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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대승불교의 거대 산맥을 이루는 종파는 두 가지다. 중관파는 한마디로 중도를 중요시하고, 유식파는 의식을 중요하게 다룬다.
우선 중도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중용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자아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측면까지 나아갔던 그 개념. 중도 사상은 말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태어난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중도 사상은 존재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사유를 전개한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자아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존재가 연기이기 때문이다.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것에 기대어 존재한다. 그렇기에 모든 현상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공(空)'의 상태다. 그래서 중도에서 시작하는 중관의 핵심 사상은 공사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음으로 의식은 쉽게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의미한다. 유식파에서는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 마음으로서의 의식뿐이라고 본다.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실체를 갖지 않는 삼라만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진짜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은 그러한 삼라만상이 드러나는 자신의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탐구해야 하는 것은 허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마음, 즉 의식이 된다. 유식파는 실제로 우리 의식을 끝까지 파고들어 심층적 층위를 분석해낸다.
중관파와 유식파가 다루는 주제는 인류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오한 논쟁점이었다. 서양 철학이 18세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철학적 담론들을 천 년을 앞서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의 언어에 익숙한 독자를 위해 설명 하자면 실재론과 관념론의 충돌을 중관파는 중도와 공사상으로 뛰어넘고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유식파는 의식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는 것이다.
중관파
중관파는 150년에서 250년 사이에 살았던 인도 승려 나가르주나에 의해 체계화된 대승불교의 종파다. 나가르주나는 동아시아에서 '용수'로 번역되는데, 존칭의 의미로 용수보살이나 용수대사라고도 불린다. 남인도의 바라문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부모님의 지도로(베다》를 체계적으로 배웠고 천문학, 지리학 등 여러 학문을 학습했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향락에 빠져 지내거나 궁녀들을 희롱하다 사형 직전까지 가는 등 말썽을 부리기도 했다. 이후에는 육체적 쾌락해 집착하는 것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임을 깨닫고 불교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공부했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스스로 대승 경전을 구하여 공부했다. 말년에는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중론이 가장대표적이다. <중론>에서 깊게 분석한 그의 공 사상은 이후 대승불교사 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가르주나는 독립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모든 사유와 철학에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그 어떤 사물과 생명도 외부와의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것들에 의존하고 관계 맺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즉, 존재는 연기 안에서 잠시 일어선다.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모든 존재의 실체는 고유한 본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자성, 즉 공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공은 단순히 허무나 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공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중도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세계의 실체가 공이고 그것이 곧 중도임을 올바르게 관찰하고 깨닫는 것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길이라고 설파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因緣所生法 (인연소생법) 我說卽是空 (아설즉시공)
亦爲是假名 (역위시가명) 亦是中道義(역시중도의)
인연으로 생긴 법(존재), 나는 이것이 공이라고 설한다.
이것은 또한 가명(임시로 붙인 이름)이며, 중도라는 의미다.
이 말을 풀어보면, 모든 존재는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발생하므로 실제로는 고정된 자기 본질을 갖지 않는 공의 상태이고, 이러한 공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으므로 중도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르주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 의미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연기, 공, 중도는 실제로는 같은 의미를 갖는다. 굳이 나눠본다면 연기는 눈앞의 현상을 말하고, 공은 그것의 실체이며, 중도는 이러한 진실을 체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가르주나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중도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를 8가지의 부정이라는 뜻에서 '팔불중도'라고 한다.
不生不滅(불생불멸)
不斷 不常 (부단불상)
不一不異(불일불이)
不來不去 (불래불거)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오는 것이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다.
- 〈중론〉귀경계
위의 팔불중도는 〈중론>의 첫머리에 제시된 개념으로, 일반적으로는 <중론> 전체의 요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기와 공이 뜻하는 맥락에서 파악한다면, 중도가 세계와 자아의 실제 모습임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자아도, 세계도 그 실체가 공이고 중도라니. 아무리 머리로 이해해보려 해도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은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꿈속에서도 생생하게 세계를 체험한다. 꿈을 꾸는 자에게는 꿈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공과 무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무는 말 그대로 없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공은 단순히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작용은 있으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마치 꿈처럼 말이다. 이렇듯 세상은 사실 공인데 묘하게도 실존하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이를 '진공묘유(眞空妙有)'라 표현하기도 한다.
