트폰 영상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선보였다. 시단의 지형 역시 ‘미래시’의 급속한 파급으로 거의 모든 서정의 시법은 전복된 상태이다. 빅데이터·사물인터넷·5G·자율주행 등 신개념을 흡수한 전혀 낯선 언어들이, 2000년대 신춘문예 당선작에 유입된다. 세밀한 언어의 조탁과 묘사, 낯선 화법과 개인적 상징, 특히, 소수자의 성차별과 불평등한 사회의 부조리, 폭력과 야만, 팬데믹 이후의 죽음 이미지를 시의 주제로 활용하였다. 이런 포스트휴머니즘(Post Humanism) 시대의 진입은 우주와 지구, 자연과 인간의 초연결 시대를 열었다. 대체로 전근대의 동일성의 시학은 퇴색하고, 환상과 해체의 시학으로 전이된다. 화자의 자리는 다층적, 분열적 주체로 바뀌었으며, 시적 주제는 부조리한 현실을 과감하게 비판한다. 신인들의 시적 고뇌는 불안한 시대의 정신적 위기감을 투영한 것이며, 현대인의 분리 불안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2001년 김지혜의《동아일보》당선작「이층에서 본 거리」를 보면 언어 마디를 극미세 이미지로까지 치고 들어간 관찰력과 묘사력이 단연 돋보인다. 2001년 조유인의《매일신문》당선작「금관」은 고대 석관의 밀폐된 뚜껑을 여는 듯한 돌올한 상상력으로 빛과 소리의 영롱한 합금을 빚고 있다. 2005년 윤진화의《세계일보》당선작「모녀母女의 저녁식사」는 신선한 발상이 주목을 받았다. 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이미지를-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로 연상한 시적 비유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잘 보여주었다. 2006년 곽은영의《동아일보》 당선작「개기월식」은 시와 과학적 사실이 시인의 상상력과 버물려 어떻게 시로 재탄생되는지를 보여준 수작이다. 2007년 신미나의《경향신문》당선작「부레옥잠」은 근래 보기 드문 서정시의 완성작이었다. 부유성 수초인 부레옥잠이라는 작은 사물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여성성에 닿게 한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2008년 문정의《문화일보》당선작「하모니카 부는 오빠」는 현대시 속에 외국 노동자(캄보디아)의 신산한 삶을 새롭게 환기시킨 작품이다. 한 소녀의 입을 통해 부정적이고 어두운 노동자의 고통스런 현실을 따스한 서정으로 희망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2009년 임경섭의《중앙일보》당선작「진열장의 내력」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점을 잃지 않고 삶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서류뭉치로 정의되는 직장인의 고단한 하루를 통해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폐쇄적 환경을 잘 응시한 작품이다. 2010년 성은주의《조선일보》당선작「폴터가이스트」는 불안을 이미지의 질료로 비벼 수준 높게 형상화하였다. 진심이 묻어있는 어눌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공포를 해소시키는 짧은 농담, 살얼음처럼 떨리는 섬세한 문체로, 현대인의 불안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특히, 앞서 말한 김지혜(1978~, 서울 출생)의「이층에서 본 거리」는 대상에 대한 예리한 응시와 발견이 단연 돋보인다. 이 시는 94년 심보선의《조선일보》당선작「풍경」에서 처음 시도된 영화적 기법을 보다 세련시켰다. 신선한 언어의 사용과 관능적 은유는, 심리에 기반한 플롯의 정교함과 겹쳐 백미를 이룬다. 세 장면의 자연스런 이야기의 흐름과 반전은 정치(精緻)한 데가 있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전개되는 풍경은, 생생한 묘사와 즉물적 상상력으로 카메라의 이동 기법을 선보였다. 작품 전문을 보자.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투둑 흩뿌려지는 환(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몸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환상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환상도 한 걸음씩 비켜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 않고 있으므로.
