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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공병대의 초기 역사는 굉장히 비극적인데, 이들은 공병보다는 보병에 가깝게 싸워야만 했고 그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음.
종래 49년, 기존의 보병여단들이 사단으로 승격되면서 7개 사단 공병대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들의 장비는 사실 대단한 편은 아니었음. 약 3,000여 명 규모의 한국군 공병대는 서울 공방전에서 그나마 보유한 물자를 모조리 소모했고, 소총병으로 운용되며 많은 피해를 입었음.
폭약 29,700파운드와 대전차지뢰 360발, 도폭선 4천 피트, 마대 35,000장을 서울 공방전에서 모두 소모했는데, 사실 이들이 북한군의 공세를 막기 위해서는 지뢰 지대 매설이 굉장히 절실했었음.
그러나 신생 한국군 공병대에는 그럴 능력이 사실 많이 모자랐는데, 당시 공병대대장들의 증언을 보면 지뢰매설이나 장애물 구축보다는 막사 건축 및 사격용 표적을 세우는 정도만 했고 그나마 제대로 장비를 갖춘 것은 부평의 제1공병단 정도.
사단 공병대대는 병력 수만 채웠을 뿐이라서 제대로 된 대전차지뢰 매설에 대한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음. 그러다보니 미군 측에서는 한국군 공병대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폭주함.
M7 대전차지뢰 980발을 보급했더니 너무 깊이 파묻어서 T-34/85 전차에 유효타를 주지 못한 적도 있었고, 어쩔 때는 신관 작동도 하지 않은 채 매설해서 무용지물이 된 사례도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움직이는 트럭에서 대인지뢰를 마구잡이로 던져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했음.
그럴 만도 한 것이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지뢰 매설에 대해 제대로 훈련을 받은 한국군 공병대원은 300명에 불과했고, 이러한 문제는 아군에 대한 피해로까지 이어짐. 적을 막기 위한 지뢰가 오히려 아군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한 것임.
물론 수원 장안문 전투에서 한국군 1사단 소속 공병대가 대전차지뢰 20여 발을 장안문 일대에 매설해 T-34 2대를 격파하는 등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이는 소수의 사례였을 뿐임.
최창식 공병감이 체포됬을 당시에도 사실 그의 죄목은 한강교 폭파에 대한 문책이기보다는 8월 말에 벌어진 제5연대장의 지뢰 폭사 사건으로 인하여 압송되었을 정도로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했음.
제6사단 방면에서 공병대가 5연대와 2연대 사이의 후방도로에 지뢰를 매설할 때, 공병대가 이를 제대로 아군에게 통보하지 않고 지뢰들을 매설해서 이동하던 제5연대장 이영규 중령과 후속하던 병력 50여 명이 폭사하거나 중상을 입어 후송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임. 이러한 사건이 상당히 비일비재했던 것을 보면 뭐.
신성모 국방장관이 진상조사를 명할 정도로 지뢰 지대 매설에 대한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 중 하나이기도 했고. 미 8군은 지뢰 12만발을 지급했는데 이 중 2만 발만 매설 위치가 알려져있고, 나머지는 알 수 없다고 기록을 남기기도 했음.
실제로 북진 작전 동안 한국군과 경찰은 사전보고 없이 매설된 지뢰지대에 대한 경고를 지속적으로 거주민들에게 공표하였으나 그럼에도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였으니 엄청난 물량의 지뢰가 피아도 모른 채 묻혀있었던 것.
그럼에도 훈련을 잘 받았던 저 300명의 인원들은 영천-신녕 전투에서 북한군의 진공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음.
당시 제6보병사단이 지키고 있던 신녕 방면에서 제6전투공병대대는 KMAG 장교단의 보조를 받으며 여느 한국군 공병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며 북한군에 치명타를 날린 적이 있음.
신녕은 6사단의 사단본부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이곳은 안동-영천 도로 및 철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음. 따라서 북한군은 영천-신녕을 방어하던 한국군 2군단을 압살하기 위해 4개 사단을 투입했었음.
당시 김종오 제6사단장 및 KMAG 소속의 마틴 소령과 6사단 공병대대장은 꽤 치밀한 지뢰지대를 구축하였는데, M3 대인지뢰 250발로 역V자 형태로 매설함.
이는 북한군이 주로 쓰는 방식이었으나 한국군 공병대원들은 북한군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지뢰가 매설되리라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며, 효과도 좋을 것이기 때문에 8월 31일~9월 1일 사이에 90발을 추가로 매설함.