연기설에 근거한 공 사상은 나가르주나 이전부터 붓다의 초기 가르침에 등장하는 개념이었다. 붓다는 이미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 속에서 생겨나므로 거기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했다. 이렇게 연기설을 공의 입장에서 해명하는 불교의 오랜 사상을 반야사상이라고 한다. 나가르주나는 대승불교가 탄생하던 시기에 이미 널리 읽히고 있었던 <반야경>을 토대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던 것이다.
붓다의 연기설을 공과 중도의 측면에서 정립한 나가르주나의 사상은 3세기에 제자들에게 계승되며 중관파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계속 발전하던 중관파는 6세기에 공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여러 종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각 종파들은 논쟁과 경쟁을 통해 이론의 외연과 깊이를 확장함으로써 중관파를 대승불교의 거대한 한 축으로 자리 잡게 했다.
유식파
대승불교의 또 다른 축인 유식파는 4세기 무렵 인도 승려 아상가에 의해 체계화된 대승불교의 종파다. 아상가는 동아시아에서 '무착'이라고 불린다. 그는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국에서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인 그는 동생 바수반들과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사상가가 되었다. 아상가는 처음 소승불교를 공부했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공의 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절망한 그가 자살하려 할 때,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소승불교의 성자 핀도라가 그를 막고는 소송불교의 공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주었다. 그제야 아상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궁금증은 늘어갔고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유식의 시조인 마이트레야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섭대승론>을 비롯한 여러 저서를 저술하고 대승불교의 유식론을 체계화했다. 아상가의 사상은 그의 동생 바수반두에게 이어졌고, 바수반두는 이를 계승하여 유식학을 완성했다. 이후 인도의 사상계에서는 점차 유식설이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후에는 유상유식파와 무상유식파의 두 파로 나뉘며 발전해나갔다.
그렇다면 유식파는 도대체 무엇을 연구하는 사람들인가? '유식(唯)이라는 명칭은 이 종파의 핵심 개념을 잘 표현한다. '유'는 '오직'이라는 뜻이고 '식'은 '의식', 즉 마음을 말한다. 이것을 합쳐보면 유식이란 '오직 의식만이 있다'라는 의미다. 실제로 영어권에서는 유식을 Consciousness only'로 번역한다.
오직 의식만이 있다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세계와 자아를 포함하여 눈앞의 모든 것이 식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도, 당신의 눈앞에 있는 사물과 빛깔과 소리와 모든 것이 사실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모두 당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유식파는 의식의 심연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정비하는 지관 수행을 이용한다. 지관 수행은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 방법중 하나로, 여기서의 지(止)'는 정신을 집중해서 마음의 적멸과 고요를 개발하는 방법을 말한다. '관(觀)'은 고요해진 정신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지와 관은 불가분의 상호의존적 관계로, 불교 수행에서의 중요한 실천 방법이다. 쉽게 말해서 마음의 안경알을 닦는 것과 같다. 깨끗하게 하고, 잘 보고.
이러한 수행 방법은 이치에 도달하는 올바른 길로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유식파는 이 과정 중에서 인간 의식의 심층적 층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은 8개 혹은 9개의 층위를 갖는다. 일단 숫자가 많으니까 복잡할 것만 같은데, 하나씩 살펴보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우선 1식부터 5식까지는 오감이 만들어내는 의식 현상을 말하는데, 앞에 있다고 해서 전5식이라 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신식으로 구성된다. 쉽게 말해서 눈, 귀, 코, 혀, 피부가 만들어내는 마음 의 상태를 뜻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감'과 오감에 의해 촉발되는 '의식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눈과 안식은 다르다. 눈이 하드웨어라면 안식은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사과를 본다고 할 때, 사과를 보는 것은 눈이 아니다. 눈은 단순히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 카메라일 뿐,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가 신경망을 통해 뇌에 전해지고 뇌가 그 정보를 해석해서 사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과를 본다는 것은 뇌가 만들어낸 사과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은 눈과는 다른 것으로, 내 의식 안에 그려진 시각적 이미지의 총체다.