― 김지혜, 「이층에서 본 거리」 전문
「이층에서 본 거리」는 현대인의 삶의 명암을 창(窓)을 통해 드러낸 사이의 풍경이다. 관음증VOYEURISM이 자아와 타자 사이 성적 충동과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라면,「이층에서 본 거리」는 현대인의 다층적 삶의 무늬를 디자인하였다. 시의 행과 연 사이 개입한 내레이션은 장면마다 흥미를 불러일으킨다.‘여성’의 관점에서‘남성성(性)’의 심볼을 비밀스럽게 훔쳐본 시선은 관능적이다. 특히“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 투둑투둑 흩뿌려지는 환(幻)의 알약들”이 “금은방 김씨”의 용두질과 겹쳐 클로즈업된다. 이런 다층의 감각적 이미지는 행간의 의미와 은유를 천착한다. 이 시는 풍경과 언어 이전의 음영(陰影)을 동시에 드러낸다. 자위행위가 끝난 남성의 식은 심볼을 “뻐꾸기시계의 추가 축 늘어”졌음에 비유한 점은 압권이다.
2연의 카메라의 이동을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 시점으로 옮겨간 것은 절묘하다. 언어의 기미와 기척을 느낌으로 바꾼 시안(詩眼)은 공감각적이다. “수염을 당”기는 고양이의 앞발은 감정의 크로키다. 풍경과 풍경 사이를 “팽팽하게 당”긴 고양이의 등으로 묘사한 점 또한 세밀하다. 가장 환상적 이미지는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든 햇빛,”을 직관한 독창적인 개성에 있다. 물론 “쩌억쩍 하품”하는 고양이의 “권태”를, 저녁의 시간적 이동으로 옮긴 기교 또한 놀랍다. 시에 있어 (괴테의 말처럼) 감정이 전부라면, 세계의 비밀을 여는 열쇠는 감성이다. 이 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발화법을 통해 언어의 끌로, 시대의 압화를 조각(彫刻)하고 있다. 구체를 통해 추상으로, 추상을 통해 구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다초점을 통해 현실 풍경의 이면을 들추어 내는 이 시는 단절과 비약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한 일상을“건너편 창”을 통해“전등”불로 비춘다. 인간의 내면은“동굴”처럼 캄캄하다.“토악질”하는“사내”는 일그러진 현대인 모습이다.“절벽”과“절벽”사이에 끼어“울부짖는”21세기의 인간 자화상이다. 생의 의미도“환상”도 없는 이 시대의 암울을, 영화 속 슬로우모션처럼 시적 주체는 전환된다. 이층에서 바라다 본 거리의 풍경과 사물은 평면적이지 않다. 이렇듯 세계를 보다 잘 조망하는 관점과 시선의 획득은 허공이거나 하나의 텅 빈 입구이다. 세계의 비밀을 여는 키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풍경과 서정
신춘문예의 흐름은 2010년 중반에 이르면, 새로운 서정과 감각적 이미지의 등장, 현대 사회의 다양한 부조리를 비판하는 동시에, 우주적 상상력이 시에 도입된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란 방법론적 질문보다, 어떤 시가 새로운 시인가라는 모더니티의 문제로 이동한다. 그리고 주체나 대상을 감각적 이미지로 보는 경향이 뚜렷하다. 상징과 은유로 대변되는 이 시기의 시작(詩作)들은, 언어의 생성과 발전, 소멸과 의미의 단절까지도 극단적으로 시도된다. 시 행간의 보폭을 최대한 넓게 사용하고 있으며, 언어유희를 통해 언어 너머를 지향한다. 2012년 김민철(1981~, 서울 출생)의 《문화일보》 당선작 「풍경 재봉사」는 새로운 서정의 언어 실험과 보다 완결된 작품의 타입을 보여준다. 기존 서정시의 유행과 시류에서 벗어난 참신한 감각은 독창적 시법이다.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놀랍고 기발하다. 이 시는 풍경 이미지를 섬세한 언어 구조와 연결시켜 구체화된다. 묘사적 이미지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형상화된다. 뿐아니라, 무의식적 우주의 복합 영상으로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하거나 사라지게 되어 사물을 언어로부터 분리시킨다. 반면, 「풍경 재봉사」는 천문(天文) 지문(地文) 인문(人文)의 내적 조화를 꿈꾼다. 말의 상투적인 틀을 해체하고 물성과 하나되어 놀라운 감성으로 되살아난다. 이미지 과잉이 아니라 고급한 이미지의 세련된 무늬로 승화된 빼어난 시이다.