당연히 그날 새벽에 중대급의 북한군이 진입해오다가 100여 명이 지뢰지대 내에서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이 모든 것이 5분도 되지 않아 벌어졌다고 함.
KMAG은 한국군 공병대에게 지뢰가 부족할 때를 대비한 부비트랩 제작법을 알려줬고, 한국군 공병대는 특히 보급수레를 활용한 부비트랩 제작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음.
적의 후방에 침입해서 북한군이 사용하는 보급수레를 가져와 바퀴를 제거한 뒤, 땅에 내려놓고 인계철선을 수레의 바퀴축에 걸어두는 방법이었음.
보급이 모자랐던 북한군은 버려진 보급수레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한국군 공병대가 특히 흥미를 보인 것이었는데, 북한군 병사들이 버려진 보급수레에 몰려들어 바퀴를 끼워 가져가려고 한다면, 인계철선이 폭약을 격발시켜 이들을 몰살시키는 매우 사악한 방법이기도 했음.
한국군은 이를 두고 '면도기(the Shaver)' 라고 부르며 북한군 후방에 자주 침투해서 적잖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음.
9월 4일 새벽에는 대전차지뢰를 활용한 기만을 펼치기도 했음. 북한군 전차와 공병대가 도로를 따라 공세를 들어오자, 한국군 공병대는 포병대의 교란 사격 지원을 받으며 지뢰지대를 구축했음.
이 때 한국군 공병대는 매우 교묘하게 북한군 공병대를 속였는데, 일부러 그동안 하듯이 엉성하게 대전차지뢰를 매설하여 발견되기 쉽도록 드러내고, 그 대전차지뢰 마로 아래에 대인지뢰를 매설하는 방식을 채택함.
북한군 공병대는 한국군 공병대의 대전차지뢰 매설을 굉장히 엉성하다고 평가하곤 했는데 이를 되려 역이용한 셈. 참고로 미군은 북한군이 대전차지뢰를 발견하면 손으로 집어내서 도로 바깥으로 던진다고 보고하곤 했고, 이를 두고서 세심하지 않다는 점을 한국군 공병대에게 귀띔해준 것으로 보임.
북한군 공병대는 예의 하던 대로 엉성하게 매설된 대전차 지뢰들을 땅에서 꺼내 도로 밖으로 던졌는데 이 날만큼은 달랐음. 대전차지뢰 바로 밑에 설치된 대인지뢰가 폭발하며 북한군 공병들을 쓸어버렸기 때문임.
그와 동시에 한국군 보병대가 급습을 가하면서 북한군 보병대의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홀로남은 북한군 전차들은 매복한 3.5인치 바주카팀의 표적이 되어 하나하나 격파당했음.
지뢰지대에 갇힌 북한군 전차는 총 9대였으며 공병대의 기민한 작전 덕에 바주카팀이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음. 이외에도 19연대가 철수할 때 북한군 1개 연대가 '반자이' 식 공격을 감행했을 때도 500여 발의 대인지뢰가 공세를 종식시키기도 했음. 이렇듯 영천-신녕 일대의 전투에서 한국군 공병대는 큰 활약을 펼쳤고, Combat Support in Korea에서는 '신녕을 구한 지뢰' 라고 극찬도 함.
다른 미군 장교들도 낙동강 전투 기간 동안 한국군 공병대의 수준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인정해주기도 했고.
그러나 이러한 공병의 전과는 종종 공군이나 포병, 보병의 전공으로 빼앗길 때가 있어 불만이 많았긴 했지만 이후 중공군 상대로도 이러한 지뢰지대 구축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음.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발목을 잡았던 2,500발의 지뢰지대나 이후 급조 네이팜 지뢰 및 백린 지뢰를 구축한 한국군 공병대는 그냥 나왔던 것이 아니기도 함.
제대로 훈련받은 공병대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한지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한 셈. 참고로 한국군은 화학병과가 당시에 없어서 화염방사기도 공병대가 다뤘는데 전쟁 후반기의 공병대는 폭약과 화염방사기를 잘 다룬다고해서 사단마다 조커 카드로 굴려먹음.
적이 공세를 걸어올 때 따로 사단 및 연대 수색부대랑 함께 빼두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충격병처럼 운용했는데 이만한 모랄빵을 주는 것이 없었다나.
출처
The Employment of Armor in Korea, Volume I
Combat Support in Korea, John G. Westover
민족의 증언
라주바예프 보고서
6.25전쟁사 제3권 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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