다른 식들도 마찬가지다. 소리, 냄새, 맛, 촉감은 귀, 코, 혀, 피부와 같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내 의식 안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다. 그래서 유식파는 매우 상식적인 결론을 내린다. 전5식은 우리 마음의 상태라고.
여섯 번째 식인 제6식은 의식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그 '의식' 맞다. 실제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의식은 불교 용어다. 의식은 전 5식을 종합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을 조화롭게 엮어서 내 앞의 세계로 펼쳐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우리는 실제로 전5식의 정신 작용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것이 외부 세계라고 생각하고 진짜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최근의 기술 발전과 VR 기기의 등장으로 현대인은 과거 사람들보다 이러한 정신적 작용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VR 기기를 사용할 때, 이것이 그저 가상임을 알면서도 시각과 청각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게임 안에서 괴물이 달려오면 몸을 움츠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만약 여기에 후각, 미각, 촉각이 더해지고 기술이 더 정교해지면서, 이것이 가상이라는 사실도 잊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완벽한 실재라고 느낄 것이다.
유식뿐만 아니라 고대인은 원래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외부에 존재하는 실패가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임을 말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세계를 환영이라는 뜻의 '마야'라고 불렀고, 서양철학에서는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로 '현상'이라 불렀으며, 불교에서는 '식'이 모습을 변화한 것으로서 '색'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참고로 마야, 현상, 색은 모두 실제로는 실체를 갖지 않고, 그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도의 상태에 있다. 즉, 공의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하면 제6식인 의식은 전5식을 종합하여 하나의 환영의 세계를 내 앞에 그려주는 역할을 한다.
다음은 제7식인 말라식이다. 이 식의 본질적인 특성은 끊임없이 생각과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작용이다. 이를 통해 제6식인 의식이 일어난다. 또 다른 역할로는 판단 기능을 하는데, 여기에는 '나'와 '내가 아닌것'의 구분이라는 판단도 포함된다. 이에 따라 자의식 혹은 자아정체성이 여기서 발생하고, 자아와 자기 것에 대한 집착도 여기서 생겨난다. 서구 심리학의 관점을 대입한다면 제6식이 의식의 세계, 제7식이 무의식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겠다.
여기서 더 심층적으로 내려가면 여덟 번째 식인 제8식, 아뢰야식이 있다. 아뢰야식은 가장 심오한 근본 의식으로,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 번째는 앞의 일곱 가지 식 전체가 발생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이것은 일종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내면 세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세계가 그 안에 담기게 하는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3장에서 이야기했던 영사기의 빛이나 수정구슬을 떠올리면 된다. 기억나는가? 수정구슬은 나의 마음 혹은 의식이었다. 이 안에 왜곡되어 드러나는 이미지가 세계였다. 세계란 나의 마음 안에 담긴 환영과 이미지 그 이상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다. 자아가 곧 세계다. 수정구슬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기는 세계도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정구슬로서의 자아의 의식뿐이다.
이제 우리는 수정구슬이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수정구슬은 바로 제8식인 아뢰야식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인 능력으로서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다. 당신의 내면 세계 그 자체이자, 당신의 내면 세계를 일으켜 세우고 존재하게 하는 힘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식학은 아뢰야식을 근본 의식이라는 의미에서 본식이라고 부른다.
아뢰야식의 두 번째 역할은 모든 존재와 법칙의 씨앗을 탐지하는 기능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고 행한 모든 것은 아뢰야식에 씨앗처럼 가능성의 상태로 남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착한 행위와 나쁜 행위의 과보가 기록된다는 의미를 넘어서, 의식적 존재로서의 모든 체험이 평가나 처벌과 무관하게 흔적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설명은 윤회에서의 업(카르마)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경험한 의식은 그 체험이 흔적으로 남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고래로서의 삶을 경험한 의식은 다시 고래로, 사슴을 경험한 의식은 사슴으로, 개미는 개미로, 나비는 나비로 다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마음이 지옥이라면 이것은 흔적으로 남아 당신의 다음 삶을 결정할 것이고,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면 당신의 다음 삶도 그렇게 결정될 것이다. 붓다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방법으로 왜 팔정도를 강조했는지, 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등의 도덕 선생님 같은 이 야기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가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은 그것을 심판하는 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어서다.