수련 꽃잎을 꿰매는 이것은 별이 움트는 소리만큼 아름답다
공기의 현을 뜯는 이것은 금세 녹아내리는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일까
오늘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이다
댐은 수문을 활짝 열어 태풍의 눈에 강줄기를 엮어준다
때마침 장맛비는 굵어지고, 난 그걸 풍경 재봉사라 부른다
오솔길에 둘러싸인 호수가 성장통을 앓기 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재고 수면 옷감 위에 재봉질한다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킨다
흙빛 물줄기들은 보푸라기의 옷으로 갈아입고
버드나무 가지에서 밤새 뭉친 실밥무늬가 비치기도 했고
꾸벅 졸다가 삐끗한 실밥이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풍경 재봉사의 마지막 바느질이 아닐까
주먹을 꽉 쥐려던 수련의 얼굴로 톡 떨어지는 물방울
수련꽃이 활짝 피어 호수의 브로치가 되었다
― 김민철, 「풍경 재봉사」 전문
「풍경 재봉사」는 “호수에 떨어지는 장맛비를 풍경 재봉사로 인식하는 형상화 과정 하나하나가 자상하고 섬세”하다. 하여, 유행과 시류에 벗어난 “한국시가 근래 들어 잃고 있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깃들었다.(심사평) 1연에서 시인은 장맛비가 수련 꽃잎에 떨어지는 순간의 시학으로서 시각을 촉각 이미지로 전이시킨다. 비가 꽃잎을 ‘꿰맨다’는 발상과 비유적 이미지는 신선하다. “봄눈”, 혹은 “물푸레나무 뿌리의 날숨을 타고 오는 하얀 달”의 시각적 은유 역시, 서로 연결된 사물의 존재를 내밀화 한다. 물푸레나무 뿌리와 하얀 달은 본질적으로 같은 생명이며,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연결된 전체로 작동한다. 이런 융합 이미지는 “공기의 현”을 뜯는 소리로 청각화 함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했다. 한 사물의 다양한 이미지를 어떻게 시어 속에 적확하게 부려 쓸 것인지가, ‘시’의 핵심이다. 2연의 장맛비가 때리는 상황을 “공기가 휘어질 듯하게 풍경을 박음질”하는 촉각으로의 환유는 탁월하다. 이전의 서정시에서 볼 수 없는 사물을 뒤집어 본 발상은 신선하다. 직선 또는 사선으로 ‘허공’을 긋는 장맛비의 빗줄기를 ‘휘어짐’으로 본 곡선의 사유와 상상력은 놀라운 응시이다. 다양한 언어의 변용도 기막힌 시법이지만, 기후를 나타내는 등고선을 “장마전선은 하늘이 먹줄을 튕겨놓고 간 봉제선”으로 감각화한 시법은 기발하다. 무엇보다 이 신인의 놀라운 시적 인식은, 호수의 장맛비가 불어나는 현장을 “빗방울이 호수 가슴둘레를” 잰다는 깊은 사유의 내공에 있다. 그리고 “소금쟁이들이 시침핀을 들고 가장자리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장면은, 옷의 수치를 재는 재봉사와 오버랩되어, 시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아울러, 호수 가운데 피어있는 “수련꽃”을 “호수의 브로치”로 비유한 시각 이미지는, 김민철만의 독창적인 은유의 미학이자 진리가 된다.
