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을 빼서 동해에 걸어라 / 김종윤
시월의 중순이면서 음력 9월 9일은 전해산 장군의 추모제가 열리는 날이다. 오늘 그 행사에 가려고 차에 타려는 순간, 아침까지만 해도 쾌청하던 날씨가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앞 차창에 후두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차를 몰고 행사장으로 갔다. 도로 주변에는 아직 탈곡이 안 된 논에 누런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자신들의 지나온 계절을 정리하고 있었다. 저만치 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예상치 못했던 빗줄기를 피하고자 천막을 치고 있었다. 진설한 제사상을 보호하려고 준비한 것이다.
이곳은 북쪽의 수분 재에서 금강과 섬진강으로 나뉘어 흐르는 물 중 이 물은 남원 요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운봉 재에서 생긴 동쪽 물이 서쪽으로 흐르다 물이 합수되는 곳이다. 여기는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 내 눈을 빼서 동해에 걸어라 / 김종윤원촌마을이다. 남향으로 자리한 묘소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에 시냇물이 졸졸졸 흘러가고 앞 논에서는 누렇게 익은 벼가 탈곡을 기다리고 있다. 광주-대구고속도로가 운봉 쪽으로 기어오르고 상수리나무와 소나무가 섞인 혼효림 아래 요천수가 보인다. 곁에는 옅은 단청의 정자 하나가 가을을 부르고 있다. 내리던 비가 금세 멎었다. 장군의 충정을 하늘도 배려하는 것일까. 제례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촛불이 타고 향불이 타오르니 코끝의 냄새가 자연스럽게 두 손이 앞으로 모아졌다. 전해산 장군의 약력을 소개하였다. 대동 의병장 전해산 장군의 휘는 ‘기홍 (基泓)’, 자는 ‘수용 (垂鏞)’이고, 관향은 ‘천안(天安)’이며, 호는 ‘해산 海山’이다. 고려조에 좌상을 지낸 전인양의 후손으로 1879년 10월 18일 임실군 둔남면 국평리에서 아버지 전병국과 어머니 경주김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장군이 여섯 살 되던 1885년 부모님을 따라 이 마을로 이사 와서 자라면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거사는 물론 순절 후 유택까지 이 자리에 모시게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비범했던 장군은 학당에서 의로운 친구들과 더불어 훌륭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일본에게 약탈 되자, 이듬해 장군은 당시 국가적 지도자 최익현 선생의 순창의거에 참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최익현 선생이 순국한다. 그 뒤를 이어 의병을 300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 순창, 임실, 장수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쳐서 수백 명의 왜병을 잡아 죽이자 그 명성이 전국 팔도에 떨치게 된다.
전남 나주 출신 김 준 의병장의 활약을 듣고 연합전선을 꾀하고자 광주와 나주를 무대로 활동하게 된다. 1908년 7월 25일 여러 장병들 추대로 대동의병대장으로 지휘권을 잡고 훈련을 쌓아간다. 많은 의병을 이끌고 왜병과 맞서 싸운 석문동 대전을 전개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통솔력이 탁월한 장군은 광산 대치작전, 순창 내동 전투, 정읍 입암산 전투, 순창 화개산 작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전투마다 패배하던 왜군이 본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여 영광 오동촌 포위 작전에서 피아간 많은 사상자를 내고 부하 장병들을 잃고 후일을 기약하며 해산하게 되었다. 이때까지 71회 전투에서 왜병 살상자 수는 3,500여 명에 이르는 피해를 입혔다.
의병을 해산하고 백주대로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혈안이 되어 찾던 왜군 헌병들의 눈을 피하고자 동화리에서 은거하며 어린 학동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왜군 헌병에 체포되어 광주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다시 대구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을 때 장군은 왜군 판사 앞에서 큰 소리로
“내 눈을 빼서 동해 바다에 걸어 놓으면 머지않아 일본이 망하는 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라고 호통을 쳤는데 그 뒤 장군의 그 말씀이 현실로 되고 말았다.
1910년 7월 19일, 당대의 영웅 전해산 장군은 의병장 박영근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어 31년의 생애를 애국충절로 마감하게 되었다. 장군의 부모는 체포되어 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비통한 나머지 식음을 전폐하고 신음하다 별세하였다. 장군의 부인 김해김씨는 시부모를 치상하고 혼자서 가정을 지켰다. 그해 9월 장군의 유해가 원촌리 본댁으로 돌아왔다. 남편의 시체가 든 관을 어루만지며 크게 통곡하다 그날 밤 자결하니 온 마을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절세의 충신과 열녀를 마을 앞 양지바른 언덕, 이 자리에 쌍분으로 모신 것이다.
광복 뒤 국가의 질서가 잡히고 정부에서 1962년 장군의 공을 기려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장수 향교 유림에서 번암면 노단리에 장군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뜻있는 인사들이 전해산 장군의 업적을 잊지 않고 받들고자 추모제를 모신 것이다. 제례 행사가 마무리되고 음복하면서 제사음식을 나누어 먹는데 구름이 걷히며 하늘이 밝아졌다. 가을바람이 촛대를 어루만지다 살며시 지나갔다.
[김종윤] 수필가. 2009년 《 대한문학 》등단.
전북문인협회 이사,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부회장. 임실문협지부장.
* 수필집 : 《시나브로 가는 길》
* 전북수필문학상 수상
이틀 후면 음력 9월 9일 이네요. 고향의 훌륭한 어른을 기리는 일이 후손으로 마땅한 일이지만 쉽지는 않지요. 나라를 위해 분연히 싸우는 일, 31세의 짧은 생애를 애국충절로 마감하는 일은 정말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수많은 선조들의 희생으로 나라를 지켰고, 전해산 장군을 비롯해서 여러 선조님들이 눈 부릅뜨고 독립을 쟁취해 내셨습니다. 그 분들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일 또한 훌륭하십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전해산 장군의 충절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님, 올리시는 이해숙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