이처럼 과거의 경험과 행위가 씨앗처럼 저장된다는 의미에서 아뢰야식을 종자식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외에도 아뢰야식은 그 성질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무몰식, 장식, 이숙식, 아타나식, 일체중식, 무구식,초식, 제1식 등이 그것이다.
유식설은 보통 제8식까지를 말하지만, 제9식을 언급하는 견해도 있다. 제9식은 아마라식이라고 하는데, 혼탁함에서 완전히 벗어나 청정에 도달한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궁극의 지혜를 깨달은 상태라는 뜻에서 반야(般若)라고도 한다. 반야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인 진여(眞如)를 깨달은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투명한 수정구슬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라식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제8식의 청정한 모습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제8식과 다른 제9식으로 구분할 것이냐에 따라 종파의 견해가 나뉘기도 했다.
초기 불교에서도 마음을 심의·식으로 구분하긴 했지만,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고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분석하지는 않았다. 유식 사상에 이르러서야 마음은 세분화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이 왜 필요한 것인가? 마음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다.
결론적으로 유식 사상은 우리 눈앞에 펼쳐진 세계가 사 실은 우리 마음에 그려진 이미지이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의식뿐임을 밝혀낸다. 그리고 의식의 심연까지 깊게 파고 들어감으로써 의식을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까지 더듬는다. 즉, 최종 종착지에 이르러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아와 세계를 일어서게 하는 근원적인 능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인류라는 존재가 자아가 무엇인지, 세계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탐색하고자 하는 운명에 처해진 존재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러한 능력, 자아와 세계를 일으켜 세우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의 탐색에 있을 것이다.
나의 마음과 그 안에 드러난 세계,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일어서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아뢰야식. 이러한 결론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것은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노자의 도와 덕의 관계, 유학의 <태극도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자세히 다룰 서양 철학의 핵심이 되는 관념론, 중세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이어지는 것이다. 세계가 내 마음의 반영이고, 그러므로 세계와 자아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설명은 세계를 진지하게 통찰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결국에 도달하게 되는 최종 결론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은 이러한 결론을 매우 명료하게 표현한다.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지어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는 자기계발적인 메시지로 해석되기에는너무도 묵직한 개념이다. 일체유심조는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꿰뚫는다. 우리가 언젠가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될 때, 아마도 우리는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내 앞에 드러난 현상 세계가 내 마음이 지어낸 것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로써 자유로워질 테니 말이다.
*출처: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인도철학의 태동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스스로를 아리아인이라고 불렀던 민족의 이주로부터 시작한다. 아리아는 '고귀하다'라는 의미다. 이 고귀한 사람들은 카스피해 연안의 코카서스 지역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았던 민족이다.
그들이 어떤 이유로 자신의 땅을 떠나 이동을 시작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그들이 여러 방향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일부 그룹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유럽 지역에 정착해서 켈트족, 일리리아족, 슬라브족이 되었다. 다른 그룹은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이란고원에 도착했다. 이들은 소그드인, 메디아인이 되었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나아간 무리들이다. 그들은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지금의 인도 지역으로 들어왔다.
당시 아리아인은 초기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고 가벼운 바큇살을 이용한 수레와 전차를 사용할 줄 알았다. 이러한 문화적 우위는 그 지역의 원주민을 쉽게 정복할 수 있게 했다.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고 그들과 섞이며 고대 인도인이 되었다.
아리아인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손에는 <베다》가 있었다. '베다'는 산스크리트어로 지식, 지혜, 삶을 말한다. 종교적이고 신화적이며 동시에 철학적인 방대한 양의 문헌으로,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다. 《베다》는 시작도 없고 저자도 없는 경전이라고 말해진다.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 신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 오랜 시간 구전되어오다가 기원전 1500년을 전후로 산스크리트어로 문자화되었다는 것이다. 아리아인은 《베다》가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성스러운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베다는 핵심 경전에 해당하는 상히타와 부속 경전으로 구분된다.