한편, 2013년 황은주(1966~, 강원도 홍천 출생)의《중앙일보》당선작「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는 발랄한 상상력, 풋풋한 사유, 오랜 시적 내공과 함께 새롭게 찾은 사물의 성질, 감각의 명증성,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야무진 시로 평가받았다. 시의 위치를 다양하게 이동시킴으로써 주체의 의미를 심화한다. 언어의 모호성과 모순에서 발생하는 청각의 시각화는 독자적 이미지로 거듭난다. 여러 겹으로 접힌 언어의 중의성은 행간을 팽팽하게 긴장시킨다. 때로는 시간의 급격한 이동으로 인해 불협화음이 발생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시가 추구하고 있는 미래를 향한 지향점은 바뀌지 않는다. 이 시는 실제의 세계와 인간이 만든 상상의 세계 사이에 굴절과 균열이 생겨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혀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 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 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 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 황은주,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전문
신인에게 원숙한 장인처럼, 시의 도구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시의 연장을 골고루 다뤄 본 경험이 있는가, 기존 문단의 “관성과 타성에 기대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남의 것 흉내 내기”, “조악한 모국어 사용 습관”(심사평) 등은 없는가, 이런 몇 가지 기본기를 점검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는 “오장육부를 뒤흔들 만한 놀라운 개성은 아니지만”, 오래 응시한 사물의 신선한 물성과 “모국어를 최적화할 수 있는 약동(躍動),”과 더불어 “진탕만탕 생명력의 잔치(보들레르)들이 잘 어우러진”다는 평을 받았다. 이 시의 1연 “아삭”이란 이미지는 시작(詩作)에서 첫 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킨 재기발랄한 시구이다. 한 입 사과를 베어 물 때 나는 상큼한 소리를 통해, 행간의 여백을 미각에 따른 상상과 청각적 이미지로 가득 채운다. 미각은 예술가의 감식안과 심미안을 키우는 반면, 청각은 세계와의 이해 폭을 넓혀준다. 아침을 알리는 “사과나무 기척”이란 의인화도 그렇지만, 커가는 사과 둘레를 비유한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의 기교는 절묘하다. 허공과 사과의 접촉을 통해 공(空)의 세계와 색(色)의 사상까지 시적 의미를 확대한다. 섬세한 관찰이 이미지로 도드라진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 가는 아침 사과의 시각적 심상은, 인상파 화가들의 색채에 대한 놀라운 감각까지 연상시킨다. 또한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는, 낮과 저녁 사이의 시간 이동에 대한, 기존 화법을 완전히 뒤집은 참신성은 주목할 만하다.
2연의 사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신인의 키를 훌쩍 뛰어넘었다. 썩은 사과의 움푹한 한 쪽을 “어두워진 빨강,”으로 관찰한 시적 화자의 매서운 눈매 역시 화가의 그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태풍이 쓸고 간 과수원 한쪽에 떨어진 사과를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고 묘파한 이중의 알레고리 기법은, 새로운 서정성의 확장을 의미한다. 그런가하면, 사과의 단맛에 취해 “어지러운 인”을 박으며, 마구 과일을 파먹는 벌레들을 “집 한 채 허무는 공사”로 비유한 것 또한, 미각적 이미지의 절정이다. “죽은 옹이”를 “사과의 말을 듣는 귀”로 은유한 3연의 시 읽는 맛도 일품이지만, 지난 가을 남쪽 햇살에 씨알을 너무 많이 달아 찢어진 사과 가지들의 무지를 “방향의 편애”로 본 시선도 독창적이다. 4연의 빠른 시상의 전개를 위해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과 “바람”의 행간 걸침(enjambment)은 시적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스듬한 접목의 자리”와 비탈에 우리가 모르는 생명의 씨를 뿌리고 생명의 씨가 자란다는 사실. 늦여름과 가을 사이를 24절기의 아홉 번째인 “망종”과 그때의 태양의 기울기인 “황경 75도”로 처리한 계절의 시각 이동도 눈여겨볼만한 대목이다. 또한 마지막에서 보듯이 그믐달이 풋사과의 갈변 속도(과일이나 채소에 있는 폴리페놀 성분이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점차 갈색으로 변하는 현상)로 빠르게 이행한다면, 이내 초생달이 반달이 그리고 만월이 될 것이다. 시 제목「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역시, 모호함과 심플한 감각을 동시에 가졌다. 비록 지금은 ‘풋사과’처럼 덜익지만, 언젠가는 삼만 광년의 속도로 ‘붉게 익겠다’는, 다부진 시의 결기가 느껴진다.
