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입구에서
홍 성 자
비에 젖은 낙엽 길을 걷다보니 기온이 뚝 떨어졌음을 알겠다. 벌써 입동가까이 되었나? 한국의 입동쯤이면 월동준비를 해야 했던 60여 년도 훨씬 넘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캐나다 땅에 살고 있어도 어릴 적 일들이 선명함은 웬일일까, 올해 2023년 입동은 11월 8일이다.
당초 24절기는 중국의 주나라 때 동이족 희화자(羲和子)가 만들었으며, 황하강 유역의 기후에 따라 농사를 짓기 위해 정한 것인데, 어느 절기는 한국의 기후와 꼭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희화자는 2023년 현재로 보면 거의 2900년 전의 사람이라고 하며, 동이족이라는데 동이족이면 우리 한국인의 선조가 아닌가? 계절의 시금석이라 하는 24절기를 만들어 낸 사람이 결국 한국인이란 말이다. 알고 보니 참말로 프라우드한 일이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되어있고, 한국에는 고려 충렬왕 때 도입했다고 한다.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 즉 황도의 위치에 따라 계절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언뜻 생각하면 절기라 하여 음력 같은데, 해를 중심으로 만든 것이어서 단연코 양력이다. 24절기는 양력 기준이지, 절대로 음력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24절기는 한 계절 당 6개의 절기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1년을 지구 360도로 보고 1절기 당 15도씩 나누어서 24개가 되었다고 한다. 절기를 보면 정말 신기하다.
입동(立冬)이란? 겨울이 시작됐다는 뜻보다도 이제부터 준비하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입자를 入 들어갈 입이 아니고, 立 설 입자를 쓴단다. 아기가 걷기 위해서는 먼저 일어서야 하지 않는가? 서지 않고 어찌 걸음마를 시작 할 수 있겠나. 일단 서야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입동! 예전에는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하여 이웃은 물론, 농사에 힘쓴 소에게도 나누어주며 1년을 마무리 하면서 각 가정에서는 김장준비에 들어간다.
동면하는 동물들은 땅속에 굴을 파고 숨으며, 입동 날 추우면 그해 겨울은 몹시 춥다고 한다. 물론 캐나다는 한국과 기후가 다르고, 또한 지금은 지구가 온난화 현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때도 있지만.......
어릴 적 7-8세쯤이었을까? 그 당시 입동 즈음이면 할머니와 작은 집이 사시는 충남 보령군 주포 고향집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대천의 목장리 기역자 초가집까지, 지붕에 얹을 이엉들과 용마름, 둥글게 말은 새끼줄 둥치 등, 일하실 분들을 싣고 이른 아침 덜덜거리는 트럭이 우리 집 앞 둑길로 들어선다.
일하시는 분들은 지붕에서 살살 기어 다니시며, 새로 엮어온 이엉을 얹기 전에 삭아서 오래된 이엉을 조심조심 걷어낸다.
추억의 체크포인트, 그때 지붕에 이엉을 얹으며 일하시는 분이 소리 질러
“여기 애기 이빨도 있어요.” 하고 오래된 이엉 속에서 이빨 하나를 마당으로 던지면 내 이빨인가? 하여 얼른 가서 두리번거리며 찾아 주워서보는데 아버지는
“어머나 우리 성자 이빨을 작년에 제비가 못 가져갔구나, 박씨 같은 예쁜 새 이빨 가져오라고 지붕에 던졌는데, 제비기 깜빡하고 안 물어갔구나” 평소에 말이 없으신 아버지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머도 있으셨던 멋쟁이 우리 아버지, 코트에 중절모자를 쓰고 담배냄새 흩날리며 옆에 서 계신 듯하다.
(참고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니, 초가집 기역자 사랑방이 아버지 방인데, 앉은뱅이책상 위쪽에는 흑백으로 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Golden Gate Bridge, 金門橋)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그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사진을 구하셨을까? 그 때 아버지의 마음 조금은 미국에 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부터 먼 훗날 내가 캐나다 땅에 와서 살게 된 것은 또 무엇일까.
아버지는 편두통이 있어서 늘 고통스러워하셨는데, 두통이 시작 될 때면 사리돈을 드시면서도, 정말 열심히 행정고등고시 준비를 하고 시험 보았는데 합격하셨다. 할머니께서 어찌나 기뻐하시는지, 아버지는 행정사무관이 된 기쁨보다도 할머니께서 기뻐하시는 그 모습이 더 기뻤다고 하셨다.)
정성으로 짱짱하게 엮어온 새 이엉을 초가지붕에 고루고루 펴 얹고, 마지막엔 용마루에 짚으로 길게 양쪽으로 갓을 펴 놓은 듯, 기술적으로 볏짚을 틀어 엮은 용마름을 얹는데, 완전 고정될 수 있도록 군데군데 총총 박음질하듯 새끼줄로 단단히 매어준다. 어떤 회오리강풍이나, 태풍에도 이엉이 들썩이지 않도록 짚으로 튼튼하게 꼬아 만든 새끼줄로 묶고 또 묶는다.
용마름으로 초가지붕작업을 마무리 해놓고 보면, 새로 만든 집같이 깔끔하고 아담하며, 단정하고 포근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일하신 분들과 우리 부모님, 동네 어른들까지 나와서 아주 잘 되었다고 막걸리를 함께 하시며 좋아하는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장면이다.
엄마는 부엌에서 일하신 분들을 위해 쌀밥에 입맛 돋우는 구수한 동태찌개를 끓이며, 고소한 배추 속을 찍어 드실 고춧가루와 참기름, 깨소금, 썬 잔 파 등을 듬뿍 넣어 고소한 양념장 등을 준비하신다.
거기에 이때쯤이면 겨우내 땔 나무를 한 트럭 실어 오며, 쌀과 소금가마니를 준비하고, 김장도 쌀 버금가는 양식이라며 무, 배추로 김장을 넉넉히 담근다. 그래야 내년 푸성귀가 나올 때까지 대어 먹어야 하고, 메주콩과 콩나물 콩, 등을 잊지 않고 준비해야 우리 여섯 식구가 기나긴 겨울을 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의 입동도 한참을 지났는데 나는 무엇을 준비해놓았나? 세상은 예전 같지 않고 완전 달라졌는데, 늙어갈수록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단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됐다면 나는 과연 내 삶의 겨울을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