상히타는 네 가지 문서로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를 말한다. 이 중 특히 중요한 문서는 가장 오래된 <리그베다로, 신들에 대한 찬가와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사마베다>는 찬가들을 담고 있고, <야주르베다>에는 제례 의식의 형식적 관례가, <아타르바베다>에는 건강, 장수, 질병 치료 등 민간 신앙에서의 주술적인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상히타는 의례에 참여하는 사제들의 네 가지 역할에 대한 지침서로 사용되었다.
부속 경전은 〈브라흐마나>, <아라니아카>, <우파니샤드〉다. 이 중 특히 중요한 문서는 〈우파니샤드>로 여러 다양한 신들에 대한 찬양을 주로 다루고 있는 <베다>와는 달리, 우주의 최고 원리를 탐구하는 심오한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철학서인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끝, 마지막이라는 뜻의 '베단타'로 불리는 동시에 《베다》를 기반으로 한 브라만교의 폐쇄성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문서는 이후 인도 사상 전체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다.
아리아인이 《베다》를 중요시했던 건 그들의 세계관 때문이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해 하나의 거대한 순환적 모형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신, 사제, 인간이 서로 물고 물리는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환경이다. 이곳에는 풍요로운 대지가 있고, 알맞은 바람이 불고, 계절마다 적당한 비가 내리며, 낮과 밤의 시간이 흐른다. 문제는 질서가 깨어질 때였다. 폭풍, 홍수, 가뭄, 질병, 적의 침입 등이 발생하면 농사를 망치고 인간은 고통받는다. 인간은 자연의 무질서를 멈추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대인은 생각했다. 자연의 질서와 무질서를 결정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그들의 답은 '신'이었다.
신들은 우주의 원리를 지배했다. 그들은 서로 겨룸으로써 승리하게나 패배했고, 그 결과로 자연의 질서나 무질서가 발생했다. 그러니 인간은 질서를 유지하는 선한 신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했다. 고대인은 다시 고민했다. 어떻게 신들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등장한 존재가 사제였다.브라만이라 불리는 이 최고의 계급은 꼬장꼬장한 사람들이었는데, 매우 세밀하고 정교한 제사와 의례 활동을 통해 신들을 돕고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즉, 브라만 계급의 의도가 곧 신의 행동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열심히 재사를 지내도록 만들어야 했다. 고대인은 다시 고민했다. 어떻게 위대한 브라만이 적극적으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한단 말인가?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신들을 쥐락펴락하는 사제들은 고맙게도 돈에 움직여주었다. 즉, 브라만을 움직이는 건 보통의 인간이었다. 인간은 브라만에게 사례하거나 물질을 제공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신을 움직여달라고 의뢰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발 딛고 살아가는 자연에서 풍요의 결실을 얻고 삶을 이어갈 수 있을 테니. 즉, 보통의 인간을 움직이는 건 자연이었다.
다시 자연은 신이 움직이고, 신은 사제가 움직였으며, 사제는 인간이 움직였다. 신, 사제, 인간, 자연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로 긴밀하게 엮여 공존했다. 고대인의 세계에서는 신이 월등하게 위대한 존재이고 인간은 보잘것없는 부속물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럴 때 질서가 유지되고 우주와 삶이 지속될 수 있었다.
브라만이라는 이름 자체가 우주를 창조한 최고 신인 브라흐마에서 기인한다.
최고의 인격신은 후에 우주의 원리인 추상적 실체 '브라흐만(범, 梵)'이 된다.
신에 대한 세가지 구분
C유형 : 초월적 능력자 - 다신론
B유형 : 창조주 - 유일신(브라흐마)
A유형 : 궁극의 전체 - 범신론(브라흐만)
우선 C유형은 셋 중에 인간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가장 구체적인 유형으로, 인간적 능력을 월등히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신을 말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 아폴론, 디오니소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베다 신화에서는 태양의 신 미트라, 불의 신 아그니, 천둥과 폭풍의 신 인드라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초월적 능력자로서의 신이다.