차이의 생성과 존재(론)
2014년 심지현(1990~, 경남 김해 출생)의《경향신문》당선작「갈라진 교육」은, 이전까지 신춘에서 볼 수 없었던 교육의 문제를 거침없이 들추어낸다. 이런 은어(隱語)의 사용은, 불편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생생한 발화로서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015년《조선일보》당선작「면面」은 독특한 위치에 놓인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평면 측면 얼굴 경계선 바닥 방향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면이란 단어를 활용하여 우리 시대 삶의 다층적 ‘면’을 성찰한 작품이다. 2016년 변희수의《경향신문》당선작「의자가 있는 골목-李箱에게」는 이상의 시「거울」의 말투를 빌어, ‘의자’가 함의하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파편적 의미들을 깊이 있게 성찰했다. 특히 시 행간 툭툭 던지는 대화의 시법과 ‘의자’를 ‘침묵의 의지’로 알레고리화 한 점은, 말이 어떻게 사물과 소통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2017년 문보영의《중앙일보》당선작「막판이 된다는 것」은 숙련공의 언어 운용과, 단단한 사유의 힘을 갖춘 시로 평가된다. 이 시는 산문시가 갖기 쉬운 상투적이고 이완된 측면을 잘도 조정한다. 자유롭고도 능숙한 언어 구사와 일관된 주제 이미지를 행간 속에 밀고 나간 힘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근래에 유행하는 미래시에서 한 발 비껴선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2018년 강지이의《중앙일보》당선작「수술」은 수술을 받기 위해 침대에 누워 기다리는 짧은 순간을 묘파한 것으로, 시의 구체성과 몽환성, 선명한 이미지와 신비한 여백이 새삼 눈길을 끌었다. 그것은 온전히 몸의 수평을 유지한 이에게 주어지는 그 무엇이었다. 2018년 변선우의《동아일보》당선작「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로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였다.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대상을 옮겨가는 유연한 처리는 상당한 시적 내공을 가늠케 한다. 2018년 우남정의《세계일보》당선작「돋보기의 공식」은 시어의 섬세함과 적확한 묘사, 이야기 구조의 탄탄한 전개 방식이 돋보였다. 주름을 아코디언처럼 펼쳤다 접는 기막힌 묘사는, 세월의 무수한 실금으로 은유된다. 2019년 노혜진의《한국일보》당선작「엄마는 저렇게 걸어오지 않았다」는 신선한 자기만의 화법이 돋보였다. 모두가 충분히 시라고 부를 만한 진짜 시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시는 산문을 어떻게 시적으로 잘 끌고 갈 것인지를 보여준 작품이다. 2019년 류휘석의《서울신문》당선작「랜덤 박스」는 소재의 참신성으로 상당한 시선을 끌었다. 상품을 무작위로 상자에 넣어서 파는 상술로, 일종의 도박을 시적 소재로 가져왔다. 