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uld you please take my picture?(제 사진 좀 찍어 주시겠어요?)" 외국여행을 위한 실용영어 책자에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문장이다. 이런 사진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의 '대상'이다. 아무리 각도를 조절해도, 카메라의 시점은 타인의 시점으로 여과되고 조절된다. 거기에서 결국 응시하는 시선의 주체는 타인이다. '내가 나를 찍겠다'는 욕망, 즉 '셀카(self-camera)'의 욕망은 삼각대를 세우고 카메라에 셔터 타임을 조절하는 타이머를 장착하던 카메라 초기 역사부터 내내 존재했다. 이 욕망의 핵심은 단지 나를 찍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 시점'에 의해 제어된 내 모습을 가지고(take) 싶다는 것이다. 철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이는 찍는 주체와 찍는 대상,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을 완벽히 일치시키려는 욕망, '내가 보고 싶은 나'를 구현(연출)해 보려는 욕망이다.
'시점(point of view)'은 '서 있는 자리(standing point)'이다. 카메라 눈인 렌즈는 일찌감치 발달했지만, 시선의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는 일은 그래서 별개의 일이 된다. 셀카의 진정한 실현은 카메라가 일반 필름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기술적으로 전환되면서, 특히 카메라 눈이 휴대폰과 결합하여 일상화되면서 가능해졌다. '페이스북(facebook)'은 디지털 셀카로 찍을 수 있는 공간적 프레임이 '얼굴(face)'에 해당하기 때문에 붙은 셀카시대의 명칭이기도 하다. 카메라의 프레임은 내가 원하는 나의 그림(picture)을 잡아주지(take) 못한다. 지금 대유행인 셀카봉은 '내 사진 찍기(take my picture)'의 완결판이다. 팔 길이가 아니라, '눈'을 확장하는 쉬운 방식을 고안함으로써, 1인칭(나)과 3인칭(타인-카메라)의 시점 통합을 간단히 해결한 흥미로운 사물이다. 시선의 주체(카메라렌즈)와 대상 사이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풍경을 자연스러운 나의 배경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족을 하나 붙이자. 'Cogito'라 불리는 데카르트적 성찰이나 '혼자 있을 때도 삼간다'는 뜻의 조선 성리학자들의 '신독(愼獨)'이라는 것도 '나를 응시(반성)하는 나', '정신의 셀카'를 찍는 방법이었다. 셀카봉은 이와는 다른 방식의 유희적 태도를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이 사물에는 이 시대의 '근본 기분(Grundstimmung)'이 암시되어 있지는 않은지.