다음 B유형은 우주와 세계의 창조자이자 유일한 지배자로서의 신이다. <구약>의 하느님, 하나님, 야훼, 여호와, 알라가 여기에 속한다. 또한 중국 신화의 반고와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가 여기에 해당된다. 베다 신화에서는 하늘과 땅, 태양과 창공을 창조하고 신들의 위에 군림하는 유일신 프라자파티와 만물을 만든 자로서의 신 비슈바카르만이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세 유형 중에서 가장 추상적인 A유형은 특정 존재나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우주 전체, 혹은 우주의 근본 원리, 거대 법칙으로서의 신이다. 베다 신화의 브라흐만이 이 유형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브라흐만은 인간성을 넘어서 만물의 근거가 되는 대우주의 본질이다.
하지만 C유형 처럼 정신없이 많은 신에 대한 개념은 결국 최고의 유일신 B유형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베다》는 모든 것의 창조자인 최고신을 제시한다.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프라자파티, 모든 생물의 창조자라는 의미의 트바슈타, 세계를 만든 자라는 의미의 비슈바카르만, 그리고 우주의 창조자인 브라흐마가 있다. 수많은 신과 자연과 인간은 이 궁극적 실체로부터 기인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많은 사람을 만족시켰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창조자라는 인격적이고 종교적인 설명보다 더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결국 깊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존재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설명하는 유형의 철학적 논 의가 등장했다. <우파니샤드>가 정리된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인격신으로 서술된 '브라흐마'를 철학적 개념인 '브라흐만'으로 치환했다.
신의 유형에 따라 개인이 고민하는 주체
B유형 : 피조물로서의 나의 역할과 의무는 무엇인가?
A 유형 : 우주 전체와 자아의 본질은 어떻게 관계 맺는가?
일원론의 시작 : 고대 인도인이 찾은 궁극의 지혜
<우파니샤드>는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 정리된 문서다. 산스크리트어로 '가까이 앉다'라는 뜻으로, 스승과 무릎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제자들에게 비밀스럽게 전수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방대하고 복잡한 내용 중에서 핵심이 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했다. 그만큼 《베다>에 비해 현대인의 감성에 더 부합하고 잘 읽히는 면이 있다. 《베다》는 너무 많은 신의 이름이 등장하고 찬양을 반복하므로, 막상 읽어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파니샤드는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선명한 주제 의식을 통해 독자를 심오한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점에서 생각보다 흥미롭게 읽히는 고전이다.
<우파니샤드>의 탐구 주제는 의외로 단순하고 명료하다. 핵심은 세 가지로, 전체로서의 '세계', 부분으로서의 '자아', 그리고 이 둘의 '관계'다. 세계, 자아, 관계다
우선 전체로서의 ① 세계는 브라흐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 외부의 세계,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한다. 우주와 물질, 시간과 공간, 사회와 제도, 인간과 동물부터 초월적
능력을 가진 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 불멸의 브라흐만이
모두의 정면에
뒤에
오른쪽에
왼쪽에도 존재하며
위 아래로 퍼져 있나니
이 모든 세상은 훌륭한 브라흐만 그 자체로다.
- <문다카 우파니샤드>
다음으로 부분으로서의 ② 자아는 아트만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아 내면의 세계, 내 안으로 펼쳐진 모든 것의 근원을 말한다. 여러 관념들과 정체성, 기억, 욕망과 좌절, 슬픔과 기쁨, 용기와 두려움 등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나'라고 생각되는 것들 전체와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고 발현하는 본질의 '나'. 이것이 아트만이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맑은 정신으로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그 내면에 펼쳐진 광활한 모든 것. 이것이 아트만이다.
<아이티레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트만은 누구인가?
그로 인해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들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말을 할 수 있고, 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도다.
그는 심장이며, 마음이며, 의식이며, 인식이며, 지성이며, 지혜이며, ()
기억이며, 상념이며, 결단이며, 생기이며, 욕망이며, 통제력이다.