비틀린 현실을 은유한 이 작품은, 실패 · 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릴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음화의 한 단면을 깊게 집어냈다. 2019년 설하한의《한국경제》당선작「물고기의 잠」은, 신화적 상상력을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능력이 탁월하다. 유목민의 떠돎과 인간의 회귀하는 서사를 시의 구조로 구축한 것은, 젊은 신인의 독창적 안목과 역량으로 평가된다. 2019년 오경은의《중앙일보》당선작「계시」는, 다소 언어의 결이 거칠지만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려는 패기와 진지함이 돋보인 작품이다. 디스토피아적인 현실 속에서도 끝내 길들여지지 않는 우울과 분노를 그의 시들은 품고 있다. 매일 복권을 긁으며, 당첨되기를 무슨 계시처럼 여기는 현대인의 그늘과 소시민의 삶에 대한 통증을 제대로 짚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9년 조온윤의《문화일보》당선작「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 강가에서」는, 자연의 냉혹한 질서와 죽음의 공포, 삶의 애착을 무심하게 바라본 점이, 높이 평가된다. 죽기 직전의 할머니가 바라본 풍경과 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호랑이의 교차된 시선을 통해, 스케일 큰 상상력으로 버무려낸 힘은 신선했다. 이 시는 지상의 수많은 삶과 죽음을 온몸으로 겪어낸 할머니의 마지막 적요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개개의 삶을 넘어 생태계에 각인된 기억에 따라 움직이는 호랑이의 시선과 교차시킨 점 또한, 이 시의 관전 포인트다. 2020년 박지일의《경향신문》당선작「세잔과 용석」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였다. 숨어 있는 것들의 모호성을 통해 드러난 것들의 부조리를 지목하였다. ‘세잔과 용석’은 어쩌면 이 시대 전혀 상반된 얼굴일 수도 있다. “기록하면서도 함부로 기록하지 않”는 당대의 음영을 들춰내는 진실이 숨쉬고 있다. (참조.『신춘문예시집』심사평, 문학세계사, 2000~2020)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춘문예의 중요한 특징은 ‘새로움(novelty)’과 ‘다양성(variety)’, 혹은 차이의 생성과 존재(론)로 규정된다. 마지막 장에서는 심지현의 시「갈라진 교육」과 변희수의 시「의자가 있는 골목-李箱에게」를 중심으로 좀더 분석 감상하기로 한다. 「갈라진 교육」을 먼저 보기로 하자.
오빠 내가 화장실 가다가 들었거든, 내일 아줌마가 우릴 갖다 버릴 거래. 그 전에 아줌마를 찢어발기자. 우리가 죽인 토끼들 옆에 무덤 정도는 만들어 줄 생각이야. 토끼 무덤을 예쁘게 만들어 주는 건 오빠의 즐거움이잖아. 아줌마는 가슴이 크니까 그건 따로 잘라서 넣어야겠다.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 여긴 아줌마가 오기 전부터 우리 집이었어, 난 절대 쫓겨나지 않을 거야.
너 시들지 않는 새엄마를 시기하고 있구나. 아버지가 무능해서 고생하는 예쁜 나의 새엄마. 그녀가 나를 버려도 괜찮아. 개처럼 기어가서 굶겠다고 말하면 그만인걸. 그게 안 먹히면 그녀의 가슴을 빨고 엄마라고 부르면 되지. 잠 설치는 아이를 달래는 척 밤마다 날 찾을지도 몰라. 자꾸 커지는 나를 본다면 오히려 그녀는 아이가 되겠지. 아, 못생긴 엄마가 떠나면서 주고 간 선물. 예쁜 우리 새엄마!