이 모든 것은 '의식'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 <아이타레야 우파니샤드>
'아트만은 '의식'을 의미한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의식이라는 말은 어렵고 익숙하지 않다. 우선은 당신의 주관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관찰자, 보는 자, 경험하는 자, 체험자, 인식 주체, 당신 안에 앉아 당신의 오감을 느끼고 있는 바로 그 존재감이 오는가?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이 내면의 주관자인 아트만은 신체에 종속되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 <카타 우파니샤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아트만은
누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누구에 의해 죽게 되는 것도 아니며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근원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어떤 다른 것을 낳지도 않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 아트만은 태어난 적이 없으며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 <카타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는 불변의 두 가지 근원을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브라흐만과 아트만이다. '우주 전체'와 '나의 마음' 정도가 되겠다. 이로써 세계는 둘로 구분된다. 즉, 이원론적 세계가 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이원론에서 멈추지 않고, 과감하게 한발을 더 내딛는다. 서로 달라 보이는 두 개의 근원이 사실은 하나라고 선언함으로써 세계와 자아의 ③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즉, 브라흐만과 아트만은 하나다. 이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라고 한다. 방대하고 심오한 문서인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명확하다. 범아일여. 이것이 모든 것의 결론이다. 모든 것이 이 네 글자 안에 담겨 있다. 여기서의 '범'은 브라흐만을 한역한 것이고, '아(我)'는 아트만을 한역한 것이다. '일여지는 오직 하나라는 뜻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의미다.
이를 종합하면 <우파니샤드>의 결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 밖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실체와, 네 안에 펼쳐진 자아의 본질은 궁극으로 하나다."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며
아트만이 바로 브라흐만이다.
- <만두끼야 우파니샤드>
이것이 고대 인도인이 찾아낸 궁극의 지혜다.
범아일여의 현대적 의미: 자아, 새계, 그리고 관계
내용물을 담는 그릇의 이름은 변해왔다. 그것은 베다, 우파니샤드, 베단타 철학 또는 힌두교 등으로 불렸다. 그릇의 이름은 6천 년의 시간을 따라 변해갔지만, 그릇에 담긴 내용물은 그대로 이어졌다.
범아일여는 오늘날의 인문학이 다루는 세 가지 주제를 모두 담고 있다. 우선 '법', 브라흐만은 세계 전체를 의미하므로 오늘날의 의미에서는 '세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다음으로 '아', 아트만은 자아를 뜻하고 오늘날의 '자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마지막으로 '일여'는 오직 하나라는 뜻이므로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응한다.
나는 무엇인가
당신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내가 임시로 걸치 고 있는 건 내가 아닐 테니 그런 것부터 벗어내보자. 우선 내가 지금 입은 옷은 내가 아니다. 당연한거 아닌가?
다음은 사회적 역할이다. 학생, 직장인, 주부 같은 것도 당연히 나의 본질이 아니다. 이번에는 생물학적 관계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자매 등 이런 관계는 나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만들어내지만 그렇다고 자아의 본질적 특성이라 말하기는 어려우므로 벗어두자.
다음은 나의 신체다. 우리가 곧잘 이것이 나라고 생각할 만한 강력한 무엇이 나타났다. 하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나의 신체도 본질적인 내가 아니다. 만약 나에게 다리가 사라진다면 혹은 시각이 사라 진다면 그것은 더이상 내가 아닌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남아 있을 것이다. 혹시 내가 성전환을 하게 된다면, 혹은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여 내가
기계 몸을 갖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아닌가? 나의 능력이나 내가 하는 행위의 형태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것이 나임을 느낄 것이다. 신체도 옆에 벗어두자. 이제 거의 다 왔다.
다음으로 나의 정신은 어떤가? 나의 지능, 나의 기억, 내가 사용하는 언어능력, 심리적 욕망 등.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것들도 본질적인 자아라고 할 수 없다. 내 지능이 향상되거나 저하되어도, 내가 새로운 추억을 쌓거나 옛 기억을 상실해도, 신체 변화에 따라 나의 욕구와 욕망의 형태가 달라져도 나는 자신을 자신이라 느낄 것이다. 그러니 정신도 벗어내자. 이 제 옆에 쌓아놓았던 나의 껍질 무더기를 바라보자. 자아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쌓여 있다.
남은 건 무엇인가?
정신 ×
신체 ×
역할, 의무 ×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거기에 있는가? 당신에게 남은 건 무엇인가?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 하나뿐이다. 당신의 1인칭 관점, 무엇인가를 보는 자, 바로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능력, 관조하는 무엇, 다시 말해 텅 빈 의식만이 남아 있다.
세계란 무엇인가
자아의 본질이 의식임을, 하나의 투명한 의식 능력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계의 실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갖게 된다. 즉, 자아는 하나의 등불이고 세계란 그저 그 등불이 비추는 범위임을 알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사유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자이다. 등불이 고정된 세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등불의 범위 안에 세계가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전환은 서양 철학에서도 이루어졌다. 이를 관념론이라 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다. 그것은 실재론과 관념론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고 당신은 어떤 관점이 더 사실에 부합하다고 느끼는지 판단해보면 좋겠다. 우선 실재론은 상식적인 세계관으로, 세계가 자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반면 관념론은 자아가 세계보다 앞서 있다는 관점이다. 이를 비교하기 위해 머릿속에 도구 하나를 준비하자. 이 도구는 크고 둥근 구(球)다. 원 말고 구. 이 구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제 이것을 가지고 두 세계관을 비교해보자.
우선 실재론에서는 세계가 고정되어 있다. 우주, 은하,태양계, 지구,국가, 사회 등. 그것이 무엇이든 세계라는 것이 먼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서 그 세계 위를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 머릿속에 준비한 구를 지구로 색칠하면 되겠다. 나라는 존재는 그곳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세계관은 매우 상식적이다. 이 세계관에 따르면 세계는 실제로 존재한다. 실재론은 세계가 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외부에 진짜 있다고 믿는 관점이다.
<실재론:세계가 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외부에 진짜 있다고 믿는 관점>
다음으로 관념론에서는 자아가 고정되어 있다. 나의 마음, 정신, 내면 의식 등 그것이 무엇이든 자아가 앞서 있다. 그리고 내면이 탄생하는 동시에 세계가 나의 내면 세계에 드러난다. 우리 머릿속에 준비한 구를 투명한 수정구슬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수정구슬은 나의 마음 혹은 의식으로, 유일한 실재다. 세계는 그 수정구슬 안에 왜곡되어 비치는 이미지다. 그렇다고 할 때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세계를 본다는 것은 언제나 내 마음이 그려낸 이미지로서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내 마음은 그저 내 마음을 본다. 이러한 세계관은 상식적이지 않다. 관념론에 따르면 전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 의식, 관념일 뿐이다. 내 앞의 세계는 그저 하나의 거대한 가상이다. 그래서 인도인은 이 세계를 환영이라는 의미의 '마야'라고 불렀다.
<관념론:자아라는 수정구슬에 이미지로만 비치는 가상의 세계 >
그렇다면 진짜 세계는 무엇일까? 고대 인도인은 마야 너머의 실체를 상상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물질적 세계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적 의식을 사유하고자 했고, 이 상상할 수 없이 심오한 존재에 일단 브라흐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계와 자아의 관계는 무엇인가
당신은 실재론과 관념론 중에 어떤 세계관이 더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가?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어떤 세계관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세계의 자아의 관계에 대한 이해까지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선 실재론의 세계관에서는 세계와 자아가 분리된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 해도 세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세계와 자아의 존재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 하지만 관념론의 세계관에서는 세계와 자아가 분리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수정구슬과 그 안에 왜곡되어 담긴 세계의 이미지는 떼어지지 않는다. 즉, 자아가 사라지면 세계도 함께 사라진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실재론은 결국 세계와 자아의 분리라는 이원론으로 향하고, 관념론은 세계와 자아를 통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원론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고대 인도인은 자아와 세계의 미분리를 이해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은 자아의 의식이 우주의 의식과 다르지 않음을 내면으로의 침잠 속에서 깊게 체험했다. 무한한 우주로 향하는 출구가 자기 내면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발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 p178-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