― 심지현, 「갈라진 교육」 전문
「갈라진 교육」은 갈라진 사회상을 투영한 메타포로 볼 수 있다. 최근 교육의 양극단은 진보와 보수, 부자와 가난한 자로 갈라져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화자인 여동생은 “오빠”에게 “아줌마”가 아이들을 “갖다 버릴” 것이라고 일러바친다. 물론 아줌마는 ‘영어’의 은유이자, “찢어발”겨야 하는 서구적 교육 방식을 말한다. 한국의 거의 모든 아이들은 조기 영어 교육에 매몰되어 있다.『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토끼들”처럼 “무덤” 속 구멍에서 살고 있다. 교육 백년대계란 말은 이제 구태가 되었다. 더 큰 폐단은 엄마 부대의 맹목적인 영어 사랑이 도를 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년의 욕심만큼 쓸데없이 큰 젖”은 미국을 겨냥한 사대주의를 풍자한 알레고리일 것이다. “새엄마”로 은유된 영어를 “시기”하는 한국 교육의 양태는, 혼돈과 파행, 반목과 질시로 얼룩져 대안이 사라진지 오래다. 그 결과 교육 현장은 탁상공론의 장이 되어 버렸다. 결국「갈라진 교육」의 주범은, 전근대적 인물로 지칭된 “아버지”의 “무능”이 불러온 병증인지도 모른다. 한국 교육 현장은 이제 새로운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이렇다할 대안도 없고 무작정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다. 아날로그 교육의 장점인 정(情)의 문화, 디지털 교육의 가치인 투명과 열린 교육을 통합한다면, ‘갈라진 교육’은 조금이라도 숨 쉴 틈이 생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가장 고민할 대목은, “못생긴 엄마(구시대적 교육 방법)”가 사라진 지금, “예쁜 우리 새엄마!(서구식 교육 방법)”와의 조화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물론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이 진정 어떤 교육 방향을 원하는지, 그것을 바탕으로 교사들의 교육적 윤리관과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또한 국가의 교육 백년대계가 어떠한 방향과 목적을 갖고 행동할 것인지, 교육자와 학부모, 교육 당국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그리고 상징과 알레고리로 점철된 이 시는 시제를 고려해 볼 때 우리의 교육 현실은 주체 대 타자로, 아니 사고방식의 차이로 갈라져 죽임의 교육과 살림의 교육 사이에서 기로에 놓여 있다. 다시 새로운 교육, 새로운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편, 2016년 변희수(1963~, 경남 밀양 출생)의 《경향신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李箱에게」는 이상의 시 「거울」의 화법을 오마주(hommage)한 것으로서, 현대 사회의 다양한 파편적 의미들을 철학의 깊이로까지 탐색한 작품이다.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변희수, 「의자가 있는 골목-李箱에게」 전문
이 시의 라이트모티브로서 의자는 의인화된 사물로서 삶의 이면과 내면 풍경을 담지하고 있다. 의자는 사람과 세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점에 놓인 하나의 질문이다. 또한 의자는 관계의 사유이자 사방(상하좌우)을 살펴야 하는 밥의 공간이다. 시의 첫 행“아오?”는 아시다시피 이상의 「오감도」와 「거울」의 종결 어미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상이 근대적 인간상의 비극적 이미지를 부정의 사유와 초현실주의 기법에서 발굴해 냈다면, 변희수의 경우 보다 긍정적인 태도에 기반한 방법론적 측면에서 수용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변희수는 마치, 시인 이상(李箱)의 혼령이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이, 조곤조곤 말을 허공에 대고 풀어내고 있다.‘의자’가 함의하는 현대 사회의 의미는 다층적이다. 의자는 욕망의 상징들이 달라붙어 온갖 의미들로 재해석된다. 그녀의 질문은 내면의 계단 아래 숨겨진 시의 방으로 끌고 가는 착시를 가져다 준다.“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게 한다. 현대인과“의자”는 한 통 속의 은유로 형상화된다. 현대 사회는 모름지기‘의자의 시대’이다. 발화자인 나는“오직 그녀가 내준 의자에 앉아“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않고 있다. 우리는 의자의 나라에 충실히 복무하는 시민이다. 출근하여 집에 갈 때까지, 아니 집에 가는 도중인 지하철, 버스, 택시 안까지도 의자에“의지”해 실려 간다. 어떤 의미에서 의자는“책상”보다 덜“편견”적이고 유용하다. 의자와 의지의 언어유희는 물론, 의자의 환유 또한 다양하게 변주된다. 달과 해와 별이 허공의 의자에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놀다 가듯이, 변희수의 의자 역시 태도와 지세의 그것으로“참 의젓하”다. 의자는 각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동시대인들의 ‘의미’의 장소이자, 말이 번지는 지점이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은, 결국 의자에 함몰된다. 모든 것을 의자가 해결하지는 못한다. 태도와 방법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이해와 질문의 시로서 이상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즉“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는 눈으로서 전통과 예지의 시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